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다음날 나는 그동안 열심히 연습한 첼로를 주현이네 차에 싣고 학교에 갔다. 격주로 돌아오는 동아리 활동 시간이었다. 즉, 우리가 하루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주현이는 아침부터 제법 까탈스럽게 반찬 투정을 부렸다. 학교에 도착해서 박 비서 아저씨가 트렁크에서 첼로를 꺼내 올 때는, 주차장에 튄 작은 아스팔트 쪼가리를 하얀 운동화로 퍽퍽 차댔다. 떨어져서 활동을 하는 게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맨날 같이 있어서 그런가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이런 식으로 유난한 항의를 했다.
그나마 나은 것은 ‘그 붉은 끈’을 내게 매지 않는다는 것일까? 지난 저녁의 일로 내 발목 주변이 퍼렇게 멍이 물든 것을 보고 주현이는 ‘좀 더 연습을 하겠다’며 울상을 지었다.
물론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부러지지 않은 게 어디인가.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고 긴장을 풀며 박 비서 아저씨에게 첼로를 건네받았다.
첼로를 어깨에 메며 입을 댓 발 내민 주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주현이가 몸을 홱 돌려서 넓은 등판을 보여 주었다. 우리 학교 옆에 있는 부속 유치원생도 이러지는 않을 거라고 피식피식 나오는 헛웃음을 참으며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주현이를 불렀다.
“주현아.”
“…….”
오늘은 대답을 씹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왜. 가하. 왜 불러. 이러기라도 했는데. 나는 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꾹꾹 참고 다시 주현에게 다가갔다. 이러다가 웃음이 터지면 주현이가 더 삐져서, 하루 종일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으며 박 비서 아저씨와 가정부 누나를 걱정시킬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주현아.”
“…….”
“나 간다.”
“…….”
“정말 가?”
“…….”
“이따 볼 거잖아. 응?”
“…….”
“오늘 나랑 말 안 할 거야?”
“…….”
이런.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나는 결국 미루고 미뤄 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나 싫어?”
“……니.”
주현이의 옹골찬 뒷모습에서 소심한 대답이 들려왔다. 걸렸다. 나는 혹시라도 주현이가 돌아보았다가 웃음을 참는 내 얼굴을 볼 경우를 대비해서 몸을 돌렸다.
“나는 주현이 좋은데. 근데 말도 안 하고…… 할 수 없지. 오늘 네버랜드 가면 다른 애랑 롤러코스터 타야겠다.”
“아냐!”
나랑 롤러코스터를 탈 애는 아무도 없을 텐데, 주현이는 내 말에 급하게 뛰어와서 내 등 뒤로 폭 달려들었다. 한 뼘 더 큰 주현이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으으, 하고 신음을 내었다. 분에 이기지 못하는 듯 했다. 애는 애였다. 친한 친구가 다른 애랑 논다고 하면 이렇게 뛰어오는 그런 애. 어쩌면 이 학교에서 가장 애다운 애는 이 애일지도 모른다. 나는 씰룩거리는 볼을 꿋꿋이 참아보려 노력하면서 부러 불쌍한 척을 했다.
“정말?”
“…….”
“어…… 주현이는 내가 싫구나. 말도 안하고, 이렇게 못 가게 막고.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놀아야지. 좀 외롭지만 뭐…….”
보란 듯이, 들으라는 듯이 퉁퉁대는 목소리를 높이자 주현이가 내 목덜미에 파묻은 머리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엷은 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내 목을 새털처럼 간지럽혔다.
“……니야. 아니야. 가하 좋아해.”
“정말?”
“응…….”
시무룩한 대답에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내가 플루트에 재능이 없고, 이 애는 내가 없으면 잘하는 친구들과 함께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그건 내가 되고 싶어도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그들의 세상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이 학교에 들어가서 만나지 않았으면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 것처럼. 성가신 방해물마냥 이미 잘 짜여 있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건 나였다. 그렇다고 나 때문에 주현이가 종일 내 옆에서 매달려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는 건 아까웠다.
“그럼 나 연습하게 보내 줘. 아직 첼로 못해서 부끄럽단 말이야.”
게다가 언젠가 이 애가 즐겨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첼로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매일 밤마다 연습하는 ‘반짝반짝 작은 별’만 매번 듣는 건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
“좋은 남자라고 했잖아. 이해심 많다고. 아니었어? 주현이 너, 거짓말한 거야?”
“……알았어.”
주현이는 가을 단풍처럼 붉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더불어 바닷물처럼 찰랑거리는 파란 눈을 보자니 내 마음이 시려워져 주현이를 꼭 안아주었다. 뭐, 사실 그 애의 몸이 더 크니, 어떻게 보면 내가 그 애의 품 안에 들어간 거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달래고 달래서 나는 엄마마냥 주현이를 플루트 반으로 보냈다. 그리고 나서야 내가 속한 첼로반이 연습하는 음악실로 갈 수 있었다.
“으.”
발을 옮길 때마다, 저녁내 겪었던 고통으로 저리는 왼쪽 발목이 느릿하게 끌렸다. 나는 티내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며 음악 연습실로 들어갔다. 연습실 안에는 이미 자리를 잡은 고학년들, 그 애들을 지도하는 김 선생님.
“어, 왔니. 저기 가서 우리 친구랑 연습하고 있으렴. 계속하자. 투, 쓰리…….”
그리고 진한 눈매로 나를 올곧게 보는 대호가 있었다.
“……안녕.”
“안녕.”
짧은 인사에 깃든 정은 첼로를 꺼내는 손을 따뜻하게 했다. 나는 대호의 옆에 살짝 거리를 두고 접이식 의자를 폈다. 일종의 경계심이었다.
사람이란 것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속을 도통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사를 해도, 뒤를 돌면 어떻게 변할 줄을 몰랐다. 그게 가족이기도 했고 그게 친구일 때도 있었으며 선생님일 때도 있었고, 혹은 누군가에 나 또한 그럴지도 몰랐다. 그게 사람이었다.
나는 첼로를 고정해 주는 판의 링을 의자 다리에 고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시큰한 내 발목이 비로소 편안함을 맞았다. 대호는 정면을 보고 현을 키려다 다시 손을 내리고 내 다리 쪽을 물끄러미 봤다. 우리 앞에는 콩쿠르에 나간다는 고학년이 애쓰며 연주하는 음악이 울려 펴지고 있었다.
“……너, 다리 다쳤어?”
대호의 말에 도둑질을 들킨 사람마냥 내 어깨가 파르르 떠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교복 바지에 가려진 다리를 흘끗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리 절룩거리면서 들어온 거 다 봤어.”
대호는 눈썹 사이에 주름을 만들면서 추궁하듯이 말했다. 나는 활에 송진을 벅벅 문대면서 대답을 피했다.
“그냥, 삐끗했어.”
“……송주현이 그랬어?”
대호가 날카롭게 찍었다. 주현이가 그런 건 맞지만……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소문은 와전되기 마련이었다. 그것도 이 학교처럼 작고 폐쇄적인 공간이라면. 대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가지가지 하네.
“……송주현.”
“……어?”
뭐가 가지가지 한다는 거지……. 주현이의 이름을 말하는 대호의 모습에 나는 혹시 오늘 교문 앞에서 얼싸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걸까, 하고 막연히 짐작했다. 대호가 봐도 좀, 이상하게 보였나? 내가 추측하는 동안 대호는 얇은 입술을 혀로 축인 후 작게 속삭였다.
“말, 안 해?”
“……뭐를?”
무엇을? 내가 좋다고? 그건 늘 듣는 소리인데. 주현이가 내게 말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내 대답에 대호는 그러면 그렇지, 맥이 빠진 얼굴로 반질반질한 젤로 가르마를 탄 머리를 긁었다. 그 애는 무언가가 제법 골치 아픈 듯, 망설이는 듯, 이마에 주름을 살짝 만들었다.
“너네 부모님, 요즘 연락 안 오셔?”
“……우리 집? 아니……바쁜 거 같던데…….”
마지막으로 전화 했던 날이 언제더라? 주현이로 가득 차 있는 기억들 가운데 가물가물해진 엄마의 목소리를 더듬었지만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대호가 작게 한숨을 쉬고 활을 손가락으로 뜯다가 보면대에 걸쳐 둔 송진을 들었다. 그 반응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
“……삼라…….”
대호는 활에 송진을 슥슥 문지르다가 속삭였다. 대호의 목소리는 또래에 비해 유독 저음인지라 앞에서 연주하는 첼로 소리와 함께 녹아들어 버렸다. 그 가운데에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내용은 막을 수가 없었다.
“삼라 화학이 오늘 부도낸다고 했어.”
“부도?”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어려운 단어에 이해를 하지 못했다. 대호는 활을 손이 하얗게 되도록 쥐었다 말았다를 반복하며 설명했다.
“……망하는 거 말이야. 돈이 없어서…….”
“……아니.”
주현이네, 사업이 망한다는 소리인가? 그런 기색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는데? 나는 멍청하니, 대호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흔들었다. 박 비서 아저씨도, 가정부 누나도, 그런 소리는 일절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부린 주현이의 심통은 언제나 같았고, 우리를 데려다주던 운전기사 아저씨도 여전했다.
“그런 말, 없었는데…….”
오늘, 차 안에서 네버랜드 가서 신나게 놀자고 웃던 얼굴이 선했다. 자기 옆에 앉으라고, 안 그러면 공중에서 물구나무 시킬 거라고 마구 협박을 하면서 말이다. 집안 사업이 망하는 애가 그렇게 말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괴리에 나는 말도 안 된다고 반박했다.
“나 아무런 소리도 못 들었어.”
“……그렇겠지.”
대호는 눈을 한번 깜빡이면서 대꾸했다. 우리 앞에서 연주하던 첼로가 멈추고 레슨을 봐 주던 김 선생님이 반주를 해 주려는지, 음악실 창가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오늘은 선생님이 반주 쳐 줄게. 맞춰서 해 보자. 잘 할 거야. 알지?”
“네에.”
머리를 곱게 두 갈래로 땋은 고학년 여학생이 자기 몸집의 두 배 정도 되는 첼로를 껴안고 대답했다. 김 선생님이 씩 웃으면서 피아노의 페달을 밟았다. 피아노의 경쾌한 음이 묵직한 첼로의 음과 함께 일렁이는 가운데 대호가 비현실적인 말을 꺼냈다.
“망하는 건, 너네 집이니까.”
더운 히터 바람을 잠시 환기 시키겠다고 열어 둔 음악실 창문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음악실 벽에 걸려 있던 종이 달력의 엷은 종잇장을 펄럭하고 흔들었다.
97년 10월 5일.
그날의 시작이었다.
* * *
“와! 네버랜드~”
“난 가서 호돌이랑 사진 찍을 거다.”
“난 호순이.”
애들이 버스 안에서 신나서 와글와글 떠드는 와중에 한 여자애가 복도 쪽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고 새침하게 일침을 놓았다.
“진짜 너네 짱 촌스러워. 미국 가면 이런 거 완전 많거든? 디즈니랜드가 훨 재밌다고.”
반 애들의 떠돌아다니는 어느 말에 의하면 이 애의 엄마는 교포라고 했다. 그래서 가끔 주현이에게 능숙한 원어민 발음으로 말을 걸곤 했다. 물론 주현이가 주현이다 보니 그 말을 열 번 중에 한 번 정도 받아 주는 게 다였다. 그 정도면 주현이 기준에서 나름 잘 받아 주는 애 중에 하나랄까. 그래도 모르는 남이 보면 그 반응조차도 무시에 가까웠다.
“그치 주현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는 빨간 얼굴을 숨기지 않고 씩씩하게 말을 걸곤 했다. 그게 내 눈에는 조금 귀엽게 보였다. 그런 버스의 뒷좌석에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내 옆에 앉은 주현이는 버스 의자 팔걸이에 팔을 걸고서 자는 척을 하기 바빴다.
“주현이 자나 봐.”
“……씨이.”
그런 주현이의 모습에 그 여자애는 심술을 잔뜩 껴안은 얼굴로 변해서 복도에 빠끔히 내민 자기 몸을 다시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여름방학 동안 캘리포니아에 있었다는 그 여자애는 얼굴이 제법 까맣게 그을려서 그런가 그 모습이 마치 오락실에 있는 두더지 찾기에 나오는 두더지 같았다. 그 생각에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조금 웃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웃었던 눈을 폈다. 주현이었다.
“……왜?”
혹시라도 내 말소리를 들은 그 여자애가 주현이를 귀찮게 할까 봐 나는 조심스레 속삭였다. 그러자 주현이가 고개를 저으며 씩, 하고 웃었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 집 사업이 망할 거 같은 애의 표정은 아니었다. 무언가 만족스러운 듯, 아닌 듯.
그 얼굴에 숨겨진 불안이 나를 뒤늦게 흔들었다. 그건 내 발목을 시큰하게 하는 아픔도 아니고, 혹은 다시 옭아맬 그 붉은 빛의 가이딩도 아니었다. 나는 내 두 손을 잡고 짧은 손톱으로 손톱 사이에 난 거스러미를 슬슬 긁었다. 사소하고도 작게 일어난 것들이, 아까 대호가 말한 말처럼 은근히 거슬리고 신경이 쓰였다.
「망하는 거 말이야.」
“있지…… 주현아.”
“음?”
나는 고민했다. 대호가, 그랬는데. 뭐라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 말이 진짜야? 너네 집 사업, 망해? 그리고 우리 집도?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말들을 입 안으로 우물거리다가 결국 하나씩 꺼냈다.
“대호가…….”
“…….”
“대호가 그랬는데,”
“……대호? 왜?”
입안에 고이는 침을 두어 번 삼키고서야 느릿한 말이 나왔다. 팔걸이에 팔을 기대고 실실 웃음 짓던 주현이의 입 꼬리가 살짝 팽팽해졌다. 마치, 오늘 아침에 간식을 노리던 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저울을 이리저리 기울이다가 결국 말했다.
“우리 집이 망한대.”
“…….”
“대호가, 그러는데 너네 집 사업 하나 부도날 거라고…… 그래서 우리 집도 그럴 거라고…….”
고속도로를 세차게 달리는 버스의 차창 너머로 완만한 높이의 푸른 산이 어른어른 스쳐지나갔다. 내 조용한 말에 주현이는 생각하는 듯, 그 지나가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요즈음 곁에서 주현이를 봤던지라, 그게 어쩐지,
“대호가, 그래서 네가 무슨 말 안하냐고…….”
평소보다 조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
“……대호가, 잘 못……. 안 거지?”
마치,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빳빳하게 굳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게 확신은 없어서, 나는 한겨울의 살얼음판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처럼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었다.
“아……. ——.”
주현이의 특유의 옅은 색의 긴 속눈썹이 나풀대었다. 차갑게 내뱉는 말은 다른 언어였지만,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말버릇처럼, 내뱉는 그 말은 가끔 박 비서 아저씨가 잔소리 비슷한 것을 할 때 주현이가 늘 웅얼거리는 말이었다. 그럴 때면 박 비서 아저씨는 얼굴이 살짝 굳어져서 엄하게 말하곤 했다.
「짜증난다고만 하지 마시고, 제대로 대답해 주세요.」
그러니까 이 말은, 짜증난다는 소리다. 그 반응에 나는 불안하던 마음속의 저울추가 훅,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진짜야?”
“상관없어. 그런 거.”
주현이는 짧게 대답했다.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묘하게 자세가 여유로웠다. 자기 집이 망한다는데, 도대체…… 나는 이제야 말을 해 주는 주현이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왜 이런 거 말 안 했어? 우리 엄마랑, 아빠는 전화 안 했어?”
“안 망해.”
안 망해. 그 애는 가볍지만 무거운 말로 덜덜 떨리는 내 입을 막았다. 팔걸이에 늘어진 주현이의 손을 붙잡자, 그 애의 파란 눈이 날 좋은 햇볕을 받아서 더욱 반짝였다. 차창을 스치는 가을 벼이삭 마냥 은근한 빛을 띠는 게, 마치 사람이 아니라…….
“사업, 많아. 하나 가지고 안 망해. 걱정 하지 마.”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의 눈과 닮았다고 하면 좀 이상할까.
그렇지만 빠르게 쏟아져 나오는 그 말에 나는 보이지 않는 무게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넘어가는 그 말에 나는 비집어 나온 불안들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이따가 나 엄마랑 전화해도 돼?”
그냥, 좀 걱정이 되어서…… 대호가 연락 안 왔냐고, 그래서……나는 궁색하게 덧붙였고, 주현이는 살짝 눈을 내리 깔면서 진절 넌더리가 나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대호, 대호…….”
“……어?”
주현이는 시리도록 파란 눈을 내게 고정하고서 입술을 끌어올렸다.
“대호 말만 믿어? 내 말, 안심 안 돼?”
“그런 게 아니라…….”
“싫어하잖아.”
“…….”
“가하, 너. 그 집 싫어해. 엄마, 아빠. 모두.”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게 망하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멀리 있고 싶을 뿐이었다. 말문이 막힌 나를 두고 주현이가 살짝 곱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서운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속상해. 가하, 제일 친한데. 내 말 안 믿어.”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냥.”
“너무해. 난 가하를 좋아해. 그런데 가하 나 안 믿어.”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황급히 손을 내젓는 나를 두고 주현이는 방울만한 눈에서 제 눈의 색만큼 투명한 물기를 하나 둘씩 떨어뜨렸다. 그 모습에 내 심장은 죄책감을 타고 두방망이질을 쳤다. 울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야, 가하는 나를 싫어해. 그래서 이래. 나 너무 슬퍼.”
“미, 미안해. 나 그러려고 한 거 아니야…… 정말이야.”
그 애는 우는 모습을 다른 애들에게 들키기가 싫은지 내 목덜미에 달려들어서 내 교복의 셔츠 깃을 축축하게 적시고 고개를 바르작거렸다.
“……정말?”
주현이는 자존심이 센 편이라서, 내 말이 주현이를 의심하면서 추궁하는 걸로 들린 모양이었다. 억울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주현이의 모습에 나는 앞에 앉은 반 애들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혹여나 앞에 앉은 애들이 본다면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내가 주현이를 괴롭혔다든지……. 일이 커지기 전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 정말.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대호가, 대호가 잘못 알았나 봐.”
애써 어깨를 토닥이는 것을 두고 주현이가 내 목덜미에 대고 바르작거리던 머리를 멈칫, 하더니 곧장 내 귀 아래 목덜미를 콱, 물었다.
“……아!”
선연하게 퍼지는 아픔에 나는 주현이의 토닥이던 손을 올려서 반사적으로 목을 만지려고 했다. 그 애가, 이빨 자국이 났을 그 부위를 할짝거리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가하, 나빠. 내 말 안 믿고…… 응? 나는 가하 좋아하는데. 나빠. 다른 애 이름 부르고.”
“아파, 아파. 그만해…… 그만.”
아픔도 아픔이고, 말랑한 혀가 연약한 살결을 핥는 감각은 전날의 가이딩처럼 요상하다 못해 야릇했다. 의자에 기댄 내 척추 근처가 근질거려서 앉은 자세가 무너지는 것을 두고 주현이는 유난히 날카롭게 반짝이는 송곳니를 귓바퀴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우리 집에만 있으면, 다른 사람이 가하 이름 못 부를 텐데…… 그렇지?”
주현이는 사르르, 웃으면서 자세가 비틀어진 내게 몸을 기울였다.
“언제 어른 될까, 가하?”
주현이는 이제 친절하다 못해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얼굴로 내게 얼굴을 천천히 내렸다. 다시 목을 베어 먹을 듯한, 그 위협적인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말하는 내용은 늘 버릇처럼 말하는 각인이었고, 나와 같은 나이의 어린애인 걸 분명 아는 데도, 마치 그 모습이…….
“각인하고 싶어. 얼른.”
당장이라도 내 목을 잡아서 비틀어 버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