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9)화 (19/136)

#19

찻잔을 내려놓은 권태범이 나를 보며 물었다.

“밖에 잘 안 나온다고 하던데.”

그건…. ‘괜히 싸돌아다니다 그쪽 심기 거스를까 봐 그런 겁니다.’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그런 내 침묵의 의미를 혼자 정의 내렸는지 권태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둬두고 싶긴 했는데, 막상 방 안에만 있는 꼴을 보니 기분이 썩 괜찮진 않아.”

“…….”

그런 말 쉽게 하지 말라고 했죠. 다정한 그의 모습에 마음을 내려놓다가도 종종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추운 걸 어지간히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그것도 아닌 거 같고.”

권태범은 내 후드티에 그려진 병아리를 노려보는 것도 같았다. 내가 괜히 옷을 정리하며 앞을 가리자 그가 당부했다.

“귀찮더라도 너무 방 안에만 있지 마. 여긴 그나마 따뜻하니 밖이 추워서 안 나가는 거라면 여기 있어.”

혹시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손끝에 그의 체온이 닿았다. 권태범이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열쇠였다.

그 흔한 열쇠고리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모습은 누가 봐도 그의 소유물임을 티 내고 있었다. 그의 고갯짓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열쇠를 받았다.

“여기 저 주는 거예요?”

“원한다면.”

손바닥에 올려놓은 열쇠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손끝을 안으로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이 열쇠의 의미를 알 것 같지만 지금은 왜인지 조금 욕심을 내고 싶었다.

그냥…. 잠시만 원래의 주인이 오기 전까지만. 그렇게만 욕심을 내기로 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나뭇가지 끝에 푸르른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봄은 훌쩍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머지않아 다가올 4월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

권태범이 온실의 열쇠를 내게 준 이후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유리 온실을 찾았다. 이곳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공부를 했다.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유일한 장소여서 그런지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했다.

심지어는 도시락을 싸 와 점심까지 이곳에서 먹을 정도였다. 지금까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는 걸 보니 나는 이 온실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오늘은 얼마 전부터 시작한 수능 대비를 위해 기출문제를 풀기로 했다. 교육 과정은 원래 내가 있던 세계와 크게 차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향긋한 꽃내음을 맡으며 공부를 하는데, 오랜 시간 공부에서 손을 놓고 있던 터라 모르는 문제가 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는 문제에 연필 끝을 잘근잘근 이로 짓이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이 모르는 문제는 넘겨 가며 1 챕터를 끝내자, 어느덧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문제를 다 풀었음에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불안한 마음에 해설지를 들어 채점을 했는데 점수가 엉망이었다.

“…속상해.”

이대로는 한국대는 물론 중상위권 대학 진학도 어려웠다. 한숨을 쉬고 해설지를 펼쳐 유형 탐색과 내가 틀린 이유를 노트에 정리했다. 틀린 문제가 많은 만큼 정리할 것이 많다 보니 노트에 빼곡하게 글자가 늘어갔다.

오답 노트를 정리한 후에 인터넷 강의를 듣고, 할머니와 통화까지 마치자 어느새 주변이 어둑해져 있었다. 깜깜해진 하늘에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문제집을 정리하고 가방을 열자 맨 아래에 놓인 도시락 통이 눈에 들어왔다.

“나 점심도 안 먹었네….”

점심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야식으로 족발을 먹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부렸는데 한순간에 바뀐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차게 식은 도시락을 다시 가방에 넣고 속으로 주방장 아저씨께 사과했다.

“으… 춥다, 어…? 태범 씨!”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오자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권태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택까지 가는 길이 너무 어두워서 조금 무서웠는데 잘됐다.

반갑게 웃으며 그에게 달려가려는데 조금 전 속상한 마음에 엉엉 울어 붉어졌을 눈시울이 신경 쓰였다. 티가 나지 않게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데리러 왔어요?”

“안에 없길래.”

권태범은 무심한 얼굴로 내게서 가방을 가져갔다. 검은색 슬랙스와 얇은 카디건을 걸친 그의 귓가가 조금 붉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래 기다린 것 같았다.

먼저 앞장서는 권태범을 따라 걸어가는데 가방 끝에 달린 병아리 열쇠고리가 대롱대롱 움직이는 모습이 그와 너무 이질적이었다.

“푸핫-”

내 웃음소리에 걸음을 멈춘 권태범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몸을 돌리자 가방에 매달린 열쇠고리가 더 빠르게 흔들렸다.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린 찰나, 권태범의 표정이 일순간 느슨하게 풀렸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아… 너무 웃겨. 잘 풀리지 않은 일에 마음이 상했던 것도 잠시. 별것도 아닌데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고개를 돌려 다시 걷기 시작하는 그에게 달려가 손끝을 잡았다. 역시. 나 오래 기다린 거 맞았네. 꽉 잡은 권태범의 손끝은 차게 얼어붙어 있었다. 손이 차가운 만큼 마음이 따뜻해져 그를 향해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나, 태범 씨가 보고 싶었나 봐요.”

내 말에 권태범의 발이 우뚝 멈췄다. 정면을 향한 채 얼어붙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보고 싶었어요.”

잘 못 들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린 그가 내 모든 것을 관찰하듯 응시했다. 두 뺨에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가로등 불빛에 그늘진 내 그림자 위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뺨에 닿는 그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살갗을 녹일 것처럼 뜨거웠다. 확 붉어진 얼굴에 그를 외면하듯 고개를 피하고 싶었지만 나를 잡은 단단한 손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천천히 내 입술을 따라 내려오는 시선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뺨을 문지르는 그 다정한 손길이 왜 이리 부끄러운지 몰랐다.

“울었어?”

“…아.”

권태범이 내 눈가를 문지르며 물었다.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떼어내고 한 걸음 물러섰다. 붉어진 눈시울보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겁이 났다.

“저- 앗.”

권태범이 내 손목을 잡아 제게로 당겼다. 폭, 하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이 닿았다. 익숙한 그의 향기가 천천히 폐부 속에 차오르며 그의 심장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쿵, 쿵, 쿵. 나와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날뛰는 그의 심장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권태범의 눈을 마주하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봄바람이 불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그가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귓가에 닿는 손길에 몸이 움찔 떨렸지만 그를 피하진 않았다.

“차유원.”

“…태범 씨.”

나를 부르며 점점 가까워지는 권태범의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입술 끝에 닿은 그의 숨결에 운동화 속 발끝이 굽어졌다.

“으흣….”

내 입술에 따뜻한 그의 입술이 닿았다. 어찌할 줄 모르고 가만히 얼어붙어 있자 맞닿은 입술 사이로 그가 웃는 게 느껴졌다. 잔잔한 떨림에 그의 어깨를 잡은 순간, 꽉 다문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좁은 입 안을 비집고 권태범의 두텁고 단단한 혀가 들어와 내 모든 것을 탐하듯 움직였다. 점점 깊어지는 움직임에 그의 어깨에 닿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탐하고 싶다는 그의 갈망이 입술을 통해 느껴졌다. 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제 몸을 붙이는 그 뜨거운 움직임에 숨이 가빠왔다.

입 안 곳곳을 문지르고 혀를 얽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입에선 열띤 신음이 터져 나오고 코끝에 스며드는 그의 페로몬 향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힘이 풀려 다리를 휘청거리자 그가 내 허리를 바짝 감싸 안고 지탱해주었다. 자꾸만 힘이 빠지는 몸을 그에게 기대며 숨 막히는 입맞춤을 이어갔다.

“쪽-”

마지막으로 닿았다 떨어지는 짧은 키스에 얼굴이 화륵, 붉어졌다. 뜨거운 열기가 아직도 입 안에 머무는 착각이 들었다.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자 그가 손목을 잡아내려 내 얼굴을 눈에 담았다.

“태범 씨….”

깜깜하게 내려앉은 어둠 가운데 가로등의 불빛이 그와 나를 비추었다. 그 때문인지 그 아래에 서 있는 권태범과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원작이니 뭐니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생겼다.

이번에는 내가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 댔다. 쪽, 작은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며 그가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결국 우리 두 사람은 3월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더운 열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마침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미쳤어, 미쳤어….”

권태범과의 첫 키스 이후. 아, 물론 그게 첫 키…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키스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무튼 그와의 첫 키스 이후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문지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문제를 풀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자꾸만 아랫입술에 손이 갔다. 혼자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곤 발을 구르기도 했다.

“아무리 분위기에 취했어도 그렇지. 너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한 거야….”

게다가 마지막에는 입을 떼어내려는 그를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혼자 머리를 쥐어박으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데 멀리서 주방장 아저씨가 다가왔다.

“유원 님.”

“아저씨!”

“식사하셔야죠.”

주방장 아저씨는 나를 보고 ‘형수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원 님’이라는 호칭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형수님’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와! 이게 다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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