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25)

<20>

두 손에 닿는 피의 느낌이 싫었다.

질척하고...

너무나 뜨거워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끔찍한 느낌에도 후안은 그... 새빨간 피를 지울 수 없었다.

두 손가득 피를 뭍힌채 후안은 슈엘을 바라보았다.

“폐하... 제발 몸을 쉬어주십시오.”

“반려님의 치료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안정을 취하는것이...”

의원과 시종의 말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치료를 끝낸 슈엘만 멍하니 바라보는 후안의 모습을 보며 

시종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문이 닫히고 적막한 후궁의 방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

<< 반려로 맞아주세요 >>

꿈.. 이겠지, 분명.

흐릿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이 저렇게 안도하는건...

마치 잃어버린 엄마를 찾은 아이처럼 안도하는 저런 표정은...

“... ....”

까만 눈동자가 조심히 나타났다.

최대한 힘을 짜내어 고개를 돌려보지만 보이는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창문 너머...까만 밤하늘 만 보일뿐이었다.

메마른 입술로 슈엘은 웃었다.

“역시... 꿈이었잖아.”

이상하게도 아픈 곳은... 검에 꿰뚫린 배가 아니다.

가슴.

가슴.

나의...심장.

생각나는 것은.

나의 고백을 차갑게 거절한 그... 얼굴 뿐이다.

달칵.

문소리에 슈엘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지만 

들어온 것은 그가 아니었다.

놀란 눈으로 슈엘을 바라보던 이안이 황급히 슈엘에게 다가왔다.

떨리는 두 손으로 슈엘의 얼굴을 만지며 그가 물었다.

“...괜찮아?”

“... 예.”

“...아-. 정말 다행이야, 정말...”

“....은요?”

“... ....”

생기없는 까만 눈동자가 묻고 있었다.

“후안...님은요..?”

-자신의. 주인은 슈엘이 아닌 그 사람인 것처럼 

까만 눈동자가

너무도 당연하게 그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한결 같은 그 눈동자에 이안은 지독한 상실감을 느꼈다.

-넌. 며칠동안 눈을 뜨지 못했어.

이제야 정신을 차린거야.

목숨을 겨우 건진후에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야?

겨우...

겨우...

그것...뿐이냐?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그는 말했다.

“무사해. 모두...네 덕분이야, 반려님.”

“... ...”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눈동자가 휘인다.

힘없이 웃으며 슈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안님. 나... 아무래도 바보인가봐요.”

“?”

하얀 손이 가슴을 가르킨다.

“여기. 여기가... 뻥 뚫렸는데... 

이렇게 뻥...하고 뚫려버렸는데...”

아이처럼.

슬픈 미소를 짓는다.

“아직도...... 두근거려요.”

두근.

두근.

두근.

다시...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다시 살아나버려요.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하는데도 

지치지 않고

다시.

살아나 버려요.

“... ...”

그 말에 이안은 싱긋이 웃었다.

“맞아. 반려님. 너- 충분히...바보야.”

그렇게 아프고도 그렇게 상처받고도 아직도 그 심장이

살아 있다니.

그런거, 내가... 싫어.

나는 좀더 니가 바보가 아니였으면 좋겠어.

조금쯤은 포기를 아는 영악한 남자였으면... 좋겠어.

기운 없이 웃는 슈엘을 향해 이안이 말했다.

“그나저나 큰일인데?”

“네?”

“반려님이 이렇게 아파서 말이지. 

어제도 오늘도 하늘이 회색이었거든.”

“??”

고개를 갸웃거리는 슈엘의 모습에 이안은 큭큭 웃었다.

“역시 봄의 나라에서 온 왕자님은 모르나보네. 

제국에선 어린아이조차 아는 사실인데 말야.”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슈엘을 보며 이안은 말했다.

“하늘이 회색이라는 건 말이지. 

곧 눈이 올거라는 신호야. 

그런데 기껏 눈이 오는 날 반려님이 아프...다면... ...”

창문을 바라보는 이안의 말이 점점 작아졌다.

이안을 따라 창문을 바라본 슈엘또한 

놀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밤하늘 위로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공주.”

지친 얼굴로 후안이 쥴리엣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화가 났다.

벌써 며칠째 그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게다가 의원이 아닌 자는 절대 그 방에 들여보내도 않고 

내내 혼자 그를 간호했다는 것 즘은!

그래서 쥴리엣조차 며칠 만에 보는 후안이었다.

그런데 뭐야...

이 초라한 얼굴은!

잠시 본궁에 가기 위해 후궁을 나온 후안의 얼굴은 

피로함에 가득 차 있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가 화나는 건 그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상대방을 압도하는 눈동자로 보는 자가 

바로 황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그런 눈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있는 남자 하나만을 바라보는 

그런 볼품없는 눈동자.

“언제까지 저에 대한 청혼을 미루실 건가요?”

그녀는 후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루시아왕가의 사람은 그리 인내심이 깊지 않습니다.”

두려움 없는 파란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 나를 기다리게 할 것이냐고.

하지만 그녀의 독기어린 모습도 후안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분명 황제로서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공주의 일이건만

후안의 머릿속은 보이지 않는 까만 눈동자에 대한 일뿐이었다.

그는 지친 듯 입을 열었다.

“아직 시기가 아니라고 말했소, 공주.”

“시기요?! 대체 언제가 시기입니까! 

제가 이곳에 온지 벌써 몇 십일이 지났습니다! 

언제까지 저를 제국의 손님으로만 대접할 생각이십니까! 

잊으셨습니까?!

저는... 루시아국의 공주 쥴리에뜨·루시아·쥰 입니다!“

어린 소녀의 얼굴이 긍지높은 공주가 되었다.

분명 철없고 오만한 어린 공주지만... 

황제의 앞에서 큰소리칠 역량이 있는 여자였다.

또한, 제국에 더 없이 많은 이득을 가져다줄 여자.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손에 키스를 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하면 끝인 일이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잘 터였다.

그런데 뭔가가 콕 하고 후안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콕...

하고.

뜨겁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후안의 심장에 박혀 빠지질 않았다.

후안이 고개를 내 젓는 순간 공주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때 공주의 눈에 보인 것은 

후안의 등뒤로 나타난 얼굴이었다.

이 성의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까만 머리카락.

황급히 달려오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는 

몸을 숨기는 그 모습에 공주의 두 눈이 반짝였다.

... 죽지 않고 살아났네... 알스의 왕자-.

그녀는 후안을 바라보았다.

“그럼- 맹세의 키스를 제게 주세요.”

“.. ...?”

“폐하를 위해 며칠이고 기다리겠어요. 

대신... 약속의 증표로 입을 맞춰주세요.”

후안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물러섬이 없었다.

단지 어서 그녀석에게 가고 싶었다.

언제...그 까만 눈동자가 보일지 모르는 일이다.

조급한 마음에 후안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후안과 입이 맞닿는 순간... 

그녀는 흡사 마녀처럼 미소를 지었다.

“..................”

슈엘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조심스럽게 떠보았다.

새하얀 눈 속에... 새빨간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금빛의 머리카락 또한 그와 함께였다.

................

왜.......요?

후안님...... 

어째서

어째서

그녀와... 입을 맞추고 있는 거예요?

내가

당신의 반려잖아요.

내가

당신의 유일한 반려잖아요

나만이...

그제야 생각난다.

붉은. 루비의 반지.

그녀의 가는 손에 끼여져 반짝이던 나의...마음.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 폐하께 청혼을 받았어-.]

이제.

그의 옆자리는

네가.

아니야.

털썩... 슈엘은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슈엘의 위로 새하얀 눈이 쌓였다.

새하얗고

아름다운

첫...눈.

첫 눈이 오는 날은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는데.

당신과 함께

웃고

싶었는데...

함께.

사랑을.

하고

싶었는데...

“반려님?!!”

제대로 된 옷도 걸치지 않고 뛰어나간 슈엘이었다.

황급히 쫓아온 이안이 슈엘에게 다가왔다.

첫 눈을 보자마자 며칠이나 앓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재빨리 후궁을 나갔던 슈엘이었다.

까만 눈동자가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은 듯 빛났었는데...

“이안님... 이안님........ 어떡하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심장이............ 심장이...

두근거렸던 심장이........ 이상해...

이상해......... 이제... 뛰지 않아...

첫 눈이 와서...

얼어버렸나... 봐요... 첫 눈이 와서..... .....흑....“

하얀 눈이 내리는 날엔... 분명히-

“흐윽............흑....  ... ....  해줘..”

-웃을. 거라고.

“.......알...스로...”

“알스로.... 돌아가게... 해줘... ...”

그렇게 

“알스로 돌아가게 해줘!!!!!!!!!!!!!”

말했었다...

“젠장...”

후안은 황급히 후궁을 향했다.

며칠 째 밀렸던 일인지라 급한 것만 했음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저녁부터 밤이 깊은 지금까지 내리는 눈을 보며 후안은 작게 내뱉었다.

“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첫 눈이라고-.”

그 녀석이 눈을 뜨면 당장 이 눈을 보여줄 셈이었다.

하얗게 쌓인 눈을 보고 얼마나...즐거워할까, 그 녀석.

아이처럼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후안의 가슴은 설레였다.

“슈-.”

대답이 들리길 기대하며 후안은 문을 열었다.

그러나...

달빛을 받은 창가밑 침대엔 아무도 없었다.

“?!!!!”

황급히 슈엘의 침대로 다가간 후안의 눈에 보인 건...

수십 개의 빨간 주머니였다.

침대위에 올려진 주머니를 풀러보았다.

하나...

둘...

미친 듯이 주머니를 푸른 후안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이것은..

매일 매일 빠지지 않고

슈엘이 자신에게 만들었던 루비 세공품이었다.

... 분명...

주지 못해 바보처럼 가지고 있었을

녀석의. 선물이었다.

마지막 주머니 속엔 루비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언젠간 주었던 반지와 같은. 루비의 반지.

후안이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들었다.

작은 루비 속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 사랑합니다 -

부디.

그녀와 행복하길.

나의...

사랑스런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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