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74)화 (74/136)

#74

오랜만에 호빵이가 아닌 다른 꿈을 꾸었다. 엄청나게 큰 복숭아였는데 할머니가 아주 귀한 거라며 내게 주셨다. 엄청 싱싱하고 좋은 복숭아라 권태범과 같이 먹으려 기다리고 있는데 잠이 깨버렸다. 손에 들고만 있어도 단내가 풀풀 풍기던 복숭아였는데….

“복숭아….”

결국 꿈에서 복숭아를 먹지 못하고 눈이 번쩍 떠지고 말았다. 과일 섭취를 자제하라고 했지만 복숭아는 너무 먹고 싶었다. 아직도 꿈에서 내 손에 들려있던 복숭아의 단내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몇 시지…?”

시계를 보니 4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권태범도 잠이 든 듯하고. 결국 침대에 누워 다시 잠을 청하려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양을 1312마리까지 세어 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또 그 와중에 배가 다시금 살살 아파 왔다.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니 이제 본격적으로 아기가 커지는 시기라 아픈 거라던데. 몸도 아프고 잠은 오지 않고, 매일같이 하는 입덧에 갑자기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흑… 훌쩍, 흐….”

관자놀이를 따라 베갯잇이 축축하게 젖어가기 시작했다. 권태범이 깰까 봐 입술을 꾹 깨물며 조용히 우는데 그조차도 갑자기 서러웠다.

“으흑… 복숭아…. 흐으….”

결국 꽉 깨문 입술이 허물어져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흐헝- 하고 울어버리자 권태범이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유원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흐으… 흑, 태범 씨이, 흑….”

급히 조명을 켠 권태범이 눈물로 번진 내 얼굴을 살폈다. 그늘진 얼굴이 걱정으로 물든 그가 나를 품에 안고 토닥였다.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으으… 아니, 흣, 아니요….”

눈물이 멈추지 않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소매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자 권태범이 나를 만류하고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서럽게 울어.”

“흐윽, 태범 씨이… 흡.”

내 등을 토닥이며 다정하게 물은 그 목소리에 다시금 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다.

“흑… 보, 복숭아…가 흐엉…. 꿈에서, 흣, 나왔는데에…. 흑, 일어나 보니까… 없어요…. 흐으…. 내가 태범 씨랑 같이 먹으려고 아껴둔 건데…. 흐엉….”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진짜 맛있게 생긴 복숭아였는데. 입을 크게 벌리자마자 잠이 깨버렸다.

“배도 자꾸만 따끔거리고…. 흑, 입덧하는 것도 너무 아프고… 흐헝….”

“그래, 그래. 많이 힘들었지, 우리 유원이.”

우는 것도 기력이 소모되는지, 등에 식은땀이 났다. 권태범이 따뜻한 손수건을 가져와 몸을 닦아주고 따뜻한 물도 먹여줬다.

“복숭아만 먹고 싶은 거야?”

“흡… 네에…. 무, 물렁이로… 흐….”

“잠깐 기다리고 있어.”

권태범은 그 길로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혹시 이 새벽에 아저씨들을 깨우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사장님. 접니다. 권태범.”

사장님…?

“복숭아 가장 크고 좋은 걸로 한 박스만 부탁드립니다. 네, 지금 바로 가지러 가겠습니다.”

전화를 뚝 끊은 권태범은 물컵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복숭아 사 올 테니까 울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피곤하면 그냥 자고. 복숭아는 내일 먹어도 되니까.”

“네에….”

너무 미안한데, 너무 고마웠다. 권태범이 얼른 다녀오길 바라며 얌전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더니 겉옷을 들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를 배웅하고 오랜만에 호빵이에게 말을 걸었다.

“호빵아, 아빠가 복숭아 사 오신대. 우리 그것만 먹고 푹 자자….”

***

서둘러 가게로 향한 태범은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는 복숭아에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뭘요. 언제든 연락해주십시오, 전무님.”

유독 과일을 좋아하는 유원이기도 하고, 임신 중에는 자다가도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기는 일이 빈번하다고 해서 혹시 모를 일이라 미리 준비를 했다. 두둑하게 현금다발을 건넨 태범은 복숭아 이외에도 유원이 좋아할 만한 것을 차에 실었다.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라 도로엔 차가 없었다. 덕분에 빨리 집에 도착한 태범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본채에 들어섰다. 주방에서 복숭아를 닦고 과도와 접시를 챙겨 2층으로 올라갔다.

“유원아-”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든 유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태범은 복숭아가 담긴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유원의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새액새액, 고른 숨을 내쉬는 유원의 입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임신을 해서인지 그의 페로몬 향은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유원 특유의 체향이 오늘따라 더 진해진 것도 같았다.

놀란 토끼처럼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귀까지 새빨개졌던 유원을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좋은 꿈 꿔, 유원아.”

유원의 이마에 입을 맞춘 태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큰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문신 아래로 성난 알파의 근육이 드러났다. 꽉 닫힌 문 뒤로 자신의 오메가를 향한 알파의 페로몬이 흘러나오는 것도 모른 채 유원은 평화롭게 단잠을 이루었다.

***

“으으아… 복숭아다!”

물소리에 잠에서 깨자 테이블에 복숭아가 있었다.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잠이 들어버렸네. 괜히 권태범의 잠만 깨우고 꼭두새벽에 고생만 시킨 것 같아서 미안했다.

“미리 깎아놔야겠다.”

태범이 복숭아를 씻어놔서, 바로 깎아서 먹을 수 있는 상태였다. 한 번도 과일 같은 건 깎아본 적이 없지만 복숭아는 그냥 자르기만 하면 되니까.

복숭아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말랑한 복숭아 안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물렁이 복숭아여서 그런지 과즙이 엄청 많았다. 칼등을 따라 복숭아 과즙이 흘러 손을 온통 적셨다.

혀를 내밀어 과즙을 핥았다. 조금만 먹은 것인데도 엄청나게 달고 맛있었다.

“헉. 이러다 이불에 흘리겠다.”

급히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근데 왜 이렇게 가렵지.

코끝이 간질거리며 얼굴도 좀 따끔거리는 거 같고. 혹시 모기에 물렸나…?

벌써 모기가 있나 싶어 이상했지만 의자에 앉아 칼질을 하기 바빴다. 복숭아가 뽀얀 살결을 드러내 침이 고였다.

“와, 맛있겠다.”

침을 꿀꺽 삼키고 먹기 좋은 크기로 복숭아를 잘라 접시에 예쁘게 담았다. 빨리 먹고 싶었다.

“그래도 태범 씨 나오면 같이 먹어야지.”

으응… 근데 진짜 벌레라도 물렸나, 팔이랑 얼굴이 너무 가려웠다. 칼을 내려놓고 가려운 부분을 벅벅 문지르는데 샤워를 마친 권태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태범 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잘 잤…. 차유원. 너 얼굴이 왜 그래.”

손을 흔드는데 권태범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 얼굴? 내 얼굴이 뭐가? 조금 따끔거리고 간지럽긴 하지만 괜찮은 거 같은데.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거울을 찾는데 그보다 빨리 권태범이 내게 다가왔다.

“너 설마 복숭아 알레르기 있어?”

“네? 아니요?”

“일단 일어나. 병원부터 가자.”

권태범은 빠르게 내게 옷을 입혀주며 준석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지금 차 대기시켜. 병원 갈 일이 생겼으니까 최 박사 부르고.”

뚝 전화를 끊은 권태범은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어, 형수님 얼굴이….”

“출발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떨결에 차에 타자 내게 인사하려던 준석 아저씨가 입을 떡 벌렸다. 그제야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제, 제 얼굴이 왜 이래요?”

얼굴 곳곳이 울긋불긋 달아올랐고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피부가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덜컥 겁이 나 권태범을 바라보자 그가 걱정하지 말라며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팔도 이러네. 너 원래 복숭아 알레르기 있는 거 몰랐어?”

권태범의 말에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당연히 난 차유원이 아니니 차유원이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지, 아닌지 알지 못했다.

“자, 잘 모르겠어요.”

“일단 병원 가서 치료받고 생각해보자.”

생각보다 간단하게 넘어가서 다행이다….

잔뜩 긴장한 몸에 힘을 풀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이런 것도 조심해야지. 역시 남의 몸을 빌려 사는 게 쉬운 건 아니구나. 붉게 달아오른 팔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복숭아 알레르기가 맞네요.”

“아….”

병원에 도착해서 진정제를 투여받고 피검사를 한 결과 나는, 아니. 차유원은 복숭아 알레르기가 맞았다. 그리고 혹시 몰라 다른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지 검사를 진행했다.

“다행히 많이 드신 게 아니라 위험할 정도는 아니고, 일시적인 가려움과 피부 통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권태범과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던 게 신의 한 수였다. 흐르는 과즙이 아까워 핥아먹은 정도로 이렇게 되었으니, 혼자 복숭아를 먹었다면 얼마나 심했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현재 임신 중이시고 증상이 심하지 않으니 먹는 약 대신 가려움을 완화하는 연고 정도만 처방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알레르기라는 진단에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바로 그거였는데 다행이었다. 아직 목이 좀 따끔거리고 불편했지만 호빵이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었다.

“얼굴이나 몸이 가려울 때마다 100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짜서 넓게 도포해 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나를 대신해 처방전을 받아 든 권태범이 나를 다독였다.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연고만 잘 바르면 돼.”

“네에….”

“그래도 복숭아만 조심하면 되니까 차유원이 좋아하는 거는 많이 먹을 수 있겠네.”

기운이 없는 내게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한 그가 내 콧등을 톡, 하고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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