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8)화 (18/136)

#18

“와, 씨. 배가 진짜 많이 나왔네.”

거울 앞에 서서 티셔츠를 길게 올리니 통통한 뱃살이 드러났다. 저번에 권태범에게서 살이 조금 붙었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은 이후 나름대로 식단 조절을 시작했다. 단 하루 만에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지만. 주방장님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하루하루 행복한 돼지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마지막 남은 양심상 야식은 먹지 말자. 어젯밤도 정말 최악이었고.”

넘어지면서 삐끗한 손목을 돌리며 거울 앞에 선 차유원과 굳게 약속했다. 따뜻한 물로 씻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샤워부스에 들어가기만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서둘러 몸에 남은 비누 거품을 닦고 샤워부스 밖으로 나오자 화장실에 뿌연 수증기가 가득 차 있었다.

뿌예진 거울을 몇 번 닦으니 막 샤워를 마쳐 뽀얗게 빛나는 차유원의 얼굴이 시야에 꽉 찼다.

“세상에. 어떻게 피부에 잡티 하나 없지?”

얼굴을 조금 더 앞으로 들이밀었지만, 모공 하나 찾아보기 어려웠다. 투명한 피부는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얼굴빛은 따뜻한 물로 샤워해서 올라간 체온 때문에 적당하게 달아올라 예뻤다.

“대학을… 굳이 가야 할까?”

이 얼굴이면 아이돌이든 배우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텐데. 저번에 보니까 차유원의 책상 위에 대형 기획사의 명함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조금 더 쉬운 길을 택하려는 유혹이 스멀스멀 덮쳐왔다.

“에이. 됐다. 연예인은 무슨. 차유원 또 도망갈라.”

헛된 망상은 집어치우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물기에 젖은 몸도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밖으로 나와 문 앞에 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권태범이 따뜻하게 입고 오라고 했지만 오늘 기분으론 밝은 옷을 입고 싶었다. 그래서 기모가 있는 진한 남색의 트레이닝복 대신 봄, 가을용의 이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꺼냈다.

얼어붙을 것 같던 추위도 어느덧 한풀 꺾이고 날씨도 너무 좋아서 그런지 상큼한 색깔의 옷을 입자 원래도 좋던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귀엽네, 차유원. 병아리 같아!”

전신 거울 앞에서 차유원의 모습에 감탄하며 한 바퀴 뱅그르르 돌았다. 누구에게든 이 귀여운 차유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휴, 이 귀엽고 잘생긴 자식. 보기만 해도 배부르네.”

거울 속의 차유원에게 윙크를 날리고 한 번 더 크게 한 바퀴를 뱅그르르 돌았다.

“윽, 어지러워. 웩.”

몇 바퀴를 연속으로 돌자 속이 울렁거리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머리를 붙잡고 있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자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권태범이 말한 것도 있으니, 뭐. 내키진 않았지만 장갑을 낀 채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거실로 가자 이미 준비를 마친 그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태범 씨! 저 준비 다 했어요. 빨리 산책가요, 산책!”

이곳에 온 뒤로 처음 하는 산책에 신이 나서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걸음이 빨라졌다. 순식간에 권태범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진짜 말 안 듣지, 차유원.”

신문을 내려놓은 권태범이 한쪽 눈썹을 치켜뜬 못마땅한 얼굴로 내 옷차림을 훑었다.

“다시 갈아입고 나와. 남색 트레이닝복으로.”

남색 트레이닝복이 내 옷 중에 가장 두껍고 따뜻한 옷인지는 어떻게 알았지? 설마 옷까지 뒤져봤나?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상큼한 기분으로는 그런 우중충한 남색 말고 이 노란색이라고.

“저 태범 씨 말대로 장갑도 꼈어요. 히히.”

양손에 낀 장갑을 권태범 앞으로 내밀고 방긋방긋 웃었다. 네 말을 들었으니 너도 이번엔 넘어가라는 뜻이었다.

“갈아입-”

“어! 아저씨!”

희미하게 들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마침 안으로 들어오는 준석 아저씨가 보였다. 구세주라도 된 듯 아저씨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자 아저씨가 감격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얼굴이 조금 무섭게 생겼지만 참 착한 아저씨였다.

“준비 다 됐습니다, 형님.”

“일단 차유원-”

“네네! 가요, 가요! 어디로 가면 돼요?”

권태범에게 잡히기 전 쌩하고 그를 지나쳐 아저씨에게 달려갔다. 아저씨의 옆에 찰싹 달라붙자 권태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히윽, 무서워.

살짝 겁나긴 했지만 두려움을 애써 잠재우며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었다.

***

“헉.”

고집을 부려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고 밖에 나온 지 딱 5분까지는 너무 좋았다. 뜨거운 물에 오래 있던 탓에 조금 답답했던 것도 시원한 바람에 상쾌해졌고, 환하게 내리쬐는 햇살도 너무 좋았다.

“으….”

하지만 그 기분 좋던 바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매섭게 변해 나를 덮쳐왔다. 그런데 어쩌겠어. 고집부린 것도 나, 이 옷을 굳이 굳이 입겠다고 도망쳐 나온 것도 나이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입 안으로 숨기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하아….”

그러나 완전히 숨기긴 무리였는지 권태범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기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나에게 건넸다.

“입어. 그러다 감기 걸린다.”

내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그가 혀를 찼다.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리고. 감기 걸리려고 작정했지, 아주.”

“그런 건 아닌데…. 근데 그럼 태범 씨는요?”

“이번에도 말 안 들을 거면 그냥 들어가고.”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금방이라도 발걸음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갈 것 같은 표정에 그에게서 옷을 받아 몸에 걸쳤다.

“으아… 따뜻하다….”

뼛속까지 아리던 추위에 떨리던 몸이 권태범의 온기를 나눠 받은 것처럼 따뜻해졌다. 그런데 이제는 겉옷도 없이 니트 하나를 입고 있는 그의 얇은 옷차림새가 마음에 걸렸다.

“저, 태범 씨.”

앞을 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저랑… 손잡을래요?”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냥 손을 잡자는 핑계로 그의 한쪽 손만이라도 추위를 피해 옷 안으로 숨겨주고 싶었다.

“그, 그냥 태범 씨 손 시려울까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왠지 몸이 뜨거워지며 귓불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 코트 방한 효과 장난 아, 아니네…. 크흠. 허공에 닿은 손이 부끄러워져 괜히 헛기침하고 손을 거둬갔다. 그때….

“착하네.”

권태범이 내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앗.”

풀썩. 그 힘에 못 이겨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됐다. 권태범은 그런 날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그의 체향에 이미 열이 오른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가자.”

“…네.”

권태범의 손을 맞잡고 그를 따라 산책하는 동안 우리 두 사람은 말없이 그저 걸음만 옮겼다. 오로지 모든 신경은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손에 집중되어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또 어디로 가는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직접 닿은 것도 아닌데 그의 뜨거운 체온이 천천히 스며드는 착각이 일었다. 추웠던 몸에 열이 나고 다리가 조금 저릴 때쯤 권태범이 입을 열었다.

“여기야.”

“와-”

권태범이 나를 데려간 곳은 저택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온실이었다.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읽은 적은 없던 거 같은데.

소설에 잠깐 지나가듯 나오는 내용이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처음 보는 온실은 권태범의 저택에 있는 모든 색을 빼앗아 숨겨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온실은 입구부터 화려한 색감으로 수놓아져 있어 정말 이곳이 권태범의 집인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와, 너무 예쁘다. 꽃이 엄청 많네요.”

권태범을 따라 온실 안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종류의 꽃이 형형색색 예쁘게 피어있었다. 인공적인 향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느껴지는 꽃향기에 코를 킁킁거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향기도 너무 좋고.”

권태범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이 꽃은 이름이 뭐냐, 저 꽃은 이름이 뭐냐 묻는 내게 하나하나 답을 알려주었다. 직접 심었나? 이 많은 꽃의 이름을 어떻게 저렇게 다 알지? 신기한 마음에 그를 올려다보자 권태범이 나를 일으켜 안쪽에 자리 잡은 테이블로 데려갔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마실 거라도 갖고 올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온실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운동장처럼 엄청 넓지는 않지만 꽤 큰 규모의 온실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꽃으로 가득 채운 수채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 잠깐만….”

그 순간,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에 선명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발끝에서 살짝 피어난 기시감이 발목을 따라 점점 크기를 키우며 내 몸을 감싸왔다.

여기를 내가 언제 와본 적이 있었나…?

모든 기억을 끄집어내 그 끝을 따라가자 며칠 전 꿈속에서 봤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자 마치 꿈속에서 봤던 그때 그 장소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금방이라도 꽃들이 내 발목을 움켜쥐고… 호랑이가….

“왜 그래?”

차를 가져온 권태범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조금 전에 느꼈던 기시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그땐… 내 발목을….

“차유원.”

“아니에요, 잠깐 뭐가 생각나서….”

그래, 그건 그냥 꿈이었다. 꿈이었을 뿐인데, 무슨.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권태범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함께 작게 웃어 보였다.

“여기 정말 예뻐요.”

“다행이네. 마음에 들어 해서.”

권태범의 눈빛이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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