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너 엄청 착하구나? 귀엽다, 히히.”
내 손길이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며 피하는 백호였지만, 옆에 얌전히 누워 하품을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이번에는 피하지 못하게 날쌘 손길로 백호의 얼굴을 붙잡았다. 귀여운 볼을 주무르며 콧잔등에 입을 맞추는데 백호의 얼굴 밑으로 목에 큰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호랑아, 너 어쩌다 다쳤어? 너도 혹시 그 이상한 아저씨가 그런 거야?”
그렇게 칼을 함부로 굴리더니 그것 때문에 백호가 다친 것일지도 몰랐다. 백호의 목을 만지려 하자 백호가 다시 혀를 내밀어 내 얼굴을 핥았다.
“아잇! 흐아! 자, 잠깐만 있어 봐, 호랑아!”
자꾸만 입 주변을 핥는 백호에 나는 결국 포기하고 백호의 옆으로 누웠다.
“너 근데 여기 집주인 못 봤어? 눈은 이렇게 뾰족해서 엄청 무섭고 코는 엄청 높은데 입술은 또 예쁘다? 근데 전체적으로 보면 잘생겼긴 해.”
나는 눈을 가늘게 떠서 최대한 권태범의 표정을 따라 하며 백호에게 말했다.
“응, 정말 이렇게 생겼어. 특히 째려볼 때. 푸흣-”
웃음이 저절로 나와 한참을 키득거리며 배까지 부여잡고 웃었다. 백호는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튼 오늘도 아마 새까만 옷을 입고 있을 텐데, 호랑이 너 정말 못 봤어?”
백호는 내 질문에 나른한 얼굴로 자리에 누워 꼬리만 살랑거렸다.
“치…. 무슨 호랑이가 이래.”
말은 그렇게 해도 커다란 몸집이며 호랑이 무늬며 번뜩이는 금색 눈까지 너무 멋있었다. 깃털로 만든 부채가 살랑거리는 것처럼 호랑이의 꼬리가 왼쪽,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 저절로 졸음이 몰려왔다.
“태범 씨가 아무 데서나 자지 말라고 했는데…. 그건 그렇고 호랑아. 어디 가지 마. 나 혼자서는 조금 무서워…. 알겠지…?”
그러자 호랑이는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한 뒤 나를 따라 눈을 감았다. 참 보기만 해도 신통방통한 호랑이였다. 마치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은 모습에 이 호랑이를 놓치고 싶지 않아졌다.
“호랑아… 가지 마…. 알았지? 약속…이야….”
완전히 잠에 빠져들기 전, 호랑이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
“…원.”
“으응…. 호랑아… 하지 마아….”
“차…원.”
나 아직 피곤해, 호랑아.
자꾸만 나를 흔들어 결국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호랑이의 앞다리를 잡았다.
근데 왜 이렇게… 딱딱해?
눈을 뜨자 푹신한 호랑이의 앞발 대신 권태범의 단단한 손등이 내 앞에 놓여있었다.
“헉, 언제 오셨어요? 호, 호랑이는요?”
주변을 둘러보자 형형색색의 꽃밭은 어디로 사라지고 새까만 가구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호랑이?”
“아, 아니에요…. 꾸, 꿈인가 봐요….”
뜬금없이 호랑이를 찾는 내 말에 의아한 얼굴을 한 권태범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얀색 호랑이…. 참 멋있고 귀여웠는데 꿈이었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어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저 얼마나 잤어요?”
“12시 좀 넘었어. 점심 먹어야지.”
“아 맞아. 오늘 메뉴는 뭐예요?”
내가 물어보고 나서도 속으로 조금 뜨끔했다. 이 집에 온 지 벌써 일주일 정도가 지났지만 여기서 하는 거라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밖에 없었다. 오늘은 공부 좀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남의 침대를 빼앗아 자버리기까지 했으니. 양심이 가슴을 콕콕 쑤셨다.
“소갈비찜.”
“네? 소갈비찜이요?”
꿀꺽. 윤기가 자르르하니 먹음직스러운 갈비찜이 떠올라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서둘러 침대 밖으로 나와 권태범을 재촉하고 먼저 앞장을 섰다.
“빨리 오세요. 저 엄청 배고파요! 빨리요!”
양심에 찔린다는 건 그저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아무렴 돼지갈비도 아니고 소갈비인데, 뭐 어때!
멀리서 솔솔 풍겨오는 달짝지근한 소갈비찜 냄새에 군침을 삼키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1층 식당으로 내려오자 식탁에는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오늘의 메인 메뉴인 소갈비가 먹기 좋은 크기로 그릇에 잘 담겨져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권태범이 젓가락을 드는 순간, 나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젓가락을 들었다. 젓가락 끝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갈비찜이었다.
“와, 맛있다.”
부드럽고 간이 달콤짭짤하게 배어있는 소갈비는 단연 최고였다. 몇 번 씹지 않아도 입에서 살살 녹아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갈비찜이 조금 느끼해질 때쯤 새콤달콤한 도라지무침을 입에 넣었다. 그냥 도라지무침일 뿐인데 어찌나 이렇게 맛있는지.
이뿐만 아니라 모든 반찬이 적절한 간에 재료 본연의 풍미가 느껴져 밥이 꿀떡꿀떡 잘 넘어갔다.
누가 보면 삼시 세끼 굶은 사람처럼 열심히 밥을 먹었다. 점점 바닥이 드러나는 밥그릇에 아쉬워하자 권태범이 사람을 시켜 밥 한 공기를 더 내왔다. 눈치 보지 말고 많이 먹으라는 그의 말에 예의상이라도 거절을 해야 했지만, 소갈비찜의 유혹은 너무나 강렬했다.
“잘 먹었습니다…!”
허용치를 넘은 식사량에 숨을 쉬는 것도 힘겨웠다. 꽉 찬 배를 문지르고 젓가락을 내려놓자 내 앞에 수북하게 쌓여 산을 이루고 있는 뼛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 반해 권태범의 그릇엔 뼛조각은커녕 소갈비찜 양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머쓱한 마음에 뼈로 이루어진 작은 산을 부수며 입을 열었다.
“소갈비찜 안 좋아하세요? 왜 하나도 안 드셨어요?”
내가 놀라 물어보자, 권태범의 눈이 빈 소갈비찜 그릇을 향했다.
“아…. 죄, 죄송해요.”
내가 너무… 많이 먹어서 권태범이 먹을 게 없었나 보다.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이고 눈만 깜빡이자 그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으앗!”
다가오는 손길에 눈을 질끈 감았는데 오른쪽 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차유원.”
“느, 네에?”
권태범이 내 볼에 붙은 밥풀을 떼어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순간 때리는 줄 알고 눈을 감아버렸는데 권태범의 눈을 마주하자 그게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는데 권태범이 내 양쪽 뺨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너 요새 운동은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손에 힘을 주어 내 볼을 가뿐하게 짜부 시켰다. 내 입술이 자연스럽게 붕어처럼 오동통해졌다.
씨이….
붕어처럼 입술을 쭉 내민 얼굴이 참 멋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권태범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그는 밀려나기는커녕 재밌다는 얼굴로 손을 풀었다, 조였다 하며 내 볼살을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살이 좀 붙은 거 같은데.”
매일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살이 찐 게 분명했다. 충격적인 말에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울상을 지었다.
터덜터덜 기운 없이 2층으로 올라왔다. 남몰래 욕실로 들어가 문을 굳게 잠그고, 거울에 비친 얼굴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살이 좀 찌긴 쪘나? 그냥 귀여운 얼굴이라는 것밖에 모르겠다. 오늘 좀 많이 먹긴 했지만 정확한 판단을 위해 윗옷을 벗어 던지고 전신 거울로 향했다.
“어…. 배가 나온 거 같기도 하고….”
옆으로 서서 거울을 바라보니 원래는 팽팽하다 못해 약간 말랐던 배가 오동통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많이 먹어서 나온 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허벅지 살도 조금….
“그동안 잘 먹긴 잘 먹었어.”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여기서 사는 게 너무 편했다. 매일 배가 터질 때까지 잘 먹고 시도 때도 없이 잘 잤다. 그러한 일상이 반복되니 결국 살이 쪘나 보다.
“안 되겠다. 운동하자, 차유원.”
생각해보니 이 집에 들어온 궁극적인 이유도 마르고 볼품없는 몸을 근육질로 변화시켜 그 새끼들한테서 차유원과 할머니를 지키려고 한 것이었다. 근데 실제로 하는 거라곤 칼 잡는 방법, 총 쏘는 방법, 급소 찌르는 방법 등등 전부 기본 정도 배운 게 다였다. 온갖 이상한 방법만 배우며 띵가띵가 놀았으니….
“나 그냥 돌아갈까.”
어차피 여기서 하는 거라곤 먹고 자는 것밖에 없으니 그냥 돌아가도 될 거 같았다. 곧 있으면 차유원의 할머니도 제천으로 내려가신다고 하셨고. 그동안 같이 있으면 할머니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그래. 그냥 가자! 어차피 학원도 다녀야 하고.”
사실 그동안 배웠던 호신 기술이 이상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정말 위험할 때 써먹기는 좋을 것 같았다. 암. 그놈들을 다루기엔 이만한 방법도 없지. 싸움의 첫 번째는 선제공격이라더니 맞는 말이었다.
아무튼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론을 내리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 당장 집으로 가야겠다 싶었다.
“짐 먼저 챙길까?”
화장실에서 나와 옷장으로 다가가 맨 밑에 넣어두었던 가방을 꺼내기 위해 손을 밀어 넣었다.
“어라…?”
팔을 깊게 집어넣고 손을 휘저어도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눈이 커지고 입에선 허탈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 이게 어디로 갔어?”
분명 가방은 이곳에 넣어뒀었다. 혹시 몰라 신분증이랑 여분의 돈도 가방 안에 넣어 뒀었는데 이게 발이 달렸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집착광공의 황제 감금…. 이런 걸 하려고 그러나? 막 못 나가게 하려고 꽁꽁 묶어놓고, 가둬놓고 그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