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잠시 생각하느라 입을 다물자 권태범이 내게서 손을 떼며 물었다. 멀어지려는 권태범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얼른 가요! 얼른, 얼른!”
그래. 진짜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야? 꿈이 깨기 전에 얼른 거사를 치러야지! 암암!
나는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손끝으로 가게 입구를 가리켰다.
“태범 씨, 근데 나 다리에 힘이 없어요. 저 좀 안아주면 안 돼요?”
“애 아니라며?”
“애보다 살짝, 진짜 조금 더 큰 건데도 안 돼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권태범 코앞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이게 바로 장화 신은 고양이 권법이다! 이번에도 역시나 통한 건지, 권태범이 피식 웃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혹시나 나를 내려놓을세라 권태범의 허리에 다리를 꽉 감고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태범 씨, 나 빨리···.”
이상하게 엉덩이가 자꾸 움찔거리며 몸이 권태범을 원했다. 이거 진짜 욕구불만 때문에 꾸는 꿈 아니야?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권태범과 그 무언가를 빨리하고 싶었다. 재촉에 나를 추슬러 안은 권태범이 식당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옷차림을 정리하며 안으로 들어오던 콧수염 아저씨가 그런 우리를 발견하고 눈을 찡그렸다.
“어…! 형님 어, 어디 가십니까?”
“망치야. 가게 뒷정리 좀 해라.”
“예?”
“간다.”
태범은 그대로 콧수염을 지나쳐 가게를 빠져나갔고, 나는 멍한 얼굴의 콧수염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안녕, 콧수염 아저씨.’
상큼하게 윙크를 날려주자 콧수염 아저씨가 그런 나를 보며 눈가를 바들거렸다.
너무 귀여운 나머지 참을 수 없나보다.
역시 잘생기고 귀여운 게 짱이었다. 뭐든지 다 먹힌다! 히히!
***
“으으··· 아, 허리 아파···.”
너무 많이 자서 그런지 허리가 뭉친 듯 아팠다. 하지만 얼굴에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느낌이 너무 좋아··· 응? ···햇살?
내 자취방은 반지하인데···?
순간 묘한 이질감에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또 어디야···?”
눈만 뜨면 새로운 곳에서 일어나는 게 벌써 두 번째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 남자랑은 참··· 좋았는데 아쉽네.
어우, 처음이긴 했어도 눈앞이 번쩍거리며 찌릿찌릿한 게 아주… 극락에 다녀온 듯 좋았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꿈 꿀 수 없는 현실에 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엥? 근···육이 다 빠졌나? 이거 다리 상태가 왜 이래···?”
못생기고 키도 작은 탓에 제일 신경 썼던 것이 바로 근육을 키우는 일이었다. 특히나 하체 운동을 많이 한 터라, 다른 건 몰라도 허벅지 근육은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두툼한 허벅지 근육은 어디 가고, 지금 내 눈에 들어온 건 순두부처럼 새하얗고 말랑말랑한 허벅지와 그 밑으로 털 한 가닥 없는 매끈한 종아리였다.
이 이상하고도 볼품없지만 어쩐지 자꾸만 시선이 가는 다리가 신기해서 구경하고 있을 때, 갑자기 미끄덩한 무언가가 허벅지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으흣- 이게 뭐야.”
엉덩이를 바짝 조이며 손을 뒤로 가져갔다.
설마 어제 그 죽여주는 꿈을 꾸고 이 나이에······. 아니, 그러기엔 위치가 이상한데···?
도대체 이 상황은 무엇이며, 내가 깨어난 이곳은 어디인지 머리가 고장이 난 듯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혼자 있는 줄 알았던 이 공간에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뒷목이 뻐근해진 순간 방에 딸려있던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일어났어?”
그 안에서 큰 수건으로 하체를 가린 권태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왜 아직도 내 눈앞에 보여요?”
저 사람은 분명 꿈…에서 만난 사람인데 왜 아직도 있는 거지?
“너무하네. 어젠 내가 좋다고 그렇게 끌어안더니.”
권태범은 나른한 얼굴로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꿈인데···? 분명 꿈이어야 하는데···?
“어제 대충 씻겨주긴 했는데.”
한쪽 눈을 찡그린 권태범이 내 다리 사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권태범의 등에 있는 호랑이 문신이 화장대 거울에 비쳐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목에 있는 상처··· 권태범···, 그리고 호랑이 문···신······.
내가 아직도 꿈을 꾸는 건가?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멍하니 있자 미간을 일그러뜨린 그가 나를 불렀다.
“차유원.”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숨이 턱 막혀왔다.
서, 설마. 이거 꿈이 아니라 빙의야?
“히윽.”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 빙의라는 걸 깨달은 순간, 단순히 끝장나게 섹시하다고만 느껴졌던 권태범이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죄, 흣, 죄송해요.”
저렇게 다정스럽게 말하는 권태범은 더, 더 무서웠다. 언제 돌변해서 내 목을 조이고 나를 죽이려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저 권태범은 집착광공에, 사랑에 눈이 멀어 여주인공을 감금하는 미친놈이기 때문이다.
근데 소설 속에서는 분명 여주인공이 첫사랑이라고 했는데 왜 나랑 같이 밤을 보냈지? 아, 사랑까진 아니어도 몸 정도는 괜찮고 그, 그런 건가?
그렇다면 저 미친놈이랑 더 엮이기 전에 여기서 그만두는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차유원.”
내가 왜 갑자기 빙의를 한 건지,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권태범의 눈치를 보고 이불 끝자락을 잡아당겨 몸을 가렸다. 그러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을 아무렇게나 몸에 끼워 넣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 일단. 음… 실수였다고 하자. 아니야, 그렇게 말했다가 기분 나빠서 나 죽인다고 하면 어떡해….’
상, 하의를 입는 것보다 양말을 신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최대한 권태범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을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 궈, 권태범 씨.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하하.”
최대한 말끝을 늘어뜨려 시간을 끌면서 마지막으로 하얀색 뽀글이 잠바까지 챙겨 입었다.
‘어, 어쩔 수 없다. 도망가자. 36계든 38계든 일단은 도망가야 해!’
바닥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슬그머니 문이 있는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어젠 실수였습니다! 잊으세요!”
“차유원. 쓸데없이 머리 굴리는 거 티 나니까 집어치워.”
내 입에서 나오는 말과 동시에 권태범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망했다. 내 말을 들은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권태범의 손에 들린 수건이 휴지 조각처럼 한없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를 어쩌지. 생각, 빨리 생각해보자···. 저 수건 대신 내 머리통이 구겨지기 전에 얼른···!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아 씨, 일단 뭐라도 해보자! 권태범이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로! 12행시를 지어보겠습니다.”
“지껄여 봐.”
다행히 이 방법이 먹힌 건지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린 권태범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일단 듣고 나서 생각하지.”
시발···.
내 말에 권태범은 긴 다리를 매끄럽게 꼬아 앉아서 본격적으로 들을 자세를 취했다. 지금 막 씻고 나와서인가, 얼굴에 물광이 장난 아니었다.
후우··· 이 와중에도 존잘이네. 근데 무섭기도 하고… 씨이···.
삐죽 튀어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참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뽀글거리는 재킷의 끝을 꽉 쥔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어.”
곧바로 운을 떼는 권태범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어이가 없으셨죠?”
“제.”
헉. 두 번 운부터 문제가 생겼다. ‘제’가 아니라 ‘젠’인데 어쩌지.
움푹 파인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엄청난 난관에 마른침을 삼키며 권태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쉬지 말라는 듯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타닥, 타닥 하고 내리쳐 재촉했다.
다그치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이젠 손바닥까지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그래도 ‘제’는 아닌데······.
하는 수 없이 ‘제’로 바꿔 말하려고 했지만 권태범과 눈이 마주치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제’로 시작하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무서워······.
나는 삐죽 튀어나온 눈물에 코를 훌쩍였다.
“저, 궈, 권태범 씨.”
“제.”
“흐··· 흐흑, 정말 죄송한데요···.”
“뭐가 죄송한데.”
날카로운 인상의 권태범이 뭐가 죄송하냐고 되물었다.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이 너무 무서웠다.
아, 맞아. 권태범은 우, 우는 걸 싫어했다. 특히 남자가 울면 사내새끼가 질질 짠다고 땅에 묻어버리라는······.
너무 오래되어 가물가물했던 기억 속에 <<날카로운 턱 끝으로 사내를 가리킨 권태범은 일 초의 망설임 없이 사내를 땅에 묻으라고 지시했다.>>라는 소설 속 문구가 떠올랐다.
그 기억에 서둘러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싸늘한 적막 속에서 발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린 후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제’가 아니라 ‘젠’이에요··· 제에 니은 받침···.”
기분 나빴으려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눈동자만 굴려 힐끔 그를 올려다보자 권태범은 자신의 큰 손으로 제 입가를 한 번 쓸어내리더니 입을 열었다.
“···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