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대호는 그동안 삼라 밑에서 일했던 것을 한껏 살려서 각종 비리와 비자금 관련 이슈를 터뜨렸다. 보통이라면 우리 쪽 검사들에게 막혔을 일들이 어떻게 된 일인지 황대호와 비슷한 성격의 검사에게 자료가 넘어가 버렸다. 덕분에 우리 집은 언론의 포화를 받으며 곤욕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나잇대 치고 무른 성격이라고 우습게 봤던 것과 달리, 어떤 면에서 황대호는 참 주도면밀했다. 나는 가만히 혼자서 본채 거실의 TV 라이브 속보를 보고 있었다.
―송시윤 회장은 오늘 아침 10시 부터 서울 중앙 지방 검찰청에 출석하며 기자들에게…….
덕분에 ‘삼라’ 라는 이름이 조간신문부터 해서 매일같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화려하게 수놓을 정도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집안이 뒤집어질 정도로 결정적인 방해물을 세우고 간 덕에, 결국 가하를 쫓는 일이 자연히 늦어졌다.
이런 일은 하루 이틀로 바로 결정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금치산자로 살았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나도 정상적인 면모를 갖추고 임원 계열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 자리를 비운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참, 상황이 좋지가 않았다. 가하를 다시 만난 이후 운도, 시간도, 기회도 언제나 나를 기다려 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게서 등을 돌리기라도 한듯이 나쁜 일들이 한꺼번에 터지고 있었다. TV속에서는 젊은 기자 하나가 검찰청 로비로 걸어가는 아버지에게 뛰어들어서 기어코 질문을 내밀었다.
―지금 부인 되시는 조아현 EC 홀딩스 대표가 페이퍼 컴퍼니를 앞세워 사내 유보금을 거짓 투자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 한 말씀이라도?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습니다.
나는 늘 번지르르한 얼굴은 한 아버지가 간밤에 십년은 더 늙어서 핼쑥한 얼굴로 검찰청에 출석한 모습을 TV로 보면서 머리를 짚었다. 욕심이 많은 여자와 멍청한 아버지는 너무 많은 꼬리를 만들었다. 영원한 비밀은 없지만, 그럴듯하게 포장을 했어야지. 저기 들어가서 어떻게 말이라도 잘하려나. 나는 내 몫으로 물려받은 지분들을 적절할 때를 보아서 잘 분리시킬 생각만 하면서 대충 머릿속으로 구도를 세웠다.
악재지만, 어떻게 보면 기회였다.
멍청한 아버지와 그에게 기생하고 있는 욕심쟁이 여자를 날려 보낼 그런 기회. 저 두 명을 저대로 오래 둘 생각은 아니었지만, 내가 만든 일이 아닌 일로 처리하게 되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본채의 거실에 위치한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내 옆에 다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박 비서가 넌지시 알렸다.
“……도련님, 여권 기록 추적 들어갔습니다.”
“……아, 그래.”
나는 기자들의 프레스 라인을 헤치고 검찰청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으로 TV를 끄면서 박 비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프린트 해 온 보고서를 건네면서 짧게 설명했다. 나는 급하게 보고서를 받아서 얼른 이름을 찾았다. 유, 가하…….
“생사 여부에 대해서는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날, 영국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주기적으로 유럽 안에서 거주지를 옮겨 다니는 모양입니다. 유럽 내 지사 인력들에게도 연락을 취했으니 다시 보고 들어오는 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건네받은 보고서에는 세 사람이 그동안 옮겨 다닌 국가와 도시, 주소, 그리고 거주 기간이 적혀 있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 어느 국가에도 3주 이상을 머무르지를 않았다. 마치 우리가 추적을 하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재지를 파악하자마자 바로 떠나 버리는 이동 날짜에 나는 쓰게 웃었다.
다행이다. 여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살아 있다는 의미니. 도용을 당하지 않았다면.
짧은 시간에 짜낸 도주 계획치고는 제법 탄탄했다. 황대호 네 가족이 우리 집안에서 일한 기간이 좀 되었으니, 어떻게든 정보를 얻고 있는 건가.
나는 안 그래도 어수선한 회사 분위기에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끄나풀을 걸러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보고서를 넘겼다.
“…….”
뒤편에는 몰래 찍어 둔 것인지 좋지 않은 화질의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노이즈로 인해서 희미하게 보이는 그 아이의 얼굴 사진을 내 흉터진 손끝으로 찬찬히 더듬었다.
아, 살아 있어. 죽지 않고……. 정말 살아 있구나.
까만 후드 사이로 얼핏 보이는 하얀 얼굴은 누군가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행방을 찾지 못했던 그동안 달은 불안을 조금 거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건강, 한 건가.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우선,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더 이상 나는 너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거지.
너는 다행히 잘, 있는데. 혹시 어디라도 다친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는 단절에 불안해하는 내게 박 비서는 서류를 훑다가 놓친 부분을 덧붙였다.
“아, 비 오는 날에는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의 파동이 울리지 않는 텅 빈 가슴을 버릇처럼 손으로 문지르며 조그마한 안심을 지우고 다시 불안에 흔들렸다. 다른 날도 아니고 비 오는 날. 그건, 네가 나를 기억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그래. 그래도, 계속 건강 관련해서 보고를 받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이 각인이 끊기던 그 비 오는 날……. 나는 다시 떠오르는 지난날의 절망스러운 감각에 눈을 꾹 감았다.
그때는 정말로 가하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다. 가하를 황대호가 데려가는 것을 보았다는 조아현의 말이 아니었다면 바로 죽고 싶을 정도로 믿을 수가 없는 차단이었다. 조각조각난 행방을 모을 때까지 수 없는 밤들이 풀리지 않는 고민과 불안으로 흔들리면서 버텼지만 이미 쌓아 온 불안은 이런 종이와 사진 하나로 쉽사리 가라앉을 것이 아니었다. 내가 손에 들어간 힘을 다시 풀어 내리자 박 비서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가연 씨는 영국에서 프랑스로 이동한 후, 같은 곳에서 계속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
나는 3명의 인원이 각각 적혀 있는 체류 국가를 살피다가 맨 마지막에 있던 유가연의 행적을 훑었다. 영국에서 프랑스 파리로 거주한 이후로 잠깐씩 움직이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 파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첼로 때문인가. 가하는 동생을 무척 아끼고 있으니, 황대호도 그건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지원해 줄 게 뻔했다. 어쩌면, 가까이 있을 수도 있고.
“예. 주변 유학생의 말에 의하면, 파리 국립 음악원에서 수업을 받는 중이라고 합니다. 유학생들과 큰 교류 없이 조용히 지내는 듯합니다.”
“……그래.”
“……연락을 넣어 볼까요.”
나는 고민했다. 과연, 연락을 넣는 게 좋은 선택일까. 그러면서도, 내심 그녀가 가하의 행방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또 흔들렸다. 만약, 그녀를 만난다면 그때와 같이, 그녀는 가하를 붙잡는 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과연 우리가, 내가 찾아간다고 그녀가 행방을 알려 줄 지도 미지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직접 내 눈으로 가하를 보고 싶었다. 누구 눈이나 입이 아닌 오로지 내 감각으로. 그렇지 않고서야 그 애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도 믿기지가 않을 것만 같았다. 지금에 내게는 전해지는 모든 것이 모래로 한꺼풀 덮인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 곧, 거주지를 옮길 시기가 된 것 같은데.”
“예.”
그토록 나는, 가하가 필요했다.
고통 속에 살 때는 그저 그 아이의 행방을 쫒아 사는 것이 의미였다. 하지만 나와의 각인을 끊기 위해서 그 애가 죽었다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날에도 그 애를 찾았지만…….
고요한 나날에 홀로 남겨진 것을 참아내는 게, 이상하게 더 힘들었다.
나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파동의 흔적을 다시 쫓으며 가슴팍을 손으로 슬슬 더듬었다. 우습게도 그날 이후로, 가하가 옆에서 사라지고 나서 내게는 폭주도 무엇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지만 도리어 내게는 그게 더 잔인한 절단같이 느껴졌다.
나는 다 읽은 보고서를 앉은 소파 앞의 테이블에 두고 지시했다.
“……거주지 옮기고 나서 보고 들어오면, 바로 항공권 준비해.”
마치, 그 애와 나 사이에 아무런 연결도 없다는 것을 도리어 반증하는 것 같아서 그게 나를 점점 좀먹어 갔다.
아니야, 살아 있어. 살아 있어, 그래야 해…….
나는 맨손으로 얼얼한 피곤이 가득한 얼굴을 문지르면서 불길함을 떨쳤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갈 테니까. 그 전까지 최대한 스케줄 정리해 두고.”
“알겠습니다.”
“황대호 쪽, 사람이 계속 추적을 흘리는 것 같으니 그것도 좀 알아 봐.”
“예. 안 그래도 계속 알아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잘 처리해 보겠습니다.”
어떻게든, 나는 그 애를 되찾고 싶었다. 어디까지, 황대호가 내 일에 대해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전부 다 말했다고 해도, 나는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그 애의 부모는 가하를 욕심으로 이용하려던 추악함 그 자체였고,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가하를 구해 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다른 사람이 주는 고통으로 부터 건져내어 내 곁에 두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던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애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기보다는,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내가 가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어떤 사람보다도……. 아껴 주고 싶었다.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 주고 싶었다. 그런 것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무엇으로 남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치 마지막에 나를 탓하는 황대호의 마지막 말과 그날 보았던 가하의 무심한 그 얼굴에 나는 사념에 빠졌다.
나는, 그 애에게……. 나쁜 짓을 한 걸까. 하지만 소중한 것을 다른 사람이 탐내는 것을 어느 누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이번에도 눈앞에서 빼앗기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런 사이가 아닌 것도 싫었다.
차라리, 내 곁에 남아서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사는 게 낫다.
박 비서는 말을 다 끝냈는지 소파에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회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보고 받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예.”
나도, TV로 언론 확인만 하러 본채에 온 것이라 차고로 향하는 박 비서와 정원에서 갈라지기 전까지 걸음을 같이 했다. 그는 본채로 가는 정원석을 밟는 내게 살짝 몸을 돌리다 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간밤에,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아 어. 잘…… 잤어.”
나는 계속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가 박 비서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되찾으며 대충 대답했다. 그러자 박 비서의 눈에는 옅은 불신이 서리며 고개를 저었다.
“……비행 시간이 제법 길 것 같으니, 그동안 수면은 잘 챙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맹 박사님이, 요새 가이딩 수치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걱정을…….”
그는 내가 그날 이후로 폭주가 아니라, 오히려 가이딩 출력이 낮아지는 것에 대해 신경이 쓰이는 듯, 우려를 표했다. 각인이 이상하게 단절되어서 그런 것인지 이제는 폭주가 아니라 오히려 힘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힘이 줄어들고 있다는 이 결과는, 내 몸이 무척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말, 상대가 죽어서 각인이 끊긴 경우에 일어나는 결과이자 반응.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래서 처음에는, 가하가 정말 각인을 끊기 위해서 스스로 죽은 것인지 절망했었지만 이내 살아 있다는 보고를 듣고 겨우겨우 정신을 잡을 수 있었다. 아무튼, 서로가 살아 있어서 그런가 나는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아직까지는 큰, 아픔이나 고통은 없었다. 그저, 이런 저런 일들로 생각이 많아서 정신이 또렷하다 보니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뿐. 내 건성한 대답에 박 비서는 작게 한숨을 쉬고 차고로 향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
먼 별채로 돌아오는 길은 조용했다. 애초에 나만 살던 집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조아현의 검찰 구속이 될지 말지 뒤숭숭한 분위기를 풍기는 탓에 안 그래도 별로 없는 고용인들이 알아서 입을 다물고 축 늘어진 분위기를 만들었다.
나야, 시끄러운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텅 비어 있는 것은 똑같다.
나는 신발을 벗어서 마루에 발을 디디며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와 달리, 나는 몸이 어디 아픈 곳도 없었고, 일부러 모자라고 어린 척을 해야 하지 않아도 되었고, 폭주의 위험성 때문에 어디 병실과 같은 곳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되었다. 이 한 몸이 가고자 한다면 원하는 곳 어디라도 갈 수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에겐 지금과 가하 없이 살던 과거는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 자유롭지만 도리어 갇혀 있었다.
나는 복도의 코너를 돌아서, 덧문을 열고 마룻바닥에 누웠다. 등불 하나 키지 않아서 어둡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누워서 덧문의 유리창 너머로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나는 그때와 같이 혼자였고, 가하는 없었다.
오히려 그때와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사이에 이어진 무엇이 없다는 것.
“…….”
차라리 고통을 느꼈더라면, 그 애와 이어진 것이라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을까.
나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힘을 더듬었다.
혹시라도, 이 안에 그 애가 남겨 둔 것은 없을까. 내가 그 애를 안고 자는 동안, 무언가 남겨 준 것은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내 가이딩 너머를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러한 것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철저한 차단이자 절단이었다.
우리는 인파 속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고 해도, 서로의 생사는커녕 같은 곳에 존재하는지도 못 알아차릴 것이다.
“……가하.”
내 가하는, 마치 내게 원망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아무런 흔적 없이 날아가 버렸다. 나는 며칠 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뻑뻑해진 눈 위로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렇게 여지 하나 없이 도망가 버린 너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서로 이전과 같지 않을까.
내게 다시 그 인연을 걸어 주고 애정을 줄까.
차라리 나를 때리고 미워해도 좋으니, 아니, 다시 폭주를 일으키며 나를 갉아먹어도 좋으니 이러한 단절은 그만 했으면. 차라리 원하는 걸 말해 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너에게 내가 다시 무언가로 남아 있었으면 했다.
“…….”
조용한 귓가로 가만히 찌르르 우는 풀벌레의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축축하게 젖어들은 눈앞은 잔뜩 일그러진 광경을 보였다. 아릿한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면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해서든 가하를 만나서, 무슨 일을 한 것이냐고 물어봐야 한다. 죽어서나 깨질 각인을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고…….
그리고, 나를 다시 받아달라고. 이렇게는 두지 말아 달라고…….
* * *
그날 이후로, 아버지 대신 조아현이 모든 일을 뒤집어쓰고 재판에 넘겨졌고, 아버지는 당분간 자숙의 의미로 회장직을 내려 두었다. 말이 자숙이지 어떻게 보면 경영을 포기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여자 하나에 늙은 정신이 팔린 결과였다. 아버지가 물러난 경영 일선에 내가 화두로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과 같은 정신적 결함도 없었고, 인계를 받는 동안의 일처리는 잘해냈으니까. 하지만 나는 본격적인 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전문 경영인을 불러서 자리를 채워 넣고 상무이사직을 유지했다.
사소한 애정에 휘둘리던 아버지를 한심하게만 여기던 나 또한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를 어떻게든 닮았던 것 같다. 나도 그의 자식이니 당연한 일인가. 나도, 그와 같은 험한 길을 걸어가는 것을 알지만 이상하게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내가 경영이나 기업은 둘째 치고, 종잡을 새 없이 도망 다니는 가하의 행방을 다시 찾는 동안, 갖은 애를 달여 내면서 밤을 지새운 시간동안, 결국 나는 깨닫고 말았다. 그 아이가 내 곁에 없으면, 그 무엇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내 세상에 잃어버린 빛깔은 돌아올 수 없는 것을.
그리고 나는 가하가 제 동생이 있던 프랑스를 들려서 이탈리아에 비로소 둥지를 틀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항공권을 준비했다.
“상무님, 항공권 발권 완료 되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예.”
나는 박 비서에게서 표를 받고서 그와 동행하며 직원과 함께 출국장의 패스트 트랙으로 향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다니던 공항이건만, 왜인지 이때에는 기분이 좀 달랐다
그 애가, 남기고 간 일련의 사건들을 잘 정리한 후에야, 비로소 그 애를 보러 간다는 기분 때문일까. 아니면, 그 애도 지금과 같은 과정을 거치며 날아가 버렸다는 이 묘한 기분 때문일까.
어찌 되었든, 내가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그 애를 다시 놓쳤고, 그로 인한 허탈함과 허전함이 빚어내는 후회는 너무나도 늦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박 비서를 비즈니스 석으로 보내고 일등석 통로로 걸어가면서도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잘 정리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상황은 정리 되었지만 그 사이에 있는 우리의 관계가 하나도 정리 되지 못한 건 여전했기 때문이다.
그 애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찾아온 나를 보고 그 애는 무슨 얼굴을 할까. 허탈하게 웃을까, 두려워서 울어 버릴까, 아니면…….
“…….”
아니면, 마지막과 같이 내게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버린 얼굴을 할까.
나는 다시 떠오르는 그 얼굴의 잔상에 눈을 감았다. 이륙을 향하는 비행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가지만 내 안쪽의 마음은 도리어 바닥없는 곳에서 계속 떨어지고만 있었다.
차라리, 그래 차라리 우는 게 나을 것이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고 때리고 싶어 하는 게 낫다. 전에 보았던 그런 텅 빈 얼굴을 마주할 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더…….
내 마음이 아팠다. 그 갈피 없는 상상이 오히려 나를 더 괴롭게 몰아갔다. 나는 그 잔상을 떨쳐보려 눈을 감았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영리한 머리는 이런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씁쓸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시간이 좀 흘렀다고 생각할 무렵, 기내에 안내방송이 울렸다.
―오늘도 저희 한국 항공을 이용해 주신 승객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 비행기는 20분 이내에 로마 다빈치 공항으로 착륙할 예정입니다. 좌석을…….
벌써 도착인가. 어지러운 이 마음의 잔해를 간직한 채, 나는 로마 공항에 도착할 때 까지도 여전히 전전 날들과 같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비행시간을 지새웠다. 덕분에 깜빡일 때 마다 영 뻑뻑한 눈을 비비면서 착륙 전, 좌석의 창문 커버를 올렸다. 그러자 어두웠던 객실 내부에 눈이 멀어 버릴 듯 강렬한 태양의 섬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번쩍거리는 눈을 천천히 적응시켰다.
“…….”
한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이 하늘 아래, 우리는 같은 땅을 밟고 있었다.
아마 우리는 같은 색깔의 하늘을 보고 있겠지.
아침에 한국에서 출발했지만 도착한 이탈리아는 시차 덕분에 한창의 낮 시간이었다. 가하가 둥지를 틀은 곳은 소도시라 직항편이 없는지라 로마에서 환승 편을 갈아타야만 했다. 우리는 게이트 근처에 조성된 한국 항공사 라운지에서 환승 편을 기다렸다.
『스카이 팀 라운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떤 음료를 준비해 드릴까요?』
『저는 카페 라테로. 상무님은…….』
『나도.』
나는 소파에 앉고, 라운지 입구에서 집어든 영자 신문을 펼치고 짧게 대답했다. 직원은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잠시 사라졌다가 이내 고소한 커피 냄새를 풍기는 두 잔을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놓고 떠났다. 내가 미국에서 일어난 선거 로비 스캔들에 대한 기사를 대충 눈으로 훑고 있는데, 박 비서가 말을 걸었다.
“예전에, 이탈리아 자주 오셨던 것 같은데요.”
“튜린? 겨울에 스키 타러 많이 갔었지.”
나는 갓 내려진 커피를 입에 머금으면서 보던 신문을 살짝 접었다. 그러자 박 비서가 아, 하고 졸음으로 부은 눈을 연신 깜빡깜빡거렸다.
“그럼, 비센차는 처음이신가요.”
“지나가 본 적은 있어. 어머니가 여름마다 야외 오페라를 들으러 베로나에 가셨거든.”
나는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직 김이 오르고 있는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그러자 박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셨군요. 마르코 폴로 공항에 도착하면 오후 5시쯤 되니, 바로 차로 호텔까지 이동해서 저녁식사 하시면.”
“식사 챙겨 먹어. 난 먼저 나가 볼 테니까.”
“비행기 안에서 제대로 못 주무셨다고, 승무원이 전달해 줬습니다.”
“…….”
“……그렇게 핼쑥한 얼굴로 가시면 귀신으로 착각 할 것 같습니다만.”
승무원이 어쩐지 계속 서성거리더니만. 박 비서가 일러두었나. 나는 잔소리를 계속 해대는 박 비서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서 읽고 있던 신문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내게 철 지난 유머를 던진 박 비서는 살짝 한숨을 쉬고 내가 읽고 있는 신문의 귀퉁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바스락대는 소리를 내었다.
“가하 도련님 주소, 여기 적어 두었습니다.”
그에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고, 라운지 소파에 가만히 앉은 채로 나를 바라보던 박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저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얼굴에서 걱정을 지우지 못하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나는 신문 귀퉁이에 붙여진 노란 포스트잇을 집어 들고, 적힌 주소를 찬찬히 읽으며 머릿속에 외웠다. 낯선 언어의 길 이름과 숫자, 알파벳의 조화는 마치 그 애에게 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암호와도 같았다.
“……고생……했어.”
가하가 살고 있는 주소……. 화장실을 간다던 박 비서는 걷다 말고 뒤를 돌아서 내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왕 가시는 거, 조금이라도 주무세요. 그런 힘없는 얼굴이면 천년의 사랑도 도망가겠습니다.”
“…….”
그리고 떠나는 박 비서의 모습을 보다가 나는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그렇게, 엉망인가. 나는 환승 편을 타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 주소가 적힌 쪽지를 곱게 접어서 지갑에 넣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외웠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고 싶었다.
정말, 진짜로……. 만나는 건가.
막상 비현실적인 이 상황을 맞닥뜨리니 지갑을 도로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 넣는 손끝이 저릿저릿해지고 피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손목에 찬 가죽 끈의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면서 긴장으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애를 만나면 무슨 소리를 해야 할 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무탈하고, 건강하냐고, 혹은…….
“……잘못했다……고.”
나는 그 애에게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박 비서가 이내 라운지로 돌아오고, 이번에는 내가 화장실에 가서 퀭한 내 얼굴을 보고 놀란 다음, 게이트 시간에 맞추어 환승 편을 탔다. 어딘가 짜증이 서린 얼굴은 내가 봐도 가하가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웃어야지, 웃어. 나는 입 꼬리를 의식적으로 올리면서도, 가하가 사는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말을 정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입을 벌리면 그동안 머리에서 조합되지 않아 조각조각 난 헛소리가 우르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나는 박 비서가 운전하는 렌트카에 탑승해서 호텔에 도착하고, 호텔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와중에 마음이 급해져서 무작정 차 밖으로 나왔다. 행인들이 다니는 길거리로 달려가자 조수석의 창문 너머로 당황한 박 비서의 목소리가 따라 붙었다.
“상무님!”
“연락할게.”
나는 머릿속으로 외웠던 주소를 가지고, 대충 핸드폰으로 지도를 확인한 후에 발걸음을 닦달했다. 그 애를 지금 당장 만나서, 그냥 말하고 싶었다.
그냥, 내가 다 잘못했다고. 내게 돌아와 달라고. 그때, 내가 잘못했다고 했을 때, 작은 희망을 걸던 그 맑은 눈을 희망처럼 떠올리면서 저녁나절의 길거리에 부유하는 수많은 행인들을 헤치고 불편한 도보 길을 구둣발로 뛰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의 숫자를 하나 둘씩 줄여 가고, 두 사람이 나란히 다니기에도 좁은 도보 길에서 확 트인 광장으로 나왔을 무렵, 귀에는 익숙한 목소리가 걸렸다.
“와, 한국인이에요? 반가워요.”
“어머, 진짜 한국인이네. 여기서 일해요?”
“아, 네. 잠시지만……. 여행 오셨어요?”
내가 그 목소리에 이끌려서 고개를 돌리자 저녁나절 환한 가로등을 켜 둔 네모난 광장 한쪽에, 저녁 공기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노천카페가 보였다. 그 중에서도 두셋 정도 되는 한국인 여자들이 천막이 쳐진 테이블 주위로 앉아서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 내 눈에 콕 박혀들었다. 그 테이블 옆에 서서 가하가 쑥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도.
가하의 질문에 웃고 있던 한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 그만두고 친구들끼리 왔어요.”
“와, 대단하시다. 용기가 대단하세요.”
순수하게, 탄성을 지르는 가하의 모습에 나는 오는 길 내내 느꼈던 조급한 마음과 달리, 그쪽으로 쉽사리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그냥 저렇게 웃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어딘가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그런 모습이, 내가 아닌 사람에게 그런다는 게.
연신 환하게 웃고 있는 가하에게 한 여자가 괜히 짓궂게 물어보았다.
“우리 주문 안 받아 줄 거예요? 나야, 잘생긴 친구랑 계속 대화하면 좋지만.”
“아, 맞다. 주문 도와드릴게요. 정하셨어요?”
그제야 허리에 두른 까만 앞치마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허둥지둥 꺼내고 주문을 받을 준비를 하는 가하의 모습을 본 여자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 전 레모네이드 줘요.”
“저는 이거. 목테일 중에…… 요거요.”
“전 이 크래프트 비어 주세요. 근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여기는 큰 관광지도 아닌데? 여기 어디서 공부해요?”
가하는 주문을 메모지에 적다가 살짝 무안한지, 뒤통수를 긁었다. 그 사소한 행동마저도 귀여웠다, 여전히.
“아, 아뇨. 공부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아는 분이 소개시켜 줘서요. 잠시만 일하고 있어요.”
“아, 뭐 민박 스태프 이런 거?”
“네, 뭐…… 그런 거요. 주문 전달하고 올게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둘러대는 말에는 황대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애를, 데려가서 저런 일이나 시키고 있다니, 미친놈. 그렇지만 그런 것을 알리가 없는 여행자들은 오랜만에 귀여운 애를 봤다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대학생인가, 몇 살인가 궁금해 하면서.
“…….”
나에겐 저 상황이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여기서 넌 왜 다른 사람 눈요기나 하고 있는 거야. 짜증나게. 나는 노천카페의 야외 테이블을 떠나 카페 내부로 들어가는 가하를 보면서, 굳은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 가하를 뒤따라갔다. 날씨도 좋고, 밤공기가 선선하니 다들 노천 테이블에 앉아 있는지라, 카페 내부는 오히려 한산한 편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카페의 매니저 같은 사람이 느긋하게 인사했다.
『좋은 저녁입니다.』
『네, 좋은 저녁입니다.』
『빈자리 아무데나 앉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나는 주문으로 나온 음료 잔을 나르기 바쁜 가하를 가만히 보면서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일을 하느라 바쁜지 내가 왔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10여 분을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 가하는 주문으로 나온 여러 잔의 음료를 다 날랐는지, 주문을 받으러 가라는 매니저의 턱짓에 내게로 다가왔다. 그 맑은 시선이 내게로 향하는 것에 나는 느긋하게 앉은 자세를, 척추를 곧추 세우고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잘 고쳐 앉았다. 입안이 바짝 말라오는 기분도 들어서, 작게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정리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가하는 하얀 셔츠와 까만 바지, 그리고 허리에 웨이터가 걸치는 까만 앞치마를 두르고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좋은 저녁입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
가하는 내 예상과 달리 울지도, 놀라지도, 혹은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그 무심한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환한 얼굴로 서투르게 이태리 말을 건네는 가하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웃었어? 뇌가 멈춘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몸이 굳어서 그저 가만히, 그 아이의 웃는 낯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가하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조금 이따가 올까요?』
“……아니.”
금방이라도 떠나갈 것처럼 구는 가하에게 나는 급하게 손을 올려서 멈췄다.
“가지 마.”
나는 지끈대는 머리를 짚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런 내게 가하가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어? 한국말 하네요?”
“……하.”
당연한 소리를 하는 가하에게 나는 짚었던 손을 내리고 다시 똑바로 보았다. 그러자 가하가 특유의 애교 있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얼굴이 좀 이국적이라서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아니면, 혹시 외국인인데 한국말 하는 거예요?”
“…….”
가만 들어 보니, 가하의 말이 어딘가 이상했다. 내가, 아무리 혼혈이지만 한국말을 잘하는 것을 가하가 모를 리가 없다.
“네. 주문하실 거예요?”
“……지금, 나 모른 척 하는 거야?”
내가 너무 미워서, 이렇게 봐도 모른 체를 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 애의 성격치고는 연기가 완벽할 지경이었다. 그렇게라도 분풀이를 해야 좀 후련하다면,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씁쓸하게 픽 웃으면서 셀 수 없는 날들을 지새우느라 빠질 것 같은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엷은 눈꺼풀에 상처로 흉이 진 손끝이 이때 꽤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지워지지 않는 과거란 아무리 그렇게 애를 써도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손에 남아 있는 상처와 같이 가만히 있어도 떠올리고 마는 것인데.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그 푸른색과도 같은 것일 텐데.
내 말에 가하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어…… 저기, 죄송한데.”
그런 과거를 까먹고 모른 체를 하고 싶을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내가 싫었던 걸까.
“혹시, 저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뭐?”
나와 만난 기억이, 전혀 없는 것처럼 굴다니. 나는 여전히 무척 이상한 대답에 다시 가하를 보았고, 가하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 저는 잘 모르겠어서요.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면 분명 제가 모를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정말로, 저는 기억이 없어서.”
“……가하, 너.”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하가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 어설프게 웃었다.
“아, 진짜 저 아시나 보다. 그거 제 이름 맞거든요. 그…… 제가 예전에 사고가 좀 나서 기억이 좀 없어서요.”
“……너 지금…….”
“그래서, 잘 몰랐어요. 죄송해요.”
기억이 없다고? 나는 미안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이는 가하에게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원망도, 질책도, 미움도, 미련도, 싸늘함도 무엇도 없는 얼굴로 그저 환히 웃는 가하는…….
“저기, 그쪽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름을 알면, 기억이 날지도…… 아닌가?”
눈부시도록 하얗기만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그 하얀 눈밭과도 같이.
하지만 내가 남긴 푸른 자국도, 붉은 증거도 없었다.
“……주현.”
그게 어린 나를 숲으로 미련 없이 떠나보내면서 웃던 엄마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무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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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새장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