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25)

<19>

긴... 밤이었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만큼 깊고 슬프고 괴로웠던 밤.

아침 햇빛에 정신을 차렸지만 슈엘은 눈을 뜨지 않았다.

조용히. 불러본다.

“..............안님.......?”

다시한번 조용히 소리를 내어본다.

“................후안님.”

목이 매여왔다.

“.......후안님...”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손이 차가워 손을 가슴이 가져다 대었다.

이상하게도  따뜻해야할 이불속의가슴마저도 얼음처럼 차가웠다.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줘보았다.

바르르..... 떨며 힘들게 뜬 눈동자 속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 반려로 맞아주세요 >>

“정말 너무 하잖아요.”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 웃어본다.

그의 체온이 사라진 차가운 침대 속에서 그를 향해 투정부려본다.

그치만...

정말 너무 하잖아, 이건.

내가 잘못한 건 알아요.

당신에게

내.. 감정을 보여서 화난 거라면 나는...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렇게... 날 슬프게 할 건 없잖아요.”

웃음이 나오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아프다.

밤의 흔적만 잔인하게 남은 이불을 꼬옥 안으며 외쳐본다.

“당신의 체온정도는... 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도 웃어본다.

실실.... 미소를 띄어본다.

[너는 단지 밤의 반려야-]

잔인한 그의 말에 베어버린 너덜너덜한 심장이지만

사랑을 담아 힘겹게 웃어본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첫 눈이 오는 날이 아니여서...”

... 오늘 첫 눈이 왔다면

난.

도저히 웃지 못했겠지.

******

젠장.젠장.젠장.

후안은 짜증이 솟아 올랐다.

아침이 되어 도망치듯 슈엘의 방을 나왔다.

밤새 몇 번이나 녀석의 몸을 안았던가.

그야말로 미친 것처럼 녀석의 몸을 탐했다.

벌써 며칠이나 만지지 못했던 그 입술과. 손과.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하얀 속살과...

이전에 남겼던 붉은 키스마크에 온 몸이 달아올랐다.

작은 저항 따윈 무시하며 그를 안았다.

처음엔 분노였던 감정이 점점 사라져가고

사랑이

되어갔다.

몇 번의 절정후 눈을 떠보니... 잠이든 네가 있었다.

땀이 맺힌 하얀 얼굴과 까만 눈썹.

질척해진 녀석의 그 곳과 엉망이 된 몸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메여져왔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아니... 충격이었던 건 미칠 듯이 녀석을 

안아버린 행동이 아니었다.

바로...

잠든 녀석의 얼굴에 죄책감을 가진 나의 마음이었다.

후안.

후안·루비젝트·알

이녀석은...밤의 반려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냐.

이렇게 너를 안은 후엔 왜 이렇게 심장이 메여드는거냐.

그래서 황급히 도망치듯 그의 방을 나왔다.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 눈동자가 ‘원망’을 담고 있을까봐.

[내가 원할 때 뒤만 대주면 그만일 뿐인 녀석이란 말이다.]

라고 말한 나의... 말에 상처를 가지고 있을까봐

아이처럼 도망쳐와버렸다.

겨우 소국의 왕자에게서...

이, 내가.

이.......

후안.....루비젝트가.

[똑.똑]

“무슨 일인가,”

“들어가겠습니다, 폐하.”

대답도 하기전 들어온 건 쥴리엣 공주였다.

그녀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짜증에 그녀를 바라보자 

눈썹을 찡그린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뭐지?

언제나처럼...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군.

제멋대로인 여자여도 내 앞에선 언제나 청순한척 미소를 짓던 여자였다.

“폐하!”

“무슨 일이오, 공주.”

“어젯밤 누구와 밤을 보내셨지요?!”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상관이 없다니요!“

열일곱의 공주는 또다시 

철없는 일곱 살의 아이가 되고야 만다.

일곱 살 먹었던 그때처럼 어리고 제멋대로인 잔인한 공주님.

“저 쥴리에뜨는 폐하의 반려가 될 몸입니다!”

분명 그랬었다.

제국으로 찾아온 첫째 날 그녀는 내게 말했었다.

[알스에서 온 남자 반려 따위 없어도... 

당신을 만족시켜줄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폐하.]

블루의 눈동자는 수컷을 유혹하는 암고양이처럼

매혹적이고 오만했다.

그리고 그녀에겐 그 아름다운 몸외에도 

루시아국이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실로 매력적이며

내게

필요한

여자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받은 얼굴의 녀석이 떠올랐지만... 

애써 녀석의 얼굴을 부정했다.

밤의 반려 따위보다 중요한건... 진짜 반려다, 후안.

쥴리엣 공주.

이보다 더 제국의 왕비에 어울리는 여인은 없어.

이제 정식적인 발표만 있다면 그녀와 나의 혼사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폐하. 어젯밤 그를 안으셨습니까?”

“?!”

“저의 시종이 알려왔습니다. 

폐하께서 오늘 아침 후궁을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상처받았다기보단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그는 밤의 반려니.. 그를 안는 것은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이후로 제가 폐하의 반려가 된 후에도 참아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이것만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폐하.“

그녀의 손가락이 나의 가슴을 가리켰다.

“절대... 마음만은 주시면 안 됩니다-.”

파란 눈동자가 표독스럽게 반짝였다.

“저보다 그를 선택하는 일 따윈 생겨선 안 됩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가 밤의 반려 따위를 택하는 

어리석은 남자가 되는 것은 볼 수 없다고.

자신의 고귀한 위치를 소국의 왕자가 더럽히는 것은 

절대 허락하지 못하겠노라고.

******

하루 종일 성안이 분주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쥴리엣 공주의 방문후 

소란스러웠던 성이었지만

오늘은 다른 때보다도 특별한 날이었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이는 시녀들 사이로 걷는

이안의 앞에 쥴리엣이 보였다.

“이안왕자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흠...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보게 되는군.

머리를 긁적이며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자 

쥴리엣은 싱긋 미소 지었다.

“또 후궁에 가시는 길입니까?”

아아. 질리는 구만.

그놈의 비꼼.

아무리 웃으며 말해도, 

그 작은 머리로 얼마나 건방진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다구... 철부지 공주님.

“내가 어딜 가던, 공주께 보고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대로 공주를 지나치려하자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금세 사라진 후 다시 가식적인 미소로 되돌아온 그녀의 얼굴이지만 

눈치 빠른 이안에게 그녀의 순발력은 통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이 무슨 일인지는 아시겠죠?”

“음... 글쎄요. 남의 나라에서 뻔뻔하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 

어린 공주님이 주최하는 파티였던가요?”

“!!!!”

하하. 그런 찡그린 표정이 진짜의 당신이야. 

그렇지, 쥴리에뜨 공주?

킥킥 웃으며 공주를 스쳐가는 이안은 뒷통수 

너머로 무시무시한 분노가 느꼈지만 

그것은 오히려 더 그를 즐겁게 했다.

휘파람을 불며 이안이 도착한 곳은 후궁이었다.

“흠, 타국에서 온 손님주제에 파티라니... 

당돌함이 끝이 없는 공주님이라니깐.”

그녀의 욕심과 자신감은 실로 대단했다.

아무리 왕비후보라 해도 지금은 단순히 타국의 공주인 그녀다.

그런 그녀가 귀족에서 왕족까지... 

제국에서 내놓라하는 고귀한 가문에 파티의 초대장을 보낸 것이다.

“뭐, 그런 점이 나름대로 재미있긴 하지만....”

‘그녀석’만 괴롭히지 않는다면야, 마음에 들었겠지, 분명.

달칵. 이안은 익숙한 방의 문을 열었다.

“..................”

두근.

“이안님, 오셨군요.”

“...........................”

“아.. 저어, 역시 이상한가요, 이런 모습은.”

“.........................”

두근.

분명, 심장이 뛰었다.

어느 때고 뛰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그보다도 강하게 심장이 뛰었다.

겨울의 햇빛을 받은 슈엘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달랐다.

평소보다 반짝이는 모습.

단아한 빛의 보석들이 슈엘의 귀와 목에서 빛나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까만 머리카락과 까만눈동자.

아아...

역시.

넌.

아름다워.

“잘.. 어울려.... 정말로.”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쑥스러워 하는 슈엘의 표정에 이안은 모든 것을 눈치 챘다.

보나마다 여느 시녀들보다 

기운 세고 적극적인 그녀들의 공로일 것이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보다 빛나고 아름답길 바라는 그녀들이 

억지로 슈엘을 꾸며놓은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이런 얘길 하면 당황해하겠지.

평소엔 하지 않는 작은 악세사리나

흰색의 화사한 정장이... 꼭 결혼식을 앞둔 신부처럼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그러니 그런 칭찬은 마음속으로만 하도록 할게-.

난처한 듯 웃는 슈엘을 향해 이안은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보실까요. 반려님-.”

“어머나~ 정말 이안왕자님과 함께 올 줄이야!”

“역시 그 소문이 정말인가봐요.”

“기가 막히는군요. 밤의 반려주제에... 어디 감히...”

귀족들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

그녀들은 부채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속삭였지만 그럴수록 그 날카로운 목소리는 

더더욱 슈엘의 심장을 찍어 내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궁내에 자신과 이안이 불미스런 사이란 소문이 퍼졌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 이 파티에 온다면 분명

그들의 시선이란 무서울 정도로 차갑고 잔혹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시끄럽게 입을 놀리는 것 외엔 하지 못하는군.”

자신과 슈엘을 바라보며 얘기하는 한 귀부인을 쏘아보며 이안이 말했다.

이래서... 오지 않으려 했는데-.

슈엘이 오지 않는다면 애초에 관심도 없는 파티였다.

그런 이안이 파티에 참석한 이유는 단하나... 슈엘때문이었다.

“반려님. 괜찮아?”

홀에 들어선 내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슈엘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마음이 강한 녀석이라지만... 

이런 시선엔 익숙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슈엘이 이안을 바라보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아요. 이안님. 하하... 저야말로 이안님께 너무 죄송한걸요. 

저런 소리를 듣게 해서.. ”

“킥킥! 저런 성내의 스캔들쯤이야 장난이지. 괜찮아~ 괜찮아.”

시원히 웃어넘기는 이안을 향해 슈엘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소문이 돌아도 나를 찾아와 준 것을 알고 있어요.

외로운 나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후궁에 들러준 정성을 알고 있어요.

상처받아 찢어진 심장의 조각이 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안님 덕분이겠죠.

이안님을 위해서라면 이곳엔 오지 않아야 했어요.

이런 소문이나 시선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엔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럴 수 없어요.

쥴리엣 공주의 초대장을 받는 순간

정말 한심스럽게도... 내 스스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뻤어요.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후안·루비젝트·알 황제폐하께서 납십니다.”

-그를 볼 수 있으니까.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의 말과 상처에 깨부숴진 심장은 언제나

그의 얼굴과 목소리만으로 다시 살아나곤 했다.

비록 저 멀리 있는 사람이지만

심홍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언제고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의 심장을 먹어버리고야 마는

나의...사람.

“그렇게... 좋아, 반려님?”

“네.”

“... 보는 것만으로 좋아, 반려님?”

“네.”

“... 보는 것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거야... .. 반려님?”

“........네.”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지 않아도 나는 분명 ‘사랑’을 하고 있어요.

지독히도 외로운 외사랑 이지만

그래도 나는 분명 

‘사랑’을 

하고 있어요.

후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슈엘의 모습에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나만을 봐달라는 말은커녕

나도 좀 봐줘...... 라는 비굴한 생각이라니.

제길- 정말 꼴이 우스워졌군.

고개를 흔들며 와인을 들이키는 이안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화려한 보라색의 드레스를 입은 쥴리엣공주였다.

뒤늦게 등장한 후안에게 인사를 한 그녀는 후안의 손을 이끌고

이안의 앞에 다가왔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안왕자님.”

“별말씀을-”

방긋이 웃으며 그녀는 이안의 옆에 있던 슈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오늘도 두 분은 함께 시군요.”

“... ...”

“소문처럼 두 분은 정말 특별한 사이이신 것 같네요.”

“!!!”

순간 억지로 짓고 있던 슈엘의 미소가 무너졌다.

남은 용기를 짜내어 후안을 바라보았던 

슈엘의 시선이 황급히 사라졌다.

바닥으로 향한 슈엘의 시선 밖으로 공주는 웃었다.

“슈엘님. 슈엘님은 자신의 입장을 잊은 것이 아닌지요?”

이안이 그녀를 말리기도 전에 그녀는 재빠르게 입을 놀렸다.

“역시 밤의 반려는 

어느 남자에게나 가벼운 사람인가 봅니다.”

황금의 눈이... 경멸의 빛을 가지고 있었다.

슈엘의 두 손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눈동자같은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약해지면 안돼. 슈.

두 손을 꼬옥 쥐며 슈엘은 입을 열었다.

“공주님. 그건 오해입니다.”

“쿠쿡. 변명 따윈 하지 않아도 되어요. 

어차피 밤의 반려에게 ‘정숙’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렇지요, 후안님?”

그녀의 입에서 후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슈엘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 차갑게 미소 지었던 그가 생각났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부드럽게 웃어주던 그가 생각났다.

비록 잠시뿐이었지만 분명

자상하게. 웃어주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조금쯤은...

“-더럽군.”

“... ...”

“아직도 이안녀석과 만나고 있었다니-”

..... .........

........ ............

툭.

하고 저 밑으로 떨어져버린 것은 아마도

심장...

이겠지.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는 

자연스럽게 후안과 팔짱을 끼며 슈엘을 지나쳤다.

바들거리는 손을 뒤로 숨기고

슈엘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는 그들은 

이 곳의 주인공 이었다.

아름다운 공주님이 그의 옆자리인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와 그녀를 보며 웃는다.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그는 그녀에게 춤을 신청한다.

그녀가 그의 손을 맞잡는 순간

사람들은

그들을

축복한다.

“반려님?!!”

황급히 파티장을 빠져나가는 슈엘을 쫓아

이안도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슈엘은 쓸쓸히 서 있었다.

“......반려님.”

“...............”

“................ 을 알려주세요.”

울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슬픈 눈이었다.

“... ...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주세요.”

“... ....”

“후안님을 향한 내 사랑이

축복받을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줘요. 제발...“

떨리는.

목소리였다.

상처 입은 아이의 얼굴로 슈엘은 이안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안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웃지 못하는 슈엘에게 웃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첫 눈이...오길 기다리고 있었지?”

“.........”

“첫 눈이 오는 날, 행복해 질거야.”

“..............”

“그렇게 기도했잖아. 반려님... 그러니까 분명-”

하얀 입김을 내며 이안은 슈엘과 마주보았다.

조금씩 밝아지는 까만 눈동자를 향해 이안은 입을 열었다.

“첫 눈이 오는 날 웃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너의 그 웃음을 포기하지 말아줘. 

“그에게 사과하시오.”

“...네?”

후안의 손위에 손을 얹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로즈의 표정이 굳었다.

춤을 시작한 후에도 한동안 슈엘을 나간 방향만 바라보았던 

후안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이었다.

“그는... 한 나라의 왕자요. 

아무리 작은 소국이라해도...

공주가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건 큰 실례요.“

“... ...”

심홍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로즈는 모든 걸을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어...

지금. 내가 이 남자를 얻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건

밤의 반려 따위가 아니야.

방해가 되는건 바로.

“앞으로도 그를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도록 하시오, 공주.”

황제의. 이. 마음이었어!!!

******

“... ...”

눈을 뜨기가 싫다니.

... 이런 기분은 처음이로군.

눈썹을 찡그리며 후안은 눈을 떴다.

자신 외엔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넓은 침대를 바라보며 후안은 중얼거렸다.

“파티 다음날, 혼자 눈을 뜬 것은 처음인가...”

파티가 있는 밤엔 언제나 누군가 후안의 곁에 있었다.

후안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 금발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자라던지

후안을 유혹하는데 성공한 귀족가의 아가씨...

파티의 열기를 밤까지 이어가는데 부족함 없는 잠자리 상대.

“비록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자들이지만...”

그런데.

어제는 처음으로 혼자였다.

불쾌한 기분을 숨기며 억지로 웃는 쥴리엣을 뿌리치고 

방으로 돌아온 후안의머릿 속은 밤새 한 남자로 가득했다.

-도저히 누군가를 안을 마음따위, 들지 않았다.

씁쓸히 웃으며 후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후안을 덮쳤고 

후안의 숨소리와 함께 입김이 세어져 나왔다.

제국의 추운 겨울아침을 느끼며 정작 떠오르는건

어젯밤... 슈엘의 모습이었다.

[-더럽군.]

나의 말에.

상처 받은 표정이었다.

아니, 상처받은 것을... 숨기려는 표정이었다.

여전히 입과 눈은 웃고 있었지만... 까만 눈동자는 분명

상처를 받았겠지.

금새...후회해 버린 것은 아마도 나.

“모두, 네 탓이다. 슈.”

나, 네 탓이란 말이다.

나의 반려인데, 어째서 자꾸 녀석의 곁에 붙어있는거냐.

-그 모습에 화가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넌 나만 바라보면 돼.

나 ... 만...

“... ....”

후안의 걸음이 멈추었다.

언제... 이 곳까지 온거지?

오히려 후안 스스로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후궁을 향했던 것이다.

스스로의 감정에 혼란스러운 후안의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슈엘... 알스·슈.

높은 난간에 앉아있는... 

슈엘의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이 휘날리고 있었다.

홀로 그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모습.

거센 바람 속에 위험해 보여야 하는 게 

당연한데도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높은 그곳에 앉아 하늘과- 제국의 대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니,... 그 넓은 곳에서 홀로 아침을 맞는 

슈엘의 모습은 한없이 쓸쓸해 보인다.

매일 싱글벙글 웃던 녀석이 아니었던가.

... 상처같은건 금방 잊는다는 듯 그렇게 웃곤 했는데...

가슴이 메여옴을 느끼며 후안은 한 참동안 슈엘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감정이 떠오른건 

슈엘의 시선이 후안과 마주쳤을 때였다.

후안과 눈이 마주치자...

무표정했던 얼굴이 마치 마법처럼... 바뀌었다.

입술이 생긋이 올라가고...

까만 눈동자가 아이처럼 반짝였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바뀐 슈엘은 다시 돌아와 있었다.

사랑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남자로.

빙긋이 웃으며 슈엘은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후안님-.”

-어째서였을까.

이제는 익숙한 그 인사에 이렇게 가슴이 두근 거리는건.

슈엘에게 다가간 후안은 손을 내밀었다.

후안의 친절에 놀라며 슈엘은 후안의 손을 잡고 

난간에서 내려와 힐끗 후안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무슨 날인가요?”

“무슨 소리지?”

“음, 그러니까... 후안님께서 

이런 이른 아침에 여기까지 찾아와주셨으니까... 아, 물론!! 

싫다는게 아니구요! 좋아요, 좋아요. 저는 정말 기쁘지만...”

어째서 이녀석은 이렇게 쉽게.. 

기쁘다는 말을 할 수 있는걸까.

어떻게 이렇게 쉽게 행복한 얼굴을 하는 걸까...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후안의 시선에 

슈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참, 후안님! 이제 곧 첫 눈이 오겠지요?”

“첫 눈?”

“네-. 첫 눈이 오는 날은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까만 눈동자가... 아름답게 휘어진다.

“그러니까- 

꼭... 첫눈이 오는 날은, 행복해져.......요....”

슈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순식간에 다가온. 후안의 입맞춤 때문이었다.

........ ........어?

갑자기 다가온 후안의 체취와 입맞춤에 

슈엘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모든 생각이 정지 되었다.

단지

심장소리만이 쿵쿵쿵.. 울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부드러운... 키스였다.

사람을 원하는 키스.

사람을

사랑하는

키스.

설마.........

두근대는 마음으로 눈을 뜨는 순간... 

따뜻했던 입술의 감촉은 사라졌다.

“... ...”

... 마치 도망치듯 입을 뗀 후안의 표정에...

... ... 사랑은 없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후안을 보자 슈엘의 가슴은 아파왔다.

“후......안님?”

“.... ....”

자신을 바라보는 슈엘을 뒤로하고 후안은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린 그의 표정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어째서... 입을 맞춘거야!!!

전혀... 그럴 생각따윈 없었는데....... 

어째서.......

하루종일 제대로 한 일이 없었다.

쌓여있는 서류를 바라보며 후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스러워 봐줄 수가 없군.

후안.루비젝트.알- 정말 바보가, 되어버린거냐.

머릿 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서류를 책상에 던지며 후안은 눈을 감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입맞춤...

이성이 아닌 감정이 저지른 입맞춤,

벌써 몇 십번이나 한 키스였음에도...

가슴은 두근거렸다.

마치 첫사랑을 하는 소년처럼.

그렇게... 두근거렸다.

“후후... 첫 눈이라.”

그리고 파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려본다.

첫 눈... 그런 것을 기다리기엔 후안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처럼 첫 눈을 기다린다는 녀석의 말을 떠올리자

왕이 되어 처음으로 첫 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첫 눈이 오면... 좋아하겠지, 그 녀석.

강아지처럼 하얀 눈위를 뛰어다닐 녀석을 생각하지 웃음이 나온다.

후안은 버릇처럼 책상 서랍을 열어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서랍안은 가득 채운 빨간 주머니...

하루도 빠짐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주었던 슈엘의 선물이었다.

공주가 오고나서 끊겨버린 선물....

그가 꺼낸 주머니속에 있는것은...

새빨간 루비가 장식된 반지였다.

마지막으로... 녀석이 준 선물...이었지.

반지를 꺼내어 만지작 거리던 후안은 

노크소리에 반지를 주머니속에 넣었다.

후안의 대답과 함께 방으로 들어온건 쥴리엣 공주였다.

후안에게 인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엔 분노가 가득했다.

“폐하!”

“이번엔 또 무슨일이오, 공주.”

환영은 커녕, 귀찮다는 반응을 모이는 후안의 태도에 

쥴리엣은 더더욱 화가났다.

그녀는 작은 입술을 악물며 후안에게 말했다.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 하루라도 빨리 저에게 정식 청혼을 해주세요.”

“?!”

“저를 어서 폐하의 반려로 맞아달라는 겁니다."

쥴리엣은 이를 악물었다.

...이런 부탁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자존심을 구기는 일 따위를... 이, 내가..!! 이. 쥴리에뜨가!!

“... 어째서요?”

“... ...”

“어째서 갑자기 서두르는거요, 공주.”

쥴리엣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밤의 반려를 향한 폐하의 감정 때문입니다, 라는 말같은건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물러섬이 없는 눈빛에 후안은 말했다.

“공주의 부탁은 정중히 거절하겠소. 

공주를 반려로 맞는 일은...물론 중요하지만 

지금은 적기가 아니라고 생각...”

후안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공주는 후안의 손을 잡았다.

후안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간 쥴리엣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밤, 절 후안님의 여자로 만들어주세요.”

“... ...”

“한번도!절! 안지 않으셨잖아요!”

... 그랬다... 분명.

단 하루도 그녀를 안은 적은 없었다.

아니...

순례를 끝낸 후... 그녀석이 아닌 다른 자를 안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단... 한번도.

부드럽고 따뜻한 가슴의 느낌.

-이상한 일이었다.

여자의 가슴보다 남자의 가슴 따위가 생각나다니...

딱딱하고 보잘 것 없는 가슴이 생각나다니.

하지만...

가슴 속에 있는 심장소리만큼은 언제고 선명히 들렸다.

두근...

두근...

가슴에 입을 맞출때면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리곤 했다.

... 그 녀석을.안을 때면.

“역시.. 무리요, 공주.”

쥴리엣의 손을 뿌리치며 후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반려로 맞을때까지 당신을 안지... 않을 것이오.”

“!!!!”

그녀의 얼굴이 치욕스러움으로 가득찼다.

“폐하는... 그런 남자따위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건가요?”

“?!”

“겨우, 소국의 왕자. 그것도 밤의 반려따위에요?”

그녀가 웃었다.

“설마- 저의 착각이겠지요?”

그녀의 말에 후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국의 황제를 대한다기엔 너무도 오만한 태도이건만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루시아국의 공주기때문이 아니었다.

알리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들킨듯한 당혹스러움 때문이었다.

내가..?

내가. 그 녀석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하...하하.

그럴 리가...없잖아.

그런 남자따위에게.

나를 사랑한다는 것 말고는...

... 그것빼고는 봐줄 이유가 하나 없는 그런 녀석에게.

... 내가.

사랑을 느낄 리가 없어.

“물론 큰 착각이오, 공주.”

“... ...”

“나는... 제국의 황제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없어-.”

쾅-.

문이 닫히고 넓은 방엔 쥴리엣 혼자가 남았다.

“하....하하하하..!!!!”

쥴리엣은 커다랗게 웃었다.

제국의 황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없다고?!

-그 눈동자 어디가. 사랑을 하지 않는 눈이란 말이지?!

쥴리엣은 아침의 그를 기억해보았다.

슈엘을 보러 후궁에 간 이른아침... 쥴리엣은 후안을 보았다.

한참을... 말 없이 슈엘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슈엘에게 입을 맞추는 후안을 보는 순간

그녀의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이 남자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

그. 시선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밤의 반려에 가지는... 

가벼운 호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황제는...

그 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마음깊이.

그것을 깨닫자 아무런 문제 없을거라 생각했던 

황제의 옆자리가 불안해졌다.

원하는 것은 얻고야 마는 루시아국의 공주가...

한 낱 소국의 왕자에게 지는 일이 생긴다니...

그런 치욕은 참을 수 없었다.

“절대... 절대 그렇게 두진 않을거야...”

그녀는 두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런 그녀의 두눈에 보인 것은... 책상위의 빨간 주머니였다.

이건...분명.

폐하가 들고있던 주머니...

황제의 물건을 허락없이 만지는건 커다란 죄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런 건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주머니를 풀자 주머니 속에서 나온건 새빨간 루비의 반지였다.

반지를 보는 순간 그녀의 머릿 속에 시종의 말이 떠올랐다.

[요즘엔 뜸한 모양이지만... 

알스의 반려님은 후안님께 매일매일 선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분명... 루비로 만들어진 선물...이라고.”

-붉은 루비를 담은 공주의 파란 눈동자가 빛났다.

“으으으음~~ 음~~ ”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슈엘은 보석을 세공하는 중이었다.

어젯 밤에는 그렇게 상처받아버린 주제에 

오늘은 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다니, 

정말 좀! 주체성을 가져보라고 내 마음아.

라고 외쳐봐도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은... 후안님이 내게 키스를 해주셨는걸.

그것도 강제적인 키스가 아닌.. 한없이 부드러운 키스였다.

그 사실이 너무 기뻐 오늘은 하루종일 바보처럼 실실 웃고 다녔다.

“이왕 이렇게 용기를 팍팍 얻었는걸. 

어서 만들어서 후안님께 드려야지-.”

하루도 빠짐없이 만들었던 보석들을 바라보며 

슈엘은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요 며칠동안... 드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용기가 생겼으니까....

오늘은 꼭. 줄 수 있을 거야-.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는 슈엘의 귀에 문소리가 들렸다.

달칵.

순간 슈엘의 손이 멈췄다.

... 방문이 열리는 순간 설마 

그... 일까 싶어 온몸이 긴장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슈엘의 앞에는 그녀가 있었다.

“쥴리엣...공주님?”

“늦은 밤에 온 걸 용서해요. 

하지만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슈엘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지독한 장난을 치는 여자인지.

아름다운 가면속에 얼마나 무서운 본성을 감추고 있는지.

슈엘의 앞에 다가간 그녀는 테이블위의 보석들에 시선을 보냈다.

“와- 정말 굉장하네요. 모두 당신이 직접 만든것?”

“...네.. 그래요.”

“흐음~ 이게 바로... 후안님이 말씀하신 그거로구나.”

“... ....”

말이 없는... 사람인데 그녀에게는 

그런 사소한 것까지 말해주는 것일까.

터져나오는 질투를 느끼며 슈엘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부탁할것이라뇨, 공주님?”

“그리 힘든 일은 아니네요. 당신... 보석세공하는게 특기라면서요? 

내가 봐도 부끄러운 솜씨는 아닌 것 같고 말이지.”

“... ...”

금색의 눈이 차갑게 웃고 있었다.

새빨간.. 입술이 느릿 느릿 떼어졌다.

“폐하께 드릴 반지를 만들어줘.”

“... ...”

그녀가 손을 들어 슈엘의 눈 앞에 가져갔다.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어진

새빨간.......루비의 반지.

“나, 폐하께 청혼을 받았어-.”

“... ...”

“승낙의 표시로 이것과 똑같은 루비반지를 그에게 주고 싶어요.”

“... ...”

“... 만들어줄거지? 알스의... 왕자님-.”

그녀의 눈이 휘이는 순간

슈엘의 심장은 내려앉았다.

그녀가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슈엘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돼- 상처받을거야.

하지만 슈엘의 다리는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그를 찾고 있었다.

늦은 새벽...

성의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슈엘은 후안의 방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오랫동안 돌처럼 굳어있던 슈엘은 

뭔가에 홀린 듯 방을 나왔다.

참을...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것은.

... 그 사람에 대한 섭섭함. 배신감.

그리고..........................................

그녀에 대한

질투.

-어째서. 그걸 당신이 가지고 있는거야!!

그건...

내가 그에게 준 선물이었어.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걸 만들었는지 모르면서...

단순한...반지가 아니야.

내.

마음이 남겼어.

내.

상처가... 담겼어.

그가 아니면.......

누구도 껴서는 안되는...반지야.

슈엘은 후안의 방문을 열었다.

그녀가 있을까 불안했지만... 다행히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혼자였다.

문소리에 깬 후안의 기척소리가 느껴졌다.

“누구냐?”

“..........어째서예요.”

“슈...?”

늦은 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후안이 묻기도 전에 

슈엘은 소리쳤다.

“어째서! 그녀에게 그 걸 준 거예요!!!”

후안은 슈엘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는 슈엘의 외침에 놀랐다.

소리치는 것 따위... 

화를 내는 것 따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인데...

어두운 방...

서로가 보이지 않는 그 속에서 잠시의 정적이 맴돌았다.

아무런 변명이 들리지 않아... 슈엘은 더더욱 참담했다.

미안하단 말은 바란 건 아니었지만

조금쯤은... 변명을 해주길 바랬는데.

...그랬는데.

처음의 외침이 거짓처럼... 작아진 목소리로 슈엘은 물었다.

“... 그녀를....... 사랑해요?”

... 어째서..일까.

그 말에 심장이...내려앉는 것은.

후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반려로 맞으실...건가요?”

...대답을..

대답을 좀 해봐요.

아니라고..............

아니라고............ 대답을 좀... 해줘요.

하지만 아무리 간절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실된 기도도 소용없다는 걸안지는 이미 오래였다.

이... 사랑에 기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걸 슈엘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목에... 메여왔다.

“후안님.........”

눈물이... 고여 왔다.

“후안님.........”

심장의 고동소리는..... 

영원히. 

끝나지 않아.

“사랑해요.”

그에게 처음 한 고백이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 무언가에 홀려버린것처럼 그 말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치... 고장나버린 인형처럼.

지금껏 숨겨왔던 말이

터져버린것.처럼.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달빛이... 창문 밖으로 비추고

어둠이 눈에 익었을 때야 후안은 볼 수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을.

까만 눈동자를.

“.........사랑해요, 후안님.  

흐으...흑.”

-울고.

있는.

그 모습을.

쓸쓸히 서서 아이처럼 울고 있는 그 모습에 후안의 심장이 메여왔다.

당장이라도

그 까만 머리카락을 만지고

까만 눈동자위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후안은 고개를 돌렸다.

후안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슈엘의 가슴은 내려앉았다.

슈엘은 다시 한번 용기를 짜내보았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희망을 다시 한번 잡아보았다.

“......다.... 다른 사람을... 

반려로 맞지...않으면 안되...나요? ”

“... ...”

“뭐....라도 좋아요. 후...안님이 필요하다면 

나의 눈이든, 심장이든 좋아요. 모든걸 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만을... 사랑해줄 순 없나요?”

“... ....”

두근두근... 방안에 가득한 것은 심장소리였다.

귀가... 막힐 정도로 커다란 심장소리.

나의... 고백소리.

슈엘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후안의 입이 열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 그건, 무리야.”

“..........................”

툭.

심장이 떨어진다.

..........아니

떨어지는 것은 심장이 아냐. 심장이 아냐!

심장이 아냐!!!

나의...

마음...

사랑을.......받고자했던 나의...마음.

...............사랑을 했던... 나의...마음.

슈엘의 눈에 이제 후안은 보이지 않았다.

눈물의 흐릿함 너머론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몸이 움직였다.

머리가 명령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여 후안에게 달려들었다.

“안돼!!!!”

“?!!!”

푸욱. 사람의 살을 꿰뚫는 소리.

후안은 멍하니 슈엘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얀색 옷위로...새빨간 피가 번져나왔다.

날카로운 검으로 꿰뚤린 몸으로 슈엘은 후안의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가 후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픔이 가득한 눈동자가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암살자가 잠입했습니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 ....”

털썩......

후안의 앞으로 슈엘이 쓰러졌다.

후안이 재빨리 슈엘을 안아들었지만 이미 숨소리는 거칠어져 있었다.

보이지 않는 까만 눈동자에 후안의 두 손이 떨려왔다.

느릿느릿...눈을 뜬 슈엘은 후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지만 그래도...

두 눈은 부드럽게 휘였다.

“전에.... 했던...약속..을 지킨..것 뿐이에요. ..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후안의 눈엔 또 다른 슈엘이 나타났다.

순례를 떠나는 날 보았던 슈엘의 모습이었다.

가볍고 소박한 복장으로 그는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후안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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