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햄스터 귀에 경 읽기 (1)
“안 돼!”
카일은 당연히 반대했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한 것 같았다. 안색이 붉어졌다가 창백하게 질리더니, 이내 내 어깨를 콱 붙잡았다.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슈. 놈들에게 신의를 기대하나? 게다가 너를 팔아 목숨을 구걸하라고? 날 치욕스럽게 만들 생각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다.”
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아까 행운을 강제 충전하느라 무리한 까닭일까? 여전히 명치 근처가 답답하고 화끈거렸다. 나는 숨을 꾹 참는 것으로 그 미묘한 구역감을 어떻게든 견뎌 내고서 꾸역꾸역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자존심에 금은 가겠지.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자존심이 목숨을 구해 주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이건 우리에게 훨씬 이득인 거래였다. 나는 그에 대한 정보를 캐낸 뒤 ‘불러오기’를 해제하면 그만이었다. 마침 남은 시간도 몇 분 되지 않으니까.
카일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테다.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온 꼴을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까지 맹렬하게 반대할 필요가 있나? 나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설득될 생각은 없었다. 카일은 물론이고 기사들의 목숨마저 걸린 상황이었다.
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이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그리고 확실하게 이 광산을 빠져나간다면 너를 따라갈게.”
“보장이라도 해 달라는 건가?”
“당연하지. 나도 이렇게 순순히 따라가겠다고 하는데. 봐, 우리 대공 전하께서 싫어하시는 거. 나름대로 파격적인 제안이라고. 그러니까, 너도…….”
절절하게 매달리는 건 취향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에게 신뢰를 요구할 수는 없다.
흥미와 편의를 기준으로 움직이는 자에게 유효할 만한 말이 뭐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내가 말했다.
“성의를 보여 봐. 그럼 고분고분하게 굴 테니까.”
하얀 망령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 성격에?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맞지도 않는 옷에 팔다리를 욱여넣는 꼴은 언제 봐도 즐거운 법이지. 좋아. 관대하게 구는 건 별로 어렵지 않거든.”
싸늘한 침묵 속에서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딱―.
엄지와 중지가 맞부딪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협곡을 둘러싼 채 숨죽이고 있던 변종 고블린들이 일시에 쓰러졌다. 마치, 마리오네트 인형의 실이 끊어진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허물어지는 광경은 조금 오싹해 보일 지경이었다.
모두 죽었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그리 힘들이지 않고 해낸 일이었다. 자세히 올려다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형체도 남지 않고 녹아 문드러져 버렸다. 적어도 다시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건 하얀 망령이 내게 보이는 성의였다.
“…….”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들었으면서도 조금 질린 듯 주춤주춤 물러났다.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말로만 듣던 무법 지대의 마법사. 그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자. 마른침이 넘어갔다. 본능이 그의 존재를 경고하고 있는 듯했다.
“어디 보자…….”
남자가 몸을 일으켜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나를 ‘꼬마’라고 했던 것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컸다. 고개를 들어 가늠해 보니 카일보다도 키가 큰 것 같았다. 나와 거의 머리 한 개쯤은 차이가 났는데, 호리호리하고 선이 얇아서 멀리서 보면 실제 키보다는 작아 보였다.
새하얀 백발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번쩍였다. 나는 그 눈동자가 ‘겨울의 심장’과 같은 색일 것 같다고 무심코 생각해 버렸다.
신기한 인상이었다. 정중해 보였으나 비열해 보였고, 또 수려하면서도 악해 보였다. 무엇보다 겉모습은 눈처럼 희지만 속은 재처럼 시커멓게 보였다.
그는 내 턱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마치, 어떤 상품을 감정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카일은 검을 꽉 쥔 채로 이를 악물며 이 모든 과정을 참아 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검을 뻗어 그와 대거리하고 싶다는 듯.
“……이상하단 말이지.”
중얼거리던 하얀 망령의 손이 내 가슴께로 내려왔다. 그즈음의 나는 욕지기가 치밀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사내가 혀를 가볍게 차며 내 명치를 눌렀다. 가슴께에 고여 있던 진득하고 불쾌한 열기가 치미며, 이내 시커먼 피가 한 줌 더 토해져 나왔다.
아까 잘 토해냈다고 생각했는데 부작용이 끝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입안에 찝찔한 맛이 남아서 불쾌했다.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아무렇게나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마법사의 그릇은 아닌데. 우리와 비슷한 힘을 쓰고.”
“…….”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궁금증까지 풀어 줘야 할 의무 같은 건 없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카일의 안전이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0일 남았습니다.]
이 빌어먹을 숫자부터 어떻게 좀 올리자고.
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철수 명령을 내리십시오.”
“…….”
“전하!”
나는 카일을 돌아보았다. 동시에 줄곧 나를 바라보았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상처 입은 듯한 얼굴이었다.
*
카일은 끝까지 저항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한 명을 노골적으로 희생시킨다는 선택지를 고르고 싶지 않았겠지.
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고블린들은 죽었지만, 하얀 망령이 다른 것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었다. 기사들은 불안감으로 인해 점점 더 신경이 곤두섰다. 심지어 동굴을 빠져나오며 부상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제임스마저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러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카일을 말리던 그는 마법사의 곁에 붙들려 있는 내게 조금 미안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물론 내게 ‘불러오기’가 없었다면 더없이 매정한 선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방법이 있었으니까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기로 했다. 애당초 나의 선택이니까.
“……가지.”
카일은 쥐에게 발이라도 물린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제 뒤에 있는 기사들에게, 한 명을 구해 내기 위해서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싸움을 하자고 할 수는 없었다. 직접 겨뤄 본 적이 있으니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참의 반대 끝에 결국 물러난 카일은 몇 번이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제야 그가 ‘불러오기’에 대한 부분을 하얀 망령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고집을 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야 떠나면 그만이겠지만, 남은 내가 망령에게 의심받으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
알면서도, 몇 번이고 고통스러워하는 카일을 보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잔인한 선택을 강요했는지 알 것 같았다.
피는 충분히 토해 냈건만, 왜 속이 아직도 답답한 건지.
“꼬마야.”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협곡에는 서늘하고 축축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사이에 반듯하게 서 있던 남자가 먼 곳을 내다보더니 말했다.
“수를 숨겼구나?”
일견 다정하게마저 느껴지는 그 음성이 섬뜩하게 와닿았다.
“아, 잘 연기한 줄 알았는데. 이걸 들켰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바라봤다.
“하긴, 역시 아무리 속여도 좀 부족하죠? 우리 전하가 날 두고 그냥 돌아서 나갈 분이 아닌데.”
“…….”
“고블린 같은 걸 더 데려오셨을 것 같지는 않아서.”
아무리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지만, 마수의 핵을 한꺼번에 많이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몇 달 전의 정쟁에서도 상당히 썼고, 오늘 데려온 고블린도 적은 수는 아니었다.
“만드실 때 상당히 애를 먹으실 거라서, 더는 낭비하기 어려우실 텐데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뭐, 마음껏 만들 수 있었으면 당신이 북부 근처를 깔짝거리며 ‘인사’니, ‘선물’이니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요. 좀 만들었다 싶은 건 사냥에 죄다 갖다 바치지 않았겠습니까.”
“눈치가 생각보다 빠르네.”
그는 내 팔을 콱 틀어쥔 채 걸음을 옮겼다. 마치 내가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을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은 도망 안 가는데. 나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가며 말했다.
“근데, 이봐요. 우리 만난 적 있었나?”
정성스러운 미친놈의 얼굴에 환하고 재수 없는 미소가 감돌았다.
“지금 작업 거는 건가?”
“지나가는 쥐도 비웃을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그는 붙잡은 내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손목에 느슨하게 매여 있던 팔찌가 기울어지며 파란 보석이 반짝였다.
“이거랑 비슷한 게 내 방에도 하나 있거든.”
비슷한 팔찌라면…… 황성에서 파는 게르마늄 팔찌 말하는 건가? 구경 나갔다가 카일에게 하나 사 줬던, 그거.
그렇게 생각하니 불현듯 한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마력이 담겨 있군그래.’
우리 옆에 서 있던 흰 머리의 남자.
분명히 무척 즐겁다는 듯이 팔찌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저 마력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하는 것을 보니 신기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나쳤었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놓고 영지 안까지 들어왔을 줄은 몰랐다. 상인 틈바구니에 섞인 건가? 아니면, 변장? 신분 위조? 공간 이동 마법?
내 심란한 속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남자는 조금 흥미로운 시선으로 내 턱을 붙잡은 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새로 산 물건의 먼지를 문질러 닦듯이 장갑으로 입가의 핏자국을 닦아 내기도 했다.
“숨겨 둔 수라는 게 뭘까. 마법 능력도 형편없고. 공간 이동은 물론이고 대단한 무력도 없어 보이는데.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할까?”
흥미로 번들거리는 푸른 눈동자는 다소 집요해 보이기까지 했다.
“붙잡아서 갈라 볼 수만 있다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저기요, 미친…… 아니, 큼. 수상한 마법사 양반. 그쪽 연구실에 얌전히 누워 주는 취미는 없으니까 김칫국 드시지 마시고요. 이참에 통성명이나 좀 합시다. 어때요?”
명백히 정보를 캐려는 행동이었다. 그는 내 속내를 들여다보았음에도 이 정도는 얼마든지 알려 주겠다는 듯 순순히 말했다.
“녹스.”
녹스.
새하얀 남자에게는 썩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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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