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75)화 (75/136)

#75

“뺨은 이제 조금 괜찮은 거 같은데. 아직도 많이 가려워?”

“이제 조금 괜찮아요.”

응급실에서 발라준 연고 때문인지 가려운 게 많이 가라앉았다. 나 대신 처방 약을 받으러 간 준석 아저씨를 기다렸다.

“그나저나 아버님은 아침 잘 챙겨 드셨을까요?”

“알아서 드셨겠지.”

“태범 씨는 가만 보면 아버님한테 너무 못하는 거 같아요.”

나한테 하는 거 반의반만이라도 해드리면 아주 효자라고 소문이 날 텐데.

“그러게. 우리 호빵이는 차유원을 닮아야 할 텐데.”

“우리 호빵이는 여자일까요, 남자일까요? 성별은 14주 차부터 알 수 있다던데.”

“너는 딸이었으면 좋겠어?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글쎄. 딸이든 아들이든 유전자 조합은 이미 완벽할 거 같았다. 하지만 딸이면 애먼 자식이 우리 호빵이가 좋다고 쫓아다닐까 봐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권태범이나 아저씨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둘 다 상관없을 거 같아요. 아들이든 딸이든 건강하게만 나오면 뭐든 좋아요.”

“나도.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나랑 차유원은 생각이 똑같네.”

이젠 능글맞은 소리도 잘한다. 우리는 함께 키득거리며 미래의 호빵이를 상상했다.

***

복숭아 알레르기 사건이 있고 나서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아버님 벌써 가시려고요?”

지난 3일간 권태범이 출근하고 나면 아버님과 쇼핑도 하고, 영화관 전체를 대관해서 호랑이의 아들이라는 영화도 보는 등, 생각보다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아버님이 사 주신 옷 때문에 드레스 룸은 포화 직전이고, 놀러 나갈 때마다 권태범의 부하들이 감시하듯 따라온 것만 빼면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집을 너무 오래 비운 거 같으니 가봐야지. 권태범 그 자식도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는지 나를 보는 눈빛이 제법 매섭더구나.”

“태범 씨가 괜히 그러는 거예요. 속으로는 아버님이 계셔서 좋아할 거예요.”

“그놈이 퍽이나 그러겠다. 지 애비 죽으라고 고사만 안 지내면 다행이지.”

아버님은 나 같은 막내 아들을 하나 더 낳았어야 했다고 한탄하셨다.

“그럼 다음에 또 오세요. 아니면 연휴 껴서 주말에 놀러 가도 좋을 거 같아요.”

“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구나.”

숨만 쉬어도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봐주셔서 그런지 무섭게만 느껴졌던 아버님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든든한 내 편이 한 명 더 생긴 기분이랄까?

집을 나서는 아버님을 따라 마당과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아이고, 다리야. 이놈은 왜 이딴 집을 지어서는. 우리 호빵이 태어나기 전에 집부터 바꿔줘야겠어.”

굳이 동의하는 말을 내뱉진 않았지만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 이 계단이라도 있어서 운동을 한다고 하지만 밖을 오갈 때 불편하긴 했다.

“아버님께서 좋은 집으로 알아봐 주세요.”

애교스럽게 아버님께 말을 건네며 차에 오르는 그를 배웅했다.

“조심히 가시고, 가현동에서 혼자 계시는 게 너무 외로우시면 언제든 오세요!”

“그래. 유원이 너도 몸조리 잘하고. 권태범 그 자식이 속상하게 하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라. 이 애비가 아주 혼쭐을 내주마.”

“헤헤. 그럴게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아버님이 탄 차가 조그마해질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이내 도로를 빠져나가는 차를 보며 고개를 돌리는데, 가로등 뒤로 누군가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이상해서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형수님?”

“아니에요. 누가 쳐다보는 느낌이 나서.”

“제가 확인하고 올까요?”

“아니요 그냥 좀 착각했나 봐요. 얼른 올라가요, 아저씨.”

‘예전에 도망쳤을 때 생긴 버릇인가.’

하지만 사람한테 감이란 게 있었다. 좋지만은 않은 느낌에 서둘러 아저씨와 집으로 들어갔다.

***

혹시 몰라 노트의 위치를 한번 바꿨던 게 신의 한 수였다. 갑자기 내 방이 사라지게 될 줄은 몰랐다. 어차피 두 번 다신 안 볼 사람이라 도망쳤을 때 딱히 노트가 걱정되진 않았지만, 다시 이 집에 돌아오고 내 방이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노트를 들킨 줄 알고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흠… 이제 본격적으로 조사를 해봐야 하는데.”

문제집 사이에 껴두었던 노트를 꺼내 끼적이던 페이지를 펼쳤다.

“배신이라….”

그리고 그 아래 권태범 중상이라는 문구가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지만 이 내용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한 상황이었다.

“이번엔 내가 지켜줘야 해.”

비록 평균 이하의 신체 조건과 임신까지 한 몸이었지만 지금 권태범을 위험에서 구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창밖으로 이어진 별채를 노려보며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장 먼저 어떤 것부터 해야 하나 고민하다 1층에 있는 권태범의 서재로 향했다.

“오… 1도 모르겠는데?”

분명 한글로 쓰여 있는데 그저 까만색은 글자요 흰색은 바탕이었다. 무슨 법 같은 단어가 잔뜩 적혀져 있고 대부분 전문 서적만 잔뜩 있어 이곳에서 정보를 얻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빈손으로 터덜터덜 서재에서 나와 별채로 향했다.

분명 그 배신자는 귀에 큰 점이 있다고 했으니 일단 그 사람을 찾는 게 먼저였다. 그 뒤를 쫓다 보면 어떻게 배신을 하는지 알 수 있겠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냥…!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둔 강릉에서 사온 후춧가루를 꽉 쥐었다.

“어, 형수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별채 주변에는 따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 그 옆에 있는 건물로 들어왔다. 이곳엔 체력 단련실 같은 게 있으니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꽤 괜찮은 생각이 떠올라 아저씨에게 물었다.

“저도 오늘 여기서 운동해도 되나요?”

“네? 형수님께서요?”

“네. 혼자 운동하니까 심심해서요.”

본채에도 헬스장은 있었다. 그래서 운동 기구 핑계로 왔다고 하면 의심할 게 뻔하니 일부러 혼자 하기 외롭다는 이유를 들며 활짝 웃었다. 웃는 얼굴엔 침을 못 뱉으니까, 후후….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아저씨는 흔쾌히 승낙하고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형수님, 늦었지만 임신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형수님.”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역시 체력 단련실 안으로 들어오니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있었다. 저번처럼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진 사람은 없었지만. 아무튼 처음 보는 아저씨들부터 익숙한 얼굴의 아저씨들까지, 그들이 건네는 축하 인사에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

“가, 감사합니다… 크흠.”

진짜 여기가 소설은 맞나 보다. 같은 남자가 임신했다는 데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걸 보면. 빙의를 하자마자 히트 사이클이 터지고 임신을 해서 그런지 아직 알파, 오메가의 형질에 대해서 아는 부분은 아직도 몇 없었다.

페로몬 조절이나 히트 사이클을 견디는 방법 같은 것도 잘 모르고. 아직 태동도 없어서 배 속에 우리 호빵이가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진 않았다. 그냥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상상할 뿐이지.

“형수님. 아무래도 스파링을 하거나 벤치프레스 같은 기구를 이용하는 건 위험하니, 런지나 가벼운 러닝은 어떠십니까. 속도는 2에서 3 정도면 적당할 거 같은데요.”

“네, 그럴게요. 아, 근데 귀에 엄청 큰 점이 있는 아저씨는 요즘 안 보이시네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을 흘려보았다. 이름도, 나이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 사람을 찾으려면 그 남자에 대해 아는 사람을 만나야 했다. 권태범의 부하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태식 아저씨면 그 남자를 알 수도 있었다. 무슨 말이 나올까 바짝 긴장했는데 태식 아저씨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귀에 큰 점이요…?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아저씨의 표정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그 남자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영 헛다리를 짚은 것 같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권태범을 배신할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지…?

“아, 저 갑자기 조, 졸려서 이만 가볼게요!”

온 지 1분도 안 돼서 간다고 하는 게 좀 웃겼지만 그래도 여기서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냈으니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다.

“네? 그럼 제가 데려다-”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럼 다음에 또 봬요, 아저씨!”

이왕 나온 김에 집 구석구석을 살펴봐야 하는데 아저씨가 나를 데려다주면 곤란했다. 아저씨는 분명 귀에 큰 점이 있는 남자는 없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 내 눈으로 찾을 때까진 포기할 수 없었다. 체력 단련실에서 빠져나와 식당과 영화관을 둘러보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은 갔다간 권태범한테 혼날 거 같은데.”

그와 있으면서 느끼는 건데 생각보다 질투심이 엄청 강하다. 알파는 소유욕이 강하다고 하더니… 내가 자기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푸흐- 하고 입가가 풀어졌다.

오랜만에 꽤 오랫동안 돌아다녀서 그런지 다리가 저렸다.

“에구… 일단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찾자….”

저린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자 주방장 아저씨가 내게 다가왔다.

“유원 님! 어디 가셨다가 이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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