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61화 (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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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뒤, ‘사냥’을 제안할 거다.”

그게 벨리알의 본론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속 시원히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 그는 답지 않게 잠시 망설였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그 과정을 잠자코 기다려 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리 ‘불러오기’ 시간이 늘어났다고 해도, 겨우 네 시간이었으니까.

다만, 굳이 직접 나서서 벨리알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내 상황을 얼추 파악한 카일이 시간이 별로 없으니 서둘러 달라는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거기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됐다.

‘편하네.’

진작 좀 털어놓을걸.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저기…….”

나는 한 손을 슬쩍 들어 올리곤 질문했다.

“사냥이 뭡니까?”

내가 듣기엔 표현이 영 엉뚱했다.

본래 사냥이란 사람들이 무리 지어 짐승이나 마수 따위를 잡으러 가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 분위기에 썩 어울리는 행사가 아닌 탓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는 센과 카일은 그러려니 했지만, 벨리알은 마치 괴상한 질문이라도 들은 것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바로 지난 대에서도 사냥을 치렀는데, 모른다고?”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그냥 바보 하나 가르친다 생각하시고 얘기해 주십쇼.”

카일이 재빨리 대화를 가로챘다.

“정쟁이다.”

“정쟁이요?”

“그래.”

황성에서 마차로 이틀 정도 걸리는 동부의 깊은 산.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아, 어떤 짐승과 마수가 사는지 제대로 아는 이조차 없다.

한 팀당 제한 인원은 열 명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건 전쟁을 치른다.

원칙적으로는 더 많은 마수를 사냥한 사람이 이긴다지만, 그런 것을 헤아리는 이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 숲에서 나오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사흘간 어떤 위협으로부터든 무사히 살아남거나, 적 팀의 우두머리를 죽이거나.

또한, 그곳에서 일어나는 죽음은 불문율에 부쳐진다. 정확히는 그 죽음을 조장하기 위해 간다. 무엇으로 죽여도, 설령 시체조차 찾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한낱 사고로 치부될 테니까.

황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고, 다른 한 명이 그 권위에 도전하고 싶을 때. 어떤 합의도 없이 피와 죽음만으로 해결해야 하는 순간, 도전자는 ‘사냥’을 제안한다.

그의 짧은 설명 속에서 나는 마인하르트 제국의 민낯을 본 기분이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센이 현재 황성의 상황을 딱 잘라 말했다.

“책임자의 꼬리를 잘라 내는 걸로 급하게 불을 끄긴 했지만, 체스틸 남작이 죽었다고 해서 상황이 마무리된 게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아.”

벨리알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불길이 커지면 번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꺼번에 폭발하게 되지. 휘말리게 되면 끝장이다.”

“그래서, 먼저 사냥을 제안하신 건가요?”

“온갖 핑계 속에서 무력하게 숙청당하고 싶진 않거든.”

아무래도 황위 계승권이 낮은 벨리알은 로렌츠에 비해 행동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느니, 제대로 판을 까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내게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지.”

적어도 검을 들 수는 있으니까. 이해는 됐다.

“그렇군요.”

상당히 야만적인 축에 속하는 이 전통은 제국에서 상당히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장남을 위주로 황위를 계승하긴 하나, 그렇다고 차남과 삼남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죽이려 드는데 주변 귀족들은 안 말리고 무얼 하냐니까, 세 사람의 새삼스러운 시선이 내게 향했다.

‘결판을 빠르게 내면 줄 타기가 쉬우니까, 내버려 둔다고…….’

사람이 죽는데 썩은 동아줄을 일찌감치 잘라 내니 편하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사냥이니 뭐니 하는 것도, 거기에 동참하는 이들도 다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부루퉁한 태도로 이야기를 듣고 있자, 카일이 낮게 웃었다. 내가 이 잔인한 방식의 행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 기껍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사람 죽는 걸 반가워하는 게 더 이상한 겁니다. 게다가, 방법이 잔인하잖아요.”

어딜 가나 인간이 모이는 곳은 다 이 모양이다. 세상이 아무리 혹독해도, 인간의 악의만큼 지독한 건 없다.

나는 환멸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황위는 하나고, 그걸 바라는 사람은 많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벨리알이 담담하게 말하니 더 속이 꼬이는 기분이다.

힘겨운 삶 속에서 원하는 걸 꼭 이뤄야 한다며, 무참히 상대를 짓밟는 사람들은 다 똑같은 말을 했다. 어쩔 수 없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어쨌든, 이 정쟁 역시 <겨울의 심장>에서 다뤄지긴 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카일이 위기에 몰린 이후로부터는 제대로 집중해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시스템에게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중요한 건 벨리알이 열흘 뒤를 상정하고 정쟁을 선포하겠다는 거다. 로렌츠는 오히려 그를 깔끔하게 없애 버릴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서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 사이에서 카일은…….

“대공께서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평소, 그의 오만한 성격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공손한 태도였다.

벨리알이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동부의 깊은 숲에는 상당히 위험한 마수들이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북부와는 생태계가 달라 차이가 좀 있겠지만, 대인 기사들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상대하겠지요.”

카일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뜻이었다.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그에 대한 값은 모자라지 않게 치르겠습니다.”

로렌츠가 이 흐름을 읽지 못할 리가 없다. 어쩌면 사냥 제안을 들은 후, 로렌츠도 카일에게 같은 제안을 할지도 모른다.

세 명의 황자 중 두 명이 대립한다. 그것도 동복형제끼리. 그러니 하나뿐인 이복형제, 그것도 마인하르트 최강의 기사가 누구의 손을 들어 줄지 모두가 주목하겠지.

“갈림길이네요.”

내가 무심코 말하자, 카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원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이보다 더 숱한 걸 겪었으니 괜찮다는 태도였다.

‘하긴, 그렇겠지.’

사람은 언제나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마수랑 싸울 때도 그랬을 것이다. 왼쪽으로 검을 돌릴지, 우측으로 쇄도할지. 결정은 순간적으로 내려야 하며, 그 대가로는 목숨을 건다.

그런 그가 이런 선택에 눈 깜짝할 리가 없다.

카일이 말했다.

“좋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사이에 다시 시스템을 확인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70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0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70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0일 남았습니다.]

여전히 여러 개의 창이 내 시야를 파랗게 채웠다.

카일은 열흘 뒤의 ‘사냥’에 참석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생사가 결정된 건 아니다.

예상 사망 시간이 10일 정도로 고정된 벨리알과 세레나가 되지 않게 된 센과는 전혀 다르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까? 아니면…… 고정된 운명이 아니니, 벨리알이나 센의 운명보다는 바꾸기 쉽다는 뜻일까?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

탁자 아래로 내려 꾹 말아 쥔 내 손등 위로 따뜻한 체온이 와 닿았다.

카일이었다.

그는 침묵을 깨뜨리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아직 벨리알과의 담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곧고 무뚝뚝한 시선은 줄곧 앞을 향한 채였다.

그러나 부드럽게 다가온 손은 내 손등을 가만히 쥐고, 엄지로 손끝을 가볍게 쓸었다가 이내 살짝 힘주어 쥐었다.

단단하면서도 안정적이었다. 차갑게 굳어 있던 긴장감이 느릿하게나마 풀어질 만큼.

“단, 블레이크 기사단은 함께 움직이지 않습니다. 영지 단위의 지원도 아닙니다. 저는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의 이름으로 움직입니다.”

영지에 끼칠 정치적인 영향을 조금이라도 줄이겠다는 뜻이다.

벨리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영지 단위의 지원까지 바라지는 않았을 테다. 오히려 그편이 더 설명하기 애매하기도 하니까. 제 사람들을 아끼는 카일이 기사들을 위험한 곳에 내몰 리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이름으로든 큰 지원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겠군요.”

“…….”

“제게는 이 ‘사냥’에 참여할 명분이 없습니다. 필요하지도 않고.”

벨리알이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군요.”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주십시오.”

카일의 서늘한 목소리에 벨리알의 녹색 눈동자가 이채를 품었다.

벨리알의 수려한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상당히 자신만만한 게, 그런 이유쯤은 얼마든지 만들어 주겠다는 듯했다.

벨리알이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구리로 만든 메달은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였으나 상당히 묵직해 보였다. 그 안에는 모래시계와 눈동자, 태엽이 음각돼 있었는데 섬세하면서도 묘하게 섬뜩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였다.

“무법 지대의 마법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향로를 정했다는 뜻이겠지요.”

“서리의 마탑…….”

그 어떤 법으로도 옭아맬 수 없는 집단. 그야말로 무법 지대의 주인인 그들은, 호시탐탐 북부로 내려올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랜 숙적인 거겠지.

카일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그 메달을 가져가 손에 쥐었다. 마법사들이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고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건 다른 문제였을 테니까.

벨리알이 낮게 말했다.

“형님께서는 마법사들과 손을 잡았다, 카일. 이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아.”

“…….”

“세 명의 마법사가 붙잡혔다. 하지만 지하 감옥에 가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체스틸 남작처럼 피를 토하고 죽었다더군. 부검 결과, 그들은 왼쪽 맨 아래 어금니가 모두 부서져 있었어.”

“이 사이에 독을 숨겨 두었군.”

“그래.”

카일은 그들을 비웃지조차 않았다. 그저 그들의 지독함에 넌더리가 난다는 듯, 눈가를 일그러뜨렸을 뿐이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내가 침묵하는 사이, 벨리알이 이어 말했다.

“내가 이 정쟁에서 진다면, 다음 황제는 로렌츠 형님이 될 거다. 그리고, 마법사들에게 사냥을 도와준 값을 치르겠지. 마법사단이 정말 원하는 게 뭘까.”

“…….”

“이 정도로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나?”

카일이 탁자 위의 메달을 꽉 쥐었다.

증오와 분노로 떨리는 손에는 힘줄이 희게 두드러질 정도였다. 마치, 내 손을 잡아 주었던 손과는 별개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충분해.”

그렇게 카일은, 정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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