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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카일 전하. 벨리알 전하께서 잠깐 뵙자고 하시는데요. 안에 계신가요?”
돌연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우리는 그야말로 불에 덴 사람들처럼 화들짝 놀라서 떨어졌다.
‘……미, 미, 미친.’
목 위로 열이 확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뭘 하려고 한 거지? 진심인가? 하마터면 카일하고 키스할 뻔했다고!
이건 햄스터에게 귀엽다고 입술을 들이대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카일을 좋아하는 건 맞는데, 이렇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건 좀……!
“전하?”
문 너머의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센이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재차 문을 두드렸다.
“안 계신가? 이상하다. 아침까지는 침실에 계실 거라고 했는데…….”
그러자, 카일이 얼른 대답했다.
“안에 있다. 들어오도록!”
나는 여전히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아무리 상체가 좀 멀어졌다지만, 여전히 반쯤 안겨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걸 바로 말하면 어떡해요!?”
신경질적으로 속삭이던 나는 등 뒤에서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펄쩍 뛰어올랐다.
“어머.”
방 안으로 들어선 센이 입가를 가리며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두 분 다 얼굴이 붉은데……. 방이 좀 더웠나요?”
“콜록.”
“…….”
목이 막힌 내가 콜록거리며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자, 카일이 창가로 고개를 스르르 돌렸다.
“죄송해요. 제가 눈치 없는 타이밍에 들어와 버렸네요.”
이럴 때마저 눈치 빠를 필요는 없는데…….
카일도 무안했는지 한차례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바꿨다.
“바깥 상황은 정리됐나?”
“일단은요. 그래서 두 분을 일단 모셔와 달라는 황자님의 부탁이 있었어요.”
센이 차가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빚을 지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전하.”
“…….”
“제안을 들어 보시는 걸 추천하고 싶어요. 상황이 흘러가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종의 약점이 될 수 있어요. 추후 벨리알 전하께서 블레이크 영지에 해를 끼치는 순간, 그걸 막을 만한 방패가 될 수도 있잖아요.”
카일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벨리알의 약혼녀에게서 나올 말은 아니군.”
“정략결혼이잖아요. 서로 이용할 뿐, 어떤 의리를 가진 건 아니에요.”
“센.”
카일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붉은 눈동자는 타박하듯이 센을 바라보고 있었다.
센은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꾹 말아 쥐었다가,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카일 전하는 못 속이겠네요. 맞아요, 신경 쓰여요. 카일 전하께는 좋은 분이 못 되겠지요. 물론객관적으로도 성격이 별로 좋은 분도 아니고…….”
“…….”
“하지만…… 적어도 제가 선택한 사람이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정이라는 게 좀 붙기는 했는지, 요즈음 부쩍 벨리알 전하께서 막다른 길을 앞두고 계신 분처럼 느껴져요. 그 끝에 절벽이 있는 걸 알면서도, 돌아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달려가시는 것처럼 보여요.”
그 말에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 나쁜 기시감이었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켜니 카일이 나를 바라보았다.
“슈? 왜 그러지?”
“…….”
“슈.”
“……아니, 아닙니다.”
내게 몸을 숙이는 카일을 볼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저은 내가 시스템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비슷한 원작 내용! 분명히 이런 내용이 있었지? 어떤 부분이었어?’
그러자, 잠시 고민하듯이 깜빡거리던 시스템이 내게 물어 왔다.
[해당 내용을 정말로 열람하시겠습니까?]
‘판도라의 상자라는 건가.’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손 놓고만 보는 건 싫다. 뭐든지 알아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새파란 시스템 창이 내 시야에 떠올랐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는 막다른 길을 앞두고 있었다.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절벽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이유는 단순했다. 돌아갈 수 없었으니까.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것뿐이었다.]
카일과 벨리알의 운명이 바뀌었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0일 남았습니다.]
“슈!”
카일이 내 이름을 크게 외쳤다. 턱을 붙잡혀 고개를 들자, 그의 흔들리는 눈빛이 나를 샅샅이 살폈다.
“뭘 보는 거지? 미래? 예지몽을 이렇게 갑자기 꿀 수도 있나?”
“…….”
“아니, 무엇을 본 거지? 안색이…….”
정말로, 운명이 바뀐 건가?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시스템을 다시금 불렀다.
‘……그럼 카일은? 카일은 여전히 오래 살 수 있는 거야?’
그러자, 시스템 창이 연이어 여러 개 떠올랐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70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0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70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0일 남았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살 수도 있다.
날짜는 벨리알이 죽을 수도 있는 날과 같았다. 같은 사건에 연루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 센을 따라서 벨리알을 만나러 가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이건 그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뜻이다.
“……도와주지 마세요.”
이기적인 말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내게는 벨리알보다 카일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들은 센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지만, 객기를 부렸다가 둘 다 잃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냥 어쩌다가 재수 없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운이 좋아 이것저것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난 그리 전능하지도, 유능하지도 않으니까.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해도 할 말은 없다.
“전하, 여긴 위험해요. 북부로 돌아가요. 오늘 당장이라도…….”
“슈!”
“벨리알 전하의 일에 더 이상 끼어들지 마세요. 어차피 저희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북부는 북부대로 따로 대비를…….”
카일이 내 이마에 손을 가만히 얹더니 말을 잘랐다.
“센. 잠시 나가서 기다려라. 내가 설득해 보마.”
“……네.”
“나를 염려해서 한 말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벨리알에게 가 있도록. 내가 그쪽으로 찾아가겠다. 십 분 뒤에 간다고 전해.”
“알겠어요, 전하.”
센이 방을 먼저 나가자, 이마를 덮고 있던 손이 내려와 내 뺨을 감쌌다.
카일이 신중한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뭘 봤지?”
나는 잠깐의 침묵 뒤에 대답했다.
“……열흘 뒤, 벨리알 황자님이 죽어요.”
“샹들리에 사건처럼?”
“…….”
“그때도 너는 벨리알을 위해 몸을 날려 막지 않았던가. 그가 죽지 않기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나?”
“그건 맞긴 한데…… 그때와는 좀 달라요.”
나는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내 말이 너무 비겁하게 들리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그땐 벨리알 전하께서 설령 샹들리에에 맞았다고 한들, 다치시긴 하더라도 죽진 않으셨을 겁니다. 제가 본 꿈에선 그랬거든요.”
“음.”
“하지만 부상은 상당했을 거고, 북부에서 일어난 사고였으니 자연스럽게 카일 전하를 탓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 일로 두 황자님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고, 카일 전하 때문에 북부 영지에 불이익이 계속 돌아오고, 사람들이 힘들어지니까…….”
“그렇게 자세히 볼 수도 있군.”
카일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래서, 나를 위해 네가 그 운명에 개입한 거고.”
“……네.”
“이유야 간단하겠군. 그렇게 해야만 내가 안전했을 테니까. 그 말은 곧, 내가 죽을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인 거고…….”
“…….”
“방금,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지.”
“열흘 뒤,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몰라요.”
나는 바짝 마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동행한다면, 전하도 위험해요.”
“슈.”
“아직은 안 돼요. 전하가 없으면 북부도 흔들릴 거고, 저도 갈 곳을 잃어요. 벨리알 황자는 어차피 카일 전하의 아군이 아니었잖아요.”
“하지만, 센이 얽혀 있지.”
“…….”
카일이 나를 달래듯이 엄지로 입가와 뺨 언저리를 가만히 쓸었다.
“운명이 바뀌지 않았나? 북부 축제 때도 그랬고, 네 개입으로 인해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가능했지만, 언제나 성공하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났죠. 샹들리에는 제가 맞았고, 카일 전하께서 받아야 할 습격은 벨리알 전하가받았어요.”
성공은 그렇게 쉽고 만만한 단어가 아니다. 적어도 내 삶에서는 그랬다.
단 하나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려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아득바득 밟고 올라가야 하는지,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를 거다.
그러니까,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성공할 거라고. 이번에도 내가 시스템의 힘을 빌려서라도 운명을 바꿔 보겠다고.
“저는…… 도박하고 싶지 않아요. 거기에 전하가 걸려 있다면 더욱.”
게다가 이번 일은 그저 노력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카일 전하의 목숨을 두고, 다른 사람 목숨까지 한꺼번에 살려 보겠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그러다 둘 다 죽으면, 후회는 누구 몫이죠?”
“슈.”
그가 이마를 맞대며 내게 말해 왔다.
“네게 운명을 바꿀 힘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나를 구하고, 블레이크 영지를 도우려고 하는 것도, 그 힘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도 잘 알겠어. 어쩌면 너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전능한 힘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지.”
“전하. 그건…….”
“그러나.”
“…….”
“그렇다고 해도 모든 일이 네 통제하에 굴러가는 건 아니다. 너는 미래를 보았겠지만,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어. 그리고 나도, 벨리알도, 센도, 너도. 매 순간마다 숱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지.”
“…….”
“둘 다 죽는다면, 그건 우리의 선택일 뿐이다. 그 순간에도 너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후회할 필요는 없어.”
내가 꺼낸 건 오만한 말이었다. 나는 지금 그들을 이야기 속 존재로 납작하게 대했다. 그들에게는 이게 삶일 텐데도.
그들에겐 그들만의 의지가 있고, 자신의 삶에 갈림길이 나타났을 때 어디로 나아갈지 정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굳센 영혼을 가진 카일을 좋아했다. 전에도, 지금도.
“나는 벨리알의 이야기를 들을 거다. 그건 특별히 형제의 정을 느껴서가 아니야. 센의 행복을 위해서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거절하겠지만, 그건 적어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에 판단할 일이야.”
“……네.”
“같이 갈 테지?”
마치 내 대답을 알고 있다는 투였다. 허리를 가볍게 당겨 안은 손길이 다정했다.
내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저 아니면 누구랑 같이 가시려고요.”
“하하.”
카일이 짧게 웃으며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동행을 제안하듯 손을 내밀어 왔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고, 그보다 더 꽉 쥘 수 없을 만큼 힘주어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