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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4화 (4/102)

4화

율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갈색 곰 왕구에게 매달렸다.

“토끼를 만나게 해 주신다면서요….”

“만났잖아.”

“아니, 그분이 어딜 봐서 토낍니까.”

“귀를 보고도 몰라?”

귀만 보면 토끼가 맞긴 한데…. 율은 봇짐을 뒤져 도감을 꺼내 확인했다. 미리 표시해 둔 곳을 펼치자 토끼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아래 자세하게 설명도 적혀 있다. 율은 그것을 확인하며 암담한 표정으로 곰을 쳐다봤다.

“토끼는 원래 하얗고 눈이 크며 붉은 기가 돌고, 아주 귀엽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왕구가 율을 빤히 쳐다본다.

“그렇게 따지면 네가 토끼네.”

“예에?”

“찾아 줬으면 됐지. 대체 뭐가 문제냐.”

그러니까, 그게….

“너무….”

“너무?”

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놨다.

“무섭습니다….”

왕구가 아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해. 다들 우리 형님더러 무섭다고 하더라. 근데 알고 보면….”

알고 보면 엄청 착하고 좋은 분이야. 라고 말하길 기대했는데.

“알고 보면 더 무섭다. 호랑이도 맨손으로 찢어 죽이는 분이야.”

율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못 본 척하고 왕구가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난 찾아 줬다. 그러니 약속대로 진준지 뭔지 그걸 줘라.”

“혹시… 다른 토끼는 없습니까?”

“없어. 묘족은 대부분 북쪽에 모여 사는데, 여기서 가려면 서너 달은 걸려.”

율은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이 넓은 땅에 토끼가 딱 하나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홀로 찾아다니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첫날에도 정체 모를 짐승에게 습격당해 고초를 겪지 않았던가.

율의 안색을 살피던 왕구가 뒤쪽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큰형님 오셨네.”

돌아서던 율은 흠칫 몸을 떨었다. 방에서 교미를 마치고 나온 토끼는 검은 곰과 함께 사라졌다가 나타났는데 한 손에 피 묻은 몽둥이를 든 채였다. 토끼는 몽둥이를 구석에 집어 던지고는 우물에서 물을 한 바가지 떠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 냈다.

그러더니 마루로 가서 털썩 앉아 담뱃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율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 세포가 잔뜩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긴장하여 지켜보는데 왕구란 자가 와서는 율의 어깨를 툭 쳐 토끼에게 떠민다.

“형님, 아까 말씀드린 친굽니다.”

앞으로 떠밀려 나가자 토끼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율을 쳐다본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데 눈매도 무척이나 매섭다. 율은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내키지 않았으나 이렇게 된 이상 도망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자를 설득해 용궁으로 데려가야 한다. 물로 쉬워 보이진 않지만….

율은 그의 앞으로 걸어가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저는 방율이라고 합니다.”

토끼가 연기를 허공에 내뿜으며 되물었다.

“방울이?”

“아니요…. 방율. 유우울.”

“방울이라. 이름이 특이하군.”

귀가 저렇게 큰데 말귀는 왜 못 알아먹는 걸까.

“나를 찾았다고. 왜?”

율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거짓말을 했다.

“저는 서쪽 용궁에서 왔습니다…. 그곳엔 용왕께서 계시지요. 그런데 그분이 돌아오는 탄신일에 육지에 사는 수인 중 가장 멋지고 힘이 센 분을 찾아 대표로 모셔 오라고 저에게 명하셨습니다.”

“그게 나다?”

율은 떨리는 손끝을 꼭 마주 잡았다.

“예. 토, 토끼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용궁이라. 내 소문이 거기까지 흘러갔단 말인가.”

다른 동물들은 용궁이라고 해도 모르던데. 토끼는 용궁을 아는 듯하였다.

“명성이 자자하여…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돕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여우가 깔깔 웃었다. 아까 언덕에서 왕구를 부르던 자다.

“하하, 명성이라니. 악명이면 또 몰라.”

하지만 방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들 토끼를 만나고 싶어 한다며 거짓말을 했다.

어쨌든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물론 고환 떼 먹으려 하는 거지만….

“내가 가면 뭘 해 줄 건데?”

율은 망설이다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진주를 와르르 쏟아 냈다. 그걸 보는 토끼의 눈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혹시나 왕구처럼 진주를 먹을까 싶어 율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토끼가 진주 하나를 엄지와 검지로 잡더니 허공에 들고 살펴본다.

“진주네? 제법 상품이고.”

진주를 아는 자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용궁에 오시면 답례로 드릴 것입니다. 용왕님께서도 그리 약속하셨고요….”

“진주가 많아?”

“예, 발에 채는 게 진주라, 그것으로 구슬치기도 합니다….”

간절하니 거짓말도 술술 나오는구나. 율은 자책감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토끼의 마음을 꾀어내려 애를 썼다. 그 말에 토끼가 진주를 주머니 안에 툭 집어넣는다. 아무 미련 없는 손길에 율은 조바심이 났다.

“어, 어찌 그러십니까?”

“발에 챌 정도로 흔하다며.”

“그, 그건 용궁에서 흔한 거지요. 육지에서는 아니지 않습니까.”

“난 용궁에서도 귀한 걸 갖고 싶은데?”

아… 생각지도 못한 말인데. 지금 말을 바꾸면 이자의 의심을 살 게 분명하였다.

“물, 물론 다른 귀한 것도 많습니다. 모두 드릴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구절절 설명하는데 토끼가 대답은 하지 않고 율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율은 거짓말을 한 게 들켰을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토끼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너, 암컷이냐?”

“예?”

율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암컷이 아니야?”

“저는 수컷입니다….”

아쉽군. 혼잣말이었으나 율은 분명히 들었다. 뭐가 아쉽다는 거지. 그러다 문득 아까 인간 여인과 교미를 하던 토끼의 모습이 떠오른다. 색에 미친 건 용왕뿐만이 아닌가 보다. 만약 내가 암컷이었다면 이자는 진주 대신 다른 걸 달라고 했으려나.

저도 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하자 토끼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간다.

“뭐야, 그 표정?”

“아,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였습니다.”

음, 용궁이라. 토끼는 율이 아닌 대문 밖을 쳐다보며 한참 생각에 잠기었다. 옆에 있던 곰들이 형님이 못 가면 자기들이 대신 가도 되냐며 묻기에 율은 난처함에 미소만 지었다. 그러다 토끼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못 갈 거 없지. 용궁이라니 나도 궁금하긴 하네.”

율은 기쁜 나머지 환호성을 지를뻔했다.

“정말이십니까?”

“대신 그전에 할 일이 있는데, 네가 같이 가 줘야겠다.”

“어딜…요?”

“인간들한테 볼 일이 있거든. 여기서 멀지 않아.”

“인간이요?”

육지에서는 인간과 수인들이 어울려 산다더니 그 말이 참이었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 제안이라 머뭇거렸더니 토끼가 피식 웃는다. 서늘한 얼굴로 웃으니 좀 잘생긴 것 같기도 하였으나 율은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바로 지워 냈다.

“너희 왕을 뵙는 자린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아무리 망나니 같은 나라도 말이다.”

아, 생각보다 예의가 바른 자구나.

그러다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혹시 거기에 가면 의원도 있습니까?”

“왜? 어디 아파?”

“아니요. 아픈 건 제가 아니라…. 아무튼, 약을 지었으면 해서요.”

“물론 있지.”

다행이다. 그럼 온 김에 약을 지어서 가자. 육지의 약이라면 어머니께 맞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토끼가 손짓하자 여우가 윗옷을 가져온다. 옷을 대충 걸치더니 고름도 대충이다. 토끼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율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위압감이 엄청나다.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율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쇠뿔도 단숨에 빼랬다고 지금 어때?”

정확히는 모르나 당장 나서잔 뜻이라는 건 알아챘다. 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토끼가 툇마루 아래로 내려온다. 내려와도 여전히 커서 머리 위로 그림자가 생겼다. 고개를 들자 토끼가 율을 보며 미소 짓는다.

“참 소개가 늦었네. 난 이락이다.”

“저는….”

“쥐방울이지?”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하였으나 율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리. 다리 사이에 달린 방울을 훔치러 왔는데 이름까지 방울이라고 하니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 따로 정정하지 않고 그를 따라나섰다.

졸졸 쫓아가며 본 뒷모습 또한 얼굴이 없음에도 위협적이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팔뚝과 비교하면 머리 위로 삐죽 솟은 귀여운 하얀 털은 참으로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

“정신 빼놓지 말고 걸어.”

처음 보는 인간 세상의 풍경에 율은 넋을 놓고 말았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였는데 인간과 수인들이 바글바글했다. 길 하나를 두고 옆으로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곳에선 신기한 것들을 많이 팔았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자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꼬르륵. 율은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배를 움켜잡았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두 팔아요!”

만두 가게 주인의 목소리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발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닷 푼에 3개!”

닷 푼이라….

용궁에서 가져온 돈이 있긴 한데 육지에서 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주머니를 만지작대는데 누군가 등 뒤로 나타난다.

“만두 6개.”

돌아보던 율은 이락임을 알고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만두 가게 주인 역시 겁을 먹고 주눅이 든 표정이다. 얼른 돈을 받더니 만두를 내어 주고 시선을 피한다.

“먹어라.”

봉투에서 맛있는 냄새가 훅 끼친다.

율은 손을 저으며 만두를 이락에게 양보했다.

“이락 님께서 사셨으니 먼저 드십시오.”

“난 만두가 싫다.”

“아….”

율은 만두 봉투를 건네받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 그럼 염치 불고하고 감사히 먹겠습니다. 봉투에서 만두를 꺼내 입에 무는데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 용궁 밖 저잣거리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구나.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만두를 입에 넣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거리고 쳐다본다.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에 만두가 목에 턱 걸리는 느낌이다. 혹시 등에 있는 껍질 때문인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떨구어 꼭꼭 씹어 먹던 율은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지나가다 보니 벽에 종이가 붙어 있는데 거기에 그려진 얼굴이 옆에 있는 이락과 매우 흡사했다.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자 이락이 어깨를 붙든다.

“어디가?”

“저어기, 저거. 이락 님 얼굴 같습니다.”

그것을 본 이락이 어깨를 잡아 방향을 튼다.

“맞아. 나야.”

“이락 님 얼굴이 왜 저기 있습니까?”

더 보려 하였으나 골목으로 들어가며 그림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적 같은 거지.”

“부적이요? 대체 왜….”

“내 얼굴을 그려 붙여 놓으면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믿거든.”

“그림 아래 글자가 적혀 있던데요…?”

“그건 내 몸값.”

몸값, 부적… 도통 알 수 없는 말 천지다. 그러나 토끼가 생각보다 유명한 위인인 건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대단한 이를 용궁에 데려가도 괜찮을까. 아주 먼 옛날에는 육지와 용궁도 왕래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끊겼지만. 혹시 이 일로 나중에 둘 사이에 분쟁이 생기는 건 아닐까. 뒤늦게 걱정이 됐다.

“원하면 한 장 주마. 가져가서 너희 집에 붙여 놓든지.”

“괜찮습니다….”

사양하고 보니 기진이 떠오른다. 율이 알기로 그는 자주 악몽을 꿨다.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그의 모친이 귀신이 되어 그를 괴롭히는 거라고 했다. 고민하던 율은 이락의 소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락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길래 입을 달싹였다.

“하, 한 장 주시면 마다하진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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