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햄스터 귀에 경 읽기 (2)
녹스는 어쨌든 나를 그의 보금자리로 데려갈 심산인 듯했다.
그는 내 팔을 붙잡은 채 설산 깊은 곳으로 향했다. 느긋하면서도 경쾌한 걸음걸이가 이어질 때마다 눈이나 흙 따위가 그의 새하얀 신발 아래에서 부스러졌다.
그의 신발은 깨끗했다. 이곳까지 오느라 상당히 더러워졌던 나나 다른 기사들의 신발과는 퍽 대조적이었다.
‘이동 마법 같은 걸 할 줄 아는 건가?’
하긴. 그들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곳은 여기에서 한참 떨어진, ‘세상의 끝’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평범하게 걸어 내려왔을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지금은 왜 걷고 있는 걸까.
나는 의아한 시선을 녹스에게 보내지 않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시스템에게 물어보았다.
‘마법사들은 공간 이동 마법 같은 걸 쓸 수 있는 거야?’
시스템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공간 이동 마법은 고위 마법으로, 막대한 마력을 소모합니다. 보통은 마법진을 만들어 연결합니다.]
마법진! 그 생각을 못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북부 곳곳에 마법진을 설치하고, 그 수단을 통해 자유롭게 오가는 거라면 이해하기 더 쉬워진다.
‘길을 부수면 되기도 하고.’
지금처럼 얌전히 따라가는 척하며 마법진의 위치를 알아내고, 그 자리를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와서 파괴하면 되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얼굴이 자연스레 밝아졌다.
‘이 녀석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면 좋을 텐데…….’
나는 녹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나이는 적당히 카일 또래일까? 말끔하고 팽팽한 눈가를 보니 마흔을 넘은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세계 사람들은 대한민국 사람들과 인상이 꽤 다른 편이라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서리의 중독 말이야. 당신이 한 짓이지?”
녹스가 곧장 대답하지 않자,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며 그를 채근했다. 새파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했더니. 뜨거운 관심이군.”
“개소리 말고.”
“그래. 내 주특기지. 그러니, 너도 조심하도록 해.”
그는 나를 잡아끌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좁다란 협곡에 몸을 욱여넣으며 생각했다.
무법 지대의 주인.
서리의 마탑을 정복한 남자.
그렇다면 그는 마탑주이자 북부 마법사단 중에서도 강한 편일까? 과연, 그들은 몇이나 있을까? 대항할 수 있는 수준일까? 그 비수만 어떻게 한다면, 카일과 녹스가 싸웠을 때 카일에게 승산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불현듯 우리가 카일 일행과 상당히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3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5일 남았습니다.]
카일의 예상 사망 시간이 천천히 늦춰지고 있었다. 역시, 그의 사망 원인은 녹스였던 거다.
남은 시간은 어느덧 15일까지 올라갔다가 더는 늘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촉박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내가 영지에 돌아가기까지 큰일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녹스가 조그마한 동굴로 나를 이끌며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애인 생각? 그쪽은 애인도 없냐. 성격 보면 없어 보이긴 하지만.”
“부하들은 있는 편인데. 외로워하기엔 수가 꽤 많아서.”
“아까 그 고블린 같은 놈들도 부하에 들어가나?”
“설마.”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별로 웃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많다는 소식은 별로 달갑지 않으니까.
“그가 잘해 주나?”
무슨 구남친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질겁하며 대꾸했다.
“당연히 잘해 주지.”
냉혹하고 무뚝뚝할 것 같았던 카일은 정말로 다정한 이였다. 당연한 것처럼 친절을 베풀고, 섬세하게 배려할 때마다 심장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소설 몇 줄 읽은 것만으론 카일이 얼마나 오래고 외로운 사투를 겪어 왔는지 낱낱이 알 순 없지만, 그래도 그와 함께한 짧은 시간 동안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그가 생존하고 분투해 온 차디찬 땅과는 달리, 카일의 품은 너르고 뜨겁다는 걸.
[앞으로 3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슬슬 가야 하는데.”
좁은 통로 끝에 파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바닥에 공간 이동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마법진 너머까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불러오기’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어쩐지 위험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 안전 제일이다. 걱정 많은 반려 대공 전하를 위해서라도 몸 성히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봐.”
나는 한 걸음 물러나며 녹스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내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릿한 통증이 퍼져 왔다.
“왜 ‘겨울의 심장’을 만드는 거지?”
“출처 모를 정보를 제법 많이도 알고 있군.”
“그건 대답이 아닌데.”
녹스는 무언가 가늠하는 시선을 건넸다.
“글쎄, 무엇이든 전리품 삼아 하나라도 더 캐 가려는 이에게 들려줄 만한 건 많지 않은데.”
[앞으로 10초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내 전신을 휘도는 흰빛과 함께 몸이 투명해지며, 팔을 옥죄는 감각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녹스가 눈을 휘며 속삭였다.
“이 세계의 무엇이든 내게 그저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만큼은 명확하지.”
나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뭐 하나 알려 준다, 망령 자식아.”
“…….”
“넌 날, 절대 못 잡아.”
사라지기 직전, 어떤 끔찍한 한기—혹은 살기—가 내 팔을 타고 전해졌던 것 같기도 했다.
*
왁! 차가워!
나는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한쪽 팔을 타고 노골적인 냉기가 전해져 왔다.
―찍!? (녹스, 그 자식 짓인가!?)
나는 허겁지겁 내 몸의 상태를 살폈다. 녹스가 내내 붙잡았던 오른쪽 팔의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가…… 꽁꽁 얼어 있었다.
바로 찬물 때문이었다.
‘누가 여기에 물그릇을 놨어!’
카일이 북부 야생에 사는 들쥐 생태 환경을 고려한다며 물에 얼음을 띄워 두었는데, 하필이면 ‘불러오기’를 해제하면서 거기에 떨어져 버린 듯했다.
나는 온몸을 부르르 털어 물기를 떨쳐 내고는 시리다 못해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앞발 끝을 연신 꼬물거렸다.
얼음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붙들려 있던 녹스의 손이 꼭 시체처럼 싸늘했던 걸 새삼스레 떠올리니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내가 먼저 돌아와 버렸으니, 카일은…….’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5일 남았습니다.]
다행이다. 아직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나는 톱밥 사이에 파묻혀 미적거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터무니없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큰 부상 없이 돌아올 것이다. 아마 내가 영지로 먼저 돌아갔을 것을 알고 서두르겠지.
‘사흘 정도면 돌아오려나.’
그동안 뭘 하지. 대외적으로는 아직 북부에 있을 때니, 적어도 카일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얌전히 햄스터로 지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억울하거나 초조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알아봐야 할 것도 많았고, 피곤하기도 했다. 그래. 이참에 그냥 마음 편히 빈둥거린다고 생각하자.
‘야, 시스템. 녹스에 대해 더 알려 줄 수 있는 건 없어?’
녹스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회유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분명히 블레이크 영지를 망가뜨리기 위해 움직일 것이고, 필요하다면 로렌츠와 손을 잡을 것이다. 이미 전적도 있으니까.
그러나 얌전히 앉아서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카일을 지키기 위해서 뭐든지 할 거다.
물그릇 위로 조그마한 시스템 창 하나가 떠올랐다.
[녹스. 나이 미상. 출신 미상. 서리의 마탑주. 주특기로는 ‘서리의 중독’, ‘서리의 칼날’, 그리고 ‘하얀 망령’입니다.]
하얀 망령? 주특기라니, 단순한 별명이 아니었나?
큰 소득이라고 할 만한 것은 못 되었다. ‘서리의 중독’은 신광산 탐사에 나섰던 이들이 당한 수법이고, ‘서리의 칼날’은 아마 카일과 녹스가 싸웠을 때 보여 주었던 그 무기를 말하는 거겠지.
마지막 건, 어차피 지금은 알려 주지 못할 거다. 뭐라고 말해 주려고 해도 ‘□’ 따위로 범벅된 시스템 창만이 처량하게 올라올 게 뻔했다.
그 뒤로 나는 시스템을 추궁하며 얻을 수 있는 단서를 최대한 뜯어냈다. 대부분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거나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부분이라면서 말을 아꼈으나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녹스는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서 북부를 오간다. 그는 무법 지대를 기점으로 움직이는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북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초장거리 공간 이동 마법진이 있을 거란다.
‘고대 마법이라고 했지……. 하긴, 마법사단 놈이 한둘도 아니고. 심지어 로렌츠 쪽과 내통하기도 했으니까.’
그들이 꼭 북부를 통해서만 움직이리라는 보장은 없다. 마법이 생각보다 쓸모 있구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녹스는 카일보다도 더 이르게 북부에서 자리를 잡은 듯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제 와서 북부를 삼키려고 하는 걸까? 처음부터 이곳에 터를 잡았으면 됐을 텐데…….
그러나, 내 한가로운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ˍ⊙)]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크도 없는 건 물론이고, 잠긴 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따고 들어온 것이다.
숨집 안에 몸을 구겨 넣고 있던 나는 묵직한 걸음 소리에 바짝 긴장했다. 그 불청객이 한숨을 내쉬며 햄스터 집 앞까지 왔기 때문이다.
불청객이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만히 침묵을 지키는 동안, 나는 숨집에 난 조그만 구멍을 통해 그 남자의 얼굴을 몰래 올려다보았다.
카일은 아니다.
‘그럼, 대체 누가? 왜?’
하지만 충격에 빠져 있을 시간도 없었다. 이내 사방이 흔들리며 내 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큰일 났네.”
어둠 속에서 곤란해 보이는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은데. 어떻게 내다 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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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