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원아. 고마 인나라 쫌!”
“엄마… 오 분만. 나 어제 야근하고 늦게 잤단 말이야.”
“이 자슥이 아직 술이 덜 깼나,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고!”
찰싹-
“아야!”
불로 지진 듯 등짝에 닿는 매서운 손길에 스프링처럼 침대에서 번쩍 튕겨져 나왔다. 화끈거리는 등짝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대체 누군데 남의 집에….
“으앗. 뭐, 뭐야! 누구세요?”
“하이고 이 미친놈. 줘 터질까 봐 머리 쓰는 기가?”
‘누구세요?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셨어요?’라고 물어보려 했지만, 통통한 입술에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툼한 할머니의 손은 한 대 맞으면 그 길로 저세상에 갈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하이고- 정신 차렸으면 고마 씻고 나와라. 오늘 할 거 많으니까, 퍼뜩 퍼뜩!”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리고 있자 할머니는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을 두어 번 내리쳤다. 곧이어 큼지막한 뒤집개가 내 얼굴 앞에 불쑥 다가왔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네, 네! 이, 일어날게요! 아니, 일어났어요!”
워씨. 저걸로 맞으면 최소 전치 2주는 기본이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뒤집개에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도망쳤다.
“유원아! 깨끗하게 잘 씻어라, 알긋나?”
“예, 예!”
문을 쾅쾅 두들기며 소리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급히 옷을 벗어 던지고 얼떨결에 대답까지 마쳤다.
달칵-
혹시나 화장실 안까지 쫓아 들어올까 봐 걱정되어 문고리를 꽉 잠갔다. 그리고 나서야 잔뜩 긴장했던 몸에 힘이 풀렸다.
“하아… 신고. 신고부터 하자. 이런 경우엔 가택침입죄? 뭐 이런 걸로 해야 하나? 이런 일은 또 처음이네….”
벗어놓은 옷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핸드폰을 침대에 놔두고 온 것 같았다.
“에휴… 어…? 근데 우리 집 화장실이 원래 이렇게 깨끗했었나?”
내가 원래 살던 자취방 화장실은 이전에 살다 나간 가족의 취향대로 알록달록한 무지개와 물고기 스티커가 욕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마주한 화장실 벽은 그냥 곳곳에 곰팡이가 조금씩 피어있을 뿐 무지개와 물고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뭐야… 나 진짜 술이 덜 깼나?”
헛것이 보이는 것 같아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씻자.”
찬물로 세수하면 정신이 들겠지 싶어 세면대로 다가가 수도꼭지 손잡이를 위로 올렸다. 찬물로 세수를 하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오늘따라 손에 닿는 피부가 매끈매끈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한 손에 얼굴 전체가 가려진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참나, 작아지긴 무슨…. 아, 이제 좀 정신이… 아아아악!”
뭐, 뭐야. 얘는 누구야 또!
빈말로도 차마 잘생겼다고 하기 어려운 원래 내 얼굴은 어디 가고, 귀엽고 잘생기고 또 어려 보이는 남자가 거울 속에 있었다.
“하, 이거 뭐야. 무슨 뷰티인사이드도 아니고 자다가 일어나니까 얼굴이 바뀌어있어!”
내가 힘껏 소리치자 거울 속 남자도 소리치고,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거울 속 남자도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을 거울 속 남자와 눈씨름을 하다 뺨을 살짝 꼬집었다.
“…하나도 안 아프네?”
말랑말랑한 볼살을 아무리 꼬집어도 아프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이건 꿈이다.
“게다가 이 얼굴이면…… 시발, 개이득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무조건 이득인 장사였다. 거울 속 남자는 귀엽고 잘생기고 게다가 어렸다.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 연예 기획사가 즐비해 있는 청담동 앞을 십 분만 걸어 다녀도 손안에 명함이 두둑하게 차 있을 거 같은 외모였다.
“이게 꿈이라면 빨리 깨면 안 되는데.”
마음이 급했다. 이 외모, 이 피지컬을 한 이상. 내 일생일대의 소원을 이뤄보고 싶었다.
얼음장 같은 물임에도 불구하고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헤실헤실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았다.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대충 수건으로 아래를 감싸며 옷장 문을 열었다. 약간 낡긴 했지만, 이 남자애가 갖고 있는 옷 중 가장 괜찮은 옷으로 골라 입었다. 내친김에 책상 위에 있는 로션까지 바르니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 광이 났다.
‘빨리 나가자!’
복권 꿈보다 귀한 꿈이 깰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근데 그 할머니, 진짜 무섭던데….’
조금 전에 마주한 그 할머니의 눈을 피해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낭비할 순 없는 일. 손에 힘을 꽉 쥐고 저금통에 있던 오만 원권 두 장을 챙겨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할머니에게 들킬까 봐, 최대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꺾어 신고 문고리를 손에 쥐었다.
“이제 됐….”
“이 자슥이, 어딜 도망가누!”
“으앗! 저기 하, 할머니…?”
아니, 그것 좀 내려놓고 말씀하시지…!
문고리가 반쯤 돌아갔을 때, 어느새 현관문 앞까지 다가온 할머니가 내 뒷덜미를 덥석 잡았다. 단단하게 잡힌 뒷덜미가 쓰라렸다. 내가 낑낑거리며 뒤돌아보자 할머니가 두꺼운 손으로 내 등을 세게 내리쳤다.
찰싹-
“오늘 할미가 바쁘다 캤나, 안 했나! 이 미꾸라지 같은 자식. 한 번만 더 도망가믄 오늘이 니 제삿날인 줄 알그라. 잉?”
“네, 넵!”
뒤집개에서 프라이팬으로 업그레이드된 장비에 도망가려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서둘러 신발을 벗고 거실로 가 할머니가 건네주는 짐을 얌전히 받아 들며 생각했다.
‘씨이… 꿈 깨기 전에 얼른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할머니와 함께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조그만 가게였다.
‘이래서 바쁘다고 하신 거였구나.’
작지만 유명한 맛집인지 오픈을 하자마자 찾아온 손님들로 가게 안이 북적거렸다.
“유원아, 2번 테이블에 계란말이 하나!”
“네!”
뻐근한 팔뚝을 주무르며 음식을 이리저리 나르기 바빴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꿈이었고, 또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알지도 못하는 가게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하아… 여기서 어떻게 잘생긴 남자를 찾을 수 있겠냐고. 강남을 가야 하는데, 강남을.”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눈은 짝짝이에, 콧구멍은 오백 원짜리만 하고, 입은 10cm 정도 마중 나와 있는 얼굴들뿐이었다.
“어디 잘생긴 손님은 안 오려나….”
“할멈! 저, 저희 왔어요!”
그때, 식당 문이 활짝 열리며 그 사이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분명 해는 이미 져버린 지 오래였고 깜깜한 밤하늘에 별이 수 놓인 저녁이었지만, 이건 착각이 아니라 정말 찐이다.
“저 썅것이, 또 오고 쳐 지랄이네!”
“하하… 아, 우리 할마시 욕이 참 맛깔져. 이, 이러니까 다른 데를 못 가죠.”
“염병! 얼른 처먹고 집에 디비 들어가기나 해! 저 썩을 것들. 쯧.”
정확히는 저, 말을 엄청 더듬는 남자의 뒤에 서 있는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한테서 말이다.
“형님. 이쪽에 앉으시죠! 여, 여기가 저희가 자주 오는 맛집입니다.”
무섭게 생긴 얼굴에서 삑사리가 나오자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급히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삼켰다.
“어, 그래.”
어우야, 그 와중에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끝내주게 섹시했다. 사람 자체가 귀티가 줄줄 흐르다 못해 그가 걷는 자리마다 뚝뚝 떨어졌다.
“한 잔 받으시죠.”
하아… 소주잔을 드는 손가락조차 잘생겼다.
‘저 사람이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목 뒤로 넘어가며 시선이 계속해서 남자를 쫓았다. 저 남자는 그동안 내가 찾던 이상형에 가까웠다.
‘아니지, 가까운 게 뭐야. 완전히 이상형에 부합하는 외모지! 그래. 내 꿈인데 내 이상형이 안 나온다는 게 이상했어.’
그나저나 어떻게 꼬셔야 되지? 잘생긴 남자랑 그거 하는 꿈이 아니라 개망신당하는 꿈이면 어떡해….
아니야. 원래 얼굴이었으면 몰라도 지금 상태면 얼굴 오케이, 피지컬 오케이, 거기에 내 성격까지 더하면 완전 오케이지! ……근데 꼬시는 법을 모르겠네.
“끄응…. 남자는 어떻게 꼬시는 거지?”
입술을 잘근거리며 테이블에 앉아 콩나물 대가리를 뚝뚝 떼어냈다. 그러다 생각에 생각을 더한 고민 끝에 우선 저 섹시다이너마이트 앞에 앉은 남자부터 떼어놓기로 결론을 내렸다.
“흐음… 뭐 좋은 거 없나. 오, 여기 있다.”
창고로 쓰이는 방을 뒤져보니 각종 상비약이 들어있는 약상자와 함께 그 안에서 변비약을 찾을 수 있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제 꿈이니까 제 마음대로 할게요. 제가 좀 많이 급해서.”
변비약을 흔들며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긴 왜 또 들어왔누?”
“라면 좀 끓이려고요.”
“가서 앉아 있으라. 할미가 끓여줄게.”
할머니는 내심 오늘 종일 부려 먹어서 미안한지 투박한 손으로 나를 밀어내며 말했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나는 주머니 속에 숨겨둔 변비약을 떠올리며 할머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 할머니가!”
“이잉…?”
“더 고생하셨잖아요. 아, 앉아 계세요….”
어른한테 거짓말하는 게 죄송스러워 우물쭈물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시다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으셨다. 연속극 재방송에 빠져든 할머니의 시선을 피해 서둘러 가스 불을 켰다.
“파송송. 계란탁. 고추 듬뿍.”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고 라면은 빠르게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아까부터 섹시다이너마이트의 테이블을 주시한 결과, 남자는 매운 걸 잘 못 먹는 거 같았다. 콧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는 상대적으로 매운 걸 아주 좋아하는 거 같았고.
나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주머니에 숨겨두었던 변비약을 꺼내 끓는 라면에 솔솔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