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3)화 (13/136)

#13

준석은 며칠 전 브로커가 보내온 새 총기류를 권했다. 입문자용으로 나온 총이지만 연사력이나 탄속, 유효 거리 등 성능이 나쁘진 않았으니 보호용으로 유원이 쓰기 괜찮을 것 같았다.

“애 기절시킬 일 있어?”

“네?”

“아직 어려서 안 돼. 겁도 많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꽤 괜찮은 제안이라고 자신했던 준석은 예상하지 못한 태범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했다. 게다가 태범의 입에서 ‘애’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답지 않게 말이 길어진 건 또 어떻고. 과연 제 눈앞의 있는 사람이 보스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준석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건 그렇고,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한 대 맞은 듯 넋을 잃고 있는 준석에게 태범이 물었다.

“아, 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카오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홍콩 쪽에 있는 애들한테 들어보니 대대적으로 조직 개편이 이뤄질 거 같다고 하고요.”

그 말에 태범은 미간을 찌푸리고 테이블 위에 있던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담배에 불을 붙인 태범은 한참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홍콩 수주계약 건은?”

“그쪽도 지금 불안정한 상태라… 아무래도 저희가 마카오랑 홍콩에 한 번 가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짜증 나게 구는군.”

태범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 목을 조이던 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그래도 아마 일주일 안으로 판가름이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준석의 말에 날짜를 살펴본 태범이 재떨이 위에 담배를 짓이기며 말했다.

“왕 회장한테 연락해. 직접 건너가겠다고.”

“네, 알겠습니다.”

일정을 받아 적던 준석의 시야에 태범이 손가락이 들왔다. 테이블 위를 탁탁 두 번씩 내리치는 행동은 태범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차유원 여권도 좀 만들어 놔.”

“형수님도 데리고 가시려고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준석은 계속해서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는 말에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빠듯한 스케줄을 생각하면 굳이 유원을 데려갈 이유는 없을 텐데 말이다.

“봐서. 그리고 혹시 모르니 괜찮은 호텔이나 관광지도 좀 알아봐. 스케줄 조정도 다시 하고.”

“…예, 알겠습니다.”

혹시 모른다고는 했지만 이미 태범은 유원을 데리고 홍콩에 갈 사람처럼 보였다. 그동안 태범은 출장지에서 여행을 하거나 관광지를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그렇듯 항상 정해진 스케줄만 빠르게 처리하던 그였다. 처음으로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라는 태범의 말에 준석은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하며 서재를 빠져나갔다.

달칵 소리와 함께 서재 안이 다시 적막함으로 물들었다. 태범은 고요한 적막함 속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내는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시곗바늘이 벌써 새벽 2시를 향하고 있었다.

“가봐야겠군.”

평소라면 더 늦은 시간까지 서류를 보다 하루를 마무리했겠지만, 태범은 유원이 떠올라 평소보다 일을 일찍 끝내고 서재를 나섰다.

유원의 몽유병이 언제 다시 도질지 모르니 곁에 있어야 했다. 그 따끈한 몸을 껴안으며 쉬고 싶기도 했고. 유원을 떠올릴수록 자신도 모르게 허물어지는 입가를 버릇처럼 문지르며 태범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

“으앗! 태…! 흡.”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권태범의 얼굴에 유원은 경악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 사람이 여기 왜 있어?

어째서 이 사람이 여기에 누워있는 건지. 권태범의 단단한 가슴 근육이 시야에 가득 찼다. 숨을 잘못 들이마셔 터져 나오려는 사레를 꾸역꾸역 참고 권태범이 깰세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서둘러 이불 안으로 내 옷차림새를 살폈다. 혹시 저번처럼….

“하아….”

다행히 옷은 제대로 입고 있었다. 그래. 저놈이 권태범인 줄 알면서 또 그랬으면 그냥 죽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일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는 또 어디야?”

이제는 이 정도 일로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눈을 떴을 때 모르는 곳에서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을 굴려 이곳이 어딘지 파악했다.

이 새까만 것들은 다 뭐야? 침대도 까맣고, 이불도 까맣고, 심지어 바닥에 깔린 러그도 까만걸 보니….

역시 우리 광공님 방인 듯했다.

“나 어제 술 먹었나?”

쩝쩝하고 입맛을 다셔봤지만,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기억은 더더욱 없었고.

하… 어쨌거나 우리 광공님이 깨기 전에 얼른 방으로 돌아가자.

근데 자는 모습도 잘생겼네. 거울에 비친 차유원의 얼굴은 귀엽긴 했지만 머리에 진 까치집이며 베개에 눌린 건지 뺨에 생긴 가느다란 자국이 참 없어 보였다.

그와 반대로 권태범은 새벽에 혼자 숍이라도 다녀왔는지 일어나자마자 레드카펫 위를 걸어도 될 정도로 완벽 그 자체였다.

세상 참 불공평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발끝을 세워 살금살금 방문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마침내 문고리에 손이 닿는 순간….

“차유원.”

우리의 광공님이 나를 불렀다.

“하… 하하. 태범 씨… 조,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태연한 척 몸을 돌려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그래, 난 지금 막 방금 들어온 거야. 그런 거야. 권태범의 침대가 얼마나 푹신한지, 그의 체온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아, 아침 식사 안 하냐고 지금 막 깨우러 온 거였는데 보, 보셨죠? 저 막 들어온 거….”

여기서 더 깊게 엮이면 안 된다. 지금도 많이 늦은 거 같지만 어차피 권태범은 곧 출장을 가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됐다. 그럼 권태범은 여주인공에게, 나는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씹- 아침부터 개소리하지 말고 이리 와.”

나의 원대한 계획과는 달리 권태범에게는 나의 모든 노력이 가소로운 일이었나 보았다. 권태범이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말하자 내 몸은 불가항력처럼 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신 채 쪼르르 달려간 나는 권태범에 앞에 멈춰 섰다.

“저 태, 태범 씨….”

“누워.”

“그냥 제 방으로….”

눈치를 보다가 벌어진 가운을 여미며 나를 바라보는 권태범과 두 눈이 마주쳤다.

“네에….”

권태범이 뭐라 하기 전에 이불을 걷고 그 안에 몸을 누였다. 엄청… 따뜻하긴 한데….

“더 자, 너 어제 늦게 잤어.”

눈에 닿는 권태범의 손이 따뜻했다.

내가 어제 늦게 잤었나? 일찍 잔 거 같은데. 아니, 그리고 그걸 권태범은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런 의아함도 잠시, 언제 잠이 깼었냐는 듯 수마가 해일처럼 몰려왔다.

권태범이 시킨 거니까…. 조금만 더 잘까…?

***

“우와. 꽃은 언제 심어놨대?”

오늘따라 화창한 날씨에 밖으로 나가자 형형색색 예쁜 꽃이 마당 가득 피어있었다.

발끝에 잔디 대신 살랑대는 꽃이 닿았다. 기분 좋은 촉감에 발을 꼼지락거리다 혹시나 꽃이 상할까 봐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와- 너무 좋다.”

이 얼마만의 꽃구경인지, 코끝 사이로 파고드는 꽃향기며 살랑살랑 두 볼을 간지럽히는 봄바람까지 너무 좋았다.

“태범 씨는 어디 있지?”

이 집에 온 첫날 이후로 다른 아저씨들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저번에 한 번 죽을 뻔한 이후로 권태범이 남자들에게 잘 말해두겠다더니,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랬다.

“태범 씨!”

고로 나와 놀아줄 사람은 권태범밖에 없어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러면 나오려나 싶은 얼굴로 키득거리며 현관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히윽.”

권태범 대신 하얀색 호랑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집채만 한 호랑이에 눈을 비비며 얼른 두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흡…!”

잘못 본 게 아니었는지 커다란 백호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오지 마!”

자꾸만 나를 향해 다가오는 호랑이에 고개를 저으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호랑이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뒷걸음질 칠 때였다. 예쁘게만 보였던 꽃들이 내 몸을 칭칭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감싸 안았다.

“호, 호랑이….”

저번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데 권태범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는다고 욕해서일까, 이번엔 진짜 호랑이가 나타났다. 이대로 잡아먹힐 게 분명했다. 손이 덜덜 떨리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맺혔다.

“흑, 태범 씨이….”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은 권태범밖에 없었다. 저번에도 나를 구해줬으니 이번에도 구해줄 거라 믿었다. 코를 훌쩍이며 권태범을 부르는데 어느새 다가온 백호가 혀를 길게 내밀었다.

잡아먹힌….

“으앗…?”

꼼짝 않고 잡아먹히는 줄 알았건만, 백호는 나를 물지 않고 내 뺨을 길게 핥아 올렸다. 거친 혓바닥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계속해서 내 얼굴을 핥았다.

“…호, 호랑아. 혹시 나 울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지고 백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계속 보다 보니 조금 귀여운 거 같기도 하고.

백호의 앞다리를 두 손으로 잡고 정말 그런 거냐 물었다. 그러자 백호는 마치 흥, 하고 콧방귀를 뀌는 것처럼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내 곁에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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