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다 된 마법에 햄스터 뿌리기 (1)
‘꼬마의 궁금증은 해결되었을까.’
녹스가 보낸 메시지였다. 내가 도청한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가
시스템에 간섭했을 때, 나 역시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를 왜 가만히 둔 걸까? 중간부터 잡음이 사라지고,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던 건 그가 허용해 주었기 때문이겠지.
이 정도의 정보는 내어줄 수 있다는 건가.
“……슈.”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는 카일의 품에 거의 몸을 파묻다시피 하고 있었다.
여전히 몸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덜덜 떨리고, 그의 눈동자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끝났나?”
나는 멍한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내 안색을 꼼꼼하
게 들여다보았다.
“그 힘은 다시는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저는, 큼, 괜찮은데요.”
어차피 그는 내가 겁에 질렸다는 것만 알지, 무엇을 보았는지 모른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건너왔다는 단서만으로 내가 본 것을
유추해 내기는 쉽지 않겠지.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카일이 이를 갈며 나를 품에 가두었다.
“네가 뭘 봤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건가?”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가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야 알고 있었
지만, 이번에는 솔직히 놀랐다.
“슈.”
카일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삼키듯이 조
금 고통스러워 보였다.
“나는 이 추운 땅에서 십 년을 보냈어. 사선을 밥 먹듯이 넘나들었지. 어느
날은 나를 따르는 기사가 죽었고, 이튿날은 마수를 죽였다. 굶주리고, 병에 걸
리고, 추위를 이기지 못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
그가 괴로움을 꾸역꾸역 삼키며 말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어떤 눈을 하는지 알아. 삶의 끝까지 내몰린 생명이 어
떻게 발버둥 치는지도. 내내 보아 왔고, 겪어 왔다. 내게는 일상이었으니까, 모
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아, 그렇구나.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구나.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는,
그리고 카일 블레이크는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까.
어쩐지 이해가 됐다. 그러면서도 씁쓸해졌다.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숨겨 버리자, 카일이 한숨
을 내쉬며 큰 손으로 내 등을 연신 쓸어 주었다.
“……부작용을 줄일 만한 방법을 찾아볼게요.”
“널 위한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까지 하겠다고?”
내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영지의 안전을 위해서잖아요. 들은 것도 많으니, 꽤 유용하기도 한 것 같고
요. 중간에 녹스가 도와준 것 같아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돼.”
카일이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
긴 의미는 더없이 단호했다.
“부작용이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확신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안 돼.”
“…….”
“그간 네가 죽음에 대해 딱히 생각하지 않고, 두려워하거나 위축된 기색이
보이지 않아서 방심했다. 내가 물렀지. 죽을 뻔했던 사람은 그 기억으로부터 자
유로워질 수 없는데도.”
“…….”
“그래. 마탑주들에 대해서 많은 걸 알았어. 그건 네 덕이지. 인정하지 않겠다
는 게 아니다. 넌 언제나 그랬듯, 이 영지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어.”
카일이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을 대하듯 조심
스러운 손길이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입을 짧게 맞추었다. 그렇게라도 그의 마음을 달래
주고 싶었다. 그는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제 허벅지 위
에 앉혔다.
“그래도 안 돼, 슈. 네게 모든 걸 맡길 생각은 없어. 심지어 가장 두려워하는
기억을 억지로 꺼내야만 한다면 더더욱 안 된다.”
“……그 대신 여러 사람이 살 수 있다고 해도요?”
“우리 세계다.”
네 일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처럼 들렸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
다.
카일이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뺨에 입을 맞추며 재빨리 위로했다.
“네가 선택한 세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일군 땅이기도 해. 네 존재는 우리
에게 선물과도 같지만, 네 희생만 기다릴 생각은 없어. 우리가 직접 해야 의미
가 있는 일이야.”
“…….”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슈.”
카일이 한숨을 내쉬며 내 목덜미에 이마를 댔다.
“나는 모르겠어. 널 볼 때마다 혼란스럽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네가 기적 같다
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운 촛불처럼 느껴져. 그러니 너를 보호해야
할지, 믿고 기다려야 할지, 가여워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한숨을 내쉬듯 내뱉는 그 모든 말에는 정돈되지 않은, 그래서 더욱 절절하게
와닿는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떨림이 완전히 잦아든 건 아니었지만, 괴로움은 거의 지나갔다. 무엇보다도
내가 힘들어할 때 그가 곁을 지켜 주지 않았던가.
나는 그의 몸을 꽉 안으며 대답했다.
“그냥 안아 주세요, 전하.”
그리 대단한 걸 바란 게 아니었다. 물론 카일을 살리면 기적 수치가 오르고,
그걸 위해서 열심히 움직인 건 맞지만…….
“저는 그거면 돼요.”
설령 그게 아니었더라도 나는 이곳을 좋아하게 되었을 거다. 카일을 좋아하
니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여기서 지내는 게 즐거웠으니까. 외롭지 않았고, 간혹 몸은 힘들지언정 마음
만큼은 따뜻했으니까. 때때로 내가 이 세상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으면 좋겠
다고 무심코 바랄 만큼.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는다. 부작용이 아무리 거세다고 한들 각오했을 거라
는 뜻이었다.
“슈.”
카일이 나를 바짝 안으며 고백하듯이 말했다.
“기억해. 너는 살아 있고, 나는 너를 다시 죽게 둘 생각이 없다.”
“……네.”
“네가 바라기만 한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네 곁에 머물 거다. 널 지킬 거고.”
이보다 더 든든한 말이 있을까.
나는 그의 등을 가득 끌어안았다.
“알겠어요.”
*
이튿날 새벽, 나는 그가 높이 쌓아 준 담요 한가운데에서 눈을 떴다.
‘이젠 햄스터인 게 적응이 안 되네.’
푹 자서 그런가? 이제 겨우 해가 뜰 무렵인데도 눈이 말똥말똥했다. 나는 높
이 솟은 담요를 꾹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찌하아암.
팔다리 쭉쭉 펴고, 입도 크게 쩍 벌려서 하품도 하고. 눈도 깜빡거리다가 시
스템을 불러 보았다.
[좋은 아침! ヽ(* ̄▽ ̄*)ノミ]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몸을 흔들던 시스템이 러브러브 코너를 띄워 주었다.
신상품 들어왔냐? 열일하네.
NEW! [사랑의 전서구♡ | ❤x1004]
근데 가격이 대체 왜 이러는 거냐. 이제는 대놓고 네 자리씩 뜯어 드시네. 양
아치가 따로 없다.
내가 허공에 눈을 흘기자, 시스템이 변명하듯이 작은 창 하나를 더 띄웠다.
[현재 보유 현황 | ❤ x 1999]
뭐야, 저번에 귀마개 샀잖아? 근데 왜 차감이 안 됐지?
[현재 보유 현황 | ❤ x 2005]
[현재 보유 현황 | ❤ x 2015]
[현재 보유 현황 | ❤ x 2022]
―……?
하트가 실시간으로 점점 오르고 있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일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는 담요를 반쯤 감싸 안
은 채 누워서 자고 있었다. 살짝 내리감긴 눈에는 평화로운 미소가 희미하게 감
돌아 있었다.
뭐야? 왜 자고 있는데 하트가 늘어나?
‘혹시, 햄스터 꿈이라도 꾸냐…….’
그래. 타인의 심연을 굳이 들여다보지 말자. 알면 다친다. 나는 고개를 얼른
흔들어 신상품, ‘사랑의 전서구’를 샀다.
[사랑의 전서구♡]
아니! 하트는 좀 떼라! 낯간지럽게 무슨.
이름은 좀 황당하지만, 제법 좋은 물건이었다. 멀리 떨어진 카일과 직통으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면서 패시브 스킬처럼 영구 적용되는 아이템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1004개 정도는 헐값이었다.
[(* ̄︶ ̄*)]
나는 배부른 표정을 하는 시스템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번에 하트를 천 개 넘게 가져갔으니 배가 부를 만하다. 하트는 금방 쌓이
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멱살잡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손을 휘적여 시스템 창을 살짝 밀어 놓고, 곧장 메신저 창을 띄웠다.
카일과 통신을 연결하면 머릿속에 자판 같은 것이 뜨는데, 그것을 요령 좋게
입력하면 신기하게도 문자 메시지처럼 전송이 되는 형태였다.
문제는 카일이 연락이라곤 서신밖에 써 본 적 없는 중세 시대 인간이라는 점
인데…….
‘일단 깨워 보자.’
나는 뽈뽈뽈 걸어갔다. 카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잠귀 밝으면서 어쩐
일로 안 일어난대? 평소에는 내가 조금만 뒤척여도 안고 토닥였으면서.
나는 그의 손끝을 살짝 깨물었다.
―찍. (일어나, 인마.)
“…….”
―찌이와압.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래도 안 일어나?
이젠 아예 그의 새끼손가락을 입에다 넣고 질겅질겅 물었다.
그러자, 손가락에 힘이 살짝 들어가더니.
“……풋.”
―…….
“하하, 아하하. 간지럽다. 알았어, 일어나마. 멍하니 앉아 있길래 뭘 하나 싶
어 기다렸더니 깨울 줄이야.”
카일이 눈을 떴다. 방금 눈떴음에도 잠기운이 거의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나와 비슷하게 깨어났는데 그냥 잠든 척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깨
우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이렇게 보니 귀엽구나.”
―찍. (뭐래.)
오랜만은 무슨. 분명히 내가 잠든 사이에 ‘불러오기’가 해제되면 귀엽다고 한
참 지켜봤을 거면서.
내가 손가락을 놓아주자, 그가 나를 가볍게 쥐어 들더니 키스를 갈기기 시작
했다.
오랜만이네, 이 햄스터 오타쿠의 주접.
나는 시큰둥하게 눈을 감은 채 그가 양껏 뽀뽀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래. 갈
겨라, 갈겨. 네 맘대로 해라…….
그나저나, 사용법 이전에 이 메신저를 뭐라고 설명해야 한담.
―찌직. (전하.)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찌지직. 찌직. (사랑의 전서구라고 들어는 보셨는지?)
“그래, 나도 사랑한다.”
못 알아듣는구나.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불러오기를 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일찍도 일어났네. 나는 한숨을 푹 내
쉬며 그의 손바닥에 푹 퍼졌다.
여섯 시까지는 몇 분 안 남았을 것이다. 설명은 나중에. 인간이 되고 나서 해
도 충분하겠지, 뭐.
―찍. (좀 이따 얘기한다.)
카일이 즐거운 표정으로 동문서답했다.
“오늘도 아주 귀엽구나.”
―찌이.
바보.
그래도 아주 싫지만은 않은 걸 보면, 나도 참 대책 없어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