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게임 속으로(1권) (1/36)

1장. 게임 속으로

모니터에 엔딩 화면이 띄워졌다. 나는 그제야 찌뿌둥한 몸을 쭉 늘이며 스트레칭했다. 움직일 때마다 뼈에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온몸이 로봇처럼 삐걱거리고 있었다. 이제 한계다.

나는 결국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앓는 소리가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사실 오늘은 친구로부터 ‘학원 로맨스’라는 게임의 CD를 받은 지 꼭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즉, 게임에 빠져 산 지도 벌써 그만큼이 흘렀다는 이야기였다.

‘학원 로맨스’는 요 근래 온갖 커뮤니티를 뒤흔들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게임이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들으면 나잇값을 못 한다, 남자답지 못하다는 쓸모없는 평가를 들을 법한 비주얼 노벨 장르의 미연시 게임. 그러니까 미소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너는 남자애가 무슨 그런 게임을 하냐, 심지어 남자 캐릭터를 공략하는 게임이냐, 너 솔직히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냐.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듣는 일이야 비일비재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 무례한 사람들의 말을 굳이 되새기지 않기로 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나야 남자고 여자고 전부 다 좋아하는 바이니까. 그중에서도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는 전제가 들어가 있긴 하지만…….

각설하고 어쨌든 그 게임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내리 투자하고 이제야 침대에 누운 참이었다. 솔직히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체력이 딸려서 못하겠다. 저질스러운 체력이 아주 조금 원망스럽긴 했지만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하면 되지, 뭐.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주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다시 플레이 해 봐야지. 오랜만에 승부욕을 자극하는 게임이었다.

“근데 이거 히든 캐릭터가 나오긴 하는 건가?”

피곤한 눈을 감으니 방금 전까지 보던 게임의 화면이 아른거렸다. 막상 누우니 다시금 컴퓨터 앞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나도 참 중증이지 싶었다. 그때 순간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핸드폰이 지이잉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울렸다. 누가 봐도 귀찮은 기색으로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핸드폰을 집어 드니 핸드폰 화면에 ‘서준영’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응. 왜.”

-받네? 게임 다 했냐?

잠긴 목소리로 아니, 하니 전화기 너머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이 게임은 아직 출시되진 않은 게임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것을 하게 된 것은 이 게임을 출시한 회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 서준영의 덕이 컸다.

-대단하다. 너도.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받아.

눈을 비비적거리며 질린 기색이 역력한 말을 듣다 보니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나는 대충 그의 말에 대꾸하고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원래 집중하면 좀 그렇잖아. 잘됐다. 나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왜?

“이거 히든 캐릭터 나오긴 나오는 거야? 오류 난 것 같아.”

-오류?

나는 심드렁히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학원 로맨스’는 다른 미연시 게임처럼 잘생긴 캐릭터를 공략하는 게 메인이었는데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바로 공략 캐릭터 열 명 중 세 명이 히든 캐릭터라는 점이었다. 아직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없기에 게임 도중 내가 발견해야 했다.

하지만 거의 열 번의 플레이를 했음에도 히든 캐릭터는커녕 머리카락도 발견하지 못한 나는 잔뜩 골이 난 상태였다. 이쯤 되면 게임에 오류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거다.

-아……. 그거 일곱 명 기본 공략 캐릭터들 다 공략 끝나면 나온다고 하던데, 다 공략한 거야?

나는 누운 자리에서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 마지막 일곱 번째 캐릭터 공략을 마친 참이었다. 중간에 히든 캐릭터 찾아보겠다고 샛길로 새지만 않았으면 진작 끝났을 텐데…….

나는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지금 막 공략이 끝났으니 이 다음번에는 히든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피곤이 싹 가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런 건 빨리 좀 얘기해 주면 안 되냐.”

-야, 너 그쯤 되면 병이야.

“응, 알아.”

-자고 일어나서 해. 너 일주일 동안 잠도 거의 안 잤지?

“어어, 아냐. 한 번만 더 플레이하고.”

-……너는 진짜……. 그게 그렇게 재밌냐?

“원래 잘생기고 예쁘면 보기만 해도 재미있어.”

무심하게 서준영의 말에 대답하며 나는 결국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끊어. 나 히든 캐릭터 한 번만 보자.”

-……다시 내가 너한테 게임 주면 사람이 아니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고 그래.”

나는 킥킥 웃었다. 어차피 또 게임 나오면 줄 거면서 꼭 그러지. 컴퓨터가 재부팅되고 있었다.

-그래, 방학 때 실컷 즐겨라. 마지막이다. 겨울 방학 때쯤 되면…….

“시끄러워. 끊어.”

-참나. 알았다. 끊어. 나 들어가 봐야 해.

“응. 고생해.”

곧 미련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핸드폰을 다시 침대 위에 대충 던져두고 나는 아직도 뜨끈한 CD를 다시 한번 컴퓨터에 넣었다. 그러니까 기본 공략 캐릭터들 다 클리어하고 나면 히든 캐릭터도 볼 수 있었다는 거지?

컴퓨터 화면에 학원 로맨스의 메인 화면이 떴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작하기’에 마우스 커서를 가져가 클릭했다. 조금은 조급한 손짓이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하지만 이상하게도 화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우스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 컴퓨터가 멈췄나. 짜증스레 입을 비죽거렸다. 한 번씩 꼭 이런다니까. 별수 없이 강제 종료를 위해 본체 전원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껐다 켜면 되니까,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하지만 막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모니터가 하얗게 변하며 새로운 안내 창이 떴다.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다행히도 막 버튼을 누르기 직전 컴퓨터가 정상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이제 히든 캐릭터를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다만 그 기대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전에 게임을 시작할 땐 그런 안내 창이 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네’를 클릭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야가 하얗게 밝아졌다.

“전학생……?”

눈이 부셨고 그래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눈 깜빡할 사이에 내 방 안에서 학교 복도 같은 곳으로 내가 옮겨졌는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당한 마음에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내 눈으로 직접 봐도 믿기지 않았다. 이곳은 분명히 학교였다. 잠이 온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대로 잠들어 버린 걸까? 그래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이 정도면 기면증 아닌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가자. 교무실에 데려다줄게.”

하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마 나와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무척 훈훈한 외모의 남학생이 어색하게 입매를 올리는가 싶더니 나를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뭔지도 모르고 앞서서 걸어가는 남학생을 나는 일단 홀린 듯 따라 걸었다.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고 저 남학생의 행동과 말, 그리고 얼굴에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익숙한 것 같았다. 그래서 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절대 훈훈한 외모라 따라간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여기가 교무실이야.”

“아, 고마워.”

어느새 다다른 교무실 앞. 예쁘게 웃는 남학생을 보며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 학생은 내 멍청한 인사에 손사래를 치고는 금세 내 앞에서 멀어져 갔다. 뭐가 고마운 거지, 나는. 웃어 줘서 고맙다는 건가. 나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눈앞의 교무실 팻말을 가만히 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다시금 방금 전 느꼈던 기시감이 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봤던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게임에서 본 것 같은데.

교무실로 오는 길, 내 기시감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야 방금 전까지도 열 번이나 반복했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어떻게? 나는 잠이 든 걸까? 방금 전까지 했던 게임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코끝으로 은근한 봄 향기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생생한 꿈을 꿀 수가 있다고?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 교무실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모름지기 긴가민가할 땐 부딪혀 보는 게 상책이다. 드르륵 낡은 문소리를 내며 교무실의 문이 열렸다. 낯선 학생 한 명이 교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여러 시선이 모였다. 나는 조심스레 교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김민수 선생님 계신가요.”

이게 내가 생각한 그 게임이 맞다면 이미 열 번은 봤던 도입부였다. 대사는 이미 줄줄 꿰고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창가 쪽 안경을 쓴 남자가 자리에서 반갑게 일어섰다. 2D에서 지겹도록 봐 왔던 그 얼굴 그대로라 나는 하마터면 헛웃음을 칠 뻔했다.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이쪽으로 와.”

“네. 안녕하세요.”

“그래. 아,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이…….”

말끝을 흐린 남자의 얼굴 앞으로 현실이 아님을 일깨우듯 익숙하지만 이질감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플레이어님의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꿈인지 뭔지 분간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지금 게임을 현실처럼 하고 있다는 것.

멍청한 얼굴로 앞만 보고 있는 나를 선생님은 의아하게 보고 있었다.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내가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근데 무슨 이름을 말해야 하지. 무심코 든 생각에 나는 내 스스로를 내려다봤다. 나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남학생 교복을 입고 있었다. 원래 게임에서는 여학생이 남학생 캐릭터들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됐지만, 나는 원래 모습 그대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구석에 놓인 거울로 한 번 시선을 돌렸다. 역시 내 얼굴이었다. 조금 신기한 건 앳된 열여덟 살 때의 얼굴이란 점이겠지.

“한지헌입니다.”

결국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굳이 이름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냥 말로 해도 되는 건가, 아주 작은 고민을 해 봤지만 다행히도 눈앞에 있던 안내 창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래, 지헌아. 곧 조회 시작할 테니 같이 올라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는데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교무실 주변을 훑어보자니 내가 보고 지내던 현실과 다를 바가 없어 더욱 혼란스러웠다.

꿈인가. 내 꿈이 언제부터 이렇게 디테일하고 생동감 넘치게 진행됐지. 별의별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 상황을 알지 못하는 선생님은 발 빠르게 교무실을 벗어나고 있었다. 일단은 그 뒤를 졸졸 따랐지만 꿈인지 아니면 게임으로 들어온 건지는 아직까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순간 복잡해졌던 머릿속을 나는 빠르게 정리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곳이 게임 속임을 더욱 실감하게 했다.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누구 하나 예쁘고 잘생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여기서 살고 싶다. 참 철없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실까지의 거리는 금방이었다. 2학년 3반, 낡은 팻말이 걸려 있는 교실 앞에 서자 그제야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들어가자.”

어찌됐든 이게 꿈이든 게임 안이든 그렇게나 열심히 공략했던 캐릭터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곧 드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교실의 문이 열렸다. 왁자지껄하던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선생님이 먼저 들어가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금세 조용해졌다.

교탁 옆에 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현실과의 위화감 없이 생생하기만 한 교실 덕에 정말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전학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역시나 다들 훈훈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는 거겠지.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다 무심코 시선을 맨 뒷자리로 옮겼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창가 쪽의 맨 뒷자리. 그 자리는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공략 캐릭터가 앉아 있을 자리였으니까.

“아.”

심장이 갑자기 터질 듯 뛰었다. 한번 꽂힌 시선이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찢어진 눈매에 일자로 다물린 입술, 날카로운 콧날에 딱 어울리는 카키 빛이 감도는 어두운 머리카락. 게임을 하며 몇 번이나 봐 왔던 그 일러스트와 똑 닮은 남자. 강수하가 무심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무척이나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머리로는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게 어려웠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강수하가 먼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제야 깊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순간 다시금 드르륵거리는 낡은 문소리와 함께 뒷문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듣기 좋은 목소리를 내며 교실 안으로 들어선 이를 본 나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기 시작해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모든 건 두 번째 공략 캐릭터 김현의 등장 때문이었다.

밝은 갈색 머리에 동그랗지만 조금은 새침하게 올라간 눈. 그리고 살짝 올라가 웃는 것처럼 보이는 입꼬리까지.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서글서글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었다.

교탁 옆에 뻘쭘하게 서 있던 나와 눈이 잠깐 마주친 김현이 머쓱하게 웃으며 제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 나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한지 동그랗게 뜬 눈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까지 울려 왔다.

“소문이 돌대로 돌아서 다들 알고 있겠지만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새 학기도 아닌 애매한 시점이라 적응하기 힘들 테니 많이들 도와주길 바라고, 지헌아. 소개 한번 해 볼까?”

“아, 네.”

아마도 무척이나 멍청한 얼굴이었을 것 같았다. 강수하와 김현을 번갈아 보고 있던 나는 누가 봐도 티 나게 움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눈앞에 아까 나타났던 안내 창이 띄워졌다. 이번에는 세 가지 선택지가 보였다.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너무나 생생해 믿기지 않지만 이곳이 가상 현실 게임 안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선택지는 무척 중요했다. 그러니까 내가 공략할 대상의 틀을 잡는 첫 번째 장면이라고 할까.

[아, 안녕. 자, 잘 부탁해. 음……. 나는 한지헌이야.]

가장 첫 번째는 더듬거리며 수줍은 듯한 기색을 띠는 것이었다. 이것을 택하면 내가 낯을 많이 가린다는 선생님의 판단하에 학교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현의 옆자리로 가게 된다.

[안녕. 나는 한지헌이야. 많이 어색하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두 번째. 생글생글 웃으며 자연스러운 소개로 내가 굉장히 활발하고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럼 이번에는 무뚝뚝하지만 제 사람은 잘 챙기는 강수하의 옆자리로 가게 된다.

[한지헌…….]

마지막으로 무신경한 듯한 얼굴로 이름 석 자만 떡하니 내놓는 선택지는 안타깝게도 아직 중2병을 고치지 못했구나 하는 선생님의 판단하에 맨 앞 반장의 바로 옆자리에 안착하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1번이냐 2번이냐의 문제였다. 그 두 가지의 선택지를 두고 나는 가만히 서서 고민했다. 둘 다 좋은데 어떡하지. 누굴 선택해야 하는 거지. 한 명을 선택하면 다른 한 명이 아쉬워져 나는 발까지 동동 굴렸다.

[3, 2, 1.]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나는 결국 선택지를 고르지 못했다. 멍하니 고민하던 내 눈앞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더니 순식간에 선택지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눈만 도르륵 굴리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래도 낯을 많이 가려서 소개하기 어려운가 보네.”

“……아.”

얕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름은 한지헌이고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집안 사정이 있어서 갑작스럽게 학기 중에 전학 오게 되었다고 해. 그러니 너희들이 많이 도와줘야 할 거야.”

“네.”

“아무래도 적응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음……. 수하랑 현이가 같이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차츰 땅으로 내려가던 시선이 빠르게 올라왔다. 수하랑 현이? 동명이인이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히 내가 생각하는 그들일 터였다. 사실 기회를 놓쳤으니 당연히 두 사람의 옆자리로 가지 못하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기대에 찬 시선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말에 다행히도 김현과 강수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겨 보고자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지헌이는 일단 수하 옆자리 비었으니까 그쪽으로 가서 앉으면 되겠다. 현이는 그 옆자리로 옮기면 좋겠는데.”

둘 중에 하나를 고르려다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게 된 상황이었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누른 탓에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고개 숙인 내 어깨를 선생님이 두드렸다. 나는 그런 선생님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수하의 옆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애써 헛기침을 해 봤지만 그래도 웃음이 자꾸 나와 참아 내기 어려웠다.

간단한 전달 사항을 이야기한 선생님은 나를 잘 챙겨 주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반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금세 반 안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힐긋거렸지만 선뜻 내 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대신에 자리를 옮기기 위하여 이쪽으로 다가온 김현이 내게 살갑게 말을 붙였다.

“안녕, 지헌아.”

“응? 응. 안녕.”

씩 웃는 얼굴에 어쩐지 몸이 배배 꼬였다. 그냥 인사를 건네기만 했을 뿐인데도 가슴께가 간질간질거렸다. 김현은 내 옆자리와 이전 자리를 부지런히 오고 갔다. 그것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강수하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검은 속눈썹이 아래로 깔리는 걸 본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건 마치 조건 반사와 같은 거였다.

“응. 안녕.”

최대한 멀쩡하게 보이려 노력했지만 인사를 하며 흔든 손이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손은 흔들지 말걸. 말만 할걸. 그런 별 쓸데없는 후회가 드는 첫 인사였다. 하지만 강수하는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다 옮겼다!”

한참을 짐을 나르던 김현은 안 되겠는지 결국 책상을 통째로 옮겼다. 그러고는 뿌듯하게 웃으며 옆자리에 안착했다. 만족스레 웃는 김현을 보니 나도 웃음이 났다.

“강수하랑 인사는 했어?”

김현이 강수하를 의심스레 보며 내게 물었다. 분명 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표정이었다. 어쩐지 고개를 저어야 할 것 같았지만 인사를 한 것은 사실이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 진짜? 입 꾹 다물고 있을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야.”

강수하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김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너 이미지가 좀 그래’ 단호히 덧붙였다. 나는 가만히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목소리도 좋고 미간을 찌푸려도, 장난스럽게 웃어도 다 잘생겼다. 말도 안 될 정도로. 혹시 이거 캡처는 안 되는 건가. 아쉬운 생각까지 들었다.

“수업 준비나 해.”

강수하가 단호하게 김현을 끊어 냈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 듯 김현은 제 어깨를 으쓱하며 책상 서랍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문학이었다.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슬그머니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비어 있다.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무게감이었다.

“책 없어?”

“……응.”

“같이 보자.”

강수하가 나를 슬쩍 보더니 책을 가운데로 밀었다. 책 속 정갈하게 되어 있는 필기에 은근히 마음이 동했다. 손가락은 또 왜 저렇게 길어. 사람 설레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고마워.”

“응.”

머쓱하게 강수하가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아무도 몰래 숨을 들이마셨다. 양옆에 내가 방금까지 보던 공략 캐릭터들이 앉아 있다는 건 쉽게 적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흐르는 대로 끌려오다 보니 어느새 곧 수업이 시작하려는 듯 종이 울렸다.

심장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끔뻑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다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쁠 것은 없었다. 곧 아주 단순한 생각이 들었다.

“왜?”

“아, 아니야.”

계속 쳐다보자 강수하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나는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했으니까. 스스로의 단순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상황이 돌아갈지는 조금만 더 지나면 알 수 있겠지. 나는 원래부터가 안일한 인간이었다.

***

지루한 수업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 만에 듣는 고등학교 과정 수업인지. 마지막으로 들었던 게 적어도 5년은 더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1교시가 끝난 후 교과서를 전부 받게 되어 이제 불편하게 책을 가운데에 두고 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옆을 바라봤지만 나만 그런 모양인지 강수하는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 가운데에 두고 있을 때가 좋았는데.

흥미 없는 수학 수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칠판을 보던 것을 접어 두고 강수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하는 공부도 곧잘 하고 또 열심히 하는 캐릭터였다. 그래서인지 칠판을 보고 있는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반면 김현은…….

“아…….”

무심결에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칠판을 보고 있는 김현 때문이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눈을 뜨고 조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교실로 들어오는 봄바람에 김현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모든 것이 꿈이라기보다는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에 무게가 실렸다. 우리나라 게임 산업이 언제 이렇게까지 발전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사실 게임인 쪽이 조금 더 나았다. 왜냐하면 꿈은 언제 갑자기 깨게 될지 모르나, 게임이면 적어도 엔딩까지 이렇게 지낼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게임이라 생각하는 추가적인 근거는 눈앞에 보이는 화면들이었다. 예를 들면 ‘정보’ 창 같은 것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창을 바라보며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몇 번을 봐도 썩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모니터에서나 봤던 것을 내 눈앞에서 보고 있다니.

띄우고자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띄울 수 있었다. 나는 정보 창에 있는 남자 친구 탭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략 캐릭터들에 대한 호감도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러 번 게임 플레이를 했기에 굳이 보지 않아도 대충 감이 와서 확인하지 않고 있었지만 왠지 수업을 듣고 있으니 뭘 해도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지금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게임은 총 열 개의 호감도를 채워야 했다. 보통 첫날에 짝꿍이 되면 강수하가 호감도 하트 반 개, 김현이 한 개였으니까 둘 다 그만큼만 올라갔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바로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강수하와 김현 두 사람의 이름 옆에 각각 하트가 두 개씩이었다. 예상과 다른 하트 개수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물음표 세 개로 가려져 있는 누군가였다. 이름조차 모르는 이의 호감도가 한 개나 올라가 있었다.

……히든 캐릭터? 정신을 차리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이었다. 그거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누굴 만난 거지? 안타깝게도 선뜻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갑작스런 전개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깊은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타이밍 좋게 칠판에 열심히 수학 문제를 적고 있던 선생님이 뒤돌아섰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낌새가 좋지 않아 나는 황급히 정보 창을 껐다. 설마 오늘 온 전학생한테 저걸 풀라고 하진 않겠지만 그냥 느낌이 쎄했다. 방금 머릿속에 가득했던 히든 캐릭터에 대한 생각은 접어 두고 나는 눈치를 살폈다. 은근히 손에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오늘 전학 온 친구 있지?”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선생님의 그 짧은 물음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향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전학생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에 선생님이 씩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여느 호러 영화보다도 그 웃음이 더 무서웠다.

“전학 오자마자 나와서 문제를 풀어 보라고 할 순 없고.”

하지만 다행히도 선생님의 아량은 넓었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졸업한 지 한참이었다. 고등학교 수학 문제가 기억이 날 리 만무했다. 애초에 고등학교 때도 수학을 제일 싫어했다. 나는 수포자였다고.

“전학생 양옆에 앉은 두 사람이 나와서 풀어 볼까?”

반쯤 졸고 있던 김현의 입에서 헐 하는 소리가 나왔다. 강수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아, 선생님 왜…….

하지 못한 말을 꺼내고 싶은 입이 달싹거렸다. 다행히도 내가 입을 열기 전 강수하와 김현이 일어섰다. 나는 어쩐지 미안한 기분을 느끼며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칠판 앞에 선 녀석들이 거리낌 없이 분필을 집어 들었다.

사실 강수하야 그럴 줄 알긴 했었지만 김현은 진짜 의외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수학 문제를 풀어내고 있는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순간 미안한 감정도 잊고 입을 벌렸다.하지만 내 시선은 그 칠판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도 푸는 거지만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게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두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할 수 있겠지만 족히 185센티미터는 넘어 보이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넓은 등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나 때문에 저 앞에서 문제를 풀고 있는데 자꾸만 그런 쪽으로만 생각이 튀었다. 나는 괜히 애꿎은 머리를 헤집었다. 그사이 둘은 벌써 다 풀었는지 분필을 내려놨다. 문제만 덜렁 있던 칠판에는 어느새 풀이 과정과 답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잘했어. 들어가 봐.”

두 사람이 푼 문제를 슬쩍 본 선생님이 만족스레 웃었다. 나도 웃었다. 아마 다른 의미의 웃음이었을 테지만. 두 사람이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자마자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선생님은 짧게 인사하며 복도로 빠져나갔고 교실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이 모든 일이 나 때문에 벌어진 것 같아서 난 둘에게 어색한 사과를 건넸다.

“미안.”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던 김현이 먼저 손사래를 쳤다.

“뭘 어떻게 해도 시키셨을 거야.”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수하와 김현이 손쉽게 풀어놓고 온 수학 문제가 여전히 칠판에 적혀 있었다. 아무리 캐릭터라지만 중간이 없네, 애들이. 뭐 하나 모자란 게 없어. 새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세상이 현실감이 넘친다고 생각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현실감은 무슨, 이렇게 비현실적이어도 되나 싶을 정도인데.

나는 웃으며 의자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강수하는 어느새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 듯 책을 꺼내고 있었다. 책상에 놓인 책을 흘깃 보니 생물책이다. 아, 이과야? 난 망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 수업 생물이야?”

“응. 책은 있어?”

“응. 아까 다 받았어. 가방에 넣었나.”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지만 찾는 책이 나오지 않아 가방을 뒤적거렸다. 딱히 빈 사물함이 있지 않아서 나중에 선생님께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동안은 가방에 넣어 두면 되니까, 뭐.

한참을 가방 속을 뒤적거리자 드디어 생물책이 눈에 띄었다. 그것을 책상 위로 꺼내고 바로 다시 가방 지퍼를 닫으려는데 속에 든 것이 너무 많아 무거웠던 탓인지 순간 손에서 가방이 미끄러졌다. 손에서 벗어난 가방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리가 너무 컸는지 교실 안은 정적이 흘렀다. 나는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놀라 그대로 멈춰 있었다.

“놀래라.”

김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제야 교실을 감쌌던 정적이 사라졌다. 강수하가 바로 미어터질 듯 꽉 차 있는 가방을 내 대신 들어 가방 걸이에 걸었다.

지퍼가 채 닫히지 않았던 채로 이리저리 흩어진 책은 김현이 정리했다. 그때까지도 멍청하게 있던 나는 빠르게 책 더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내가 할게.”

“응.”

대답은 했지만 김현은 책을 정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뻗었던 손을 거둔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원래 플레이어가 여자라서 그런가. 과한 친절에 어쩐지 좀 뻘쭘해졌다. 하지만 나와 달리 두 사람 다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어, 새콤달콤이다.”

내 가방에 책을 넣은 김현이 어쩐지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아마 가방 속에 있던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근데 저게 왜 가방 안에 있지?

멍청한 생각을 하던 머릿속에 문득 게임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게임에서는 둘 중에 한 사람하고만 짝꿍이 된다. 지금도 따지고 보면 강수하와 짝이긴 하지만. 어쨌든 짝꿍이 되고 어색함을 버티지 못한 플레이어는 슬그머니 그 짝꿍이 된 녀석에게 새콤달콤을 내민다. 친하게 지내자는 일종의 뇌물 같은 거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자 좀 어이없어졌다. 나한테 그거 하라고 가방에 넣어 놓은 거야? 그러니까 게임의 스토리 진행을 위한 소품 같은 걸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김현이 집어 준 새콤달콤을 손에 들었다. 어차피 둘 중한 사람에게 주는 용도로 내 가방에 들어 있던 것 같긴 한데……. 근데 누굴 주지?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강수하는 썩 흥미 없는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고 김현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강수하에게 준다.]

[김현에게 준다.]

그때 눈앞에 아까 전 그 선택지가 다시 한번 띄워졌다.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선택지까지 뜨니 어쩐지 되게 중요한 부분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 기억해 보면 이 새콤달콤을 준다고 해서 호감도가 특출 나게 더 올라가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리고 이미 내 예상보다 두 사람 다 호감도가 많이 올라가 버린 상황이라 누구를 줘도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는 김현을 바라봤다. 반짝반짝 거리는 얼굴이 안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먹을래?”

대번에 김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새콤달콤을 내민 내 손이 덜덜 떨렸다. 그렇게 웃는 건 반칙이지.

“진짜?”

“응.”

“고마워.”

눈웃음을 지으며 새콤달콤을 받아 간 김현이 그대로 껍질을 까서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저렇게 좋을까. 기분이 좋은지 흥얼흥얼 거리기까지 했다. 순간 안 줬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나는 만족스레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왠지 뿌듯해졌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왼쪽 뺨이 따가울 정도로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강수하 때문이었다. 나는 살짝 눈치를 보며 강수하에게 시선을 옮겼다. 강수하는 나와 눈이 툭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왜?”

내 물음에도 강수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쳐다본 건가? ……왜?

“맛있다.”

김현이 입을 우물우물거거리며 중얼댔다. 나는 다시 한번 강수하를 봤다. 한번 시선을 돌린 뒤로 강수하는 다시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새콤달콤 하나뿐인데…….”

사실 강수하가 새콤달콤이 먹고 싶어서 쳐다봤다고 하면 이상하긴 하지만 지금은 마땅히 생각나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내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닐 거 아냐.

내 말에 강수하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당황으로 물든 얼굴을 하고서.

“먹고 싶어서 그런 거 아냐.”

그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한 나를 강수하가 민망한 얼굴로 마주했다.

“새콤달콤 싫어해.”

덧붙인 말이었다. 나는 눈을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가 달리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다른 대안이라도 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나는 겨우 입을 달싹였다.

“그럼 다른 거 먹을래? 매점 같이 가 주면 사 줄게.”

내 말에 강수하가 어이없이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김현만 줘서 그런 게 맞았구나.

***

이 게임이 플레이되는 기간은 게임상 3개월이었다. 4월에 이 학교로 전학을 오고 6월 30일이 되면 엔딩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현실에서도 3개월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략 캐릭터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한 몇몇의 이벤트를 제외하고는 자동으로 스킵되며 넘어가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도 게임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넘어가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있는 이 공간의 시간은 내가 느끼던 현실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지금 오전 수업을 고등학생 때처럼 모두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무척이나 안타깝게도…….

“지헌아, 어디 아파?”

“어……. 아니. 안 아파.”

나는 얼굴을 쓸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막 울린 참이었다.

“미국 수업하고 한국은 많이 다르지?”

내 속을 알 리 없는 김현이 물었다. 방금까지 피곤함에 지끈대던 머리가 걱정 가득한 그 얼굴을 보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려 갔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좋게 생각하자. 이런 기회가 흔한 기회도 아니고. 나는 찌뿌둥한 몸을 곧게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하지만 수업 시간을 곧이곧대로 들어야 하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아주 조금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내가 이 3개월을 게임 속에서 그대로 보낸다면 내 현실은 어떻게 되는 거지? 3개월 동안 식물인간처럼 잠을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예감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탓이었다. 하지만 금세 그 생각을 떨쳐 냈다. 에이, 설마.

“점심 먹으러 가자.”

오랜만에 수업을 들어서 그런지 몸이 축 늘어졌다. 그래도 오전 수업은 끝났으니까 반쯤은 지났다고 봐야 하나. 나는 강수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조금은 마음 졸인 부분도 있었다. 혹시나 강수하와 김현 중 누구와 점심을 먹을 건지 선택하라는 창이 뜰까 봐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창은 뜨지 않았다.

그러면 이 둘이랑 같이 먹는 건가. 복잡함을 털어 낸 머릿속에 기분 좋은 생각이 자리 잡았다. 왜냐하면 지금 식당으로 가면 새로운 공략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사실 이전에 게임을 할 땐 짝꿍으로 선택했던 사람과 점심도 같이 먹었기에 다른 공략 캐릭터들 중 한 사람밖에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강수하와 김현, 두 사람과 같이 향하는 식당이었다. 그렇다는 건 즉…….

“어, 김준! 장우진!”

두 사람 중 한 명과 짝이 되면 각각 볼 수 있었던 장우진과 김준을 둘 다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밥 먹을 시간이 되어 기분이 좋아졌는지 김현이 방방거리며 두 사람을 불렀다. 먼저 만나 있었던 두 사람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 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는 착각이 일었다.

“어, 누구야?”

“한지헌. 오늘 우리 반에 전학 왔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 턱 막혀 잘 나오지 않았다. 곧 마주칠 것 같아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도 했는데 막상 만나니 말이 안 나왔다. 다행히도 강수하와 김현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누굴 만난다고 생각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해 버린 모양이었다.

“어……. 내가 말 안 했네. 이쪽은 내 쌍둥이 김준이야. 하나도 안 닮았지.”

김현이 생글생글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응, 지헌아. 안녕.”

내 인사에 밝은 얼굴로 김준이 웃었다. 사실 김현의 쌍둥이이긴 하지만 그냥 잘생겼다는 것 빼고는 딱히 닮은 점을 찾기 어렵긴 했다. 이란성 쌍둥이라서인가. 아, 애초에 일러스트를 실물로 보고 있는 건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은 생각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김준은 구릿빛 피부에 시원한 눈매가 매력적이었는데 섹시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는 첫 만남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게임에서 김준은 야구부원이었다. 나름대로 촉망받는 투수였는데 후에 김준 야구 이벤트도 있었다. 기왕 이렇게 실물로 만나게 된 김에 꼭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쪽은 장우진.”

김준과 내가 인사를 나눈 후 강수하가 장우진을 소개했다. 나는 장우진에게도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었다.

“안녕.”

장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웃으며 인사했던 김준과는 다르게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김현이 장우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런 표정으로 안녕 하면 누가 그걸 인사로 받아들이냐. 싸우자는 거지.”

“내 표정이 뭐.”

장우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웃음 지었다. 장우진은 뭐라고 할까, 음, 츤데레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말을 툭툭 던지는 스타일이었다. 모르고 봤다면 상처받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장우진도 공략을 해 봤었다.

“괜찮아.”

나는 웃으며 장우진을 봤다. 쌍꺼풀 없이 큰 눈에 하얀 편인 피부, 그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 예쁘게 생겼다니까. 장우진의 두 눈이 나를 향했다. 마주한 눈에 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공략을 해 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난 건 아니라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순간 하얗게 된 머릿속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나는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딱히 무어라 말을 하기 어려웠다. 다들 군말 없이 나를 따라왔다. 어째 내가 좀 더 앞서서 걸어간다는 게 민망스러웠지만 얼굴을 보는 게 더 어려워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배고팠어?”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김현이 물었다. 나는 그제야 속도를 늦췄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떡갈비 나온대.”

“진짜?”

“응. 내가 형광펜 칠해 놨어.”

뿌듯하게 자랑하는 김현을 보며 내가 키득거렸다. 귀엽다. 형광펜이라니. 나도 고등학교 때 그런 짓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사실 오래된 기억이라 가물가물했다.

“떡갈비야?”

“어. 많이 달라고 해야지.”

김현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다들 별 반응이 없었다. 아까 새콤달콤도 그렇고 먹는 거 좋아하나 보다. 컴퓨터 게임으로는 잘 느끼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하게 되니 왠지 묘한 기분이었다.

어느새 짧아진 줄에 오랜만에 보는 식판을 들고 차례차례 음식을 받았다. 마지막 요구르트까지 받아다가 넉넉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양옆과 앞으로 네 사람이 앉았다.

뭐라고 할까, 밥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이었다.

“맛있어!”

김현이 떡갈비를 집어 제 입에 넣자마자 즐거운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입 안 가득 집어넣은 덕에 볼이 빵빵했다. 김현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장우진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

“야, 다 먹고 말해.”

안타깝게도 김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분명 장우진은 자리를 잘못 잡았다고 한탄하고 있을 것 같았다. 게임상에서 깔끔한 성격인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해 본 적 있었는데 실제로 보고 나니 그 생각은 확신이 됐다.

구겨진 데 없이 깔끔한 교복도 그렇지만 은은하게 나는 향수 냄새가 그런 생각이 들게 했다.

“너 생각보다 많이 먹는다.”

장우진에 대해 멍하니 생각하던 나는 문득 들린 강수하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강수하가 보였다. 혹시 하는 생각에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어째선지 주위 네 사람이 푸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강수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딴생각하면서 먹다 보니까 다 먹어 버렸네.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떡갈비에 내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게 맛있더라고.”

그 말에 강수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더니 무심하게 내 식판 위에 떡갈비를 옮겨 담았다.

“어?”

“더 먹어.”

나는 가만히 두 눈을 깜빡였다. 나 지금 좀 청혼 받은 것 같은데…….

“저렇게 감동받을 줄 알았으면 내 거 줄걸.”

멍청한 얼굴로 강수하를 보고 있던 나는 김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을 한 김현이 입을 비죽거렸다.

“먹고 더 먹어. 내가 다 줄게.”

그러더니 내 식판 위에 제 떡갈비까지 올려놓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

긴 듯 짧았던 게임 속에서의 첫날이 끝나 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사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5시에 하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그래도 게임이라는 본분을 잊지 않았는지 모든 수업은 끝이 난 상황이었다.

종례까지 마친 아이들은저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메고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교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시끄러운 교실 중간에 앉아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안 가?”

“응. 가야지.”

“집 어느 쪽이야? 비슷하면 같이 가자.”

그런 나를 의아하게 보던 강수하가 딱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며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야……. 집이 어디인지를 모르니까.

좌절스러웠다. 게임에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상세하게 나올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집 주소가 나왔던 것도 아니었으니 어느 방향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주소를 안들 알겠냐마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내 머릿속 생각을 강수하나 김현에게 말할 필요도, 말할 수도 없으니 대충 핑곗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어느 쪽인지는 잘 몰라. 아버지께서 데리러 오실거야.”

“아, 그래?”

“기다려 줄까? 금방 안 오시면?”

아주 고마운 말이었지만 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나 여기서 오늘 노숙해야 할지도 몰라…….

“괜찮아. 금방 오실 거야.”

“음…….”

“진짜 괜찮아. 내일 보자.”

“……진짜?”

괜찮다는데도 마음이 쓰이는지 김현이 재차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

“응. 그래. 내일 봐.”

두 사람은 내게 손을 흔들고 이내 교실에서 빠져나갔다. 강수하와 김현이 가장 마지막에 나갔기에 어느새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창문 밖으로 깔깔 웃으며 지나가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난 집에 어떻게 가지……. 진짜 나 오늘 여기서 노숙하는 건 아니겠지. 속이 답답해졌다.

나는 내 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여기서 노숙을 어떻게 해. 지금이야 아직 빛이 있지만, 어두워진 학교에 혼자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까 전 호감도를 확인했던 정보 창을 띄웠다.

“아, 이건 아닌가.”

눈앞의 여전히 괴리감 가득한 정보 창에는 내 정보나 남자 친구 탭 정도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나는정보 창을 다시 끄고 곰곰이 생각했다. 정보 창이 있다면 혹시 설정도 있지 않을까? 나는 방금 전처럼 설정을 생각했다. 다행히도 예상이 맞았는지 방금 전 보았던 창과는 다른 설정이 띄워졌다.

“투명도 조절……. 튜토리얼 보기?”

왠지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이미 하루를 체험한 다음에 볼 만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저기에 집으로 가는 방법도 나오진 않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일단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했다. 그 밑에는 도움말 onoff 설정이었다. 나는 지금 당장 뭘 보는 건 아닌 것 같아 일단 on으로 변경했다. 누르고 나서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싶어 순간 긴장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이런 거 있을 줄 알았는데…….”

설정을 쭉 훑어봐도 내가 찾던 기능은 없었다. 정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튜토리얼을 보면 나올까? 여러 의문이 가득했다.

[교문 앞 기사님이 도착해 있습니다.]

그 순간 짧은 알림이 울리는가 싶더니 오른쪽 위편에 조그마한 알림창이 떴다. 아마 내 생각이 맞다면 방금 전 on으로 설정한 도움말인 듯했다.

근데 기사님? 교문 앞? 몇 번 그 도움말을 곱씹던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확인했다. 교문 앞에 검은색 차가 세워져 있었다. 저걸 타면 집으로 갈 수 있는 건가. 뭔가 의심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내려 두었던 가방을 메고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자동차 앞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타려니 불안해 그 주변에 쭈뼛거리며 섰다. 탔는데 누구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싶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늦게 나오시네요. 학교는 좀 어떠셨어요?”

하지만 차에서 내린 남자의 사람 좋은 웃음에 그 불안함은 단숨에 사라졌다. 진짜 기사님이었잖아. 자연스럽게 나를 호칭하는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괜히 솜털이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임하면서 주인공의 방이 조금 호화스럽게 좋다고는 생각했었는데 완전 부자로 설정되어 있었구나. 새삼 놀라웠다.

“재미있었어요.”

기사님이 차 문까지 열어 준 덕분에 나는 그 호화스러움을 누리며 차의 뒷자리에 앉았다. 앉고 나니 하루 종일 긴장에 안 하던 수업까지 듣느라 쌓인 피로가 확 밀려들었다.

잠깐 뒷자리에서 눈을 붙인 사이 차는 오래 가지 않아 큰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자연스레 차고 안으로 들어가는 차를 멍청하게 보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도착……했어요?”

“네? 네.”

뭘 그런 걸 묻냐는 얼굴로 기사님이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제야 내 물음이 좀 어색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하게 웃었다.

계속 차 안에만 있을 수는 없기에 차에서 내려 일단 집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오고 보니 여긴 그야말로 저택이었다. 그것도 어디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런 재벌 집 같은 대저택.

절로 입이 떡 벌어지는 실내를 둘러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내 방은 어디지……? 딱 봐도 방이 한 두 개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날 이상하게 보는 기사님께 물어볼 수도 없고……. 설마 하나하나 다 뒤져 봐야 하는 건 아니겠지?

[플레이어님의 방은 2층 가장 끝 방입니다.]

다행히도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아까 전 켜 둔 도움말이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작 켰어야 했는데. 머릿속에 궁금한 게 생겼다 하면 바로 답이 오니 기특하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2층으로 올라간 나는 제일 끝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은 내가 여러 차례 봐 왔던 일러스트와 거의 다를 게 없었다. 제대로 찾았구나. 안도감이 들었다.

“근데 텅텅 비었네.”

가방을 책상 위에 던져 놓고 한번 훑어본 방 안은 겉모습만 번지르르할 뿐 안의 내용물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방을 구경하는 일은 한번 둘러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금세 흥미를 잃은 나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아, 튜토리얼.”

그제야 학교에서 봤던 튜토리얼이 떠올랐다. 드디어 혼자 있는 상황이 생긴 터라 딱 지금이 튜토리얼을 보기에 제격일 듯싶었다. 나는 바로 설정 창을 띄우고 튜토리얼을 선택했다. 튜토리얼을 보시겠습니까? 하는 안내창이 눈앞에 보였다.

누가 들어오진 않겠지. 힐끔 문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확인을 선택했다. 들어올 리가 없지.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플레이어 ‘한지헌’ 님 게임 <학원 로맨스>의 튜토리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잠이 온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 보니 이상한 공간 안이었다. 설정처럼 무언가 띄워질 것을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예 공간을 이동해 버린 것 같았다.

“어, 네…….”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대답을 했다. 내가 어디에 대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튜토리얼은 총 세 가지의 챕터로 진행됩니다.]

발을 바닥에 툭툭 부딪히며 듣고 있었다. 그때 학원 로맨스의 게임 회사 로고를 본 따서 만든 듯한 캐릭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상한 공간에 나 혼자 있는 기분이었는데 뭐라도 생기니 그제야 좀 안도감이 들었다.

[먼저 첫 번째, 게임 설정 방법입니다.]

간단한 설명이 시작됐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부분이었지만. 정보 창에서 볼 수 있는 내 정보와 공략 캐릭터들의 호감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타 질문 사항이 있으십니까?]

“어……. 남자 친구 탭 이름 칸에 물음표만 적힌 게 있던데…….”

대충 설명을 끝낸 캐릭터가 묻자 나는 쭈뼛거리며 물었다. 아까 전 남자 친구 부분을 확인했다가 생겼던 궁금함이었다. 사실 예상으로는 히든 캐릭터이긴 한데…….

[물음표가 세 개인 것은 아직 플레이어님께서 그 대상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트가 생겼다는 것은 결국 공략 대상임을 표합니다. 즉, 이 게임에서 공개되지 않은 히든 캐릭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맞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디에서 만난 거지. 스쳐 지나갔나? 우리 반인가? 마땅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어쨌든 만나긴 만났다는 건데…….

나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내가 못 봤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공략 캐릭터인데, 거기에 히든 캐릭터인데 한 번 마주친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리 만무했으니까.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스킵 같은 건 없어요?”

대충 머릿속을 정리한 후 나는 다른 궁금했던 내용을 꺼냈다. 정말 내가 이 고등학교 정규 과정을 다 들어야 하는 건지.

[설정에 플레이 환경 설정이라는 탭이 있으며, 이 탭을 통해서 플레이 속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내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헛웃음을 쳤다.

“아, 있었구나.”

나는 왜 오늘 수업을 그렇게 열심히 들은 거지? 갑자기 현타가 밀려 들어왔다.

“근데 그럼 이게 게임인 건 맞아요? 뭐 여기서 가는 시간만큼 현실도 흐르는 건 아니죠?”

그리고 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만약 내가 이 게임에 있는 시간과 똑같이 흘러간다면 현실의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확인이 필요했다. 불안한 마음에 손가락이 초조하게 움직였다.

[학원 로맨스는 인간의 꿈속을 조작하는 시스템을 처음으로 시행하여 플레이어님께서는 현재 학원 로맨스 가상 현실 베타 테스트에 들어와 계십니다. 만약 게임에서 하루가 지나면 현실에서는 20분이 지나게 됩니다.]

아, 그럼 내가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든 지 하루가 지나면 20분밖에 안 지난다는 건가.

나는 가만히 시간을 가늠했다. 하루를 20분으로 생각했을 때 3개월을 90일 정도로 잡으면…… 30시간 정도인가. 한 번은 깨어나겠는데? 아주 무심한 생각이 들었다.

“꿈을 조작하는 거라면 제가 꿈에서 깨게 되면 어떻게 돼요?”

[그 순간으로 자동 저장되며 다시 한번 게임에 접속하시면 실행 가능합니다. 다만 플레이어님께서 스스로 게임을 종료하실 수는 없고 외부 상황에 의해서 깨게 되었을 때만 게임에서 나가게 됩니다.]

“아…….”

[다만 이 모든 상황은 베타 테스트로 단 한 차례만 플레이가 가능하오니 이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니 단 한 번만 플레이가 가능한 게 아깝게 느껴졌다. 한 번만 플레이하면 아예 못 만나게 되는 캐릭터들도 많은데……. 오늘 네 사람을 만난 터라 나머지 세 명의 공략 캐릭터들은 만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쉬운 마음이 차올랐다.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챕터는 ‘공략’에 대한 것입니다.]

생각에 잠긴 내가 별다른 대답이 없자 더 이상 질문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튜토리얼은 자연스레 두 번째로 넘어갔다.

[공략 대상은 총 열 명으로 기본 공략 캐릭터 일곱 명, 히든 캐릭터 세 명입니다. 플레이어님께서는 공략 대상을 설정하여 그 대상과 이벤트를 세 개 이상 함께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플레이어님에 대한 공략 대상의 호감도가 꽉 찬 하트 열 개이어야만 해피 엔딩에 성공합니다.]

오늘 내가 만난 기본 공략 캐릭터가 네 명이고,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지만 히든 캐릭터도 한 명까지 만나 봤으니 공략 대상 중 절반을 만난 셈이었다.

내 예상으로는 아마 나머지 공략 캐릭터 세 명은 만나지 못할 것 같고……. 그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을 공략 대상으로 설정해야 할 텐데.

가장 처음 누구도 고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 공략 캐릭터들 여럿을 한 번에 공략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여기도 만났다가 저기도 만났다가 왔다 갔다 하다 보니 호감도가 오르내리기를 반복해서 결론적으로는 솔로 엔딩이 났었다. 근데 그건 컴퓨터로 플레이했을 때였다.

혹시라도 베타 테스트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이렇게 잘생긴 캐릭터들을 넷이나 보여 주고 그중에 한사람만 선택해서 공략하라는 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어쩐지 드는 생각에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제가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다 만나면 어떻게 돼요?”

솔직히 희망 사항이었다. 오늘 네 사람을 모두 만나 본 나였지만 한 사람만 딱 집어 공략해야겠다, 하고 정할 수 없었다. 강수하를 보면 강수하 때문에 심장이 벌렁벌렁거리고 김준을 보면 또 김준 때문에 심장이 뜀박질 쳤다. 그럼 기왕이면 다 같이 즐겁게 지낼 수는 없는 걸까? 어차피 게임인데…….

[두 명 이상의 호감도가 꽉 찬 하트 다섯 개 이상으로 넘어갈 경우 그 공략 대상들은 플레이어님이 어장 관리를 하였다고 간주하여 플레이어님을 싫어하게 됩니다.]

왠지 어장 관리에 악센트를 준 것 같았다. 안 된다는 거구나. 어쩌면 당연하게도 내 작은 희망 사항은 단칼에 잘려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게임 시간으로 3개월이 지났을 때 호감도 열 개의 캐릭터가 없는 경우는 공략 실패로 간주되며 솔로 엔딩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내 질문에 간단한 답을 준 튜토리얼은 나머지 부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공략을 할 순 없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천천히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싶었다. 나는 오늘 만났던 녀석들을 찬찬히 다시 떠올렸다.

어……. 역시 아직은 모르겠다. 무척이나 어려운 고민이 될 것 같았다.

[마지막 챕터는 히든 캐릭터에 관한 상세 설명입니다.]

***

다음 날 아침, 아직 가시지 않은 새벽 공기가 차게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아직 졸린 눈을 깜빡이며 교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한창 잠들어 있을 시간인데……. 의도치 않게 고등학생 생활을 다시 한번 겪게 된 게 어이없어 나는 헛웃음을 쳤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복도에는 몇몇의 학생들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청하게 보고 있던 나는 혀를 쯧, 하고 찼다.

어젯밤들은 히든 캐릭터에 대한 정보가 다시 한번 떠오른 탓이었다.

“짜증 나.”

입 밖으로 짜증이 먼저 튀어 나갔다. 어제 들은 내용인데도 똑똑하게 기억나는 튜토리얼 속에서의 설명을 천천히 곱씹어 보니 더더욱 화가 났다. 히든 캐릭터가 그런 의미의 히든 캐릭터였다니. 어이가 없어서 또 헛웃음이 나왔다. 뭣 때문에 내가 열 번씩이나 게임을 플레이했던 거지.

나는 히든 캐릭터를 만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내가 만난 기본 공략 캐릭터만 네 명이었다. 굳이 꼭 만나야 할 필요는 없었다. 만나고 싶지도 않고.

일단 히든 캐릭터에 대한 생각은 접어 두고 드르륵 소리를 내는 교실의 낡은 문을 열었다. 그 소리에 안에 있던 몇몇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인사를 건네니 나처럼 손을 흔들며 반갑게 웃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자 학교에 빨리 오는 편인지 이미 제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강수하가 나를 보며 까딱 눈인사를 했다. 눈부신 아침이네.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 자리에 가방을 풀고 앉자 강수하가 힐끗 나를 보는가 싶더니 다시 제가 보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통은 학교에 일찍 오면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핸드폰을 가지고 놀거나 하지 않나. 나는 책에 시선을 고정한 강수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옅은 카키색 머리가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렸다.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교실에서 가만히 앉아 책을 보고 있는 강수하에게서 차마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슨 책 읽어?”

얇고 긴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던 강수하가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저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저도 모르게 찾아오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읽어 볼래?”

강수하는 내게 제가 읽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게 밀린 책을 보니 머쓱한 웃음이 흘렀다. 책을 읽어 본 게 언제쯤이더라. 잘 기억도 나질 않았지만 나를 곧게 보고 있는 시선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너 다 읽고 빌려줘. 그때 읽을게.”

강수하가 읽던 책이면 재미있겠지 뭐. 아닌가, 오히려 어려우려나? 강수하의 모범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니 남몰래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강수하가 빌려준 책인데 재미없어도 하루 만에 다 읽을 자신이 있었다.

“읽고 줘. 다 읽은 책이야.”

강수하가 살짝 웃었다. 그에 나는 군말 없이 고맙다고 말하며 책장을 가볍게 넘겼다. 제목은 끝없는 이야기. 생각보다 두꺼운 책이라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티 낼 수는 없어 가만히 읽어 내려갔다. 정말 제목처럼 읽어도, 읽어도 끝이 안 날 것 같은 두께였다.

“근데 원래 일찍 와?”

책을 흥미롭게 훑어보던 나는 가방 안에 책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강수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느긋하게 도착하는 게 좋아서.”

그럼 나 내일도 일찍 나와야지. 매일 아침 햇살 속의 강수하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잠을 조금 줄일 가치는 충분할 테니까.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냥 바람에 머리가 좀 날렸을 뿐인데 왜 강수하는 그마저도 화보 같은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얼굴이 뜨끈뜨끈하니 열이 올라왔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응. 금방 오셔서 얼마 안 기다렸어.”

“다행이네.”

나도 모르게 입술이 간질거려서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발끝에 교실 바닥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젤리가 깔려 있는 느낌이었다. 괜히 발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꼭 사랑 고백이라도 들은 것 같았다.

“책 읽고 있었는데 내가 방해한 거 아냐? 다시 줄까? 나 집에 갈 때 주면 되는데.”

이상한 기분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일단 뱉어 냈다. 횡설수설하지는 않았나. 나 지금 자연스럽긴 했었나. 불안했지만 다행히도 내뱉은 말에 문제는 없었는지 강수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아, 그래?”

“어. 너랑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어.”

빨개졌을 것 같아. 내 얼굴에서 푸스스하고 연기라도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증기 기관차처럼.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뜨거워진 얼굴을 가리려 나는 후다닥 칠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거야.

아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 얼굴로는 마른하늘에 비가 온다고 해도 설렐 테였다. 역시 강수하가 좋을까. 나는 다시금 그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특유의 무심한 얼굴이 웃음을 머금고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심장이 찌릿해 급하게 숨을 삼켰다.

“어? 빨리 왔네?”

그 정확한 타이밍에 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급하게 김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눈에도 가벼워 보이는 가방을 멘 김현이 밝은 미소를 띠며 교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예쁘게 휘는 눈매에 방금 전부터 뛰고 있던 심장이 좀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아, 김현도 너무 좋은데……. 누가 들으면 복에 겨웠다며 혀를 찰 것 같았다.

“현아, 안녕.”

“응. 안녕!”

내가 애써 숨을 참으며 건넨 인사에 오늘도 밝은 김현은 환하게 웃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가방을 대충 의자에 걸어 놓고는 드르륵 소리가 나도록 의자를 당겨 앉은 김현이 바로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뭐 하고 있었어? 강수하 재미없는데!”

“응?”

“강수하 말도 안 하고 재미없잖아.”

김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강수하를 놀릴 태세에 들어갔다. 그 말에 강수하가 얼굴을 찌푸렸고 나는 어설피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냐, 말 잘하던데.”

“강수하가?”

내 대답에 김현의 눈이 동그래져서는 강수하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강수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슨 말을 안 했다고.”

“말 안 하잖아. 너 나랑 같은 반 되고 처음에 기억 안 나?”

강수하는 여전히 얼굴을 구긴 채였지만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현이 말한 그 처음을 아마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새 학기 때 강수하와 김현은 어땠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처음에 어땠는데?”

“쟤가 열 마디 걸면 한 마디 겨우 대답해 주던 놈이야.”

김현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진짜냐는 내 물음에 강수하가 거짓말이라고 어느새 태연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거짓말이야. 너 맨날 응, 응, 응만 해서 나 너 ‘응’밖에 못 하는 줄 알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김현은 그때 하필이면 짝꿍이 돼서 힘들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어제오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정하게 말을 붙여 주던 강수하가 그랬다고 하니 썩 상상이 되지 않았다. 김현이 조금 오버하는 걸까? 하지만 김현은 정말 힘들었다는 얼굴이었다.

“진짜야?”

“…….”

“응. 진짜라니까.”

그 단호함에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컴퓨터로 강수하를 공략했을 때 주인공 캐릭터가 ‘아……. 어색해’ 하고 생각하는 대화 창을 여러 번 봤던 것 같았다.

“아! 아침 안 먹었더니 배고파. 지헌아, 아침 먹었어?”

김현은 대답 없는 강수하를 보며 킥킥 웃어 버리고는 의자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방금까지 웃고 있었는데 금세 울상이 됐다.

“난 먹었어.”

“강수하 너는?”

“먹었어.”

“아, 나만 안 먹었어? 배고픈데……. 매점 가고 싶은데…….”

제 책상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김현이 불쌍한 척 칭얼거렸다. 동그란 눈꼬리가 축 처져 입만 비죽거리고 있는 표정이 너무 귀여워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저렇게 말하면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도 매점에 같이 가 줄 것 같은데.

“같이 가자. 나도 매점 구경할 겸.”

“진짜? 좋아! 내가 새콤달콤 사 줄게!”

내 말에 김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김현에게 꼬리가 있다면 신명 나게 흔들리고 있지 않을까. 너무나 밝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김현을 따라 일어서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안 간다고 했으면 어쩔 뻔했어.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니 강수하가 멀뚱하게 우리를 바라보았다. 강수하는 안 가려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눈앞에 어제 봤던 선택창이 띄워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뭘 선택할 게 있나?

[강수하에게 같이 가자고 권한다.]

[김현이 권할 때까지 그대로 둔다.]

선택지를 확인한 내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봐도 김현을 공략할 건지 강수하를 공략할 건지 선택하라는 게 분명했다.

방금까지도 누구를 공략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이 선택지가 유난히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일어서기만 할뿐 움직일 생각이 없는 나를 김현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자 결국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하야, 너도 같이 가자.”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강수하를 공략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이 상황에서 강수하를 외면하고 우리끼리 가자고 돌아서기 민망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내 말에 강수하가 드르륵 하는 의자 끌리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아직 이른 아침이라 조회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교실 밖으로 나서며 나는 녀석들 몰래 정보 창을 띄웠다. 방금 전 선택했던 것으로 혹시 어떤 것이 바뀌었을까 싶어서였다.

남자 친구 탭의 강수하와 김현의 호감도를 확인하니 둘 다 하트 두 개 반이었다. 원래는 강수하가 하트 두 개였으니 방금 전의 선택으로 아마도 강수하의 호감도가 오른 것 같았다. 근데 김현은 언제 올랐지……?

어느새 두 개 반이라는 생각에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섯 개면 어장 관리라고 했는데 이틀 차에 벌써 반을 채웠다. 왜 이렇게 빨리 오르는 거지.

“넌 안 사 줄 거야.”

호감도에 대해서 잔뜩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내 머릿속을 알지 못하는 김현이 강수하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내 어깨에 제 팔을 둘렀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손길 덕분에 그런 복잡한 생각은 빠르게 접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이 마주친 김현을 향해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던지.”

강수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매점 가는 김에 강수하한테 뭐 하나라도 사 줘야겠다. 어제 자기만 안 줘서 서운했던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럼 새콤달콤은 싫다고 했는데 뭘 좋아할까? 무심한 의문이 들어차고 있었다.

[강수하는 커피 우유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도움말이 단번에 정리했다. 이런 것도 알려 주는구나. 신기한 마음에 저절로 웃음이 배어 나왔다.

매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김현이 많이 배가 고팠는지 빠른 걸음으로 먼저 들어섰다. 그 뒤를 나와 강수하가 따라 들어갔다.

“지헌아, 뭐 먹을 거야? 새콤달콤?”

“응. 좋아.”

아주 조금 늦게 들어갔을 뿐인데 어느새 제가 먹을 빵을 한 움큼 집어 든 김현이 내게 물었다. 재촉하듯 반짝이는 눈빛에 서둘러 답하자 김현이 한 손으로 그 많은 빵을 붙들고 새콤달콤도 집어 들었다.

근데 아무리 아침을 안 먹었다지만 저렇게 많이 먹나. 김현 손에 있는 빵을 보며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자라나는 청소년이고 키도 있는데 저 정도는 먹겠지, 뭐.

나는 아직도 모자란 듯 다른 군것질거리들을 유심히 보고 있는 김현을 뒤로하고 커피 우유를 집어 계산했다. 그리고 딱히 뭘 먹을 생각은 없었는지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강수하에게 내밀었다. 순간 강수하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가득 찼다.

“어제 새콤달콤 대신 겸 오늘 책 빌려준 거 답례. 혹시 커피 우유도 싫어해?”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 물어보니 강수하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내가 내민 커피 우유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굳이 두 손으로 받지 않아도 됐는데 싶었다. 눈치에는 저도 무심결에 그렇게 받은 모양이었다. 강수하가 머쓱하게 웃었다.

“고마워.”

“너무 많이 샀나 봐!”

조금은 쑥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강수하를 보며 웃다가 뒤돌아서니 어느새 한 움큼 더 늘어난 빵과 먹을거리를 들고 김현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입을 헤, 벌렸다.

“……어디 쌓아 두려고?”

“다 먹을 건데?”

마치 뭘 그런 걸 묻냐는 얼굴이었다.

***

“밥 먹으러 가자!”

김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누구보다 빠르게 교실 밖으로 달음박질쳤다. 그 뒤를 강수하와 내가 천천히 쫓았다. 점심으로 탕수육이 나온다고 해서인지 김현은 부스터라도 달린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급식실을 향하고 있었다. 아까 매점에서 사 온 거 다 먹어 놓고도 점심시간이 되니 또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따라가기 힘든 김현의 속도에 강수하와 나는 그냥 느긋하게 걸었다. 늦게 간다고 탕수육이 없어지진 않겠지.

급식실에 도착하자 앞쪽에서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김준과 장우진이 보였다.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에 띄었다. 그런 생각은 나만 한 것은 아니었는지 급식실에 들어가다 말고 꽤 많은 학생들이 그 자리에 서서 녀석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연예인이냐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을 둘 다 별로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게 더 놀라웠다.

“김준! 장우진!”

김현이 힘차게 녀석들을 부르더니 두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그래 놓고는 그들이 하는 인사는 듣지도 않고 쌩 지나쳐 갔다. 당연히 멈춰 설 거라고 생각했던 강수하와 나도, 인사를 하려고 손을 들었던 김준과 장우진도 모두 다 당황스럽게 만드는 속도였다.

“뭐야?”

뒤따라 도착한 우리에게 김준이 어안이 벙벙한 채로 물었다. 나는 민망하게 웃었다.

“오늘 탕수육 나온대서 저래.”

내 대답에 김준이 어이없이 웃는가 싶더니 갑자기 미간을 확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당황할 새도 없이 김준이 바로 발걸음을 급식실 안으로 옮겼다. 내가 보기에 그 속도는 김현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빨랐다. 김준은 우리에게 한마디만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치사하게!”

결국 급식실의 앞에는 강수하와 장우진, 그리고 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이쯤 되니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혹시 늦게 가면 탕수육 다 떨어져?”

“글쎄…….”

장우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애매한 대답이라 마음이 조금 조급해졌다. 나는 그제야 급식실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진짜 갔는데 탕수육 다 떨어진 거 아냐? 이제서야 아차 싶어졌다. 나도 뛰어갈걸. 내 걸음이 조급해진 것을 눈치챘는지 장우진이 어이없이 웃으며 내 어깨를 잡았다.

“너도 뛰게?”

“어……. 떨어지면 어떡해.”

“설마 떨어지겠냐.”

태평한 대답이었지만 조급해진 내 마음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장우진에게 어깨를 잡힌 터라 뛰어갈 수가 없었다. 탕수육 못 먹으면 다 장우진 탓이다. 입이 불퉁해졌다.

설마 그래도 김현이랑 김준이 나 못 받으면 한 개는 주겠지. 게임 속에 들어온 지 고작 이틀 만에 진짜 배고픈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탕수육은 떨어지지 않았다. 식판 가득 탕수육을 담고 돌아서자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김준과 김현이 손을 흔들었다.

“치사하게 너희들끼리만 가고.”

“아, 미안. 많이 먹고 싶어서.”

내 불퉁한 말에 두 사람이 민망하게 웃었다. 막상 받고 나니 민망했던 모양이다. 그 주위로 강수하와 장우진도 앉았다. 두 사람은 시종일관 느긋했다. 극심한 온도 차이였다.

“가끔 떨어지거든. 늦게 오면.”

“맞아. 그래도 너희 못 받으면 주려고 더 많이 받아 왔어.”

뿌듯한 얼굴에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너희 같은 애들 때문에 나중에 모자란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 뿌듯한 얼굴을 굳이 망가트리고 싶진 않았다.

“수업은 들을 만해?”

정갈하게 젓가락질을 하며 강수하가 물었다. 누구를 지칭하진 않았지만 분명 나를 향한 질문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사실 거의 안 듣고 속도 조절하고 있긴 하지만…….

“지헌이는 졸지도 않아.”

“어, 꼼짝도 안 하고 수업 듣더라.”

“진짜?”

김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눈빛이 의외라는 의미를 가득 담고 있는 터라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속도 조절을 해 놓고 가만히 칠판을 보고 있는 것뿐인데 그걸 모르는 두 사람이 보기에는 엄청 집중하고 있는 걸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근데 필기를 안 해. 가만히 보고만 있어.”

김현이 여전히 놀라움의 의미를 담고 입을 열었다.

“그건 눈 뜨고 조는 거 아냐?”

“아니거든.”

졸지는 않는다고, 불퉁하게 덧붙인 말에 장우진이 킥킥거렸다. 그냥 놀리려고 한 말임을 알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눈 뜨고 존 것과 진배없었기에 더 발끈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님 말고.”

장우진은 태연하게 대답하고 밥을 입에 넣었다. 어쩐지 얄미웠지만 녀석이 한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지라 나도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 뭐. 내가 진짜 수능 쳐야 하는 고등학생도 아닌데. 어차피 얘네는 내 성적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게임 내에서 시험을 치거나 하는 이벤트는 없었으니까.

“탕수육 더 줄까?”

우물우물거리며 먹던 탕수육이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 다 먹었지. 김준의 물음에 나는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네.”

김준이 다정하게 말했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툴툴거렸다.

“엄마야?”

“잘 먹는 내 새끼 보는 엄마의 기분이 이런 걸까?”

“네 새끼 아니야. 내 새끼야.”

“왜 지헌이가 네 새끼야?”

탕수육 몇 개에 김준과 김현이 투닥거렸다. 근데 좀 욕하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

5교시 수업 시간은 나른했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이 막 지났다 보니 반 애들의 대부분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은 깨어 있는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강수하는 이런 분위기에서도 정갈한 자세로 앉아 수업을 듣고 있었고, 김현은 곧 책상에 머리를 박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앉은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구경하는 중이었다.

사실 별다른 이벤트가 생기는 구간은 아닌지라 시간을 빠르게 조정해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양쪽의 극심한 온도 차이를 구경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기에 이번 수업은 듣고 있을 생각이었다. 정확하게는 수업을 듣는 건 아니지만.

반 전체가 전멸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수업을 이어 가고 계시는 선생님을 멍하니 바라보다 강수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잘생긴 얼굴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다.

“왜”

멍청한 얼굴로 강수하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칠판을 바라보던 녀석이 내게로 고개를 확 돌렸다. 놀란 내가 움찔거리자 눈웃음을 쳐 왔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가지고 있는 노트에 ‘심심해’ 하고 적었다. 결국 강수하가 푸흐, 하고 소리 내 웃었다. 덕분에 선생님이 힐끔 시선을 던졌지만 거의 유일하게 깨어 있다 보니 다행히도 별다른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강수하가 들고 있던 샤프를 움직였다. 심심하다는 내 글씨 밑에 강수하의 정갈한 글씨가 생겨났다.

[공부해.]

점 하나까지 어쩜 저렇게 완벽하게 적었는지. 굉장히 냉정하게 공부하라고 적혀 있는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나는 그 밑에 다시 ‘너 공부해. 나는 공부하는 너를 구경할게.’ 하고 적었다. 강수하의 글씨 바로 밑에 적는 거라 삐뚤거리지 않게 쓰려 부단히 애를 썼다. 물론 썩 마음에 드는 결과물은 아니었다.

내 낙서를 확인한 강수하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하지만 더 이상 내 노트 위로 글씨를 적지는 않았다. 하긴 공부해야지. 나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다는 강수하의 프로필을 떠올리며 혼자 수긍했다. 조금 아쉽긴 했다.

칠판으로 시선을 돌린 강수하를 대신해서 이번에는 이제 아예 책상에 머리를 대다시피 하고 있는 김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완전히 수면 상태였지만 그 와중에도 한 손에는 펜을 쥐고 있었다.

장난을 좀 쳐 볼까 싶어서 그런 김현의 옆구리로 슬그머니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정말 살짝, 정말 아주 살짝 간지럽혔다. 분명히 맨살에 파리가 올라온 정도의 간지러움이었을 것이었다.

“으악!”

하지만 그 정도 간지럼에 김현이 이렇게 큰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너무 큰 소리에 반수면 상태였던 반 애들이 다들 화들짝 놀라며 토끼눈을 한 채로 시선을 집중했다.

저절로 입에서 헉 소리가 났다. 강수하는 어이없다 못해 웃기기까지 한지 입을 틀어막았고 나는 이렇게 격한 반응이 올 거라고 예상치 못한 나머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눈매가 매서워진 선생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뭐야?”

“어……. 옆구리가…… 방금 뭔가……. 죄송합니다.”

아직도 비몽사몽한 것인지 제 왼쪽 옆구리를 붙잡은 김현이 횡설수설했다. 눈을 가늘게 뜬 선생님이 김현이 가리키고 있는 왼쪽 옆구리를 한번 보고는 그 왼쪽에 앉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알아서 자진 납세했다.

“……잠이 오는 것 같아서 깨워 준다는 게……. 죄송합니다.”

“……둘 다 나가.”

선생님은 얄짤 없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현은 아직도 어벙한 상태였지만 일단 나가라고 하니 제가 넘어뜨린 의자를 다시 세우고 고개를 꾸벅이며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복도에 선 김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떻게 된 거지?”

“미안해.”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최대한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김현은 아직 졸린 눈을 벅벅 비비며 나를 보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야 상황 파악을 한 듯 녀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뭐야. 한지헌 때문에 수업 시간에 쫓겨났어.”

“……미안해.”

“하하하. 진짜 웃긴다.”

김현은 배를 잡고 웃었다. 화를 내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는 걸 보면 다행일까? 나는 민망함에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못하고 눈만 굴렸다. 괜히 자고 있는 애를 건드려 가지고. 할 수만 있다면 5분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그런 기능은 없는 건데, 왜.

“하하. 장난이야. 괜찮아. 졸렸는데 잘됐지 뭐.”

김현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올라온 손이라 나도 피할 생각 없이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김현은 내 머리를 흩트리곤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나는 김현과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4월의 복도는 아직 추웠고 벽에 맞댄 등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으, 벽 차가워.”

바로 벽에서 몸을 떼어 낸 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현이 웃으면서 다가와 내 어깨에 제 팔을 둘러 나를 잡아당겼다. 당황한 내가 살짝 버둥거리는데 김현이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가슴팍에 어깨가 닿아 김현이 웃을 때마다 그 진동이 나한테까지 느껴졌다.

“추울 땐 붙어 있는 게 최고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러고 있는 걸 선생님이 본다면 벌주려고 내보냈는데 희희낙락하고 있다고 역정을 낼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품에서 빠져나가는 건 좀 아까웠다. 따지고 보면 안긴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 김현을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복도의 바닥을 뚫기라도 할 양으로 바닥만 봤다.

그 순간 김현의 얼굴이 내 시야로 들어왔다.

“어어?”

“바닥에 뭐 있어?”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진짜 바닥에 뭐가 있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김현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내 시선이 닿아 있던 바닥을 훑었다. 그러더니 ‘아무것도 없는데’ 하고 의아함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응. 그냥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고.”

나는 어색하게 변명했다. 다행히도 수긍이 됐는지 김현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숙였던 고개를 다시 원상 복귀시켰다. 최대한 티 안 나게 심호흡을 하는 방법이 있던가. 없으면 누가 지금 당장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김현은 그냥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현아. 우리 지금 벌 받는 중인데.”

“응? 아, 그런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뱉은 말에 김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 벌 받고 있다는 자각도 없을 것 같긴 했다.

“이상하게 너랑 같이 나와 있으니까 벌 받는 것 같지가 않네.”

김현이 방긋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 말에 나는 무심결에 김현의 얼굴을 한번 봤다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엄청 잘생겼다. 새삼스러운 감탄도 함께였다.

“어……. 지금 너 좀…….”

“응?”

“나한테 반한 것 같은 눈이었는데!”

장난기가 다분한 투로 내뱉은 말이었다. 분명히 장난인 걸 알았으면서도 나는 유난히 당황했다.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김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니거든!”

“……어. 장난이야.”

유난스러운 부정에 김현이 당황한 듯 웃었다. 덕분에 나는 밀려오는 민망함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너무 격하게 부정했나. 기분 나쁘진 않았을까. 쭈뼛거리며 나는 슬그머니 다시 김현에게 다가섰다. 슬쩍 다가오는 나를 김현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미안, 너무 열정적으로 부정했다.”

“알긴 아는구나. 나 좀 상처받았잖아.”

그러면서도 녀석은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이 게임 진짜 너무 좋긴 한데…… 심장에 엄청 해로운 것 같아.

***

게임에 들어온 지 3일 차 되던 날의 체육 시간. 보통 고등학교 2학년들의 체육 시간은 적당한 수행 평가만 진행하고 자습을 주는 경우가 다반사겠지만, 여기는 게임 안이었다. 애초에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덕분에 자습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기에 우리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와 있었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아직 쌀쌀하긴 하지만 햇볕이 쨍쨍해 몸을 움츠려야 할 정도의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늘 선생님이 짝 피구 하라는데?”

운동장 스탠드에 강수하, 김현과 함께 앉아 있던 나는 반장이 들고 온 소식에 문득 한 가지 이벤트를 떠올렸다. 타이밍 좋게 저 멀리서 자신의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는 김준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지금 그 이벤트 하는 건가? 번쩍이며 든 생각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짝 피구 좋아해?”

올라갔던 입꼬리를 빠르게 꾹 눌렀지만 그 찰나의 표정을 봤는지 김현이 물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짝 피구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내 생각이 맞다면 이 짝 피구는 강수하, 김현, 김준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이벤트였다.

“모이래!”

반장은 선생님 앞에서 우리 반을 향해 소리치며 손짓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운동장 한가운데로 걸었다. 아무래도 정황상 그 이벤트가 맞는 듯 보였다. 기대감에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운동장에 모인 우리는 각각 남녀로 나뉘어 일렬로 섰다. 짝 피구라는 게 남녀가 짝지어서 하는 게임이다 보니 인원수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쭉 열 맞춰 서 보니 컴퓨터로 플레이했던 대로 두 개의 반이 다 인원수가 맞지 않았다. 세워 놓고 보니 인원수가 맞지 않자 선생님이 얼굴을 찌푸렸다.

“안 맞네.”

무책임한 말투로 중얼거린 선생님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슬그머니 웃음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내 앞에 선택창이 띄워졌기 때문이었다.

[우리 반에서 한 명 저 반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요!]

[누군가는 남남 커플이네.]

[(멀리서 눈이 마주친 김준에게 반갑게 손을 흔든다.)]

내 첫 공략 캐릭터는 김현이었다. 그래서 처음 이 이벤트가 발생했을 때 고심 끝에 두 번째 선택지를 선택했었다. 왠지 다른 선택지는 김현이 김준에게 달려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민 끝에 선택한 두 번째 선택지에서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내가 선택지를 고르자마자 김현은 ‘아, 그러네. 그러면 선생님 제가 김준이랑 같이 할게요!’ 하고 말하더니 정말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준에게로 달려가 버렸다. 아마도 제가 아닌 다른 녀석이 남의 반에 가서 남남 커플을 하게 되면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착한 마음씨에서 비롯된 행동인 것 같았다.

그 상황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헛웃음을 치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덕분에 이제 어떤 선택지가 누구와의 이벤트로 연결되는지를 모두 다 알고 있었으니까.

“선생님. 우리 반에서 한 명 저 반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요.”

나는 조심스레 고심하는 표정으로 지나가고 있는 선생님께 말했다. 강수하와 김현이 내 말을 듣고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눈빛이 똑똑하다, 칭찬해 주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 뿌듯하기까지 했다. 선생님은 그제야 손뼉을 한번 치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 꺼낸 네가 가면 되겠다.”

“네?”

“어? 지헌아 그럼 나랑 하자!”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의 선생님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나를 김준의 반으로 보냈다. 김현과 강수하의 당황스러운 반문과 함께 김준이 제 손을 방방 흔들며 목소리를 냈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나는 짝 피구 이벤트가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김준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강수하와 김현도 꽤나 설레긴 했지만 이 이벤트에서만큼은 김준이 최고였다.

나는 쭈뼛거리며 옆 반으로 줄을 옮겨 섰다. 이로서 우리 반과 김준의 반에 각각 남남 커플이 한 명씩 생겨났고 강수하와 김준은 각각 다른 여학생들과 짝을 이루게 됐다. 짝이 된 여학생들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는 있었지만 살짝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래, 그 맘 내가 이해하지. 분명 나도 지금 누군가 보기에 저런 얼굴일 테니까.

“내가 남자애들 공 막을게.”

김준이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등학생한테 이런 생각을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따가운 햇볕 아래에 서 있으니 녀석의 얼굴이 더 섹시하게 보였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김준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조금은 수줍게 그 손에 내 손을 올려 잡았다. 짝을 맺은 녀석과 손을 잡고 움직여야 하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손을 꽉 움켜쥔 김준 때문에 손끝을 떨었다.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이 내 손을 꽉 붙들었다. 운동을 하기 때문인지 손에 박인 굳은살이 여실히 느껴졌다. 어떡하지. 진짜 심장 뛰어. 당연하게도 일러스트로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마음이 일렁였다.

“간지러워.”

김준이 킥킥거렸다. 그러면서 내 손을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아무래도 민망함에 손을 꼼지락거린 것이 간지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겹쳐 잡은 손을 가만히 있으려 다른 손을 움직였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부끄러워서 온몸이 꼬일 것 같았다.

피구 시합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먼저 공격하는 쪽은 지금 내 상황에서 따지고 보면 적 팀인 우리 반이었다. 공을 우리 반에 넘겨준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시작!”

그 호루라기 소리를 기점으로 피구 시합이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꺄악 하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 반 녀석이 시작하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공을 던진 까닭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미처 공을 막지 못한 두 사람이 라인 안에서 나갔다. 큰 소리에 나도 모르게 김준의 손을 꽉 잡았다.

일러스트로 볼 때는 이렇게 공이 위협적일 줄 몰랐다고. 그 어떤 구기 종목도 즐기지 않는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맞으면 진짜 아플 것 같은데.

“겁먹지 마. 너 절대 맞게 안 할 테니까.”

김준은 잡고 있는 내 손을 토닥였다. 그게 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그래, 김준이 막아 주겠지. 왠지 자신감도 생겼다.

공이 몇 차례 왔다 갔다 반복했다. 양 반의 학생들이 우수수 떨어져 라인 밖으로 나갔고, 이제는 라인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쪽은 김준과 나를 포함해 두 커플. 그리고 저쪽은 애석하게도 단 한 커플만 남아 있었다. 그 와중에 강수하와 김현은 이미 떨어져 라인 밖에 서 있었다.

하지만 라인 밖에 학생들이 늘어날수록 안에 있는 우리는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어졌다.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공을 피하는 것도 벅차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나보다 더 열심히 뛰었던 김준의 이마에는 땀이 흘러내렸다.

아, 역시 운동하는 남자 최고. 그걸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걸 보면 아마 나도 그때까지는 버틸 만했던 것 같기도 하고.

“꺅!”

라인 밖에서 공을 잡았던 김현이 씨익 웃으면서 김준과 내가 아닌 다른 커플의 여학생의 다리를 향해서 공을 던졌다. 그다지 세게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정확한 방향으로 날아갔기에 여학생 다리에 명중했고 미처 남학생이 공을 막아 줄 틈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 커플도 아웃이었다.

김현은 제가 던져 놓고도 미안했는지 바로 다가가 괜찮냐 물었다. 여학생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제 팀마다 각각 한 커플씩 남았고 그중에 하나가 김준과 나였다.

그때부터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공이 너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인정사정없이 몰아치는 공의 대부분을 막아 내고 있는 김준은 날아다니다시피 하고 있었다.

우리 반 애들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이상하게 김준의 반 녀석들은 좀처럼 공을 잡지 못해서 거의 대부분을 우리 반이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다 막고 있으니 혀를 내두를 만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한계인 듯했다. 김준은 제 반 녀석들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아, 진짜 힘들어. 공격 좀 해라. 공격 좀.”

하지만 그게 제 맘대로 됐다면 우리만 이렇게 공격받고 있진 않았겠지. 나는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게 하려 애썼다. 우리 반도 아니고 나 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거야, 싶었지만 여전히 쉴 새 없이 날아오는 공은 그런 생각도 오래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

그 순간이었다. 아주 잠깐 헛생각을 했던 그때 나를 향해 공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정확히 얼굴에 명중할 것 같은 각도였다. 하지만 너무 놀란 나는 멍청하게 가만히 서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 공에 맞아 쌍코피가 터진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때 김준이 나를 확 잡아당겨 제 품에 안았다. 안긴 그 순간 날아오던 공은 김준이 손으로 쳐 내 버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데굴데굴 굴러 라인 밖으로 나갔다. 사고를 면한 뒤에도 김준은 내 허리를 꽉 안고 있었다. 감고 있는 팔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그 팔에 핏줄까지 서 있었다. 놀라서인지 설레서인지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김준은 그대로 나를 돌려세워 물었다.

“괜찮아?”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붉어진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얼굴에서는 걱정스러운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힘들어서든 부끄러워서든 내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을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몸이 다 화끈거렸으니까. 얼마나 꽉 안았는지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김준에게도 느껴질 것 같았다.

“어? 응. 괜찮아.”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아냐. 맞지도 않았는데 뭐.”

솔직히 말해서 날아오는 공 때문이 아니라 김준에게 안겨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는 것 같지만, 김준은 내가 그것 때문에 놀랐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간 걱정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팔자로 내려간 눈썹을 보이며 김준이 내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흩트렸다.

아, 이러다가는 정말 심장 마비로 쓰러질 것 같았다. 일러스트로 보면서도 발을 동동 굴리며 좋아했던 장면이었는데, 그걸 내가 실제로 보았으니 이렇게 멍해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어.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김준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아웃.”

그때였다. 선생님의 짧은 한마디가 들렸다. 이해하지 못한 내가 그제야 김준에게서 고개를 돌리니 내 다리 근처에 공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게 보였다.

“저 맞았어요?”

“어, 너 맞았어요.”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했다. 아마도 그사이에 우리 반이 다시 공격권을 가져가 조용히 공을 던졌던 듯싶었다. 맞은 느낌도 안 났는데. 머리를 긁적였다. 당황한 듯 보였던 김준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우리 둘만 남아 있었던 터라 너무나 어이없이 져 버렸다.

“아, 뭐야. 지헌이 너 엑스맨이었던 거 아냐? 내 혼 다 빼놓고 일부러 지게 하려고?”

“아니야. 진짜 아니야!”

장난기가 다분한 말에 나는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에 김준이 ‘알아, 알아’ 대답하며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한껏 설렜던 마음이 다시 한번 동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오래 느낄 새도 없이 피구 시합이 끝나자마자 강수하와 김현이 내게 다가왔다.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괜찮아? 안 놀랐어?”

아마도 아까 전 날아온 공에 녀석들도 여간 놀란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혹시나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는 기색이었다.

“야, 공은 내가 다 맞았는데 나는 왜 걱정 안 해 줘?”

김준이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준 말이 전혀 틀린 데가 없는지라 나는 민망하게 웃었다. 사실 지금은 내가 아니라 공을 다 쳐 낸 김준 손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김준의 손끝을 당기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어? 아, 괜찮지 그럼. 장난이야. 장난.”

하지만 오히려 걱정스러운 내 말에 김준은 당황한 듯 보였다. 녀석들이 킥킥거리고 웃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공이랑 대충 정리하고 들어가.”

오늘은 정말 만사가 귀찮은 듯 선생님이 말하고는 누구보다 빠르게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세수라도 하고 들어가야겠어.”

“응. 이따 봐!”

“응!”

김준은 해맑게 손을 흔들고는 제 반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나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좀체 진정이 되질 않고 있었다.

***

빠르게 흘러가던 시간이 갑작스레 느려졌다. 불필요한 장면을 빠르게 조절하고 있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이벤트가 발생한다는 뜻이었다.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아 있던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물리 수업이 한창이었다. 오늘의 가장 마지막 수업이었고, 끝날 시간에 가까워져 반 전체가 가수면 상태이기도 했다. 강수하마저도 이번에는 졸음을 참기 어려운 듯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발견한 나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아까운 장면을 놓칠 뻔했다.

하지만 수업은 계속되고 있었고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갔음에도 이상하게 별다른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뭐지? 의아함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수하와 김현은 잠을 이겨 내고 있을 뿐 눈에 띄게 이상한 점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왜 시간이 제대로 돌아온 거지? 이상하다 생각할 때 눈앞에 선택창이 띄워졌다. 그제서야 안심이 돼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선생님, 졸려요. 조금만 빨리 끝내 주세요.]

“……?”

하지만 찬찬히 선택지를 읽어 본 나는 내가 잘못 읽은 건 아닌지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했다. 이게 선택지야? 뭘 위해서 선택하는 건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까지 나왔다.

그래, 좋게 생각해 보자. 내가 저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때 강수하나 김현에게서 어떠한 액션이 취해질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나오지 않았을 선택지일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왜 둘 다 선생님을 향해서 해야 하는 거냐고.

질문도 없고 난 안 졸린단 말이야……. 왠지 울고 싶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얼마 전 전학 오던 날처럼 눈앞에 카운트다운이 나타났다.

[3, 2, 1]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분명히 이번에는 저 카운트다운이 진행되는 동안 선택하려고 하면 선택할 수 있었다. 자기소개를 할 때와는 달랐다. 하지만 정말 이번에는 못 고르겠다. 어느 쪽도 수업 시간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선택지가 사라진 후 잠시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 일어날 텐데……. 나는 강수하와 김현 그리고 선생님을 번갈아 보았다.

“……?”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지? 이거 왜 나온 거야?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히려 내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서 강수하나 김현의 호감도가 올라가지 않고 끝난 건가? 아니면 혹시 내려가 버렸나? 내가 선택을 안 해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나는 정보 창을 띄웠다. 눈으로 확인하는 게 빠를 것이다.

“아…….”

저절로 나오는 탄식에 강수하가 의아하게 나를 힐끗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그저 한숨지었을 뿐이었다. 하트 두 개. 히든 캐릭터의 호감도가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주위를 둘러보며 짜증스레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그 히든 캐릭터는 대체 어떤 포인트에 호감도가 올라가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뭘 알아야 공략을 안 할 텐데, 호감도가 올라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알 수가 없으니 생각을 해 봐야 의미 없는 짓이다.

타이밍 좋게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거의 잠들어 있던 반 애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선생님은 바로 수업을 종료하고 교실을 빠져나갔고 모두가 쓰러지듯 책상에 엎드렸다.

“오늘 종례 없대. 바로 가래.”

어느새 교무실에 다녀온 듯 모두가 널브러져 있는 교실로 돌아온 반장이 말했다. 그제야 반 녀석들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마치 좀비처럼 보여 퍽 우스웠다.

“지헌아. 오늘도 아버지께서 데리러 오셔?”

“응? 응. 그럴 거야.”

“와. 다정한 아버지시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김현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물었다. 기사님이 데리러 오신다고 말하긴 뭐해서 고개를 끄덕이니 저도 나처럼 고개를 끄덕거린다. 귀여워, 진짜.

“기다려 주고 싶은데 나 오늘은 집에 빨리 들어가 봐야 해서…….”

“괜찮아. 얼른 가.”

“응. 내일 봐! 먼저 간다!”

“어. 가.”

두 손을 방방 흔들며 김현이 어느새 다 챙긴 가방을 들고 먼저 반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책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느새 김현에게 인사를 건네던 강수하도 갈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책을 두어 권 손에 쥐고 있는 게 참 강수하다워 웃음이 났다.

“수하도 잘 가.”

“응.”

오늘 아침, 곤란한 얼굴로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말하던 기사님이 떠올랐다. 수하도 가고 나면 녀석이 일전에 빌려준 책이나 읽고 있어 볼까. 시간을 빠르게 스킵하는 것도 좋지만, 슬슬 넘어가고 있는 태양 빛이 교실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분위기를 즐겨 보는 것도 나름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막 생각을 마치고 책을 꺼내려는 순간 어째서인지 갈 채비를 모두 마쳤던 강수하가 메고 있던 가방을 다시 책상 위로 올렸다. 그러면서 머쓱하게 웃기에 나는 녀석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어……. 왜?”

“오늘 아버님 늦으셔?”

내가 좀 오래 기다릴 것 같은 티가 났나? 나는 강수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 좀 늦으실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그 대답에 강수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 줄 태세였다. 혹시 오늘 좀 늦는다고 하셨던 거 이런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 미리 설정된 거였나? 하긴, 생각해 보면 무엇 하나 허투루 일어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강수하는 제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확실하게 기다려 줄 의사가 보여 나는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고이 접었다. 책이야 언제든 읽을 수 있는 거니까.

그냥 걸터앉아 있을 뿐인데도 마치 화보라도 찍는 것처럼 보이는 강수하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이거 컴퓨터로 봤으면 캡처라도 했을 텐데. 게임 안으로 들어온 후 항상 안타까운 점이었다. 캡처가 된다면 아마 내 컴퓨터의 용량이 모자랄 정도로 찍어 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다려 주는 거야?”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강수하가 말없이 웃었다. 강수하는 책상 위에 나는 의자에 앉아 있어 시선을 마주하려면 쭉 올려다봐야 했다.

나도 그냥 책상에 앉을까? 아니, 의자 두고 왜 책상에 앉아 있지 싶었지만 왠지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게 조금 더 멋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나도 역시 책상에 앉을까. 아니다. 분명 똑같은 책상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도 강수하만큼 멋있지는 않을 테니.

“목 안 아파?”

강수하가 물었다. 아무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책상에 앉을지 말지를 고민한 보람도 없이 강수하가 의자로 내려왔다. 덕분에 나는 방금 전까지 내가 했던 생각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잘생긴 애들은 책상 위에 앉든 의자에 앉든 멋있는 거다.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 맞다. 그때 빌려준 책 나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조금 늦게 돌려줘도 괜찮아?”

“응. 천천히 봐. 상관없어.”

“나 책 읽는 속도도 엄청 느려서 진짜 몇 달 걸릴 수도 있는데?”

“어, 괜찮아.”

강수하가 푸스스 웃으면서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강수하가 이런 사소한 스킨십을 하는 건 거의 없는 일이라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럼 나 진짜 천천히 읽는다. 나 분명히 말했다.”

“어. 마음대로 해.”

이상한 기분을 티 내지 않으려 일부러 더 장난 식으로 툭툭 던졌지만 여전히 강수하는 웃는 얼굴이었다. 싸늘해 보이던 눈매가 웃을 때는 어김없이 예쁘게 휘었다.

“왜.”

“응?”

“빤히 보길래.”

방금까지 웃고 있더니 그새 원래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는 저도 나 지금 엄청 빤히 보고 있으면서 싶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잘생겨서 쳐다봤어.”

“어?”

“네가 잘생겨서 쳐다보는 거야.”

내가 너무 솔직했을까? 강수하의 귓가가 순식간에 발갛게 물들었다. 살면서 한두 번 들어 본 이야기도 아닐 텐데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잘생긴 건 잘생긴 거지. 나는 혼자 수긍했다.

“아, 뭐라는 거야.”

강수하는 당황한 듯 붉어진 얼굴로 조금 늦게 대답했다. 그게 귀여워 보여 나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진심인데. 더 얘기하면 싫어하려나. 곧 해가 지며 교실 안으로 햇빛이 깊숙하게 들어왔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눈부시다.”

“응. 엄청 밝네.”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 쪽을 보고 있는 건 나였는데 강수하가 내 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를 등지고 있어도 밝은가?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강수하는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빤히 봐?”

“그냥.”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응.”

아, 진짜 얼굴에 뭐가 묻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민망함에 다급히 얼굴을 손으로 훑었다. 뭐가 묻었지? 딱히 손에 묻어 나오는 것은 없었다.

“이제 없어?”

강수하의 손이 내 얼굴께로 다가오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게 또 이상하게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나는 멈칫했다. 하지만 내게 다가오던 손은 얼굴까지 닿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녀석이 벌떡 일어섰다.

“장난이야. 아무것도 안 묻었었어.”

“……너 그런 장난도 칠 줄 알아?”

생전 장난이라곤 안 칠 줄 알았는데. 민망한 기분을 애써 감추려 내뱉은 말이었지만 강수하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제자리로 돌아간 강수하의 손이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괜히 얼굴을 한 번 더 쓸었다. 방금 전 강수하의 반응이 오묘해서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수하야.”

“어?”

“혹시 너 지금 나한테 반했어?”

나는 이 간질거림을 없애 보고자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능청스러운 말에 잠시 의아해하던 강수하가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아, 넌 진짜…….”

짧은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당연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단호하게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딱히 부정의 의미는 없는 반응이라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내 쪽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장난이야.”

“…….”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나를 보고 있는 강수하의 뒤편으로 마치 후광이라도 비추듯 햇빛이 깊숙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눈이 부셨다. 조금은 떨어져 서 있던 강수하가 다시 내 앞으로 걸어왔다. 저벅저벅 걷는 그 걸음을 따라 내 시선도 움직였다. 그 걸음걸음에 자꾸만 심장이 울렸다.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강수하가 가만히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게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심장께가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예쁘다.”

“……어?”

간지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햇빛이 엄청 예쁘네.”

거짓말. 나는 분명히 붉어졌을 게 분명한 얼굴을 숙였다. 그렇게 곧게 내 얼굴만 보고 있으면서 햇빛이라고 하면 누가 믿어……. 머릿속에는 그런 말이 자꾸만 왔다 갔다 했지만 막상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 올곧은 시선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

어느새 게임 속 첫 주말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었고 지금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컴퓨터로 했던 게임에서는 주말이면 딱 한 번, 그마저도 한 곳에만 갈 수 있었다. 이게 현실과도 같은 여기에서도 적용이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하지 않으니 오늘 방문할 곳도 신중하게 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내가 정한 곳은 그냥 평범한 시내였다. 공략도 중요하지만 오늘 아침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매우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머리 왜 이렇게 길어.”

치렁치렁하게까지 느껴지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는 얇은 흰색의 티셔츠와 연청색의 청바지를 입었다. 사실 옷장 안에 옷도 이것뿐이었다. 그냥 교복을 입고 주말에 외출을 할 수는 없으니 플레이어 배려상 넣어 준 걸까 싶을 정도였다.

옷도 좀 사야겠다. 대충 오늘 스케줄을 가늠하며 방에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기사님이 나를 보며 눈짓했다.

“준비 다 하셨어요?”

“네. 시내까지만 부탁드릴게요.”

“네. 그럼요.”

“아, 혹시 부탁드린 건…….”

“여기 있습니다.”

기사님이 나를 보며 웃으며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그 안에는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사실 게임에 들어왔던 둘째 날. 나는 학교가 끝나고 휴대폰 판매점에 갔었다. 여러모로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현실처럼 할부 원금, 요금제 같은 거 하나하나 따져 묻지 않고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이거 주세요, 하는 상상도 하며 왠지 설레는 마음으로 매장에 들어갔었지만…….

‘법정 대리인이신 부모님이 오시거나 같이 방문하셔야 해요.’

안타깝게도 이렇게 거절당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아니, 무슨 게임에서 휴대폰을 산다는데 법정 대리인이 필요하다고 하지? 너무 리얼한 거 아냐?

게다가 이 게임 안의 부모님은 있기는 한 건지 바쁘다는 이유로 단 한 번도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덕분에 기사님을 통하여 이렇게 개통된 휴대폰을 건네받게 된 것이었다.

일단 쇼핑백 안에 있는 새로운 휴대폰을 꺼내 들며 나는 차 안으로 올라탔다. 예정보다 늦긴 했지만 일단 받긴 받았으니까 뭐…….

빠르게 집을 벗어난 차는 금세 시내에 도착했다. 얼마 만에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멀지 않구나, 하고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제 번호는 휴대폰에 입력해 뒀어요. 볼일 끝나면 연락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기사님은 언제나 그랬듯 친절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멀어지는 차를 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헤어 샵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이 답답한 머리부터 잘라 내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머리 자르시게요?”

헤어 샵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살갑게 건네는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자를 것인지 먼저 묻는 것을 보면 정말 많이 덥수룩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안내해 주는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거울 앞에 앉으니 눈을 찌를 만큼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짧게 잘라 주세요.”

“음, 얼마나요?”

“어……. 절반 이상?”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 이해가 된 건지 전문가 포스를 풍기며 직원분은 내게 가운을 둘렀다. 그리고 머리를 빗고는 너저분한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는 것을 바라봤다. 한 뭉텅이씩 잘려 나가는 머리에 점점 가려져 있던 이마가 드러났다.

“훨씬 낫다. 인물이 사네.”

얼마간의 가위질 후 허전할 정도로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미용실 바닥에 한가득이었다. 직원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어 내고는 가운을 벗겨 내자마자 나는 불편한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거울에 가까이 서서 머리를 잘라 낸 내 얼굴을 확인했다.

나는 열여덟 살에 맞게 아직 젖살이 올라 풋내가 나는 얼굴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답답했던 머리를 잘라 내니 확실히 시원해졌다. 나는 기사님을 통해 받은 아버지의 카드를 내밀었다. 게임에서는 주마다 용돈이 나왔다. 5만 원씩이었는데 사실 공략 캐릭터들의 취향에 맞는 옷이라든지 혹은 지성, 감수성 등의 것들을 올리기 위해 책이나 그림 등을 사기에는 조금 부족한 금액이었다.

뭐, 지금은 딱히 필요한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지금은 게임이긴 하지만 현실과 거의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인지 용돈을 올려 줄 수 있냐, 전해 달라는 내 말에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카드였다. 사실 처음 이 카드를 받는 순간 그냥 게임 속에 눌러 앉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단순 돈 때문만이 아니라 뭐라고 할까,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는 주위 사람들 때문도 크다고 할까. 나는 문득 그 잘생긴 얼굴들을 떠올렸다. 애초에 이 게임이 아니고서야 만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얼굴들.

“생각하니까 보고 싶네.”

게임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바로 학교에 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만약에 여기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냥 월요일로 시간을 빠르게 조절해야겠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주말은 당연히 의미가 없었다.

결제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강렬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옷을 사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렸을 때…….

“한지헌?”

신기하게도 장우진을 만났다.

“……머리 잘랐네.”

서로가 만나기 어려운 장소에서 마주친 터라 당황스러움에 말이 없던 것도 잠시,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장우진이었다. 나는 반가움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별로.”

장우진은 내 눈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나는 씩 웃었다. 플레이 경험상 장우진은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잘했다. 틱틱댄다고 해야 할까? 그래 놓고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상처받은 기색을 보이면 안절부절못하는 성격이었다.

“고마워.”

“……별로라니까.”

별로라는 말에도 개의치 않고 대답하니 녀석이 조금 더 불퉁해졌다. 물론 안타깝게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근데 웬일이야? 놀러 나왔어?”

녀석의 부정에도 내가 별 반응 없이 해맑게 웃자 결국 장우진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그렇게 눈을 피하면서 그런 소리를 하면 내가 어떻게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겠어.

“어. 살 게 좀 있어서 나왔어.”

“진짜? 나도 살 거 있어서 나왔는데.”

장우진은 잠깐 대답이 없었다. 왠지 말하지 않아도 그게 뭐, 하고 대답하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뭐 살 건데?”

장우진이 물었다.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러지? 무심결에 생각해 보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면 항상 넷이서 같이 있을 때만 만났었던 터라 이렇게 단둘이서 이야기 해 본 적이 없었다. 김준이야 워낙에 사교성이 좋은 녀석이라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지만 장우진은 낯도 많이 가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썩 친절한 성격은 아니었다.

나야 플레이를 하도 많이 해서 무척이나 오래 본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장우진은 아니니까…….

나한테 조금의 호감이라도 있으니 내 말에 대꾸해 주고 있는 거겠지.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옷이랑 뭐, 그런 거? 한국 들어오면서 다 버려 가지고 하나도 없더라고.”

“아, 그래?”

“너는?”

“…….”

장우진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녀석이 나를 한번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 생신이라 선물 사려고.”

“뭐 살 건데?”

“글쎄. 좀 보고.”

나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거렸다. 잠시 대화의 흐름이 끊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게임에서 주인공이 장우진하고 어떻게 대화를 했더라.

주인공의 대사를 주의 깊게 보지는 않았기에 좀 새삼스럽게 고민이 됐다. 넷이 있을 때는 별로 그런 생각 안 했었는데.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 이내 생각을 포기했다.

강수하도 김현도 플레이했을 때 어떻게 대화를 했는지는 떠올리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었지. 내 마음대로 한다고 해서 장우진의 호감도가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애초에 이 게임 자체가 내가 주인공이니 녀석들이 조금 더 나를 매력 있게 보게 설정되어 있는 것 같았으니까.

끄떡만 하면 호감도가 오르는 것도 그렇고. 오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모두 다 공략하지는 못한다고 했으니까. 이 잘생긴 얼굴을 내 두 눈으로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럼 같이 가자.”

“어?”

“나 데려가. 응?”

나는 무대포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장우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응? 귀찮게 안 할게.”

“아니, 뭐 귀찮을 건 없는데…….”

내 말에 장우진이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치다 결국을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진짜지?”

“어.”

나는 배시시 웃었다. 첫 주말 토요일은 장우진하고 보내게 되겠구나. 어쩐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근데 선물할 만한 걸로 정해 놓은 건 없고?”

장우진과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의 보폭이 큰 녀석을 따라가느라 종종거리고 있던 내가 어렵사리 옆에 서서 물었다. 그에 장우진이 나를 돌아보더니 걷는 속도를 확 낮춘다.

“말을 하지.”

아마도 내가 힘들게 따라온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어……. 일말의 자존심?”

나는 장난스레 대꾸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너의 다리 길이와 내 다리 길이가 차이가 나서 따라가기 힘들다는 것을 굳이 말하고 싶진 않았다고 할까. 내 대답에 장우진이 어이없이 웃었다.

“음. 좀 짧긴 하네.”

“와, 너 길다 이거지. 지금.”

“아마……. 너보다는…….”

장우진이 슬쩍 내게 가까이 서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웃는 건 또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은근히 디스당한 건 그새 잊고 나는 바보처럼 웃었다.

“놀렸는데 뭐가 좋다고 웃어.”

“어,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래서 뭐 살 건데?”

“……향수나 사 드릴까 생각 중이야. 원래 쓰시던 게 떨어졌더라고.”

“향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향수라는 말을 듣고 보니 장우진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가 떠올랐다. 은은하게 나는 향기가 어떤 향인지 궁금했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다 장우진에게 조금 더 가까이 섰다.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는 나를 녀석이 의아하게 바라보며 한 걸음 물러났다.

“왜?”

“너도 향수 쓰지?”

“어.”

“뭐 써? 엄청 좋은 향기 나. 전부터 궁금했는데.”

나는 한 걸음 물러난 장우진에게 굳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장우진이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말하면 아냐.”

“……그런가?”

하긴 향수 이름은 잘 몰라서 말해 줘도 모를 것 같긴 했다. 나는 그제야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건 또 그래.”

“무슨 또 포기가 이렇게 빨라.”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장우진이 웃음을 흘렸다. 뭐가 웃긴 거지. 멍청하게 쳐다보았지만 막상 녀석이 웃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잘생기면 뭐든 재미있다더니……. 뻘한 생각이었다.

“저기 들어가자.”

장우진은 웃는 나를 힐끗 보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아까처럼 빠른 걸음은 아니었기에 나는 무난하게 종종 걸어 녀석의 걸음을 맞출 수 있었다. 그 은근한 배려에 마음이 동했다.

향수 매장에 들어간 장우진이 진지한 얼굴로 이것저것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하나씩만 맡아 보면 괜찮은데 막상 여러 향기가 섞인 곳에 들어오니 살짝 머리가 아파 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응?”

“아니, 얼굴 찡그리고 있길래.”

향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나를 봤는지 장우진이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 여러 향기 섞이니까 좀 머리 아파서.”

“그래?”

장우진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는 그 길로 카운터로 향했다. 생각보다 금방 골랐네, 쓰시던 걸로 사기로 했나. 뻘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선물 포장까지 마친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나가자.”

“응? 응. 천천히 골라도 되는데.”

“천천히 골랐어.”

나는 일단 고개를 까딱거렸다. 들어온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이미 장우진은 향수 매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조용히 뒤따랐다.

“옷 산다고 했지?”

“응. 근데 이렇게 빨리 사도 돼?”

“쓰시던 것 사는 건데 뭐.”

별로 대수롭지 않은 대답을 하고는 장우진은 또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지 말이라도 해 주면 어디 덧나나, 혼자 걸음을 옮기는 녀석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순간 멈춰 선 장우진이 의아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어디를 가면 간다 말을 해 주고 가면 안 돼? 따라가기도 벅차.”

“……어. 그래. 네 옷 보러 여기 매장 안에 들어갈 거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장우진이 마치 로봇처럼 행선지를 읊었다. 그건 또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워 헛웃음이 터졌다.

“그게 뭐야.”

“왜. 어디 가는지 말해 달라며.”

그에 장우진은 금세 또 불퉁해졌다. 이럴 때 보면 딱 어린애 같았지만, 내리깔았던 두 눈이 나를 다시 마주한 순간 그 생각은 멀리 치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꼭 나를 빨아들일 것만 같은 깊은 눈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야.”

멍하니 장우진의 얼굴을 보고 있던 나를 화들짝 깨운 것은 녀석의 목소리였다. 나는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녀석을 마주했다. 장우진은 웃으며 제 눈가 아래쪽을 톡톡 두드렸다.

“응?”

“머리 자르면서 붙었나 봐. 머리카락 붙어 있어.”

“아, 진짜?”

웃음기 섞인 말에 곧장 손을 올려 녀석이 두드린 쪽을 쓸었다. 하지만 가볍게 쓸어서는 묻어 나오는 게 없어 힘을 실어 털어 내도 봤지만 여전히 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입이 불퉁해졌다.

“떨어졌어?”

“…….”

장우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말없이 내게 손을 뻗었다. 덕분에 나는 바보처럼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손이 다가오는 목적을 알면서도 순간 거리가 가까워지니 긴장감이 차오른 탓이었다.

“떨어졌다.”

목적에 충실한 장우진의 손가락이 닿았다 떨어지자 그 자리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확실히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장우진의 손에는 짧은 머리카락이 들려 있었다.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것을 멍하니 보며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고마워.”

“응.”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로봇처럼 뻣뻣해 보이진 않을까 걱정스러웠으나 장우진은 그냥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신경 쓰였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결국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무슨 말이라도 꺼내 보려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장우진이었다.

“너 향수 안 쓰지?”

“응? 응. 안 써. ……왜?”

무척 뜬금없는 질문에 일단 고개를 저었다. 향수는 왜 물어보지. 아, 혹시 나한테서 냄새 나나? 문득 든 생각에 팔을 코앞으로 가져와 킁킁거렸다. 하지만 별달리 이상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의아한 시선을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장우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물어봤어. 이상한 냄새 안 나, 멍청아.”

“아……. 어.”

그 웃는 낯에 나는 머저리처럼 괜히 머리카락만 흩트렸다. 영 어색한 기분이었다.

“가자.”

하지만 나와 달리 장우진은 어느새 꽤 풀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덕분에 어색하던 감정이 녹아내렸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

일요일 아침, 거울 앞에 서서 아직 어색한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어제 한 머리가 퍽 마음에 들어 괜히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시간이 꽤 흘렀음을 깨닫고 나서야 이내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집 근처를 혼자서 걸어 볼 생각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어제처럼 차를 타고 번화가를 방문할 생각이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늘은 쉬어야 할 것 같다는 기사님의 연락에 생각을 바꿨다. 기사님이 쉬면 당연히 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을 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음에는 조금 걱정스러웠으나 며칠 전 방과 후 교실에서 강수하와 같이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또 다른 이벤트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걱정보다는 기대가 차는 것은 금방이었다.

“여기도 번화가가 있네.”

집 근처를 조금 벗어나니 신기하게도 번화가가 나타났다. 아마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학교가 나올 것 같긴 한데…….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학교에 갈 것은 아니었으니 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좀 출출한데 간식이나 먹을까, 그런 무심한 생각을 하며 걸음을 조금 빨리할 때쯤.

“아! 아까워!”

귓가에 무척이나 익숙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나는 근처 분식집으로 옮기던 걸음을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돌아갔다.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인형 뽑기 기계 앞, 예상치 못한 인물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김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현이었다. 김현은 인형 뽑기가 제 뜻대로 되지 않는지 제 머리를 쥐어뜯는 중이었다. 나는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김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난 탓에 나는 세 걸음쯤을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김현은 내가 보이지 않는지 인형 뽑기 기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녀석이 주머니에서 천 원을 꺼내 기계에 넣었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시도하려는 모양이었다.

기계를 눈빛으로 뚫어 버리기라도 할 모양인지 김현의 눈이 이글이글 불탔다. 나는 그걸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노리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파이리 인형으로 보였다. 기계의 집게가 이리저리 움직이다 하강했다. 불꽃이 달린 꼬리를 위로 한 채 인형 사이에 파묻혀 있는 파이리에 집게가 닿았다.

“……아악! 짜증 나!”

김현이 다시 한번 제 머리를 헤집으며 주저앉았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깝지도 않게 잡지 못한 인형이 툭 떨어졌다.

내 웃음소리에 그제야 김현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녀석과 내 눈이 마주쳤다.

“어? 한지헌?”

“아하하하. 진짜 현아, 너 뭐 해?”

나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물었다. 김현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의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금세 불퉁해졌다.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웃지 마.”

“아, 미치겠다. 귀여운데 어떡해.”

채 가라앉지 않는 웃음을 애써 누르며 한 대답에 여전히 툭 튀어나온 김현의 입술이 민망한 티를 잔뜩 내며 움직였다.

“이 기계가 이상해. 저 집게가 잡았다가 놓는단 말이야.”

그 불퉁한 말에 나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기계를 들여다봤다. 김현이 한 번 더 집게로 들었다가 떨어진 탓에 인형의 위치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이거 잘만 하면 뽑힐 것 같긴 한데…….

“뽑아 줄까?”

“응?”

“파이리, 내가 뽑아 줄까?”

내가 인형에 손짓하며 묻자 김현의 눈이 금세 초롱초롱해졌다.

“뽑을 수 있어?”

“음, 될 것 같은데.”

“응! 뽑아 줘.”

잔뜩 밝아진 얼굴로 김현이 기계에 곧장 천 원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반짝반짝한 눈으로 쳐다보면 좀 부담스러운데……. 이래 놓고 못 뽑으면 어떡하지.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못 뽑으면 그냥 하나 사 주지, 뭐.

“알았어.”

나는 녀석을 향해 웃으며 기계를 움직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실 세계에서 술만 마시면 인형 뽑기 기계를 떠나지를 못했다. 나를 거쳐 갔던 수많은 술주정 중 하나였다. 덕분에 방 안에 술만 마시면 뽑아 왔던 인형들이 꽉 차 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나는 나름대로 인형 뽑기에 꽤 자신이 있었다.

“어, 어, 어? 된다. 어? 나온다! 와!”

집게가 파이리 인형을 잡은 순간부터 김현은 리액션을 끊임없이 했다. 이러다가 못 뽑으면 어떡하지, 걱정스러웠지만 다행스럽게도 파이리 인형은 단번에 출구를 향해 떨어졌다. 아직 실력 안 죽었구나, 어쩐지 뿌듯해졌다.

“와, 대단하다. 나 이거 스무 번이나 해도 못 뽑았었는데!”

“스무 번?”

“응! 네가 짱이야. 진짜.”

김현은 엄지를 치켜들었지만, 나는 헛웃음을 쳤다. 그 정도 돈 쓸 거면 그냥 사지 그랬어. 잔소리가 목 끝에 걸렸다. 하지만 파이리 인형을 들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김현 때문에 결국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그래, 뭐. 좋아하면 됐지.

“근데 지헌이 너 여기 웬일이야?”

파이리를 제 품에 소중하게 끌어안고 즐겁게 웃던 김현이 물었다. 참 빨리도 묻는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여기, 집 근처야. 산책 겸 동네 구경 나왔어.”

“진짜? 집이 여기 근처야? 나도인데.”

“그래? 근데 뭐 하러 나왔어?”

“어……. 원래는 공부를 좀…… 할까 하고…….”

김현이 두 눈을 굴렸다. 나는 미심쩍은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렇게 못 믿겠다는 눈으로 보는 거야.”

“네가 자신 없이 말하니까.”

“음……. 사실 엄마가 집에서 굴러다니니까 좀 나가라고 해서 나왔어.”

쫓겨났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김현의 얼굴에 웃음기가 넘실거렸다.

“근데 너 만난 거 보니까 나오길 잘했다. 밥 먹었어?”

“아직 안 먹었어.”

“잘됐다. 파이리도 뽑아 줬으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김현이 해맑은 얼굴을 하고 내 팔목을 잡아끌었다. 이미 가고 싶은 곳이 있는 모양인지 어디로 갈지 두리번거리는 기색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걸음이 너무 빨랐다. 장우진도 보폭이 커서 힘들었는데 김현은 거기에 빠르기까지 했다. 잡힌 대로 따라가다 보니 심장 박동이 점점 올라갔다. 김현의 걸음은 내게 거의 뜀박질 수준이었다.

숨이 점점 찼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김현을 멈추게 하려 입을 달싹였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 선택지가 떴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김현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김현의 다리를 걷어차고 천천히 걸으라고 화를 낸다.]

[김현의 손을 잡아당긴다.]

사실 생각 같아서는 굴욕감에 첫 번째 선택지를 선택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애써 참아 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러는 것 같은데 여기서 화를 내면 잔뜩 시무룩해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팔목을 잡힌 손 대신 다른 손으로 김현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신기하게도 그와 동시에 김현이 우뚝 멈춰 섰다.

“어?”

“아, 현아. 나 계속 달려왔어. 힘들어.”

“어어? 아, 진짜? 미안해. 몰랐어.”

그제야 멈춘 걸음에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내내 달린 기분이었다. 솔직히 다리 길이 차이의 때문이라기보다는 내 체력이 저질인 게 문제인 것 같긴 했다.

어쨌든 숨을 좀 고르고 나서야 나는 김현을 제대로 바라봤다. 겨우 이 거리를 조금 빨리 걸었다고 헥헥거리는 게 영 민망스러웠다.

“괜찮아?”

“다리 길다고 자랑하냐고.”

나는 민망함을 감추려 일부러 틱틱거렸다. 김현이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덕분에 여태까지도 잡고 있던 녀석의 손을 놓아야 했다. 사실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잡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어딘가 어색해진 김현의 표정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나 이제 괜찮아. 어디로 갈 거야?”

“어어…….”

어쩐지 눈을 굴리는 김현의 시선이 못내 이상했다. 왜 그러지? 그 굴러가는 시선이 제 손을 한번, 그리고 나를 한번 번갈아 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덩달아 나까지도 조금 당황스러워 시선을 굴리고 있을 때 문득 김현이 씩 웃음을 지었다. 종잡을 수 없는 표정 변화였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당황스러웠던 건…….

“어?”

“가자. 떡볶이 먹으러! 떡볶이 먹고 싶어.”

밝게 웃으며 다시 한번 내 손을 잡아 온 김현의 손이었다. 두 손을 맞잡은 김현의 걸음은 아까보다 현저하게 느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까지도 얼떨떨하던 얼굴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손을 잡아 왔다. 그 순간 눈앞에 현실과 괴리감 가득한 도움말이 떴다.

[공략 캐릭터의 호감도가 하트 세 개 이상이 되면 그 공략 캐릭터는 플레이어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게 됩니다.]

……무슨 소리야? 나는 나보다 조금 더 앞서 걷고 있는 김현과 도움말을 한 번씩 들여다봤다. 나는 곧 정보 창을 띄우고 김현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김현의 이름 옆으로 하트 세 개가 눈에 띄었다.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에 순간 김현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고 그를 바라보다 나 또한 마주보며 웃었다. 오묘한 기분이었다. 나를 향한 감정을 이렇게 곧바로 알 수 있는 상대를 보는 기분은.

“응? 떡볶이 싫어?”

하지만 내 속을 알 리가 없는 김현은 해맑았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아.”

아무렴 어떨까. 무척 간질간질한 손끝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

월요일의 아침이었다. 보통은 월요일이라고 하면 얼굴부터 일그러지지만 나는 오히려 더 상쾌했다. 쉬는 주말도 좋지만 곧 학교에서 만날 얼굴들을 떠올리면 평일도 즐거웠다.

게다가 나는 딱히 공부를 해야 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니까.

오늘 아침도 나를 데려다준 차는 교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많은 교문 앞에 서는 것은 민망하다는 내 말을 기억한 기사님의 배려였다.

“다녀올게요. 감사합니다.”

“네. 하교하실 때 올게요.”

언제 봐도 사람 좋아 보이는 기사님을 향해 웃어 보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을 향해 걸었다. 다른 이들이 흔히 등교하는 때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이라 앞은 한산했다.

“지헌아!”

그 한산한 교문 앞을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막 통과했을 때 뒤편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바로 뒤돌아서니 익숙한 두 얼굴이 보였다.

“어, 준아. 현아.”

나는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등굣길부터 쌍둥이들을 만나다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왔다.

“어? 지헌아. 머리 잘랐네?”

가까이 다가온 김준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토요일에. 너무 길어서.”

“엄청 귀여워졌다. 볼살 좀 봐.”

“아, 뭐야. 볼살 별로 없어.”

“아닌데, 엄청 많은데?”

“……헐.”

김준은 장난스럽게 내 볼을 콕콕 누르며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장난에 발끈한 척을 하면서도 그 손길이 기분이 좋아 웃고만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정작 쫑알쫑알거려야 할 김현이 넋 빠진 표정으로 우리를 빤히 보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아, 왜?”

“머리…….”

“응?”

“머리 했네…….”

바보 같은 얼굴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우리 어제 만났잖아.”

“……응, 머리 했네.”

김현은 여전히 그 얼굴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제?”

“응. 어제 우연히 만났거든. 뭐야, 어제 몰랐어?”

“……하하.”

어색하게 웃는 김현의 반응을 보니 정말 몰랐던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눈썰미가 없구나. 엄청 많이 잘랐는데. 어이없이 웃음이 터졌다.

“머리 엄청 많이 잘랐는데, 티가 안 나나?”

“아니. 완전 눈에 띄는데? 몇 배는 귀여워졌어.”

“아, 무슨 소리야.”

김준이 나를 보며 눈웃음치며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저었지만 나쁘지 않은 칭찬에 웃었다. 하지만 우리와는 전혀 상반된 반응으로 김현은 허둥대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어제 파이리 때문에……. 아…….”

그렇게 허둥대면서 꺼낸 말은 결국 파이리였다. 그렇게 인형에 정신이 팔려 있었구나. 나는 짐짓 서운한 척을 했다. 그렇게 서운할 것은 없었지만 당황한 듯 진땀을 빼고 있는 김현의 얼굴이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그랬구나. 나 파이리한테 밀렸구나.”

“아, 어제 김현이 신나서 가져온 인형?”

“응. 그거 내가 뽑아 줬거든.”

“김현 배은망덕하네.”

배은망덕까지야……. 나는 킥킥거리고 웃었다. 어느새 우는 이모티콘을 빼다 박은 표정이 된 김현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이쯤만 놀려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웃으며 김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장난이야. 현아. 나 화 안 났어.”

“……지금 보니까 이렇게 다른데, 나 어제 왜 몰랐지. 미안해.”

“원래 좀 김현이 눈썰미가 없어.”

달래려는 나와 미안해하는 김현과 여전히 김현을 놀리는 김준이었다. 찬찬히 걷다 보니 어느새 교실 근처까지 도착해 있었지만 김현은 여전히 울상이었다.

“그만 놀리고 얼른 가.”

너무 시무룩한 얼굴에 내가 부러 김준을 타박했다. 억울한 기색을 띠며 김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 갈 거야.”

“점심시간에 봐. 준아.”

“응. 김현, 나 간다.”

“……가.”

기운이 빠진 김현은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머리 자른 거 좀 못 알아볼 수도 있지. 뭐가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귀엽다 싶으면서도 저러다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어제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호감도도 감안해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이 높기도 했었고.

“수하도 나 머리 자른 거 내가 말해야 알 거야.”

“아……. 그럴까.”

“응. 준이가 눈썰미 좋은 거야. 많이 안 잘랐어.”

김현의 시선이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사실 좀 많이 자르긴 했지. 거의 3분의 2를 잘랐는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인지 김현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교실의 문이 열렸다. 오늘도 일찍 나온 강수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녕, 수하야.”

“안녕…….”

“어, 한지헌 머리 잘랐네.”

김현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강수하는 단박에 알아봤다. 덕분에 김현은 좌절했고 강수하는 그런 김현을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좌절한 김현은 꽤 오랫동안 시무룩해했다. 그 기분은 점심시간,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식당에 모였을 때까지도 지속되고 있었다.

“아직도 저러고 있어?”

김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김준이 어이없이 웃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데도 당최 풀리지를 않았다.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왜 저러는데?”

영문을 모르는 장우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야, 지헌이 뭐 달라진 거 없어?”

김준은 그 말에 답하지 않고 되레 장우진에게 물었다. 장우진은 머리 자른 날 봤는데……. 말을 할까 말까 하는데 장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어? 너도 모르네?”

어, 그러니까 이미 봤는데…….

“뭘?”

“지헌이 머리 잘랐잖아. 바보 아냐?”

김준의 말에 김현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자른 걸 어떻게 못 알아봐. 토요일에 봤어.”

“아, 진짜?”

“응. 근데 그걸 어떻게 모르지. 만나자마자 머리밖에 안 보이던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장우진에 의해 김현은 확인 사살을 당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말투였다. 그 말에 더 시무룩해졌는지 김현은 이제 거의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장우진이 물었다.

“……쟤 못 알아봤냐?”

“왜 나만 몰랐지.”

시무룩하게 김현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 마음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혼자만 하트가 세 개. 그러니까 감정을 눈치챈다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친구에게 느끼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자각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그런 감정을 느끼는 상대의 변화를 혼자만 몰랐다는 게 아무래도 신경 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김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녀석의 눈이 금세 동그래졌다.

“현아, 나 머리 자른 거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니지?”

“어? 아니! 그런 거 아닌데.”

“근데 왜 한번 제대로 보지도 않아. 서운하게.”

부러 장난스레 꺼낸 말에 녀석이 당황한 듯 나를 마주했다. 살짝 상기된 얼굴이 내가 방금 했던 생각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왠지 그런 눈으로 나를 본다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애써 침을 삼켰다.

“잘 잘랐어?”

“응. 예뻐.”

보통은 들을 수 없는 칭찬이었다. 예쁘다니……. 어색하게 내가 두 눈을 굴렸다.

“응, 고마워. 네가 장우진보다는 훨씬 낫다.”

“내가 뭐.”

“너 보자마자 별로라고 했잖아.”

장우진이 순간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장우진에게 꽂혔다.

“아, 그건…….”

“쟤가 그랬다니까, 현아.”

“……너무했네.”

김현이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완전히 기분이 풀린 것은 분명 아닌 것 같았지만 내가 애써 풀어 주고자 한다는 것은 알아챈 모양이었다. 김현이 배시시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하지만 그와는 상반되게 이번에는 장우진이 불퉁한 표정을 했다. 나는 그저 민망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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