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 번만 연락하라고 할 걸 그랬나.’
나는 좀 후회했다. 대호는 늘 그랬지만, 오늘도 내 말을 너무, 잘 들었다. 그는 환승지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내가 운전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전화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 전자기기는…….
결국 비행기 승무원이 제지를 할 정도였다. 대호 너 진짜. 나는 오늘따라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를 타박했다.
“승무원 괴롭히지 말고 얼른 끊어.”
―……누군지도 모르는 승무원을 걱정 하는 거야, 지금?
‘이 녀석이.’
“네가 구박 받는 게 싫어서 말하는 거야.”
―……알겠어. 도착하면 또 연락할게.
“그래.”
그가 탄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길고 긴 전화 통화는 끝날 수 있었다. 대호의 전화 상대를 해주느라 맥이 빠진 채로 집에 도착한 나는 침대에서 잠시 잠들었다. 어차피 카페 알바는 저녁 시간대여서, 잘 수 있는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맞춰둔 알람에 깨어서 일어났을 때에는, 환승지에 도착한 대호의 부재중 연락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메세지를 잔뜩 남겨 둔 채로.
[자?]
[어제 비와서 피곤할 테니까 푹 자.]
[한국 도착해서 다시 연락할게.]
“……갔구나.”
메시지를 보낸 시간에 비해 지금은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지금쯤 한국으로 날아가는 하늘에 있겠지?’
나는 메세지를 보다가 피식 웃으면서 파트타임 나갈 준비를 했다.
그날 떠난 대호의 빈자리를 채워 주기라도 하듯이, 작은 마을에선 보기 어려운 한국인들이 내가 일하는 카페에 손님으로 왔다. 그리고 이국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사람도 왔다.
유난히 내 시선을 잡아끄는, 파란 눈을 가진 사람.
“……가하, 너.”
저 푸른 하늘의 색깔을 가진 사람이 왔다.
나는 이 사람을 전혀 모르겠는데, 스스럼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로 나를 아는 모양이었다. 저 고급 양복을 모델처럼 입은 사람과 나는 별로 연이 없을 게 분명한데.
어떻게 나를 아는 걸까.
‘내가 이름표를 하고 있었던가?’
나는 빈 가슴팍을 보다가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닌데, 내 이름을 알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러면,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마치 오늘 꾼 꿈처럼, 늘 생각해 왔던 질문이 내 마음 속에 떠올랐다.
“아, 진짜 저 아시나 보다. 그거 제 이름 맞거든요. 그…… 제가 예전에 사고가 좀 나서 기억이 좀 없어서요.”
나와 무슨 사이였을까.
가연이와 같이 가족이었을까, 아니면 대호와 같이 친구였을까.
아니면…….
“……너 지금…….”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은,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근데, 놀란 얼굴도 참 잘생겼다.’
충격이긴 하겠다. 나도 그 당시에는 내 상황이 전혀 믿기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내 말을 듣자마자 말을 잇지 못하며 살짝 헝클어진 밀 빛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 말 때문인지 그의 피곤한 낯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마치,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괜히, 내가 그에게 큰 충격을 준 가해자 같아서 이 잘생긴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좀 들었다. 나는 우선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잘 몰랐어요. 죄송해요.”
“…….”
바닥 타일 위에서 까맣게 윤이 나는 그의 구두를 보고서 고개를 쳐든 나는, 그의 붉은 입술이 하얀 이에 잘근잘근 씹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니,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내 심장이 어딘가 간지러웠다. 비 오는 날처럼, 뻐근하게 죄여 들어왔다.
‘뭐지?’
나는 셔츠의 가슴팍을 손으로 더듬다 말고.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그 파란 눈에 나를 담았다. 푸른 바다와 같이 빠져 들 것 같은 깊이를 가지고 하늘과 같이 파란 그 눈의 색깔.
그게 얼핏, 내가 아침나절까지 여운에서 쉬이 헤어 나오지 못하던 그, 꿈속의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하늘을 담은 사람.
‘그러네, 어딘가 닮았다.’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슬픈 목소리.
‘좀 더 크게 들으면 확실하게 알 것 같기도 하고.’
긴장이 도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입술을 뗐다.
“저기, 그쪽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내 앞의 사람은, 분명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내 이목을 끄는 게 있었다. 잘생긴 것도 한 몫 했지만, 그게 그냥 예쁘다, 라고 말하기엔 좀 부족했다. 마치 어디 잡지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이국적이고 오묘한 생김새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람이 우뚝 서 있으니 괜한 위압감이 느껴져서 그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 진하고 푸른 눈 때문일지.
“이름을 알면, 저 기억이 날지도……. 아닌가?”
그래서 알고 싶었다.
꿈속에서 아무리 물어봐도 알 수 없었던, 그 사람을 닮은 사람의 이름을.
의문 섞인 내 말에 그가 푸른 핏줄이 서린 눈꺼풀을 한 번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 아래 붉은 입술이 처연하게 소리를 내었다.
“……주현.”
「가하.」
꿈결에서 나를 희미하게 부르던 그 목소리와…….
아,
“주현.”
「가하.」
“……아.”
꿈결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확연하게 겹쳐지며, 나를 꿰뚫어 버리는 기시감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었다.
‘그 꿈, 진짜……였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있었구나.
“기억, 나?”
내 앞에 있는 잘생긴 남자가 파란 눈을 안쓰럽게 떨면서 내게 다가왔다. 그의 비틀대는 걸음걸이에 걸린 카페의 의자는 내가 매일 같이 청소하는 타일 바닥에 긁혀서 기분 나쁘게 끽끽대는 소리를 내었다.
“가하. 나야…… 주현.”
“어…… 아니, 그.”
내 이름을 확실하게 부르자 나의 짐작은 더욱 확고하게 굳었다. 그 꿈의 사람. ‘주현’ 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흥분감이 서려 있는 얼굴로 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마 내가 가진 기억과, 그가 원하는 기억이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조각조각 난 유리 파편 같은 꿈은, 온전하지 못했다.
누구의 목소리인줄도, 누구를 뜻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로 꾸고 마는 꿈이었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고 마는 그런 단순한 꿈.
“내가, 내가……. 잘못했어. 응? 이제는 가지마. 내가, 잘못했어…….”
그의 파란 눈에 차오르는 투명한 눈물은 홍채의 색깔을 타고 시퍼렇게 반짝거렸다. 마치, 빙하가 녹으면 저런 것이 맺힐까 싶을 정도의 시린 색깔 때문인지, 가슴속 내 마음 언저리마저 시리게 만들었다. 거기다 대고 나는, 당신을 전혀 모른다고, 당신과 아무런 기억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이 끝맺어지지 못했다.
“……당신이 나오는 꿈을 꿨어요.”
“내가…… 가하의 꿈에 나와?”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천천히 설명했다. 그냥, 입이 열려서 그에게 말을 전달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언제나 당신이 나오는 꿈을 꿨어요.”
“……가하.”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똑같다. 참.
“당신은 꿈에서 그렇게, 내 이름을 불러요.”
“…….”
“궁금해서 찾고 싶었는데, 하지만 당신 얼굴도, 무엇도 하나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고 있었어요. 아, 한 가지 색깔 보이는 것만 빼고.”
“……색깔?”
“……파란색이, 보여요.”
“…….”
당신을 닮은 파란색. 아니, 닮았다는 소리는 좀 그런가? 당신인 것 같으니. 나는 살며시 웃었다. 매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이야.
“당신과 같은 파란색이 보여요.”
“……미안해.”
앞에 있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그는 갑자기 사과를 하면서 내게 손을 뻗었다.
‘미안……하다고?’
“미안해, 가하.”
연신 용서를 구하는 말과 함께 그의 커다란 손이 내게 뻗쳐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싫, 어요.”
그걸 포착한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확 뜨였다가 이윽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눈알 가득하게 채워 놓은 눈물이 맑은 구슬처럼 뚝, 뚝, 흘렀다. 나는 왜인지는 몰라도 나보다 덩치가 크면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다들 장난을 걸다가도 무안해 할 정도였다. 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 죄송해요. 덩치 큰 사람이 가까이 오면 제가 잘 놀라거든요.”
“……미안해.”
내 말을 듣고 나서도 그의 태도는 바뀔 줄을 몰랐다. 그 증거로, 그의 손이 덜덜 떨리다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정말로, 난 아무렇지 않은데.’
그의 사과가 진실 되고 말고를 떠나서, 내게 사과를 한다고 해도 전해져 오는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무엇을 내게 했는지, 어떻게 함께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사과는 그저 내 눈앞에서 맴돌다 훅, 흩어지는 바람 같았다. 몇 번을 반복해도, 닿지 않을 말이었다.
“그리고……. 제가 말 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사과하시는 걸 보면 예전에 저한테 뭔가 잘못을 하셨나 봐요.”
“…….”
“근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기억이 없어서요…….”
다만, 그렇게 부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진동으로 내 마음이 요동쳤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바로 눈앞에서 이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플 것 같다. 그 증거로, 내 심장이 비가 오지 않는 이 순간 계속 욱신대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나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은 듣고 싶게 만들었다. 꿈결에서나 겨우 볼 수 있었던 저 이색의 눈이 내 마음과, 눈, 그리고 손을 움직였다.
“무슨 일인지 설명을 좀 듣고 싶은데, 지금은 제가 일하는 중이라서요.”
“……응.”
나는 테이블에 있던 티슈 갑에서 티슈를 한 움큼 뽑아서 그에게 건넸다. 그는 턱에 아롱지는 눈물을 내가 건네준 휴지로 훔쳤다. 나보다 한참은 큰 사람이, 어딘가 엄마를 놓치고 길을 잃은 애와 같이 보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손으로 휴지를 쥔, 저 하얀 손을 잡아주고 싶게 했다.
‘왜, 그러지…….’
나에게 그는 남인데. 꿈의 사람과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정말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는데…….
참, 이상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우리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에게 이토록 끌림을 느끼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였다.
나는 가만히 서 있던 자리에서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다가 그에게 짧게 권유했다. 아직 일이 끝나기까지 2시간이 남았다.
“저기, 두 시간만 기다려 줄래요? 그때 저 일 끝나면, 우리 같이 이야기 좀 해요.”
“……계속 기다릴 수 있어.”
“잘 됐네요, 그럼. 뭐라도 좀 마시고 있을래요? 제가 낼게요. 앉아 있어요.”
그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내 말이 끝나자마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의자에 앉았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은근히 내 눈에 걸렸다. 지금도, 나를 빤히 그 파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잇자국이 살짝 보이는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 하며. 저러다 저 고운 입술 찢어지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다.
“……커피.”
‘커피…….’
나는 그의 주문을 듣고 받아 적으려다 말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파리한 낯을 가진 게, 커피를 마시면 안 될 사람처럼 보였다.
‘피곤할 때 커피 마시면 더 안 좋은데.’
“저녁인데…… 차 마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간단한 식사도 있어요.”
내 말에 그는 눈물을 닦은 휴지를 손 안에서 구기다 말고 픽 웃었다. 짧은 순간의 미소가 다시 눈을 잡았다. 가슴 언저리가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정말, 우리는 아는 사이였던 걸까.’
“왜……. 웃어요?”
그의 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내 걱정을 해 주는 게, 참 가하답다 싶어서.”
“……이야기 듣기 전에 당신이 죽으면 안 되잖아요.”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간단한 말조차 고마워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알고 보니 뭐 부모님의 원수라던지, 그런 건가?’
농담 섞인 내 말에 그가 작게 웃던 입술을 확 끌어당겨서 웃었다. 웃음을 참는 것인지 입술을 깨무는 모습에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헛기침을 하면서 웃음을 갈무리한 후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커피 줘. 그거면 돼.”
“……마시고 죽으면 안 돼요. 금방 올게요.”
“……응.”
내 농담에 그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고 머리를 괸 채로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다시 감탄했다.
세상은 진짜 불공평하다. 울고 나서 웃으면 추레한 게 보통의 사람인데, 그는 그 모습조차 무슨 영화나 잡지속의 모습처럼 빛이 났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와는 영 연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어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기억이 없던 내가 대호를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오늘 만난 사람은 더욱이 그랬다.
‘아, 그러고 보니…… 차라리 대호랑, 뭔가 연이 있을 법한데. 둘 다 어딘가 분위기도 좀 비슷하고.’
음료와 음식들이 부지런한 움직임 아래 돌아가는 카운터로 가서 그가 주문한 커피를 내리려고 커피머신 앞에 섰다가, 그의 창백한 낯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차나 갖다 주자.”
피곤하기 짝이 없는 얼굴은 카페인을 들이켰다가는 아무리 봐도 오늘 내일 할 것만 같았다. 아무리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이어도……. 어딘가, 한 번 툭 건들면 금방 무너지고 말 모래성과 같이 연약해 보인다고 하나. 이상한 생각이라는 건 아는데 그랬다.
‘지금도…….’
카운터 너머에 그가 앉아 있는 자리를 흘끔 흘겨보았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향해서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흔들어 주다 말고, 정신을 차리고서 컵에다 뜨거운 물을 받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근데, 우리 말 되게 잘하네.”
나는 컵 안에 받은 뜨거운 물이 조금 식기를 기다렸다.
‘생긴 걸 보면 분명 외국인이겠지? 누구한테 배운 걸까. 어느 나라 사람일까. 유난히 곧게 쭉쭉 뻗은 생김새와 키를 보아하니 저기 북쪽 사람 같은데…….’
뜨거운 물 너머로 올라오는 엷은 김 사이로 내 얼굴이 비쳤다. 거기다 그의 얼굴을 겹쳐 보며 작게 추측했다.
‘근데 이름도 그렇고, 어딘가 완벽한 유럽 사람은 아닌 것 같지. 도대체 난 저런 사람을 어디서 만났을까. 한국에서? 아니면 영국에 오기 전에 어디선가?’
그와 만나고, 얼마 없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궁금증이 잔뜩 만들어져 내 마음 속을 더 크게 뒤흔들었다.
‘얼른, 파트타임 시간이 지나서 같이 말하면 좋겠다.’
나는 티백이 쌓여 있는 꾸러미를 뒤적거리며 찾았다. 뭐가, 피곤에 좋다고 들었던 게……. 나는 색깔로 구분되는 티백을 하나하나 넘겨보다가, 노란색 바탕의 하얀 꽃이 그려진 티백을 집었다.
“이거다.”
티백을 찢어서 넣자마자 은은한 금빛 물결이 뜨거운 물 안에서 퍼뜨려졌다. 그걸 보면서 나는 아까 들었던 그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주현…….’
주현. 불러 보아도 머릿속에서는 솔직히 아무런, 무엇도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 안에서 부드럽게 굴려지듯이 나오는 이름은 뭔가, 익숙했다.
‘주현, 주현…….’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마음속에서는 왜인지 참 익숙하다고 느껴졌다.
‘꿈, 때문인가.’
그 익숙함에 잠겨서 차가 우러나오는 동안 나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계속 반복해서 불러 보았다. 그러다 어느 정도 우러나온 찻잔을 확인하고서 그에게 가져갔다. 테이블에 팔을 대고 기대어 있던 그가 나를 계속 보고 있다가 다가오는 모습에 자세를 바로 했다.
방금까지도 삐딱했던 자세는 없고 긴 다리를 한 번 꼬고서, 무릎에 두 손을 올려 둔 후에 허리를 세운 채로, 나를 향해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왔어?”
“네. 여기.”
그는 나를 보고 반색하다가, 내가 내려 둔 컵을 보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커피가 아닌데.”
“아. 그게.”
그 모습에 나는 다시 가져와야 하나, 순간 고민했다. 아까는 몰랐는데 저렇게 불만이 있는 얼굴을 보니 언뜻 예민해 보이는 구석이 은근히 있었다. 다시 나를 꿰뚫어 볼 듯이 강렬하게 쳐다보는 파란 눈을 보다가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 차가 피곤에 좋대요. 피곤한데 커피 마시면 더 힘들 거 같아서요.”
“…….”
말없이 가만히 나를 보다가, 잘 우러나온 찻잔을 바라보는 그를 두고 나는 다시 갈등했다. 싫은가, 너무 내 멋대로 했나.
‘근데 정말로, 힘들어 보여서……. 그랬는데.’
그래도 살짝 신경 쓰여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저, 싫으시면 커피로 다시 가져올까요?”
그때, 나를 부르는 카페 매니저의 목소리가 천장을 타고 울렸다.
『가하, 밖에 동양 손님들이 부른다. 가 봐.』
『아 네, 금방 갈게요.』
노천에 앉은 한국 손님들이 뭔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내 앞에 있는 남자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아, 정말 괜찮아요? 싫으면 바로…….”
“응 괜찮아, 가 봐. 손님 부르는 거 같은데.”
아까 전의 가시 돋은 예민한 구석은 어디가고 어딘가 누그러진 얼굴은 예쁜, 파란 눈을 휘었다. 내 눈 안쪽까지 시리도록 만들던 그 눈 색깔과 다르게, 입가에는 따뜻함이 서린 미소가 보였다.
아주, 상반되는 그런……. 온도.
마치 꿈에서 나를 안아 주던 그 따뜻한 품처럼.
그는 찻잔의 가느다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난 여기 있을게.”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 대답에 나는 조금 안심을 했다.
‘본인이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내가 등을 돌려서 다시 밖으로 가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
“고마워.”
그에 내 몸은 가다 말고 다시 그에게로 돌려졌다. 딱히, 고마울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가진 내 잃어버린 기억을 들을 수 있다면.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아뇨. 당연한…….일인데요.”
“그런가.”
그가 눈을 살짝 내리깔고 차를 마시는 모습에,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여기서 서버로 일하면서 수많은 손님들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봐 왔건만, 이상하게 이 순간 긴장이 되었다.
『가하? 빨리 주문 받아 줘.』
『아, 네. 미안해요. 지금 가요.』
그러다가 내 긴장을 부수고 재촉하는 매니저의 목소리에 다시 뛰쳐나갔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이 마치는 때를 맞춰서 급격한 해일처럼 몰려드는 인파에 그에게 신경 쓸 틈조차도 없었다. 간신히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상태로 앞치마를 벗으면서 그가 있던 자리에 돌아가자.
“……자요?”
“…….”
그는 아까 전 자세를 유지한 채, 두 팔을 팔짱 끼고서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서 깨워 보려다가 말았다.
‘정말 자는 건가? 아니면 어디 아픈가? 아픈 거면 앰뷸런스 불러야 하나…….’
확신이 없는 나는, 대신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엷은 갈색의 속눈썹이 촘촘히 드리워진 분홍빛 뺨 밑에서 들려오는 색색대는 숨소리를 듣고 나는 작게 안심했다.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진짜 자는 모양이었다. 참 다행이긴 한데…….
“……이봐요.”
어깨를 슬슬 밀고, 손을 잡고 흔들어도 그는 깨어나지 않는 게 문제였다.
‘무슨 수면제를 먹은 것도 아니고.’
나는 대충 구겨 접은 앞치마를 한쪽 어깨에 둘러멘 백팩에다가 챙기고, 그의 무게를 대충 눈으로 가늠했다. 이래가지곤, 이 사람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고 데려다 줄 수도 없는데. 나는 마주한 난감함에 한 번 한숨을 쉬고 말았다.
‘뭐야, 이 사람.’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요.”
“…….”
이걸 어쩐다.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사람에게 돌아오지 않는 말에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를 떠올렸다.
‘우선은, 우리 집에 데려가야……겠지?’
아까 울면서 미안하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이제는 잠을 달게 자는 모습에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호가 자리를 비워서 다행인가. 나는 집에 있는 커다란 킹 사이즈 침대를 생각하면서 그의 팔을 들고 내 어깨에 두르며 허탈하게 웃었다. 작은 집은 두 사람이 살기에도 빠듯한 크기였으니, 만약 대호가 집에 있었더라면 이 사람은 소파에서…….
‘아니, 덩치를 보아하니 우리 소파가 무너질지도 몰라.’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피식피식 웃으며 그의 팔을 내 어깨에 다시 고쳐서 멨다. 가만 보니까, 이 사람 꽤 부자 같은데.
“……일어나면 다 청구할 거예요.”
나는 그렇게 그를 내 자동차 쪽으로 낑낑대며 질질 끌고 갔다.
해치백 스타일의 내 자동차 뒷좌석에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꼭꼭 매 준 다음에 나는 구슬땀이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내 몸을 덮치고도 남을 덩치의 사내를 어찌 어찌 끌고 오는 길은 짧지만 험한 길이었다. 나는 주차장으로 오는 길에 이미 지치고도 남아서 후, 한숨을 한번 쉰 후에 문을 탁 닫았다.
특이하게도, 그런 소음과 내 부축에도 그는 일어나지를 못했다.
‘겉보기에는 별 이상은 없어 보이긴 하는데. 병원, 안 가도 괜찮겠지?’
나는 운전석으로 가서 시동을 키고, 백미러로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렇지만 가게에서 자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기도 좀, 그랬다.
게다가 한국말을 제법 잘하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나를 잘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괜히 꿈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나는 마음속에 작은 혼란스러운 파동을 애써 갈무리했다.
손에 익어 있는 운전대를 돌리고 후진을 하면서 그가 앉아 있는 뒷좌석 너머를 보면서 주차를 뺐다.
“……일어나기만 해 봐라.”
‘당신, 엄청난 부자여야 할 거야. 내가 엄청나게 청구할 테니까.’
나는 진담 반, 농담 반 섞인 말을 속으로 투덜거리고 차의 헤드라이트로 어둑한 길을 밝히며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당분간 나 혼자 지낼 줄 알았던 집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