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도망의 끝, 만남 (14/18)

04. 도망의 끝, 만남

“……다비드 님?”

익숙한 연분홍색 머리를 보았을 때 메이브는 숨이 막히는 듯, 헛숨을 들이켜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햇볕이 따사롭게 비추고 있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며, 뒷모습이었던 그가 서서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익숙하기 그지없고, 이따금 꿈에서 찾아오던 그 얼굴이 메이브의 시선에 가득 채워졌다. 가라앉아 있는 연녹색 눈을 마주 보았을 때 막혔던 숨이 토해지며 급히 숨을 몰아쉬던 메이브는 난간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메이브?”

눈앞에 보이는 그 굳은 얼굴이 곧 놀란 표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벌어진 입술에서 메이브의 이름이 불리는 것이 작게나마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메이브는 난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다비드가 배의 난간을 붙잡고 메이브의 두 눈에서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은 채 입을 벌렸다.

“메이브!”

크게 소리치는 그 목소리가 너무 익숙했다. 아니, 언제나 다정했고 감정 기복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목소리가 지금은 몹시 놀란 것처럼, 그리고 당황하고 기뻐하며 메이브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메이브는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허상인지, 실제인지 알 수도 없었다. 메이브는 목덜미부터 흘러내리는 땀에 등 뒤가 진득해질 정도였다.

그런 메이브를 보고 있던 다비드가 빠르게 난간을 놓고 저 뒤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메이브는 순간 다비드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보고 있으니, 그는 저 멀리까지 달려갔다 메이브를 바라보며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 안 돼요!”

다비드가 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메이브가 급하게 소리를 쳤다. 저 멀리부터 향했던 이유가, 빠르게 뛰어 지금 메이브가 타고 있는 배까지 뛰어넘으려고 하는 거였다.

메이브가 놀란 얼굴로 다비드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는 난간을 밟고 메이브가 있는 배까지 뛰어오르려 했다.

하지만 신은 아직 다비드가 메이브를 잡는 걸 허락하지 않는지, 다비드의 주변에 있던 선원이 그런 다비드의 몸을 붙잡고 뛰어오르지 못하게 막았다.

메이브는 출발하며 속도가 올라가는 배에서 점점 멀어지는 다비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메이브! 메이브 님!”

점차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메이브는 힘이 풀린 듯 갑판에 주저앉아 멍하니 다비드가 타고 있는 배를 쳐다보았다.

배가 멈추었으니 앞으로 출발하려면 세 시간 정도의 시간이 메이브에게 남아 있었다. 에보니 영지에 도착했을 때, 메이브는 어디론가 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보다 메이브는 당황스러웠다.

메이브는 이미 자신이 몸을 숨긴 지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기에 다비드가 자신을 이제는 찾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비웃듯 험프리 섬까지 찾아온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네.”

하루, 어쩌면 이 배를 타는 걸 놓쳤다면 꼼작 없이 다비드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메이브는 이 순간 다비드에게 붙잡히지 않은 것을 안도해야 할지, 아니면 더는 도망가는 것을 멈춰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자신의 순결을 가져간 것에 보상해 주겠다던 다비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메이브는 다비드에게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다비드는 머리를 써서 메이브에게 이름으로 내기를 권했다. 메이브는 분명 자신이 이길 거라 생각하고, 그에게 자신의 승리하고 망언을 했으니 말이다.

결국 내기는 다비드가 이겼고, 그는 메이브에게 찾아갈 때까지 기다리라 했으나 그걸 무시하고 도망친 것은 메이브였다.

그랬기에 메이브는 더더욱 이상했다. 도망간 것은 자신이 맞았으나, 다비드는 그것에 대해서 지킬 필요도, 보상을 할 필요도, 짐을 어깨에 질 필요도 없는데 왜 지금까지 찾아오는지 말이다.

“손님?”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메이브가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자 결국 선원 한 명이 메이브에게 다가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메이브를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선원을 한번 쳐다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어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아까 뱃삯을 주면서 받은 열쇠를 움켜쥔 채 방으로 걸어갔다. 그런 메이브의 심장은 마치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빠르게 뛰었다.

방으로 들어온 메이브는 방문을 굳게 잠그고 침대에 몸을 날리듯 누웠다. 그리고 복잡한 머릿속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가라앉히려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왜, 수없이 떠돌아다니는 의문에 메이브는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콘라드가 사라진 것은 다비드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또 얽혀 있는 것일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에 메이브는 결국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침대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메이브가 타고 있는 배가 점점 멀어지자, 먹잇감을 놓친 맹수처럼 흉흉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던 다비드는 자신의 두 팔을 양옆으로 잡고 있는 선원의 몸을 떨어트렸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낮게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가 금세 터져나갈 듯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화를 내리누르지 못해 흐르는 살기를 붙잡지 않은 다비드가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는 선원을 시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위…… 위험해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다비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같잖은 것 때문에 눈앞에서 겨우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메이브를 놓쳤으니 말이다.

“제가 다쳤다 해도, 그것이 당신의 문제는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다비드는 눈앞에 있는 이들을 죽이고만 싶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메이브가 다치지 않고 멀쩡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화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렇다 해도 눈앞에 있는 이들 때문에 잡을 수 있는 시간이 더 늦어졌기에 다비드는 짜증이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주군!”

다비드가 몸을 굽히고 손을 뻗으려 하자 멀리 서 있던 그의 종이 급하게 달려왔다. 그리고 선원의 앞을 가로막고 다비드의 손을 움켜쥐었다.

“선장에게 큰돈을 쥐여 주고 바로 출발한다면 금세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저자가 나를 막지 않았다면 일주일이라는 시간도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거다.”

“속도를 올려서 배의 앞을 가로막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겁니다.”

종은 어떻게든 다비드를 막기 위해 소리쳤다. 그사이 바닥에 엎어져 있던 선원이 덜덜 몸을 떨면서 다리를 움직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벌레만도 못한 행동을 지켜보던 다비드는 굽혔던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선원의 손을 떨어트렸다.

“네가 한 말이 제대로 이행되기를 바라지.”

다비드는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선원 두 명을 지켜보다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은 한숨을 내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선원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아는지,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몸을 떨고 있는 선원을 보며 종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선원은 당연히 위험한 짓을 하려는 손님을 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은 주군의 운동 신경을 알고, 그의 능력을 알기에 맞은편에 있던 배 위로 올라탈 것을 알고 있었으나, 눈앞에 있는 선원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종은 선원을 잠시 지켜보던 고개를 돌려 급히 이 배의 선장을 만나기 위해 뛰어야 했다. 결국 종이 선장에게 이 배에 모든 사람이 탑승했을 때의 돈을 주고 나서, 배가 선박한 것과 동시에 사람을 내리고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주군.”

종은 어느새 나와 뱃머리 앞에서 배가 보이지 않는 방향을 가만히 바라보는 다비드에게 다가왔다. 다비드는 그런 종을 쳐다보지도, 그렇다고 답을 하지도 않았다.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제가 주군께 실례되는 것을 물어보아도 괜찮습니까?”

종은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다비드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수평선이 아닌, 옆에 있는 종을 쳐다보았다.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 묻고 싶다는 건가?”

“예.”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종은 아까 자신의 주군이 찾으려는 자를 만났을 때,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던 것을 잊지 못했다. 다비드는 자신의 종들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메이브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었다.

그에 종은 그자가 누구이기에 그렇게 풀어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는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찾던 분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분의 생김새를 주군께 들은 것일 뿐 이름도, 실제로 본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종은 주군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던 자를 떠올렸다. 그의 말처럼 연한 자색의 눈동자가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것이 오묘했으며, 시선을 빼앗기는 듯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왜 주군이 이렇게까지 찾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종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다비드는 고개를 다시 돌려 메이브가 타고 있을 배가 향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몸을 살짝 기울여 배가 빠르게 달리면서 가르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다비드는 깊은 심해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다비드는 아마 이 말을 메이브에게 했을 때, 메이브는 또다시 그건 동정일 뿐이라고 말할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난날, 메이브의 소식을 단 한 가지도 얻지 못했던 다비드에게 스쳐 지나갔던 메이브를 보았다는 건 신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과 같았다.

이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내리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기는 했어도, 메이브가 출발한 시간에 겨우 30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다비드는 곧 만날 메이브를 떠올리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은 다비드를 모시는 동안 처음 보는 그 표정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세 그 표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주군께서 왜 그분을 몸성히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다비드를 바라보던 종은 어쩌면 앞으로 그분에게 다비드가 휘둘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비드의 잔혹한 면목을 알고 있기에 그분이 제발 더는 도망치지 않고 붙잡히기를 기도했다.

“알겠다면, 이제 놓치지 않게 잡아야 하지 않겠나.”

“……예.”

오랜 시간 옆에서 지켜봐 왔던 종은 다비드가 얼마나 오래도록 기다리고 찾아다녔는지를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섬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혹, 노예 상인에게 붙잡힌 것이 아니냐며 불법 매매를 하는 곳에서 그분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자들을 구해 왔었다.

하지만 그자들을 보았던 다비드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표정으로 이것들은 무엇인지 물었었다. 혹시 노예 상인에게 붙잡힌 것이 아닐까 해서, 그곳을 털고 인상착의가 비슷한 자들을 구해 왔노라 답했었다.

다비드는 그자들을 풀어 주는 것으로 끝냈다. 이것은 다비드만이 메이브가 공작가의 자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풀어놓은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메이브 님, 이제 곧 만나겠네요.”

다비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이번에 붙잡으면 더는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메이브가 또다시 도망간다면, 다비드는 악몽 같았던 꿈속에서 메이브가 자신에게 했던 그 행위를 자신이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메이브가 없어진 지 6개월하고도 보름이 지난 지금, 다비드는 악몽이라 생각했던 꿈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메이브의 목소리, 그 체온, 그 얼굴이 점점 흐릿해짐을 느꼈기에 말이다.

이제는 다비드에게 악몽은 없었다. 그저 메이브를 만나게 해 주는 꿈이었을 뿐이었다.

다비드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비릿한 향을 느끼며, 저 멀리 보이는 배의 형체를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렇게 도망치고, 날아가던 새를 이제는 잡을 수 있다는 것에 다비드의 입가에서 미소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

방 안에 들어가 고민을 하던 메이브는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복잡하게 생각하느니, 차라리 속 편하게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그러다 메이브는 답답한 속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넘기며 정돈했다. 그리고 굳게 닫아 놓았던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문고릴 붙잡고 있던 메이브는 어쩐지 문밖이 소란스러움을 느꼈다.

“자, 잠시만요! 여기는 손님이 계신……!”

당황한 것 같은 목소리로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메이브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귀를 문에 가져다 댔다.

“피해 받은 것은 돈을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작은 목소리로 즐거운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메이브의 귓가에 들려왔다. 제대로 들리지 않고 끊겨서 들리는 것에 메이브는 두 손으로 귀를 감싸 쥐고 나무문에 몸을 밀착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희 배에 피해가 옵니다!”

“그러니, 도와 달라고 말하는 거 아닙니까.”

“손님! 그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

“선원이 문을 두드려 방 안의 사람이 나오면 얼굴만 확인하겠다는 것인데, 그게 어렵습니까?”

“문이 잠겨 있는 방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나무문에 기대어 있던 메이브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작았던 목소리가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느꼈던 메이브가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고민했다.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일까 잠시 고민했으나, 고민은 짧았다. 다비드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나서 메이브는 급하게 뒷걸음질을 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선원이 막는다고 해도 결국 그가 들어오려 하면 들어올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메이브는 당황스러웠다. 분명 다비드를 피해 잘 도망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배에 다비드가 타고 있으니 말이다.

다비드가 빠르게 배로 달려와 고리를 연결해 넘어온 것을, 방 안에 있느라 보지 못한 메이브는 그가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메이브는 그저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생각했으나, 이곳에 숨을 곳은 없었다. 그러니 결국 걸려서 다비드를 만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숨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메이브는 한숨을 머금고 떨리는 다리로 뒷걸음질 친 만큼 앞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괜찮아…… 괜찮아.’

솔직히 메이브는 그렇게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만나게 될 거라면 지금 만나나, 조금 이따가 만나나 똑같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점점 풀어졌다.

왜인지 무서워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한숨을 목구멍 안으로 몇 번이나 삼켜 냈다.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던 땀으로 옷이 축축해졌고,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손에도 땀이 고여 왔다.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손이 미끄러져 문고리를 놓칠 것만 같았다.

“보상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걸로 문제가 해결되는 게……!”

문밖은 소란스러웠다. 화를 참는 것 같은 음색이 메이브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는 눈을 서서히 감았다가 뜨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아까 다비드를 보면서 뒷걸음질을 쳤는데, 지금 다시 다비드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짓고,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화가 났을까, 아니면 메이브에게 익숙한 표정으로 웃으며 다정하기 그지없던 그 목소리로 말을 걸까, 가늠할 수 없었다.

메이브는 문고리를 단단히 움켜쥔 채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찰칵 소리와 함께 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브는 턱턱 막히는 숨을 토해 내고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문을 열고 앞을 바라보았다.

“…….”

저 앞에 서 있는 다비드의 모습이 시선에 닿았을 때, 메이브는 어쩐지 이 공간에 꼭 자신과 다비드만 서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자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텁텁해졌다. 말라 버리는 입에 타액을 모아 삼켜 내고는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다비드 님.”

최대한 목소리를 떨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다.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몇 번이고 생각했고, 꿈에서 보았던 다비드의 이름이 혀를 굴리며 튀어나왔다.

앞의 선원과 실랑이를 하고 있던 다비드의 고개가 돌아가 메이브에게 닿았을 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긴 다리를 움직여 천천히 다가왔다.

그 모습에 뒷걸음질을 치고만 싶었다.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등 라인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만 같았다.

무섭다. 아니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손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메이브는 자신이 잡고 있는 문고리가 생명 줄인 것처럼 힘을 주고 움켜쥔 채로 점점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다비드를 올려다보았다.

그사이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보았던 그 모습보다 더 커다랗게 변한 몸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으나, 웃고 있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다가오는 것에 메이브는 주춤,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메이브 님.”

다비드가 손을 뻗어 메이브가 움켜쥐고 있는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팔뚝에 핏줄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반쯤 열렸던 문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며, 나중에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메이브가 생명 줄처럼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문이 활짝 열리자 다비드가 방 안으로 들어와, 열고 있던 문을 쿵 소리 나게 닫았다.

“…….”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고요한 적막감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메이브는 점점 숨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반쯤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다비드의 두 눈을 쳐다본 순간, 메이브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따금 생각나던 그 얼굴이 보였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은 표정으로 아무 말을 하지 않는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메이브는 지금 이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방금까지 머릿속이 복잡해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비드를 만나니 무슨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바보가 된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메이브 님.”

그런 메이브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다비드가 살짝 입을 열었다. 다비드가 익숙하게 혀를 굴려 튀어나오는 이름을 말하자, 다비드의 앞에 서 있던 메이브의 어깨가 움찔, 떨려 왔다.

“저 안 봐 주실 겁니까.”

분명 다정한 목소리인데도, 그 안에 화가 억눌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메이브는 차마 다비드를 보고 있는 시선을 내리지도, 그렇다고 그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입에 풀이 발린 것처럼 다물어져 좀처럼 떨어지지도 않았고, 몸은 누군가가 밧줄로 온몸을 감은 듯이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메이브, 제가 당신을 찾은 것이 싫었습니까.”

다비드는 한 걸음 더 메이브에게 다가왔다. 그 거리가 귀를 기울이면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졌을 때 다비드는 멈추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다비드는 손을 뻗어 메이브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사라졌던 그 시간 동안 잘 먹고 잘 지냈는지, 신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메이브의 몸이 건강해진 것 느껴졌다. 다비드는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뼈가 만져졌던 그때와는 다르게 다부져진 어깨를 문질렀다.

“메이브 님, 저와 말하는 것도 싫으신 겁니까.”

다비드는 메이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도망갈 수 없게, 문밖으로 나가야 하는 통로를 몸으로 막은 상태로 말이다.

그런 다비드의 행동도, 그의 생각도 알지 못하는 메이브는 몇 번 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눈앞에 보이는 그 얼굴에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어떻게 다비드 님과 말하기가 싫겠어요.”

말하기 싫은 적은 없었다. 단지, 메이브는 다비드가 자신을 잊어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 메이브는 다비드가 자신을 찾아온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왜,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채워졌다.

메이브는 솔직히 다비드가 예기치 못한 실수로 그때를 생각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역시도 썩 좋았던 기억은 아니었을 테니, 잊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메이브가 생각했던 모든 것을 비웃는 듯, 다비드는 자신을 찾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다르게 결국 6개월이 지나 메이브를 찾아왔다.

“그렇다면 왜 도망가셨습니까. 제가 찾아간다고 말했는데 말이죠.”

메이브는 그런 다비드의 모습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살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한다면 다비드는 자신이 왜 메이브 님을 위험하게 만들겠냐고 말할 터였다.

또한, 그 또라이 같던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죽을 일은 없었다. 결국 ‘마이 홀’에 나왔던 메이브가 죽었던 이유는 눈앞에 보이는 다비드를 망가트리며 결국 그의 손에 죽는 거니까 말이다.

이미 이야기는 전부 틀어져 생명의 위험은 없었다. 그렇기에 메이브도 한번은 생각했었다. 정말 도망가야 할지를 말이다.

하지만 다비드가 행복해지는 것은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다비드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메이브는 속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지금까지 맞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에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제가 싫었습니까.”

다비드는 메이브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싫었냐고? 싫지 않았다. 메이브는 그가 자신을 챙겨 주는 것에 고마웠고, 그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다비드가 옆에 있다면 힘든 일이 무엇이든 쉽게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편안하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싫었던 적…… 없었어요.”

메이브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그런 메이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짝 일그러져 있던 다비드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보지 못한 메이브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눈앞에 서 있는 다비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제 옆에서 사라진 겁니까.”

다비드는 다정한 목소리로 메이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죄스러운 기분이 드는 메이브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다비드 님, 저는 그게 당신에게 치욕일 거라 생각했어요.”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과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잊고 싶을 거라고 메이브 혼자 생각했었다. 메이브는 그렇기에 다비드가 자신을 찾아온 것도, 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는지도, 왜 자신이 싫었을지 묻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잊고 싶을 거라 생각했어요. 제가 다비드 님의 치부일 거라…… 생각했어요.”

숨기고 싶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앞으로 다시는 그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메이브는 속으로 되물었다.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되물었을 때, 분명 ‘아니’라는 대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만약 치부였고, 치욕적이었다면 다비드가 마지막에 떠날 때 메이브의 이름을 말하고 에녹가로 찾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찾아왔다가 메이브가 없는 것을 알았다면, 다시는 찾지 않았어야 메이브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던 거다. 하지만 결국 메이브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어쩌면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도 몰랐다.

“제가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까?”

메이브에게 되묻는 다비드는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메이브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가라앉은 채,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묻고 싶어 하는 듯했다. 몇 번 입을 달싹이면서도 다비드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메이브는 그저 고개를 느릿하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비드는 속에서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가기 전 꾹꾹 눌러 담았다. 다비드는 왜 메이브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왜 그것 때문에 도망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에 다비드의 치욕이었고 치부였다면, 메이브는 그것으로 다비드를 협박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지게 되는 거였다. 메이브에게 안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다비드가 그것으로 외려 메이브에게 협박할 수 있다고 해도, 다비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메이브는 그 좋은 카드를 들고, 다비드를 협박하지도 않고 도망을 택한 거였다. 그러니 다비드는 눈앞에 있는 메이브가 더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메이브 님, 저는 그날 신전에서 당신을 처음 만나 첫 교육을 했을 때, 당신을 안았다는 것을 후회한 적도, 그걸 수치스럽고 부끄러워한 적도 없습니다.”

단 한 번도, 다비드는 그것을 싫어한 적이 없었다. 아니, 외려 눈앞에 있는 메이브를 묶어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비드가 생각했던 것처럼 메이브는 그 안에서 다비드에게 의지했고, 그에게 기대었다. 다비드는 그래서 메이브가 도망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도망간다 해도 금방 붙잡아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도 생각했었으나, 메이브는 단순하면서도 연약했기에 다비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오래, 더 꼼꼼히 몸을 숨겼었다.

그렇기에 다비드는 자신을 싫어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서 도망간 줄 알았다. 그 기억이 메이브에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것이었기에 모습을 감추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오롯이 다비드를 생각하며 하는 말이었다. 다비드는 그동안 메이브의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숨었던 그에게 화가 났던 심정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듯 풀어지는 걸 느꼈다.

“제가 메이브, 당신을 책임지고 싶었습니다. 그 안에서가 끝이 아니라, 끝까지 당신이 편안하고 두려운 일 없게 지키고 싶었습니다.”

다비드는 메이브의 어깨를 문지르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메이브의 볼과 귀를 부드럽게 감싸고 숙여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일그러진 메이브의 표정이 보였을 때, 다비드는 고개를 숙여 메이브의 콧잔등에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메이브 님, 콧등에 키스하는 의미를 아십니까?”

다비드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메이브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다비드의 뜻을 알지 못하는 메이브는 갑자기 묻는 다비드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자신을 책임지겠다고, 끝까지 지키고 싶다고 말하는 그 말뜻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말하는 키스의 의미에 메이브는 혼란스러워하며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제가, 당신에게 반했다는 뜻입니다.”

다비드의 말이 끝났을 때 메이브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비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움직여 메이브의 뒷덜미를 손으로 잡아 자신의 몸에 끌어당겼다. 메이브의 몸과 다비드의 몸이 서로 틈이 없이 닿았을 때, 다비드는 손가락으로 메이브의 머리카락을 살짝 헤집듯이 만지고는 그 검은색 머리카락에 입술을 문지르며 작게 키스했다.

“당신과 같이 있고 싶습니다, 메이브.”

다비드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메이브의 얼굴을 들어 올리고 드러난 그의 목에 입술을 문지르며 작게 키스했다. 쪽쪽, 몇 번이고 입술이 부딪히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 울렸을 때 다비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당신을 만지고 싶고, 당신을 가지고 싶습니다.”

메이브는 지금 다비드가 하는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거칠면서도 뜨거운 입술이 부딪히는 자리에 담긴 의미를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외려, 그의 손이 몸에 닿고 떨어질 때마다, 그의 숨결이 목선에 닿는 부분마다, 불에 다 타 버린 심지를 몸에 문지르는 것처럼 뜨거우면서도 간지러웠다.

“그러니 제 옆에 있어 주시면 안 됩니까?”

메이브는 지금까지 다비드의 곁에서 자신이 사라져야지만 그가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애절한 목소리로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하는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만 갔다.

왜, 왜, 수없이 자기 자신에게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이렇게 나아갔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다비드는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보여 주며 자신에게 같이 있어 달라 말하고 있었다.

같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에 같이 있게 된다고 했을 때, 그 마음이 변하게 된다면 상처를 받는 것은 메이브였다. 메이브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거부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감정에 눈을 돌리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다정하면서도 애절한 목소리로, 메이브에게 몇 번이나 말하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다비드의 목소리에 메이브는 바보가 된 것처럼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제가 싫다면, 당신이 필요할 때 불러만 주셔도 괜찮습니다.”

“…….”

“만약 제가 곁에 있는 것이 싫다면, 당신이 위험할 때만 찾아오셔도 괜찮습니다.”

“…….”

“그러니 저를 밀어내지만 말아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메이브 님.”

다비드는 차분한 목소리로, 하지만 그 안에 꾹꾹 눌러 담고 있는 감정은 숨기지 않은 채 메이브의 귓가에 몇 번이고 속삭였다. 그럴 때마다 메이브의 몸에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그 뜨듯한 숨결에 메이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 묻고 싶었다. 당신은 바보인지 묻고 싶었다. 지금은 치욕과 치부가 아니라 생각할지라도, 언젠가는 그것을 떠올렸을 때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가 될 수도 있는 거였다.

하지만 메이브는 오롯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저 눈빛에 홀린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하는 말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 눈빛에 메이브는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후회, 할 거예요.”

메이브의 입에서 결국 포기하는 것처럼 늘어진 목소리가 나왔을 때, 다비드는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으며 메이브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 이 순간을 떠올리면…… 시간이 되돌아가기를 바랄지도 몰라요.”

다비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는 메이브의 모습에 속에서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눌러 담았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새가 혼자 날아서 새장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새를 가두는 새장을 만든 자를 걱정하니까 말이다.

“메이브 님.”

다비드는 손을 움직여 메이브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곱게 휘어 있는 목선을 따라 살살 내려가던 손이 메이브의 어깨를 잡았다.

“저는 절대로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메이브 님도 지금 제게 붙잡혀 주는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비드는 메이브에게 자유라는 선택지를 주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 메이브는 다비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었던 그 기회를 놓친 거였다.

다비드는 앞으로 메이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앞으로 놓칠 일이 없다는 게 맞았다. 메이브가 자유롭다고 생각해도, 다비드가 그 밑에서 모든 것을 작업해 다시는 이렇게 도망갈 수 없게 만들 거였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가만히 다비드의 품에 안겨 있던 메이브는 고개를 살짝 들어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는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무엇입니까?”

이 상황에 물어도 되는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 묻지 않는다면 다음번에 묻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메이브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비드를 오롯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비드 님이 콘라드 씨를 데리고 가신 건가요?”

“……콘라드, 그 사람은 누굽니까?”

메이브는 다비드의 입에서 자신의 물음에 답이 아닌, 외려 되묻는 말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콘라드 씨를 다비드 님이 데리고 가신 거 아니었어요?”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험프리 섬으로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한편으로 다비드가 험프리에 온 시간과 콘라드가 사라진 시간을 떠올렸을 때, 그 시간 사이에 콘라드가 붙잡혀 결국 자신의 위치를 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비드는 정말 콘라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처럼 메이브를 바라보며 외려 묻는 것에 메이브는 고개를 기울였다.

“……메이브 님을 찾으려고 안 가 본 곳은 이곳밖에 없었습니다.”

“……네?”

“마지막에 남은 곳이 이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메이브 님이 찾으시는 분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메이브는 그런 다비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말이 거짓인지는 아닌지, 곧 입을 벌린 다비드가 ‘콘라드는 누구입니까.’ 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어봤다.

하지만 그 대답에 메이브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자신을 찾고 있던 사람이 다비드였으니 갑자기 소식이 끊어진 콘라드를 당연히 그가 데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이브는 자신이 있는 이곳으로 다비드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비드의 표정과 행동에서는 정말 콘라드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다른 누군가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메이브를 찾겠다고 모든 곳을 찾았고, 마지막 남은 게 이곳이었다는 다비드의 말에 누군가에게 듣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메이브는 그렇다면 콘라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그를 데리고 간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 등줄기가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메이브 님.”

메이브가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에 다비드가 그를 불렀다. 하지만 생각에 잠겨 있던 메이브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메이브가 깊이 생각하는 것을 지켜보던 다비드는 그런 그의 허리와 엉덩이를 붙잡고 한 번에 들어 올렸다.

“아……!”

갑자기 들려지는 몸에 메이브가 놀라 소리를 내자, 다비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메이브를 안아 든 채 몸을 돌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선원과 눈이 마주치자, 그 옆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있는 것을 본 메이브가 급하게 다비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 다비드 님, 내려 주세요!”

메이브가 두 다리를 흔들며 다비드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가 떨어지지 않게 잡고 있는 두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몸을 흔들고 움직여도 다비드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메이브는 온몸의 힘을 풀고 그 몸에 기대었다. 그러자 다비드는 한참을 걸어 어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메이브가 배정받았던 방과는 다르게 훨씬 크고 넓은 방이었다. 커다란 침대뿐만 아니라, 간단한 티 테이블까지도 있자, 메이브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여기는…….”

“에보니 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묵게 될 방입니다.”

다비드는 메이브를 부드러운 이불에 감싸인 침대에 차분하게 내려놓았다. 그러곤 침대에 앉은 채로 당황해하는 메이브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방문으로 걸어가 문을 잠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메이브는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금세 문을 잠그고 침대로 걸어온 다비드가 메이브의 어깨를 붙잡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비드 님?”

“메이브 님, 콘라드가 누굽니까?”

아까 메이브가 답하지 않았던 그 물음을 다시 꺼낸 다비드는 무릎을 침대에 올리고 메이브의 어깨를 잡아 침대로 밀어 넘어트렸다. 메이브가 침대에 누우면서 메트리스가 조금 흔들렸다. 그런 그의 몸 위로 올라탄 다비드는 그의 허벅지 옆으로 무릎을 내려놓고 몸을 숙여 메이브의 얼굴 옆에 두 팔을 짚었다.

한순간 다비드의 품 안에 가둬진 자세로 누워 있던 메이브가 눈을 깜박이며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그를 데리고 갔는지 물을 만큼 중요한 사람입니까?”

중요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할 수 있기에 메이브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자가 메이브 님이 몸을 숨겼던 그 시간 동안 같이 있었습니까?”

심문하는 것처럼 묻는 다비드의 목소리에 메이브는 그가 왜 이렇게 묻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야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메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계속…… 같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삼 개월 정도…….”

삼 개월 조금 넘는 날까지 콘라드와 함께였다. 아니, 애초에 부모님이 걱정하시면서 붙여 주었던 자였기에 그가 편지를 부치려고 에보니 영지로 가는 배를 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함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라진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기에 메이브는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가 사라졌다고 말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모님이 콘라드 한 명만 붙여 줄 정도로 그는 그만큼 능력이 있었을 거였다.

그런 고민을 잠시 하고 있으니 다비드는 침대를 짚고 있던 손 하나를 떨어트려 메이브의 볼을 살살 문질렀다. 생각하고 있던 메이브의 시선이 다비드의 얼굴에 닿았을 때,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제게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덤덤하게 묻는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꼭 그게 말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들렸다. 메이브는 그 목소리가 꼭 언령이 되는 것처럼 말해야 할 것 같다고 느꼈다.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다비드를 쳐다보고 있으니, 메이브는 자신의 다리를 누르고 있는 그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저 시선이 점점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 그냥…… 같이 자고…… 밥 먹고…… 한 것밖에 없어요.”

메이브는 어쩐지 점점 가까이 오는 듯한 다비드의 얼굴에 몸을 굳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콘라드와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솔직히 별다를 건 없었다. 험프리에서 가장 좋은 집을 구했기는 했으나, 방이 하나였다. 그 안에 침대가 두 개 있으니, 콘라드가 거실에서 자겠다는 것을 같은 방에서 각자 다른 침대에서 잤었다.

그리고 처음에 콘라드에게 말했던 것처럼 초반에는 메이브가 음식을 했고, 나중에는 콘라드가 음식을 배워서 음식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서로 당번을 정해서 요리를 해서 먹었다. 딱히 다른 일은 없었다. 그사이에 있던 일이라고는…….

“아…… 같이 운동도 했어요.”

신전에 있는 동안 원래 있었던 근육도 많이 빠졌고, 밥을 먹기는 했으나 그 이상으로 열량을 많이 소비했기에 빠져 버린 몸을 다시 돌려놓으려 노력했었다.

그래서 메이브는 그동안 콘라드와 험프리 마을 옆에 있던 작은 산에 뛰어 올라갔고, 그곳에서 검을 휘두르며 열심히 운동했었다.

하지만 메이브는 자신이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을 가두고 있는 다비드의 표정이 굳어졌고, 부드럽게 볼을 문지르던 손가락도 멈춘 것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입 안에 타액을 최대한 모아서 삼켜 낸 메이브는 조심스럽게 다비드를 불렀다.

“다비드 님……?”

웃고 있던 표정이 사라진 다비드는 어쩐지 화가 난 표정이었다. 메이브는 그 모습에 숨을 죽이고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꼭, 지금 모습이 곧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보이는 폭탄 같았다.

“같이 자고, 먹고, 운동까지 했다고 했습니까?”

다비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이 말했던 것이 맞았고, 지금까지 콘라드와 함께했던 것이 맞았다. 하지만 메이브는 다비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유난히 이상하게 들려왔다.

“어, 맞기는…… 맞는데요.”

메이브는 일단 콘라드가 자신의 몸을 지켜 주고 있던 호위 기사였다는 걸 생각했다. 그와 함께 자고, 먹고, 운동한 것이 분명 3개월 동안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왜 다비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 말뜻이 아닌 것 같은지 메이브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곧 다비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두 눈이 깊게 가라앉은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화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메이브는 움칠, 몸을 떨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다비드가 메이브의 어깨를 움켜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메이브 님.”

“……네?”

화가 짙게 묻어난 음색에 메이브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왜 다비드가 화가 난 건지 모르는 메이브와는 다르게, 다비드는 지금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힘들게 찾고 찾았는데, 눈앞에 자신의 품에 갇혀 있는 메이브가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자면서, 운동까지 했다고 말하니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자와 함께여서 행복했습니까?”

행복했는지 묻는 다비드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진 메이브는 곰곰이 생각했다. 행복했느냐, 생각하면 행복한 것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편안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메이브는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행복한 것 같지는 않고…… 그냥 평온했던 것 같은데……요?”

메이브는 느긋하게 말하다가 말끝을 늘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문득 말하며 바라본 다비드의 표정이 너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메이브는 자신이 했던 말 중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다시 떠올렸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없던 것 같았다.

정말 콘라드와 있었을 때 행복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고, 맘 편히 뒹굴뒹굴하던 평온한 시간을 보냈으니까 말이다.

“그, 다비드 님……?”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다비드의 표정은 화에 집어삼켜진 듯 보였다. 화가 나는데 그것을 꾹 눌러 담는 것처럼 말이다. 메이브는 조금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그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메이브는 다비드가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신이 했던 말에 다비드가 오해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메이브는 갑자기 다비드가 화난 이유를 떠올리려 했으나, 그 답을 결국 찾지 못했다. 상황 자체는 똑똑하고 영리하게 헤쳐 나가려 했으나, 메이브는 결국 자신에게는 둔감한 성격이었다.

다비드가 메이브에게 좋아한다고 말했음에도 그가 화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메이브.”

화가 짙게 묻어난 목소리가 메이브의 귓가에 들려왔을 때, 그는 마른입에 최대한 침을 모아 꿀꺽 소리 내며 삼켜 냈다.

그런 메이브가 당황해하는 것을 내려다보던 다비드는 화를 참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메이브와 함께 3개월을 지냈던 그 남자가 어떤 자인지 알고 싶었다. 다비드는 자신이 메이브의 곁에 없었던 그 시간 동안 그와 함께 잠을 자고, 그와 함께 운동했던 그자를 쉬이 용서할 수 없었다.

다비드는 메이브에게 그자와 함께해서 좋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보다 좋았는지, 그자가 좋아서 자신에게서 도망간 것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메이브가 정말 도망갈까 싶어 다비드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려 했다.

“……그자가 좋았습니까?”

그러나 다비드는 결국 참지 못했다. 화를 참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메이브의 몸을 만지고 그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는 것에 목구멍부터 뜨듯한 열기가 솟구쳐 올라 뇌를 녹이는 것만 같았다.

메이브의 어깨를 잡고 있는 다비드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지금 당장이라도 메이브가 입고 있는 옷을 갈기갈기 찢어서 나체로 만들어 그가 만졌던 모든 곳을 소독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좋았느냐고 계속 물어 그가 했던 모든 것을 다시 메이브에게 행해 그의 흔적을 지우고만 싶었다.

다비드는 눈앞이 차츰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메이브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는 것이 보이는데도, 다비드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윽…… 다비드 님.”

결국 메이브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다비드는 그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급하게 떨어트리고 부드러운 이불을 움켜쥐었다. 다비드의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고, 그의 얼굴을 차차 붉게 물들고 있었다.

“메이브 님.”

다비드는 굽혔던 상체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얼떨떨한 얼굴로 아픈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메이브는 자신의 하체를 누르고 있는 다비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메이브를 지켜보던 다비드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몸을 돌려 자신이 굳게 잠갔던 방문으로 걸어갔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다비드는 지금 계속 메이브를 보고 있다가는, 화를 참지 못해 지켜 주고 싶다 생각한 메이브를 고통스럽게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러자 차라리 온몸을 휘감은 화를 풀 때까지 메이브를 보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왔으나, 지금은 그의 웃음도, 자신만이 알고 있던 그 몸을 알게 되었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화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굳게 잠겨 있던 문을 열고 다비드가 밖으로 나가면서 쿵, 소리 나게 문이 닫혔다.

방 안에 혼자 남은 메이브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융통성 있게 상황을 잘 파악하고 실행했던 메이브가, 자신에 대한 것은 둔감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메이브만 모르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한 것 같은데…….’

메이브는 한숨을 내쉬고 침대 끝에 걸터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고개를 번쩍 들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설마 다비드가 콘라드와 자신의 관계를 오해한 것은 아닐까 하는 답까지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콘라드가 부모님이 자신에게 붙여 준 호위 기사라는 것을 다비드가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메이브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붙잡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비드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방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말했었다. 하지만 오해를 하고 화가 난 다비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해를 풀어야 할지, 아니면 그가 했던 말을 어기고 다비드를 찾아야 할지 메이브는 고민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메이브는 한숨을 내쉬며 잡고 있던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한 걸음 크게 걸어서 방에서 빠져나온 메이브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긴 복도에 있는 방은 객실이었다. 아마, 그는 뱃머리 쪽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메이브는 급하게 걸어서 뱃머리로 향했다. 그런 메이브의 뒤에서 다비드의 종이 소리도 없이 조용히 그를 미행했다.

한참을 걸어가던 메이브가 선실이 모여 있는 복도를 벗어나 뱃머리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저 앞에 다비드가 난간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후우.”

메이브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그런 다비드에게 다가가 그의 옆에 서서 그가 잡고 있는 난간을 붙잡았다. 그러곤 다비드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느끼며 커다란 파도가 치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원한 바다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있던 그 사람이요.”

메이브는 서늘한 바닷바람이 자신의 몸에 들러붙었다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유난히 더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무시하며, 대답 없는 다비드를 쳐다보지도 않고 시선을 바다에 고정한 채 말을 이어 갔다.

“혼자 여행한다고 걱정하던 부모님이 저를 호위하라고 붙여 준 기사예요.”

그러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다비드의 표정이 차츰 풀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다비드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 메이브에게는 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3개월 전쯤에 부모님께 어디에 있는지 연락을 보내기 위해 에보니 영지로 갔던 그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메이브는 다리를 구부정하게 굽혀 짝다리를 한 채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다비드가 저를 만나러 왔기에 혹시 다비드 님이 그를 데리고 있나 싶어서 물어봤던 거예요.”

메이브의 말을 들으며 잠시 고민하던 다비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메이브가 말했던 같이 잠을 자고, 먹고, 운동을 했다는 그자가 에녹 공작이 붙여 준 호위 기사라면 다비드가 생각했던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다비드는 설마 하는 생각에 메이브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메이브 님.”

“네?”

“같이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운동했다던 그 말, 무슨 뜻이었습니까?”

뜬금없이 묻는 다비드의 말에 메이브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말 그대로 잠을 자고, 밥 먹고, 운동했다는 거였는데요?”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데, 쉽게 말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다비드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하며 생각하던 메이브의 얼굴이 갈수록 붉어졌다. 왜 방에서 다비드가 화가 나 나가 버렸는지, 그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그제야 메이브는 알 수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예?”

메이브가 기댔던 난간에서 일어나 두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같이 잔 거는 말 그대로 같은 방에서 다른 침대에서 잔 거고! 운동한 것도 험프리 마을 옆에 산이 있는데, 거기서 뛰고 검술을 연습한 거라고요!”

메이브는 설마 다비드가 자신과 콘라드를 그런 사이로 오해했다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그러고 나니, 메이브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다비드가 무슨 오해를 해서 저렇게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외려 그것에 대해서 알게 된 메이브가 얼굴이 붉어지고 당황해하며 소리치자, 다비드는 머리끝까지 뜨거워졌던 것이 차차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메이브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없었다. 정말 당황한 것처럼 말도 두서없이 튀어나오고 소리까지 지르는 메이브는 두 발을 동동 구르면서 당황해했으니까 말이다.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해하셔서 화가 난 거잖아요!”

메이브는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저런 오해를 하고 화가 났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다만, 메이브는 다비드가 자신이 3개월 동안 같이 있었던 콘라드와 자신의 관계를 의심한다고 생각했지, 자신과 콘라드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는지는 몰랐다.

그러다 다비드가 오해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니, 메이브는 자신이 했던 말을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황한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을 잠재우기 힘든 메이브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다비드에게서 몸을 돌리며 급하게 선실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다비드는 그제야 편하게 풀어진 얼굴로 웃으며, 뛰어가는 메이브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 걸어갔다.

“메이브 님, 같이 가시죠.”

“오지 마세요!”

메이브가 급히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으나 아까까지 열렸던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에 급하게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으려 했지만, 주머니 어디에도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메이브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그에게 다가온 다비드가 두 팔을 뻗어 메이브를 들어 올렸다.

“내, 내려 주세요!”

당황한 목소리로 온몸을 버둥거리며 메이브가 다비드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의 몸을 어깨에 올려놓고, 그의 허리와 등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불룩 튀어나온 엉덩이를 붙잡은 채 원래의 방으로 걸어갔다.

“싫습니다.”

다비드는 아까와 달리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급한 사람처럼 빠르게 걸어 방으로 걸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메이브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두 손을 움직여 다비드의 다부진 등을 힘주어 때렸으나, 그는 아프지도 않은지 작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결국 다비드의 어깨에 짐처럼 매달린 채 조금 전까지 있었던 방으로 되돌아온 메이브가 고개를 푹 숙이자, 다비드는 그 상태로 문을 닫고 메이브의 몸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한순간에 내려지는 몸에 침대가 크게 흔들리며 끼익, 나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다비드는 손을 들어 매고 있던 넥타이를 손가락으로 끌렀다.

“메이브 님, 제가 실례해도 괜찮습니까?”

“아, 안 괜찮아요.”

메이브는 넥타이를 풀며 차츰 다가오는 다비드의 모습에 두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리를 움직여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의 대답에도 만족스레 웃으며, 전부 풀어 버린 넥타이를 손에 걸고 메이브에게 다가갔다. 메이브의 등이 벽에 닿았을 때, 더는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침대에 올라와 점차 다가오는 다비드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메이브 님,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와 다르게 다비드는 손에 걸고 있는 넥타이를 문지르며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다가온 다비드가 멈추어 섰을 때에는, 그의 다리 사이에 몸이 가둬져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다비드가 상체를 굽히고 메이브가 기대고 있는 벽에 손을 짚으며 얼굴을 내밀었다.

다비드의 얼굴이 더더욱 메이브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그에 메이브가 헛숨을 들이켜며 당황해했다. 그러자 다비드는 손을 뻗어 메이브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살이 올라 있는 볼과 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메이브 님, 도와주시겠습니까?”

숨이 턱 막혀 왔다. 목구멍에서는 도와주겠다는 말이 금세 튀어 나갈 것만 같았고, 메이브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짙게 가라앉은 눈빛에 숨이 멎을 것만 같다고 느꼈다.

다비드의 손가락에 문질러지는 메이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 왔다.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에 메이브는 입에 고인 타액을 삼켰다.

꿀꺽, 작은 소리와 함께 메이브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작게 흔들렸을 무렵, 다비드는 메이브의 얼굴을 매만지던 손을 움직여 작게 흔들리는 메이브의 목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메이브 님.”

“…….”

“메이브.”

대답이 없어도 괜찮다는 듯, 몇 번이고 메이브의 이름을 부르는 다비드는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미소를 지을 때마다 움푹 들어가는 보조개에 메이브는 결국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피하려고 눈을 굴렸다.

서로의 숨소리와 다비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만 울리는 고요한 방 안, 굳게 닫혀 있는 문은 누군가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았다.

메이브는 결국, 그렇게 도망가고 도망갔는데 마지막은 이렇게 붙잡힌 것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메이브의 대답을 기다리던 다비드가 몸을 천천히 숙여 손끝에 만져지던 메이브의 목에 입술을 문질렀다. 쪽쪽, 살과 입술이 부딪히며 들리는 소리가 이렇게 야할 수도 있구나 싶었을 때 메이브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완전히 드러나는 목선에 다비드는 살짝 뛰고 있는 맥박과 도드라진 핏줄 라인을 혀로 핥으며 작게 버드 키스를 했다.

“제가 알아서 해석할 테니까요.”

입술이 닿는 부분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고, 다비드가 말할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온몸에 퍼지는 것 같았다. 목선을 지나 어깨에 닿는 거친 손은 메이브의 몸을 따라 점차 내려갔다. 그리고 셔츠 아래로 손이 들어와 심장이 쿵쿵 뛰고 있는 가슴에 닿았을 때, 메이브는 급하게 고개를 돌려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메이브는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다비드의 시선에 홀린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입고 있던 셔츠가 말려 올라가 가슴과 배가 숨김없이 밖으로 드러났을 때, 메이브는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다비드의 손을 붙잡았다.

“손으로 만지는 것이 싫으신 겁니까? 괜찮습니다. 손을 쓰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요.”

“……네?”

무슨 뜻인지 메이브가 이해도 하기도 전에 목에 닿아 있던 다비드의 얼굴이 차츰 떨어졌다. 그러곤 손을 움직여 메이브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메이브가 두 손을 사용하지 못하고 옴짝달싹 못 하는 동안, 말려 올라갔던 셔츠가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비드는 메이브의 손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숙여 셔츠 위로 도드라지게 불룩 튀어나온 유두 부분을 혀로 핥았다.

“읏! 자, 잠시만……!”

급하게 소리를 내는 메이브가 두 다리를 흔들었으나, 그마저도 다비드가 하체로 내리눌러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비드의 혀가 셔츠에 문질러지며 거친 천이 여린 피부에 비벼졌다. 하얀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면서 분홍빛 유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 다비드 님…….”

메이브가 숨을 몰아쉬며 다비드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여상하게 웃으며 메이브의 유두와 그 주변을 혀로 핥았다. 셔츠가 밀리고 젖어 들어가며 속살이 점차 비치고 있을 때, 다비드는 입을 살짝 벌렸다.

“예, 메이브 님.”

무거워지는 방 안의 공기가 답답했다. 아니, 무거워진 것이 아니라 열기에 집어삼켜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눈앞에 있는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메이브는 오롯이 자신만을 보고 있는 다비드의 두 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눈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연녹색 눈에 비치고 있는 메이브의 얼굴은 너무도 붉었다. 아니, 이미 열기에 삼켜져 더웠을지도 모른다. 메이브는 더운 열기를 머금고 있는 공기를 삼켰다가 뱉어 냈다.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거친 손가락으로 손목뼈와 마디를 문지르며 어르고 달래는 듯했다.

메이브는 눈앞에 있는 다비드가 이상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이상한 걸지도.

“왜, 후회할 길을 가시는 거예요?”

솔직히 메이브는 다비드가 괜찮다고 말했던, 외려 자신을 만났던 그곳에서 자신을 안았던 그 순간을 후회하지도, 수치스럽지도, 부끄러워한 적도 없다는 그 말이 이상했다.

메이브는 어차피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이 이야기에서 미친 또라이 서브공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끝까지 자신을 찾아왔는지, 왜 후회할 것이 분명한 길을 가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메이브를 지켜보던 다비드는 괴롭히고 있던 유두에서 떨어지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메이브를 쳐다보았다.

“왜 제가 후회할 거라 생각합니까?”

반했고, 같이 있고 싶었다. 오롯이 메이브의 두 눈이 자신만을 쳐다봐 주기를 바랐다. 다비드는 그 몸, 그 손, 그 체온과 숨결까지도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다비드는 메이브가 아무것도 못 하더라도, 그저 자신이 만들어 준 보금자리에서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을 기다리기를 바랐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다비드와는 다르게 메이브는 눈앞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저 따듯하고 다정한 눈빛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제가, 당신에게 반했다는 뜻입니다.’

‘당신을 만지고 싶고, 당신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 옆에 있어 주시면 안 됩니까?’

분명, 그 순간이 지나면 나중에 사랑이라 생각했던 감정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후회할 거라 생각했다.

‘저는 절대로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메이브 님도 지금 제게 붙잡혀 주는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눈빛을 메이브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때 자신이 다비드에게 붙잡히는 순간, 다비드 역시 후회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그 눈빛을 말이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다비드는 메이브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던 손목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천천히 입이 벌어지고 모든 것이 그의 것인 듯 아프지 않게 깨물고 있는 그 모습을 홀린 것처럼 쳐다보았다.

“그러니 당신도 후회하지 마세요. 제게 묶이는 이 순간을.”

다비드는 몸을 들어 올려 메이브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갈 곳 잃은 손을 침대에 내려놓으니, 다비드의 따듯하면서도 투박한 손이 메이브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의 얼굴이 점차적으로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던 메이브는 다물어져 있던 입을 벌렸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들어와 여린 입 안을 헤집었다.

메이브는 움찔,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다비드의 목과 등을 감싸 안았다.

‘후회할지도 몰라.’

언젠가, 지금 이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이브는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중에, 먼 훗날 다비드가 자신에 대한 타오르던 감정이 사라졌을 때, 편안한 삶을 보내려 어딘가로 떠나도 괜찮지 않을까 말이다.

“메이브.”

서로의 혀가 얽혔다가 떨어졌을 때, 키스로 멈추었던 숨을 몰아쉬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는 다비드의 표정을 보게 된 메이브는 어쩐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것 같았다.

“저를 도와주겠습니까?”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메이브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며, 장난처럼 말하는 다비드의 웃음 띤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메이브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앞의 다비드를 쳐다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만족스럽지 않은지, 다비드는 입술 주변을 혀로 핥으며 가볍게 키스했다.

“대답해 주세요, 메이브.”

어쩌면, 이미 그날 신전의 방에서 만난 그 순간부터 눈앞에 있는 다비드에게 얽혀 헤어 나오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결국 입술을 달싹이며 뜨듯한 숨을 토해 냈다.

“……도와 드릴게요.”

메이브의 입에서 도와준다는 말이 나왔다. 그제야 다비드는 자신이 원했던 대로 메이브가 이끌려 왔다는 것을 만족스러워하며,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그의 입술에 작게 키스했다.

다비드가 움직일 때마다 두 사람의 밑에 깔린 시트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차가운 벽에 기대어 있던 메이브의 몸을 떨어트렸다. 차가웠던 벽도 체온으로 미지근해졌으나 금세 식어 갔다.

“도와준다고 말했으니, 이제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네?”

“메이브 님, 후…… 메이브.”

다비드는 메이브가 잘못하다가는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과 몸을 쓸어내렸다. 그런 몸에 메이브가 당황해하는 것이 보일 텐데도, 다비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메이브가 입고 있는 옷의 단추를 하나둘 풀어냈다.

조금씩 벌어지는 셔츠 깃과 언제 풀었는지 모를 바지 버클에, 메이브가 입고 있던 옷이 점차 벗겨져 내렸다.

나중에는 하얀 속옷 빼고는 전부 침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메이브는 환한 빛이 들어오는 순간, 숨김없이 보여 주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벗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도, 지금은 너무도 부끄러웠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다비드의 손이 닿는 부분이 간지럽고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메이브는 입을 벌려 더운 숨을 토해 내며 자신을 가두고 있는 다비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굴을 쓸어내리고 몸을 매만지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와 목과 어깨에 입술을 문지르고는 입을 벌려 자신의 흔적을 만들 듯, 그 자리를 아프지 않게 빨아들였다.

“읏…….”

작게 떨리는 신음이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메이브는 쉴 틈 없이 얇은 속옷 위로 그의 단단한 성기가 살짝 문질러지는 게 느껴졌다.

이미 메이브는 나체라고 보아도 괜찮을 정도였으나, 다비드는 멀끔하게 옷을 입은 채로 성기만을 빼놓고 단단하게 발기되어 있는 그것을 살살 반쯤 서 있는 메이브의 성기에 문질렀다.

“후우…….”

낮게 숨을 내뱉은 다비드가 손에 감겨 있던 넥타이를 메이브의 목에 둘렀다. 그러곤 손을 움직여 나비 리본으로 매듭을 매어 준 다비드는 작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단추를 서서히 풀었다.

툭, 툭, 규칙 있게 단추가 풀어지는 소리와 함께 쩍 벌어져 있는 가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올려 셔츠를 벗고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아래로 던진 다비드는 메이브의 얼굴과 가슴을 만졌다.

살짝 가라앉아 있는 그의 두 눈이, 메이브가 허상이 아닌지 계속해서 만지고 그게 진짜 메이브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메이브는 떨리는 숨을 삼키지 않고 내쉬었다. 오랜만에 문질러지는 단단한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때의 쾌락을 기억하는지, 안달이 나는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힘들면 말하세요.”

느릿한 목소리와 함께 팬티에 손가락을 걸고 무릎까지 벗겨 낸 다비드는 메이브의 다리를 들어 올려 그 몸을 둥글게 굽혀 냈다. 메이브는 자신의 발기한 성기를 마주 보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귀엽다는 듯이 지켜보던 다비드는 몸을 숙여 뻐끔거리는 구멍 주변을 혀로 핥았다.

“흐…… 자, 잠시만!”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메이브의 허리가 부르르 떨려 왔다. 바스락,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들려오는 듯했고, 뱀처럼 이리저리 몸을 유영하듯 핥는 혀는 집요하게 힘이 들어가는 구멍 주변을 괴롭히는 듯했다.

단단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 좁은 구멍이 빡빡하게 조여 왔다. 다비드는 혀를 내밀어 구멍 안에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혀를 집어넣었다.

빠듯하게 들어가지 않는 혀에 힘을 주고 메이브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움켜쥐며 고개를 엉덩이에 파묻는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헛숨을 들이켜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으웃…….”

온몸의 감각이 모두 아래에 쏠린 것만 같았다. 그의 혀가 움직이는 부분에 그림이 그려지듯 자국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메이브는 고개를 돌려 눈을 질끈 감았다. 꼭, 맹수의 주둥이에 머리를 가져다 댄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제 생각하면서 자위한 적은 없습니까?”

“그……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너무 닫혀 있어서 풀어 주는데 오래 걸릴 것 같기에, 지루할까 봐 말해 본 겁니다.”

“……다비드 님!”

메이브는 얼굴에 열이 너무 올라 이러다가 펑, 터지는 것은 아닐까 무서울 정도였다. 뜨듯하다 못해 정신까지 아득해졌다. 하지만 그런 메이브와는 달리 다비드는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다.

혀가 제대로 밀려들어 가지 않을 만큼 꽉 닫혀 있는 구멍은, 처음 메이브의 순결을 가져갔던 때와 같았다.

그만큼 오랜 시간, 누군가에게 이 야하고 귀여운 구멍을 보여 주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다비드는 그동안 몸조심한 메이브에게 화가 날 리 없었다. 외려 아래가 뻐근해질 정도로 열이 오를 지경이었다.

다비드는 당장 저 안에 자신의 성기를 쑤셔 넣고 싶었지만, 정말 그렇게 하면 메이브가 아파할 것이 분명했다.

어느 정도 혀로 구멍 주변을 핥고 핥아 번들거릴 때쯤에, 다비드는 메이브의 엉덩이에 처박고 있던 얼굴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움찔거리는 구멍 주름 하나하나를 살살 긁듯이 문지르고는 손가락을 쑥 밀어 넣었다.

“흐……아!”

내벽의 오돌토돌 올라온 모든 것이 하나하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안으로 밀려들어 온 다비드의 손가락을 감싸고 조여 오기 시작했다.

다비드가 손가락을 빼내려 해도, 꽉 물고 있는 구멍에서 좀처럼 손가락이 빠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손을 살살 움직여 구멍을 긁고 메이브가 느끼던 부분을 찾기 위해 손을 조금씩 움직였다.

타액이 윤활제가 되어 빡빡한 안을 부드럽게 만들었으나, 그마저도 금세 타액이 말라 사라지면서 뻐근해지는 손가락에 다비드는 고개를 숙여 메이브의 구멍에 타액을 모아 뱉어 냈다.

근처에 기름이나 윤활제가 있었다면 보다 쉬웠을 수도 있었다. 아니, 메이브가 더는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급히 올라온 배에서 그런 물건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고, 찾을 만큼 참을 수 있는 정신이 없었다.

“메이브 님, 벌써 손가락이 세 개나 들어갔습니다.”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성기는 빠듯하게 발기해 꺼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비드는 메이브가 힘들지 않도록 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읏!”

메이브의 허리가 가늘게 떨렸고, 발기한 성기가 위아래로 흔들리며 전립선액이 배와 가슴에 투툭, 툭 떨어져 내렸다.

“메이브, 제 얼굴을 보세요.”

“싫…….”

“응? 메이브 님, 저를 보세요.”

다비드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고개를 틀어 다른 쪽을 보려는 메이브의 얼굴을 손으로 감싼 다비드가 메이브의 얼굴을 살짝 돌렸다.

결국, 붉게 물든 눈으로 메이브가 다비드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의 볼을 살살 문지르면서도 손가락을 움직여 메이브의 구멍을 풀어 주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아……!”

“괜찮아요. 힘 빼고, 제게 몸을 맡기시면 됩니다.”

“그…… 으흣…….”

힘을 빼고 싶어도 뺄 수가 없었다. 속에 들어온 손가락이 살살 안에 닿지 않는 부분이 없을 만큼 문질렀으니 말이다. 살짝 긁히는 손톱과 뭉뚱그려 안을 꾹꾹 누르는 손가락이 어디로 향할지, 어디를 긁어낼지, 어디를 누를지 알지 못해서 메이브는 힘을 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쾌감으로 인해 몸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고, 벌어진 입에서는 신음이 미약하게 계속 흘러나왔다. 그것보다 눈앞에서 오롯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시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반쯤 몸이 말려져 있어 불편한 자세와 꺼덕이는 성기에서 계속 야한 물이 툭툭, 몸으로 떨어지니 메이브는 너무도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 그냥 빨리…….”

“예?”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다비드가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듣고도 말하지 않는 건지, 되레 묻는 물음에 메이브는 벌겋게 변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소리쳤다.

“그냥 빨리…… 박으라고요!”

박으라고요! 소리친 말이 방 안에 울려 퍼져 다시 귓가에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메이브는 벌겋게 달아올라 열이 오르는 몸을 숨기려 몸을 움츠렸으나, 그마저도 다비드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손 때문에 움츠릴 수조차 없었다.

다비드는 무릎에 걸려 있던 메이브의 속옷을 한 번에 벗겨 내 바닥에 던지고는 반쯤 오므려 있던 다리를 양손으로 크게 벌렸다.

“아!”

뻐끔거리는 구멍도, 발기되어 꺼덕이는 성기가 숨김없이 드러났을 때, 메이브는 손가락을 살짝 벌려 눈만 보인 채로 다비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 모습이 너무 귀여워 다비드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흉흉하게 화가 난 성기의 귀두 끝을 메이브의 구멍에 살살 문질렀다.

쿠퍼액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구멍이 움찔거릴 때마다 야한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제가 메이브 님을 도와줘야겠네요.”

“……그……으.”

장난기가 가득 묻어 있는 목소리로 웃은 다비드가 메이브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작게 문지르는 손길에 밑에 깔린 메이브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채 몸을 움칠움칠 떨고 있었다.

다비드는 더운 숨을 내쉬며 녹진하게 풀어진 구멍 안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흐…… 아읏…….”

메이브의 몸이 작게 들썩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 등줄기를 따라 머릿속까지 저릿하게 만드는 듯했다.

입을 벌리고 더운 숨을 몇 번이나 토해 내도, 서서히 밀려들어 오는 성기를 막을 수가 없었다. 메이브는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러고는 결국 두 손을 뻗어 다비드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흐…… 아. 처…… 천천히…….”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고요한 방에서는 더욱 크게 들려왔다. 다비드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는 메이브의 모습에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최대한 눌러 담았다. 그리고 메이브의 등을 쓸어내리며 붉게 달아오른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빨리 박아 달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읏…….”

“느리게 하면…… 메이브 님이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웃음기가 짙게 배어 있는 목소리로 웃지 않으려 노력하는 다비드의 모습이 메이브의 시선에 보였다. 메이브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꾹 다물며 그저 다비드의 목에 두르고 있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메이브 님,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뻔히 무슨 말을 할지 알면서도 묻는 다비드가 미웠다. 그러면서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 모습이 머릿속과 지금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서 밉지 않았다.

메이브도 자신의 마음이 갈팡질팡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지금은 그저 안으로 들어온 성기가 더 빠듯하게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천천히…… 빨리 넣으라고요…….”

“천천히, 빨리. 어떻게 넣어 드리면 될까요?”

어쩌면 다 알면서 묻는 이유는, 메이브가 소리 없이 다비드의 약속을 어기고 도망갔기에 표현하는 화일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그저 다비드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삼켰다.

“…….”

메이브가 대답하지 못하고 다비드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자,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말하지 않으면 제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지금도, 속에 들어찬 성기는 안에서 꺼덕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메이브가 힘을 줄 때마다 구멍이 조여 오며 성기를 압박하니, 다비드도 계속 참기는 힘들 터였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나, 대하는 태도가 너무 여유롭게 느껴졌다. 꼭 안달 난 것은 메이브 혼자뿐인 것처럼 말이다.

메이브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박아요.”

“무엇을 말입니까?”

“다비드 님 거…… 그냥 박으라고요!”

메이브는 그 말을 하고, 다비드의 어깨를 손톱으로 긁으며 힘주어 그 단단한 어깨를 붙잡았다. 분명 손톱을 박아 넣으며 눌렀기에 아플 텐데도, 살짝 고개를 들고 다비드를 쳐다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아프지도 않은지, 아니면 이 정도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건지 혼자만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에 메이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 걸 박기만 하면 됩니까?”

분명, 다 알면서 끝까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다비드에 결국 메이브가 아랫입술을 짓누르듯 깨물고는 다비드의 어깨를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구멍에서 성기가 반쯤 빠져나왔을 때, 다비드가 메이브의 어깨와 허리를 움켜쥐어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도망가는 건 안 됩니다.”

“……안 해. 안 할 거예요. 그러니까 저리 가요!”

차라리 아까 박으라고 했을 때 박았으면 이렇게 부끄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온몸은 열기에 휩싸였고 침조차 꼴딱꼴딱 삼켜도, 목구멍에 뜨거운 불을 집어넣은 것처럼 텁텁하고 입 안이 말라가는 것 같았다.

너무도 부끄러운데, 그가 다가오면 어떤 쾌감을 가지고 올지 뻔히 알아서 기대되는 몸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메이브 님이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요.”

“아…… 아!”

한순간, 어깨를 붙잡고 끌어당기는 그 힘에 어느 정도 구멍에서 빠져나갔던 성기가 한 번에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허공에 들어 올린 다리가 부르르 떨려 왔고, 쾌감에 발가락을 오므리며 몸을 들썩였다.

아아, 분명 익숙한 감각이었다. 구멍 안을 꽉 채운 성기도, 밀려들어 와 꿈틀거리는 귀두가 닿는 부분이 느끼는 부분까지도 말이다.

한동안 이 감각을 무시하려고, 잊으려고 단 한 번도 그 뒤에 건들지 않았으나, 몸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다비드가 살짝 허리를 튕기며 안에 들어온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목구멍에서 울컥울컥 뜨거운 숨이 내뱉어지니 말이다.

“흐으…….”

“그냥 제게 몸을 맡기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메이브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안에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끄집어냈다가 다시 들어가는 것처럼 격렬하게 허리를 흔드는 다비드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움직임에 따라서 시끄럽게 우는 침대가 곧 부서질 듯 흔들리는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그저 입을 크게 벌리고 더운 숨과 뒤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하으으! 읏!”

그 넓은 품에 몸이 안겨지고,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뜨거운 손이 온몸을 끌어안았다. 압박감과 함께 발기한 성기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근육에 이리저리 문질러졌다. 피부가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숨을 제대로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메이브, 메이브…….”

그런 메이브의 귓가에 계속해서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다비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무슨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으나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것은 신음이 끝이었다. 숨 막힐 듯한 격렬한 움직임에 눈에 고인 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겨우 숨을 토해 내고 있던 입을 틀어막는 다비드의 입술에 메이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입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혀와 자신의 혀를 얽었다.

서로의 혀가 이리저리 얽혔고, 온몸의 뼈가 벌어져 안에 박아 대는 그 성기를 받아들이려고 몸을 바꾸는 것 같았다.

힘이 들어가는 몸에 손과 발은 오므려졌고, 휘어져 버린 허리는 작게 들썩거렸다.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본 천장은 너무나 하얀색이었다. 너무 하얀색이라, 저기에 꼭 무언가 묻으면 그 색으로 전부 변할 것처럼 말이다.

“메이브, 크읏…….”

다비드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목과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메이브의 손을 붙잡아 입술로 가져가더니,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졌다는 듯 손가락 마디마디, 손끝 하나하나에 작게 키스하며 배부르게 웃었다. 그런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아……!”

크게 허리를 움직이는 그 동작에, 메이브의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발기한 성기는 이미 정액을 쏟아 내려 핏줄까지 도드라져 있었다. 조금만 매만지면 쌀 것 같아서, 메이브가 다비드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을 성기로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세 다비드의 손에 붙잡혔다.

“만지면 안 돼요. 저와 함께 가야죠.”

“흐…… 제발, 제발…… 다비드…… 님! 아!”

속에서 찌르는 다비드의 성기에 아랫배가 욱신거리며 아팠다. 그것보다 정액이 아닌 전립선액이 계속 귀두에서 흘러내려 아랫배와 음모 부분을 더럽혔다. 진득한 애액이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와 엉덩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는 다비드의 행위에, 살갗이 더욱더 크게 부딪히며 방 안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음란하기 짝이 없는 물소리가 뒤섞였다.

다비드와 연결이 된 구멍은, 거품이 되어 버린 쿠퍼액과 정액이 허벅지를 따라 흘러내리며 침대를 더럽혔다. 축축해지는 침대에서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만큼 흔들리던 메이브는 결국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흐…… 아. 그…… 그만!”

“메이브…… 후…….”

“찌…… 찢어져!”

다비드가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만큼 기분이 좋았으나, 그와 별개로 너무도 뜨거워지는 구멍이 이러다가 델 것 같았다.

나중에 끝나면 분명 잔뜩 부어 있고 따가울 것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메이브는 고개를 흔들며 결국 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메이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쾌감을 넘어서서, 결국 눈에 고인 눈물이 쉴 틈 없이 흘러내렸다.

“흐……아!”

볼에 그림을 그리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다비드는 혀로 핥으며 메이브의 눈물을 삼켰다.

“음…… 짜군요.”

“……흐. 푸흐…… 그럼 눈물이…… 흣! 짜지 안 짜요…….”

다비드의 말에 결국 메이브는 울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와 벌겋게 변한 얼굴로 작게 웃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다비드는 사막에 겨우 핀 꽃 같다고 생각했다.

손을 뻗어 눈물에 젖은 얼굴을 살살 문지르면서 자신의 것을 품고 있는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본인이 말하고도 우스운지, 가늘게 떨면서 웃는 모습에 다비드는 다시 한번 아래에 열이 몰리는 듯했다.

“으읏…….”

속에서 살짝 움직이는 성기가 더 세세하게 느껴졌기에, 메이브가 어깨를 움츠리며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의 양손을 붙잡고 그 몸을 침대에 몰아붙이듯 내리눌렀다.

“이제 못 참을 것 같습니다. 제가…….”

참기 힘들다는 그 말에 메이브의 두 눈은 크게 떠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참으면서 했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으나, 혀가 굳은 것처럼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끝이 아니라는 생각에 온몸에 열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제야 메이브는 자신이 도망갔던 행동이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비드가 자신을 사랑한다 말할 때마다 동정이라고 말하며 거부했건만, 알고 보니 이미 자신도 그에게 마음이 빼앗겼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메이브는 그만큼 멍청했던 자신에 속으로 욕하면서도, 정말 자신이 다비드의 옆에 있더라도 괜찮은지 아직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메이브.”

표정이 숨겨지지 않는 메이브가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을 눈치챈 다비드는 메이브의 콧잔등에 자신의 코끝을 문지르며 그 자색의 눈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았다.

“지금은 저만 보고, 저만 생각해 주시겠습니까.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오직 저만요.”

그 말에 홀린 것처럼, 어쩌면 100년은 묵은 구미호에게 홀린 것처럼 다비드를 몽롱하게 쳐다보았다. 싫다, 싫다 했으면서 지금까지 좋았던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그가 오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관심을 얻기 위해 화를 낸다는 것에 메이브는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쩌면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이렇게 될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그 순례를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한 걸지도 모른다.

메이브는 자신이 이미 그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던 것이다.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멍청한 짓이었던 거다.

“……다비드 님.”

눈앞에 있는 다비드가 정말 자신을 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우스웠다. 6개월이 아니라 그에게서 1년, 더 길게 2년 이상을 도망치고 다녔어도 언젠가 붙잡히게 되는 거였다. 도망치고 도망쳐도, 결국 그 끝은 다비드가 서 있는 거였다.

메이브는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다비드의 손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다비드의 투박하기 그지없는 손가락을 툭툭, 건드리며 웃었다.

“다비드 님 생각했어요. 이러고 있으니까, 하……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요.”

그의 커다란 것을 속에 넣어 놓고, 그에게 온몸이 억압되듯 눌리는 것이 꼭 처음에 그와 했던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솔직히 그 미친 신전에서 풀리지 않은 이야기는 많았다. 왜 다니엘이 다비드와 메이브에게 거짓말을 했었는지, 왜 목욕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에 있는 호수에서 씻으라고 했었는지, 그 청탑에 갇혀 있던 지키지 못한 자들은 정말 도망갔는지, 아니면 그 안에 계속 갇혀 있는지 아직 모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잊고 싶었기에 메이브는 더는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어차피 메이브는 그 신전에서 벗어났고, 그 이상으로 다른 위험하고 힘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전…… 당신을 계속 보고 있어요.”

근데 그 안에 있는 것을 떠올리면, 꼭 다비드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아침마다 발기되어 있는 채로 흔들리던 그 단단한 성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혀를 가져다 대면 살살 흔들리며 움직이던 것을 말이다.

품에 안겨 식사를 했을 때에도, 그에게 안겨져 아이처럼 몸이 씻기는 것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기억일 텐데도, 잘 생각해 보면 그 안에 있을 때만큼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몸이 힘든 만큼,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 눈앞에 있는 다비드에게 온 신경이 가 있었고, 그에게 도망간다는 생각으로 그의 마음을 뿌리치면서도 그의 품에 기대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참기 힘듭니다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두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려 다비드의 허리를 감았다. 힘을 주어 당기니, 구멍에서 조금 빠져나갔던 성기가 밀려들어 오며 그 단단한 몸이 자신의 몸과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메이브는 낮은 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밀어 다비드의 콧등에 자신의 코끝을 문지르며 웃었다.

“……참지 마요.”

살짝 고개를 틀고 조금 거친 그 피부에 메이브는 자신의 피부를 비비며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 말이 열쇠가 된 것처럼,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어지고 한순간에 손이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곧 다비드의 손은 메이브의 어깨를 움켜쥐었고, 마치 짐승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발정이 난 것처럼 오롯이 메이브를 바라보고 허리를 흔들었다.

“흐아……!”

온몸의 뼈가 벌어지는 것처럼 힘 있게 밀려들어 오는 성기에 메이브의 몸 역시 그 움직임에 맞춰 위아래로 흔들렸다. 삐걱거리는 침대에서는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고, 온몸에 문질러지며 비벼지는 시트는 이리저리 흩어졌다.

땀과 쿠퍼액으로 축축해지는 시트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찝찝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다비드의 몸이 메이브의 온몸에 붙어서 허리를 움직이니, 메이브의 발기한 성기가 그의 상체에 문질러졌다.

여린 살갗이 오돌토돌한 부분에 문질러지니, 예민해진 귀두가 아려 오면서고 간지러웠다. 허리는 작게 떨려 왔다.

“흐…… 아흑! 응!”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신음이었다. 턱 벌어진 입에서는 혀가 돌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않았으나, 목구멍을 긁으며 튀어나오는 신음은 열기에 휩싸인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제 누구의 땀인지 모를 서로의 땀이 뒤섞였고, 숨마저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뜨듯했다. 눈을 감으면 그 쾌감이 더더욱 강해지는 듯했다. 메이브는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몽글몽글한 솜사탕 같은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얼굴에 붙어 있었고, 쾌감에 살짝 찌푸려진 눈매가 무척 야해 보였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이따금 벌어져서는 메이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낮은 신음이 뒤섞인 목소리가 툭툭, 내뱉어졌다.

메이브는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울 만큼 빠르게 허리를 흔드는 다비드에 고개가 천천히 꺾였다. 입을 크게 벌리고 더운 숨을 연거푸 뱉어 내며 힘없는 두 팔을 들어 올려 다비드의 목과 어깨를 끌어안았다.

“다, 다비드…… 아!”

이미 그와 몸을 섞는 그 순간부터 이건 벗어날 수 없는 순례였던 걸지도 모른다.

도망치고 도망쳤는데, 도착지는 결국 도망치기 전에 있었던 그의 품이었고, 한참을 돌고 돌아왔을 때가 돼서야 그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했던 일이 얼마나 멍청한 행동이었는지를 알게 되니, 그저 이 따듯한 품을, 자신의 이름을 낮게 부르는 울리는 저 저음의 목소리를, 오롯이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눈을, 무엇 하나 버리고 싶지 않았다.

손에 움켜쥐고 자신만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메이브는 그제야 자신이 모르고 있던 그 순간부터 눈앞에 있던 다비드를 좋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마이 홀’을 읽었던 그때부터 다비드에게 마음이 빼앗긴 걸지도 몰랐다.

그가 힘들어했던 것에 함께 울고, 그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미쳐 있던 메이브를 욕했으니 말이다.

“흐……아!”

“메이브…… 메이브 님…….”

메이브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서 나지막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다비드의 목소리가 들었다. 입을 벌리고 자신도 그렇다고, 사랑한다 말해야 하는데. 숨 막힐 듯 움직이는 그의 것에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된 것처럼 굳어져 버린 혀는 움직이지 않고 더운 숨과 신음을 내뱉기만 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새하얀 빛이 한 번씩 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이대로 가다가 복상사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음을 지르던 목은 쉬어 버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메이브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끌어모아 다비드의 머리를 품에 안으며 헐떡였다. 말라 버리는 입을 달싹이고 그의 귓가에 신음을 뱉으면서,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서서히 감아 내렸다.

“흐…… 응! 다비, 다비드 님…….”

‘제가 어쩌면 다비드 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끝끝내 나오지 않은 목소리는 목구멍 아래로 억눌려 사라졌다. 정신을 잃기 전 눈을 뜨고 본 곳은, 어둠이 내려앉아 노을 진 하늘이 퍽 가깝게 느껴져서 예쁘다고 생각했다.

흔들리는 바다에 맞추어 이리저리 퍼지는 노을이 지금처럼 뜨겁지 않을까 생각했다.

메이브는 점점 멀어지는 자신의 눈앞에 손으로 푸석하면서도 부드러운 듯한 다비드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끝끝내 나오지 못한 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기며, 그의 품에 안겨 결국 기절하듯 온몸에 힘을 풀고 축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목소리 사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다비드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메이브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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