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본디 ‘그것’이 이렇게까지 위로 올라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은 저 아래, 깊숙이 위치한 해저의 끝에 누워 아주 오랜 시간동안 잠에 취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우리 인간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기에 이해하기 쉽도록 얘기하자면, ‘그것’이 바닷속에서 잠들어 있던 기간은 인간이 말하는 약 200년이었다.
목린과 언영이 태어나기 훨씬 전, 그들의 부모의 부모조차도 세상에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그것은 북동쪽 저 멀리 어딘가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곳은 인간의 흔적이란 먼지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장소로, 오로지 먹고 먹히는 관계의 교류만이 간간이 해저에서 벌어질 뿐이었다.
‘그것’은 덩치와 힘만 따지자면 바다 속 최고의 포식자였으나 제 능력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겸손함이 아니라 단순히 본래 가진 특성에 기인했다. ‘그것’은 단기간 동안 사냥을 많이 하고, 배에 쌓인 먹이들을 매우 천천히, 오래 소화했다. 소화에는 몇 주가 걸리기도 하고, 몇 달이 걸리기도 하였으며 또는 몇 년이 지나기도 했다.
200년 전, 휴식을 마치고 오랜만에 배를 채우려 ‘그것’이 몸을 일으켰을 때 가장 거슬렸던 상대는 ‘그것’의 바로 아래, 2인자 녀석들이었다. 혼자서 가끔씩 사냥을 하는 ‘그것’과 달리 그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또 날마다 배를 채우러 다녔다. 약한 물고기들에게 본질적인 두려움은 외려 그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거슬렸다.
그들을 모두 잡아먹는 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것’에게도 쉽지 않은 결투였다. 하나 이를 통하여 앞으로 수년, 아니,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은 거뜬히 갈만큼 배를 채웠다. 전투를 마무리 짓고 마지막으로 남은 놈의 꼬리를 아그작 깨물어 속에 집어넣었을 때는 구경을 하러 온 물고기들이 잔뜩 ‘그것’을 에워싸고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숭배를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쉬고 싶었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남쪽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북동쪽에 낳아 둔 알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이가 깨어나면 알아서 찾아오겠지. 뒤따라오는 행렬이 줄기처럼 이어졌지만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쉬지 않고 헤엄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잠들었다.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바닷속 깊은 곳에서 ‘그것’은 눈을 떴다.
‘그것’이 눈꺼풀을 들자 그 주변을 맴돌고 있던 다른 어류들은 기쁨에 겨웠다. 아마 ‘그것’의 귀환이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오리라 예상했던 탓이다.
그들은 완전히 틀렸다.
‘그것’은 주변에 헤엄치던 모든 이들을 한 입에 먹어치웠다. 재빠르고 민첩했다. 아무런 고통도 없이 이빨로 짓이겨 바로 죽여 주었다.
마침내 눈을 뜬 ‘그것’은 강한 허기를 느꼈다.
아주 깊은 해저서부터 위로 올라오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수년간 여기에서 해결하던 끼니 또한 점차 부족해지려는 차였다. 점점 위로 올라가 육지와 가까워졌다. 한 번은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이른 새벽에 바다 위로 아주 잠깐 나간 적도 있었다.
그리고 바다를 방황 중인 지금, 해저에서도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고함이 전해졌다. 호기심이 생긴 ‘그것’은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한 세상으로 쭉쭉 뻗어 올라갔다.
그리고 신기하게 생긴 새로운 먹이들을 찾았다.
* * *
한순간이었다. 재앙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지난번에 언영이 물리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번에 나타난 악몽은 그것의 열 배는 되는 크기였다.
얼마 전 그것은 적어도 피부가 매끄러웠지만, 이번에 나타난 재앙의 피부는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몇백 년 전에 살결에 박혀 빼내지 못한 인간 문물의 자재가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 괴물은 기괴하고 신비로운 깊은 바다 가장 아래에 현재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흔적이었다.
그것의 눈으로 추정되는 시꺼먼 것이 단월도를 쳐다보았다. 다리로 추정되는 시꺼먼 것이 걸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서히 섬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이들은 사랑하는 이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목린아! 목현아!”
익문이 울었다.
목현은 서둘러 목린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일단 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타올랐다.
“목린…….”
목현으로부터 등을 지고 있는 목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어서 목린의 어깨가 발작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숨을 쉬기 버거워하는 소리까지 들리자 목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당황한 목현이 다가가기 전에 먼저 언영이 목린의 두 어깨를 세게 붙들어 잡았다. 들썩이는 목린의 어깨와 머리는 멈추지 않았다. 언영은 긴박한 얼굴로 목현을 향해 눈을 돌리고 빠르게 말했다.
“먼저 가서 장인과 나머지 섬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건 그쪽입니다. 저도 금방 목린이를 진정시키고 가겠습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
망설이는 목현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가 안쓰러워 보이는 목린의 뒤통수와 언영을 목숨줄처럼 꽉 붙들고 있는 그녀의 손에 잠시 머물렀다.
마찬가지로 안절부절못하며 목린의 주변을 맴도는 하얀 말을 끝으로 눈에 담고, 목현이 경직된 표정으로 운을 뗐다.
“최대한 빨리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목린과 눈을 맞춘 언영이 대답했다.
“목린아, 괜찮아. 괜찮아.”
언영이 두 손으로 목린의 뺨을 감싸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언영은 목린의 얼굴이 마구 떨리지 않게 붙잡고, 이마를 함께 맞댔다. 목린의 시야에 오로지 그 혼자만이 들어차도록.
목린의 호흡과 눈동자 초점이 매우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초족 사람들하고 안전하게 같이 있어. 알았지? 내가 금방 해결해 주고 올게. 너희 사람들을 지켜 줄게. 별로 오래 안 걸릴 거야.”
언영이 목린의 머리를 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목린은 대답하는 대신 더욱 언영의 품에 파고들었다.
“괜찮아. 내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목린은 한 번 크게 훌쩍이고 눈을 들어 언영을 빼꼼 올려다보았다.
“할 수 있어요. 서방님 정말 강하시니까…… 부디 무사히 돌아오세요.”
“약속할게.”
목린이 천천히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언영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목린을 기다렸다. 사람들의 아우성이 점점 커지고 그만큼 그의 등에도 식은땀이 흘렀지만, 끝까지 아닌 척했다.
“말에 탈 수 있겠어?”
“…….”
목린이 자리에서 일어난 이후 언영은 목린의 허리를 안아 들어 그녀를 봄비의 위에 앉혔다. 일단 자세를 잡기는 했는데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을까 싶어 언영이 살짝 불안하게 물었다. 목린은 고삐를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미루던 와중에, 돌연 무언가가 생각난 듯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봄비의 옆에 매달려 있는 짐 꾸러미를 열었다.
“이거 입으세요. 제…… 제가 마을 사람들하고 같이 만들었어요.”
목린은 그동안 열심히 만들었던 갑옷을 꺼내 들었다. 추운 날씨에도 볼품없는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있던 언영에게 딱 맞을 법했다.
“정말…… 고마워.”
언영이 멍하니 그것을 넘겨받았다. 고개를 숙여 빤히 내려다보았다. 위에서 목린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평생 정신을 놓았을지도 몰랐다.
“봄비야, 가.”
언영이 봄비의 뺨을 톡톡 두들기며 숙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봄비는 언영과 한 번 진지하게 눈을 맞춘 후에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괴물에게서부터 최대한 멀리, 초족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목린을 데려갔다. 멀어지는 와중에도 목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속 뒤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언영이 먼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그렇지 않으면 못 참고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갈 것 같았다.
“…….”
이미 많은 육지 사람들은 괴물의 앞에 바짝 다가가 검과 창을 휘두르고 화살을 쏘고 있었다. 섬사람들은 울면서 도망치느라 바빴고 귀혈족 사람들이 그들의 대피를 도와주고 있었다.
한꺼번에 솟구쳐 오는 수십 개의 타격에도 괴물의 껍질은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어느새 섬 위로 미끄러져 올라온 그것은 등에서 자라나는 기다란 촉완들을 널리 주변에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쭉 뻗어 나가 산을 내려치자 나무들이 형편없이 부러지기 시작했다.
언영은 이를 악물었다.
목린의 추억을 차지하는 곳, 목린의 일부분을 저렇게 손쉽게 무너뜨리는 녀석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토록 전신의 핏줄에 앙분이 흐른 적이 있었던가. 그는 목린이 건넨 갑옷을 비장한 낯빛으로 걸쳤다.
목린이 시도 때도 없이 갖고 다니던 갑옷이다. 언영이 그립고 보고 싶어 잠이 오지 않는 나날엔 품에 바짝 끌어안고 잤다. 그러니 갑옷에는 온통 목린의 체취가 배어 있었다. 그것을 착용한 언영의 몸에도 또한 온통 그녀의 살 내음이 묻었다. 그의 젊은 피가 끓어올랐다. 언영은 웅장하게 내질렀다.
“목린이 냄새!”
흥분한 언영의 전투력이 세 곱절 상향했다. 그가 날아가듯이 뛰어갔다.
가까워질수록 어머니 월진의 고함이 가까이서 들렸다.
“이겨라! 어떻게 해서든 초족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 우린 그들에게 평생 갚지 못할 빚이 있다!”
한편, 괴물의 바로 아래에서 월진을 선두로 수십 명의 귀혈족이 대형을 맞추며 하늘로 슝슝 날아올랐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들도 난생 보지 못한 적의 출현에 당황했지만, 긍정적인 태도만큼이나 이 상황에 중요한 것은 없음을 알았다. 활기찬 웃음과 함께 날아올라 꼬리와 촉완을 동강 내러 달려들었다.
다른 부족들도 각자 대열을 맞추어 이곳저곳에서 함께 공격했다. 언영은 눈을 빠르게 돌려 그중에서도 명족이 있는 위치를 파악했다.
직접 공격을 하기보다는 후방에서 괴물의 특성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던 호민은 갑자기 언영이 어깨를 쥐어오자 눈에 띄게 화들짝 놀랐다.
“저건 뭐야. 왜 여기 나타난 거야?”
“아마 지난가을에 우리가, 아니,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호민이 창피함 탓에 고개를 들 줄 몰랐다.
그때 그들의 위에서 누군가가 촉완에 몸통이 돌돌 말려 압박당했다.
“기죽지 마. 우리 모두 똑같이 생각했잖아. 네 잘못이 아니야.”
“미안해…….”
“괜찮아. 다 함께 싸워서 이번에도 이기면 되잖아. 할 수 있어.”
언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호민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서서히 검을 들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지난번과 똑같이 죽이면 되는 거잖아. 안 그런가?”
“아마 같은 종이라면 그렇겠지만 언영아, 이번 녀석은 저번 것보다 배로 크고 역겨운 놈이야. 네가 잘하는 건 알지만 너무 앞서가진 마.”
호민이 염려를 드러냈으나 언영은 이미 저 멀리 달려 나간 뒤였다.
* * *
섬 위로 꿈틀꿈틀 기어 올라온 그것의 몸통 아래에서 단월도가 무참히 찌그러지고 있었다. 콧김 한 번에 나무 다섯 그루가 휘청거렸다. 발길질 한 번에 산사태가 벌어졌다. 그것의 배 속으로 사람들의 거처가 꿀렁꿀렁 들어갔다.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초족 사람들의 낯빛은 단순히 경악이라고 하기엔 부족했다. 그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마저 모두 사라지는 현장이었다. 귀혈족의 안내를 따르며 안전한 방향으로 대피했다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저 괴물이 현재 눈앞에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일 뿐. 만일 방향을 돌린다면 또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바닷속으로 풍덩 풍덩 떨어지는 수많은 나무, 흙, 바위를 바라보다보면 그들의 목숨도 곧 저 길을 따라갈 것만 같았다.
그 말이 옳았다. ‘그것’의 눈에 섬은 하나의 먹이에 불과했다. 저 우뚝 솟아오른 것을 다 먹어치우면 앞으로 또 수년간 편히 잠에 들 수 있겠단 생각에 만족스러웠다. 그것의 눈 사이 붉은 점을 찍어 내려고 사방팔방에서 날아다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나, 어떻게든 몸통에 구멍을 낼 각오로 고함을 내는 수백 명의 사람들 모두 그것의 눈엔 거슬리는 먼지일 뿐이었다. 손짓 한 번에 죽여 버릴 수 있고, 콧김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빛을 내 보겠다고 불을 던지거나 칼날의 반사를 유도하는 행위조차도 가소로웠다.
호민은 이 광경을 처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로라하는 각 부족의 족장들이 거의 다 집합해 전투를 지휘 중임에도 상황은 악화될 뿐이었다. 날아오는 수백 개의 검날과 화살, 바위들을 귀찮다는 듯 발길질로 대충 해치워 내며 괴물은 섬을 우걱우걱 씹어 먹고 있었다. 돌덩이들이 괴물의 이빨로 가볍게 조각났다. 사람들의 처절한 고함 속에서 재앙은 홀로 평화로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호민은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비볐다. 난생 처음 방문한 섬인데도 울분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잘 싸우네.”
이어서 그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태연한 투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은도…….”
황은도가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팔을 괸 채를 전투를 가까이서 함께 구경 중이었다. 호민은 울음 섞인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너도 따라왔구나.”
“내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될 것 같고.”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도와주면 고맙지. 이 섬 주민들 생계가 걸렸는데.”
호민이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넌 그런 생각이 입 밖으로 뻔뻔히 나오느냐고 한 마디 해줄 법도 했지만, 상대는 은도였다. 그리고 은도는, 옛날에 스승님 아래에서 수련받을 때도 항상 저랬다.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했다. 어떻게든 꾀를 써서 피해 냈다. 주로 그 꾀의 피해자는 언영이어서 그가 순진하게 당해 대신 두 사람 몫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흔했고.
좋은 벗이라고 여기기는 하나 종종 이토록 이기적인 놈이었다. 그리고 원래 저런 녀석이니 저렇게 황당하게 말해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대충 무시하며 호민이 떠나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렇겠지.”
“응?”
호민은 깜짝 놀라 은도를 올려다보았다. 세상 편하게 앉아 결투를 관조하고 있던 은도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네 말대로야.”
호민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나름대로 약 이십 년을 알고 지내온 벗이다. 그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려 할 때면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바로 지금.
“네가 봤을 때 여기서 내가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 뭐지?”
은도는 호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음기 없이 물었다.
* * *
귀혈족 사람들 몇 명이 초족을 배로 이끌었다. 우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중요했다. 서둘러 가능한 많은 이들을 태우고 섬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초족 사람들은 모두 엉엉 울면서 함선 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익문과 목린 사이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익문은 어떻게든 목린을 배를 태우려 했고, 그 자신은 족장으로서 섬에 남아 있으려 했다. 반대로 목린은 아버지를 배로 이끌고, 자신은 여기서 언영을 조금 더 지켜보려고 했다.
목린은 팔을 뻗어 괴물의 얼굴 근처에서 계속 공격을 가하는 중인 언영을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멀리서 봐도 언영만큼은 누구보다도 빨리, 잘 알아볼 수 있었다.
“서방님께서 저 괴물이랑 너무 가까운 데서 싸우고 계시잖아요. 저러다가 잡아먹히면 어떡해요? 제가 어떻게 여길 떠나겠어요……!”
“괜찮을 거다. 자신 있으니까 저렇게 싸우고 있지 않겠느냐?”
익문이 초조하게 말했다. 얼른 목린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 주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 어떻게든 저희 섬사람들을 지켜 주려고, 자신이 없어도 위험을 무릅쓰는 중일지도 모르잖아요…….”
익문은 답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도 들었다. 저 괴물이 처음 등장했을 때, 육지 사람들이 저렇게 거대한 놈은 난생 처음 본다고 하며 난처해하는 웅성거림을. 그 긍정적인 육지 사람들이 말이다. 그러니, 아마도 목린의 말이 맞을 터다. 아무리 육지 놈들이 겁을 모르는 녀석들이라 해도 저런 것까지 마냥 하하하하 웃으며 대응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 더 목린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 했다.
“목린아.”
자신의 부인을 안전한 곳에 보내 둔 목현이 누이와 아버지 앞으로 등장했다. 목현은 목린이 배에 탈 수 있게 얼른 손을 뻗어 주었다.
하나 목린은 목현의 손을 맞잡긴커녕,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던 몸을 격렬히 비틀었다. 그리고 괴물을 향해 눈을 똑바로 뜨고 내뱉었다.
“가 봐야겠어요.”
“목린아!”
“목린아!”
익문은 물론이고, 오랜만에 다시 만난 목린의 벗들과 목현 또한 그 말을 듣고 소리 질렀다.
“목린아, 가서 뭘 한다고 그래! 우리가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 괜히 갔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목린아, 제발 이 아비 곁에 있으렴!”
“목린아!”
목린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저곳은 재앙이었다.
또한 목린은 저 괴물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 하등 없었다. 갔다가 눈 깜박할 사이에 밟혀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저기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더라도 서방님 가까이서 죽고 싶어요.”
충격적인 발언에 익문과 목현의 팔에서 힘이 풀렸다.
“죄송해요. 봄비야, 가자!”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는 초족 사람들을 빠르게 훑어본 후 목린은 봄비 위에 잽싸게 올라탔다. 봄비는 목린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양 곧장 박차를 가하며 전투를 향해 몸을 던졌다.
“다 같이 살아 돌아올게요!”
* * *
언영에게 시간을 끌 여유 따위는 없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지난번처럼 약점을 뚫는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작전이었다. 저번 전투에 참여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나 현재까지 그 누구도 붉은 점 근처에 가지 못했다.
이번에 만난 붉은 점은 이전에 만났던 녀석보다 훨씬 크기가 작았다. 실력뿐만이 아니라 운도 받쳐 줘야 명중이 될 법했다. 다시 말해, 능구렁이 같이 날아오는 촉완을 모두 피하고, 녀석의 입에서 언제 나올지 모를 독을 조심해야 하며, 그 와중에 저 작은 곳에 정확히 조준해야 한다는 뜻이다.
“으악!”
언영의 바로 옆에서 날뛰던 동료 하나가 괴물의 손짓 한 번에 둔탁한 소리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언영이 이를 악물었다. 이로써 벌써 가까이에 있던 열여섯 명이 전부 떠나가 버린 거다. 부디 그들의 상태가 최악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녀석의 촉완은 서걱 잘라낸다 한들 곧바로 다시 제 길이를 키웠다. 아래에서 월진이 지휘하고 있는 전사들이 이를 어떻게든 막기 위해 촉완이 자라나는 등에 온갖 뜨겁고 날카로운 것을 던져 대고 있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그때, 언영의 옆으로 새로운 동료가 날아들었다.
“뭐야.”
처음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어서 제 눈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언영은 고함을 내질렀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귀염둥이 보러왔지.”
언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가 폭발하며 무언가 내지르기 전에 은도는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생일이라 하길래 솔직히 털어놓으러 와 봤다.”
“젠장, 지금 너랑 놀아 줄 시간 없으니까…….”
“우리 일곱 살 때 자면서 요에 실수한 사람!”
은도는 언영의 말을 무시하며 외쳤다. 그리고 손에 끼고 온 것 중에 누가 봐도 가장 비싸 보이는 반지를 난데없이 빼냈다. 사방에서 꿈틀거리며 날아오는 괴물의 촉완을 가볍게 피해 낸 그는 갑자기 그 비싼 보물을 허공으로 휙 올려 던졌다. 어이가 없어진 언영이 욕설과 함께 당장 꺼지라고 외치려 하던 그때. 은도는 등에 차고 있던 월도를 쥐고 하늘에 있는 반지를 힘차게 반으로 쪼갰다.
“나 맞다! 미안하다, 언영아!”
은도가 휘두른 무기가 조그만 반지를 정확히 반으로 맞춰 갈랐다.
수백 년에 한 번 나온다는 광석이었다. 고작 조그만 돌로 보였던 것의 내부에서 세상을 녹일 정도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와 괴물의 눈을 정통으로 공격했다.
괴물은 우선적으로 손 하나로 자신의 약점을 꼭꼭 숨겼다. 하지만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어두운 동굴 같은 입을 크게 벌리며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잠시나마 다리와 촉완이 무력화되고 괴물이 힘을 잃었다.
“지금이다! 뭐라도 던져라!”
수백 명의 전사들이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온갖 힘을 다 끌어냈다. 보이는 것이라면 다 던졌다. 원래 언영의 생일 기념으로 준비했던 발 조각상도 이때 날아갔다. 그들도 빛의 영향을 받아 제대로 눈을 뜰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으나 현재의 괴물처럼 무방비하게 축 처지진 않았다. 끊어내도 쭉쭉 자라나던 촉완이 돌연 성장을 멈추었다.
전반적인 공격이 대부분 얼굴을 향했다. 약점을 가리고 있는 발을 잘라내기 위한 쉬지 않는 침투가 벌어졌다. 비명을 지르느라 쩍 벌어진 괴물의 구강을 공략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꿈틀거리는 혀를 절단시키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를 눈치챈 괴물은 독을 내뿜을 자세를 취했다. 하나 이를 모를 사람들이 아니었다. 바다를 지키고 있던 초족의 배 중에 하나를 수십 명이 같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우렁찬 고함과 함께 괴물의 벌어진 입으로 던졌다. 세로로 돌아간 배는 양쪽 끝으로 괴물의 입 내부를 찍으며 고정되었다.
“어이쿠!”
배 바닥에 커다랗게 새겨진 ‘목린아 사랑해’를 보고 흠칫 놀란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뿜어져 나온 독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배에 부딪쳤다. 괴물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극히 당황한 듯했다. 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괴물은 대체 자신의 입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약점을 가리고 있던 힘이 풀린 발을 뗐다.
언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들고 있던 검을 제대로 쥐었다. 높이 몸을 날렸다. 정확히 그 부분으로 몸과 함께 검을 내리꽂았다.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자세였다.
칼날이 붉은 점 중앙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 * *
“봄비야, 미안해. 너까지 이런 위험에 빠뜨려서.”
봄비가 작게 울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다리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방해하지는 않을 거야. 그냥……. 그냥 서방님을 최대한 가까이서 응원하자.”
목린은 거칠게 방향을 틀어 산꼭대기를 목적지로 잡았다. 높이 올라갈수록 보다 가까이서 언영을 볼 수 있으리라.
한겨울임에도 고삐를 잡은 손에 땀이 찼다.
아직 괴물의 손이 해를 끼치지 않은 길을 헤쳐 나갔다. 우거진 나무들이 시야를 막아서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하나 귓가로 밀려들어오는 괴물과 사람들의 고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했다. 목린은 손등 한쪽으로 젖은 눈을 거칠게 비볐다.
돌연 봄비가 움직임을 멈췄다. 목린이 당황하며 고삐를 흔들었다.
“봄비야, 왜 그래?”
봄비는 울음을 내며 오른쪽 위를 바라보았다. 목린 또한 그곳에 시선을 주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옆에 있는 땅이 아래로 무너지며 목린과 봄비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나무, 흙, 바위들이 한데 뒤엉켜 파도를 만들었다. 목린은 봄비의 고삐를 급하게 당기며 방향을 틀려 했다. 하나 뒤쪽의 상황이 더 심각했다. 결국 목린에게 남은 길은 흙에 깔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앞으로 달리는 것뿐이었다.
봄비의 네 다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위에서 흔들리는 목린은 핏기 없는 얼굴로 허덕거렸다.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은 공포만 더 고조시켰다. 머리 위로 벌써 흙이 우수수 떨어졌다. 실시간으로 눈앞에서 길이 사라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내면 돼!’
다행히 조그맣게 보이는 저 앞은 아직 안전해 보였다. 목린의 상체가 절로 그쪽을 갈망하며 앞으로 숙여졌다. 봄비의 눈동자도 불타올랐다. 하나 눈앞에 처절하게 보였다.
“안 돼!”
무너지는 산이 달리는 봄비보다 더 빨랐다.
그래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힘내면 될 것도 같았다. 봄비도 이를 알았다. 죽을힘을 다해, 수명을 줄이는 한이 있어도 달렸다. 격차가 점점 좁아졌다. 약간만 더 버티면 되었다. 아주 약간만…….
목린의 땋은 머리카락이 공중을 갈랐다. 상황을 눈에 담은 목린의 눈에 절망이 고였다.
“아.”
아무래도, 희망을 눈앞에 두고 결국 실패할 듯했다.
목린은 고삐를 쥐는 대신, 흙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할 수 있게 봄비의 목을 끌어안았다.
안전한 땅을 겨우 몇 발자국 앞에 둔 목린과 봄비의 위로 암흑이 쏟아졌다.
* * *
언영이 약점을 정확하게 찌르는 그 순간, 지켜본 모든 이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언영의 이름을 외치며 기뻐했다. 이번에도 승리다! 그들의 가슴이 자긍심으로 불탔다.
“하아. 하아…….”
칼날이 모조리 깊숙이 붉은 점 위로 파묻혔다. 그 위에 붙어 있는 칼 손잡이를 쥐고 있는 언영의 거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곳에 온 힘을 다해 매달린 채였다. 언영의 몸통이 닫히지 못하는 괴물의 입 앞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들도 그에겐 아득하게 들렸다.
“주언영! 주언영! 주언…….”
하나 이상함을 느낀 전사들의 목소리는 점진적으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언영의 눈동자에도 차차 의혹이 빛났다.
이전에 바다에서 물리쳤던 같은 종의 괴귀는 약점을 찌르는 순간 바로 번개에 맞은 양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팔과 다리를 뻣뻣이 굳히더니 이어서 픽 쓰러지듯 바로 옆으로 무너지며 바닷속으로 영원히 잠적했다. 직접 만들어 놓은 난장판이 무색하게도 그렇게 짧고 조용한 최후였더랬다.
그 자리에 함께했었고 지금도 이곳에 있는 이들의 수군거림이 천천히 크기를 키웠다. 현재 그들이 마주한 것은 지난번과 매우 상이했다. 괴귀는 쓰러지기는커녕,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언영 덕분이라기엔 이미 은도의 반지로 공격당했을 때부터 감겨 있었던 눈꺼풀이었다. 가만히 있다곤 하나 다리에 온전히 힘이 들어가 있으니 기력을 잃은 것 또한 아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언영은 혹시 몰라서 더욱 칼 손잡이에 힘을 주고 밀어 넣었으나 이미 끝까지 다 침투한 칼날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대로 놓고 땅으로 내려가야 하나, 아니면 계속 이렇게 매달려 있어야 하나 고심했다. 아니면 이 안으로 다른 것을 더 찔러 넣어야 하나. 손에 남은 무기가 없으니 얼른 주변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던 그때였다.
반지가 깨진 이후로 닫혀 버린 괴귀의 눈꺼풀이 번뜩 들어 올려졌다.
입 근처에 매달려 있던 언영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를 본 순간, 소름이 돋았다.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은 그것의 눈은 아까보다도 더욱 징그럽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거미줄처럼 안구에 돋아난 핏줄이 지켜보는 사람들을 압살시켰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로지 눈만 떴을 뿐인데, 언영은 돌연 무력감에 휩싸였다. 인생에서 처음 맞이하는 감정이었다.
“…….”
본디 이 괴귀는 옆에서 난리치는 인간들을 먼지 취급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 비해 너무도 약한 적이라 일말의 부정적인 감정조차 들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지나치게 성가시다면 후에 이 섬을 먹으면서 함께 배 속으로 집어넣으면 되리라, 그리 생각했다.
그랬던 그것에게 마침내 딱 하나, 거슬리는 인간이 생겼다. 바로 지금 그의 눈 밑에 매달려 있는 저 존재. 가소롭게도 건들면 안 될 곳을 찔러 버린 저자……. 그렇게도 관심을 원한다면 주면 된다고, 그것은 마침내 생각했다.
그리고 일이 벌어졌다.
“으아아악!”
얼굴을 제외한 그것의 몸통에 날카로운 가시가 갑자기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몸통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붙어 있던 사람들은 기함을 하면서 떨어져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잡고 매달릴 것이 없었다.
당연히 그들과 초족을 구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유일한 방법이 통하지 않았음이 드러나자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종적을 감추었다. 물론 끓어오르는 전사의 피를 가진 이들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새로운 방법을 갈구해 다시 공격할 대책을 세우려했다. 하나 이것은 단순한 시도로 끝났다.
감각이 돌아온 발로 ‘그것’이 산을 달려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제대로 달리자 폭풍 소리가 들리고 지진이 난 듯이 땅이 움직였다.
여태까지 보였던 움직임은 단순히 걷던 것, 아니, 기어 다니던 것에 유사할 뿐이었다. 제대로 빠르게 발을 굴려 산 위를 올라가는 그것을 앞에 두고 인간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멍하니 지켜보다가 후에 그들에게 떨어지는 흙과 나무, 바위를 피하기 위해 도망쳐야만했다.
구구구구 무서운 소리를 내며 괴물은 언영과 함께 섬의 가장 위로 성큼성큼 향했다. ‘그것’은 언영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혼자라는 처절한 괴로움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저지르면서 괴귀의 눈동자는 오로지 한 사람, 눈앞의 언영만을 평온하게 바라보았다. 언영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이렇게 빠르게 달리는데 여기서 칼 손잡이를 놓치고 떨어지면 그대로 압사당해 죽을 운명뿐이었다. 커다란 육신이 덜컹덜컹 앞뒤로 흔들리는 동안, 그는 칼 손잡이를 생명줄처럼 쥐었다.
* * *
목린과 봄비가 산에 깔리기 바로 직전. 옆에서 엄청난 힘이 날아와 둘을 앞으로 튕겨 냈다.
이기지 못한 봄비가 앞으로 넘어지고, 목린도 말에서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머리에 흙이 엉겨 붙고 전신이 쑤셨다. 하나 산사태에 파묻혀 버리느니 이편이 곱절은 더 나음이 틀림없었다.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기도 전에 목린과 봄비는 갑작스러운 도움의 근원을 확인하기 위하여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눈에 들어온 현장은 처참했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목숨을 걸고 내달렸던 길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봄비의 발자국은 모두 저 아래 어딘가에 숨어 버리고 말았다. 하나 봄비에게나 목린에게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의 시야를 정말로 사로잡은 것은 바로 몸통이 반쯤 흙에 깔린 채 괴로운 울음을 내고 있는 륭이었다.
“륭아!”
목린은 온몸이 쑤신 것도 잊고 튀어 올랐다. 봄비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륭에게 급히 달려갔다.
“륭아, 괜찮니?”
아무래도 목린과 봄비가 그대로 당하려 하자 직접 자신의 몸을 떠밀어서 대신 희생한 듯했다.
목린은 륭의 목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륭은 괜찮다는 의미로 울었으나, 평소보다 훨씬 힘 빠진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기에 외려 역효과만 낳았다. 봄비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발을 빠르게 움직이며 륭을 덮고 있는 흙을 요란하게 파내기 시작했다. 목린도 소매를 걷으며 도울 준비를 했다.
“기다려! 금방 구해 줄…….”
하나 목린의 목소리는 구구구구 하는 땅이 흔들리는 소리에 그저 볼품없이 묻혀 버렸다.
“뭐지?”
이 와중에 갑자기 지진이라도 찾아온 건가? 평소에 그런 재해는 잘 찾아오지도 않는 이 땅에 대체 무슨 불운이 들어와서 하필이면 이때, 사상 최악의 적을 대면하고 있을 때 지진이 터진단 말인가? 그렇다면 륭이 여기 묻혀 있을수록 더 위험할 수 있겠단 생각에 흙을 파는 목린의 손길이 빨라지려고 했다.
“왜 그래?”
하나 목린의 손을 치우려는 듯 륭이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 기세가 매우 험악해,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며 목린이 얼떨떨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륭이 코끝으로 목린의 등 뒤를 계속 가리켰다. 콧김이 계속 격렬하게 나왔다. 목린도 차차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누가 봐도 소리의 근원인 저 방향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나도 그건 알지만…….”
눈앞에 쓰러진 벗을 두고 그리 쉽게 떨쳐 버리듯 갈 수도 없었다.
목린이 망설이기만 하고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륭은 대상을 바꾸었다. 이번엔 봄비를 향해 가 보라고 무서운 표정과 함께 머리를 흔들었다. 하나 늘 륭을 쏘아보기만 했던 과거가 허상인 것처럼, 지금은 봄비마저도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륭 곁에 남으려 했다.
늘 더 이성적인 듯 보였던 봄비마저도 그런 태도를 보이자 이번엔 륭도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하나 그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열심히 그의 몸 위에서 움직이는 목린의 작은 손을 물어 버릴 듯이 흉폭하게 굴었다.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목린도 결국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잠깐 가서 상황만 얼른 보고 올게.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금방 돌아올 거야.”
목린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봄비야, 가자.”
놀랍게도 목린보다도 봄비가 더 일어나길 힘겨워했다. 걱정이 담긴 봄비의 눈동자가 륭의 얼굴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엔 주인을 따라 움직이긴 하였으나 누가 봐도 자의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다시 륭에게 돌아가기 위해 봄비는 있는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위에서 목린도 마주하게 될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 * *
괴귀는 언영을 데리고 순식간에 섬의 가장 꼭대기까지 올라탔다. 멀리서 보면 종말 직전의 광경이나 다를 바 없었다.
“…….”
언영은 자신을 향한 충혈된 붉은 눈을 그대로 똑바로 노려보며 손으로는 칼 손잡이를 돌렸다. 안에 박힌 칼날이 움직이면서 붉은 점 속의 살이 더 갈라지는 느낌이 전해지긴 했지만 그뿐. 외적으로 이 괴귀에게선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다.
산을 올라탈 다리는 괜찮지만 아직 언영을 잡아서 으깨 버릴 수 있는 발에는 감각이 채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다 하여 그것에게 하찮은 인간을 죽일 방법이 더 이상 남지 않은 건 아니었다.
힘을 억세게 준 그것의 턱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체 바닥에 ‘목린아 사랑해’가 적힌 배도 천천히 휘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있게 괴물의 입에서 독이 끓어올랐다.
“…….”
상황을 눈치챈 언영은 겉으로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여기서 손잡이를 놓고 도망간다고 한들 이 재앙의 표적이 된 이상 살아서 도망칠 수 없을 터. 그리고 지금 그마저도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면 이제 이 섬을 지킬 방법은 없었다. 수백 명의 삶의 터전인,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가장 사모하는 사람을 만들어 준 이 아름다운 곳 말이다.
언영은 칼 손잡이까지도 점 안으로 스윽 밀어 넣었다. 다시 말해 그가 붙잡고 매달릴 곳이 줄어든다는 뜻이었으나 아무데나 희망을 걸어야 했다. 그의 근육질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겨울임에도 땀이 났다. 하나 역시 아무런 변화 없는 괴귀의 모습은 또 행운이 언영에게서 등을 돌렸음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목린이 이 세상에서 가장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사태이기도 하였다.
시야를 잔뜩 차지하고 있던 나무들을 뚫고 목린과 봄비는 탁 트인 곳으로 나왔다. 이전에 언영이 그녀에게 다소 괴이한 방법으로 청혼하였던 장소이기도 했다. 섬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피기 가장 좋은 곳이었는데, 다행히 아직 이곳은 훼손되지 않고 안전했다.
하나 이 사실에 안도할 새도 없이 목린은 심장이 관통당하는 듯한 타격을 얻어맞아야만 했다.
목린이 조금만 더 고개를 들면, 바로 눈앞에 언영이 있었다. 그렇게 거대하다고 여겨졌던 이가 보잘것없이 작은 크기로, 범접할 수 없는 크기의 괴귀와 눈을 맞추며 단둘이 대면하고 있던 것이다. 아까 처음 건넸을 때만 해도 반질반질하고 윤기가 나던 갑옷은 어느새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와 독이 흘러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런 건 사실 아무 상관 없었다. 갑옷이야 다시 만들어 주면 되었다. 언영이 죽지만 않는다면 갑옷 따위는 다 찢어지든, 괴물의 입에 들어가 씹혀지든 알 바 아니었다.
목린도, 조금 전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기 시작한 초족도, 저 아래에서 허망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육지의 무사들도 모두 이 순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목린의 눈에도 격하게 휘어지고 있는 불안한 선체가 보였다. 저것이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면 끔찍한 일이 이어지리란 사실을 대충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목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울면서 언영을 부를 힘조차 소멸되었다.
이 상황에서 목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누구보다도 먼저 도움의 손길을 뻗어 줄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분명 몸을 기꺼이 던지거나, 아니면 최소한 언영에게 무기라도 건네주면서…….
목린의 상념이 순간 거기서 끊겼다.
목린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사실 정말 목린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진 않았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언영이 목린에게 주었던 창이 여기까지 오는 길에 늘 함께했다. 방금 전까지도 봄비의 옆에 매달려 같이 달리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 쓰이리라 예상하고 가져오진 않았다.
“……!”
배에서 으드득 금이 나는 소리 때문에 목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영은 아직 목린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하긴 저렇게 가까이서 괴귀와 눈싸움 중이라면 다른 곳으로 관심이 쏠릴 리가 없었다.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는 오리무중이었으나, 겉으로는 끈질기게 눈을 부라리며 괴귀와 눈을 맞추는 패기는 보통의 용기에서 나올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눈앞에 두고, 겁쟁이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목린은 창을 쥐었다. 이를 느낀 봄비는 창을 더 힘차게 날릴 수 있도록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런 봄비의 귓가에 목린이 그 어느 때보다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말하면 앞으로 달려.”
봄비가 하얀 얼굴을 짧게 끄덕였다.
말이 계속 뒤로 걷는 동안, 목린은 창을 제대로 쥐며 어디로 날려야 할지 고심했다. 눈을 맞춘다면 그 순간에야 잠시 희열을 느끼겠지만, 겨우 그 공격 하나로 죽어 버릴 놈도 아닐뿐더러 언영을 지키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혀를 찌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냥 언영에게 던져 주는 게 가장 나을 성싶기도 하다. 하나 그러다가 실수로 그가 타격을 입게 된다면…….
분주하게 돌아가던 생각은 선체가 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자 하얗게 불타 버렸다. 이젠 선체 바닥을 가르는 금이 점점 더 생겨나는 상황이 눈앞에 바로 보일 정도였다.
“서, 서방님!”
당황한 목린이 긴박하게 울부짖었다.
언영이 곧장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목린은 평생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입은 다물어져 있었지만 그의 눈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여기 있느냐 묻고 있는 듯했다. 당연히 목린이라면 여기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을 거라 믿고, 마음 놓고 싸운 거니까. 목린은 답했다. 당연히 서방님 곁에 있으려고 왔어요. 물론 입을 열고 말하진 않았으나 지금의 언영의 눈처럼, 목린은 자신의 눈도 그 감정을 말해 주고 있으리라 믿었다.
하나 낭만적인 상황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보, 봄비야! 달려!”
달리라니. 갑작스러운 말에 언영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리고 봄비는 절벽 끝을 향해 내달렸다. 목린은 당황한 그의 눈을 굳건히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도와드릴 수 있어.
그리고 그때, 배가 완전히 부러졌다. 선체가 입에서 떨어져 나가며 괴물은 온전한 자유를 되찾았다.
그것의 구강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독이 언영의 전신을 뒤집었다.
“안 돼!”
아래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처절하게 내질렀다. 그의 가족. 친우, 동료들 모두의 표정이 똑같았다.
“아이고!”
“무슨 일이지?”
조금 더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초족 사람들은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발만 동동 굴렀다. 원래 귀혈족의 배를 타고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던 그들은 괴귀가 언영을 데리고 섬 꼭대기로 데려가자 마음을 바꿨다. 위험해도 좋으니, 운항을 맡고 있던 귀혈족에게 다시 뱃머리를 돌리길 청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섬도 아닌 곳을 위해서 이렇게나 열심히 싸우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보자니, 가만히 도망치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웠던 탓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처참한 모습을 보며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다른 이도 아닌 그 ‘주언영’ 때문에 그들은 경악하고, 울고, 비탄에 빠졌다.
목린이 느낀 감정은 글로 써 담아 내기엔 너무도 묵직했다.
눈앞에서 지아비 몸에 독이 쏟아졌다. 이상한 악취가 올라오는 그것이 언영의 코와 입으로 콸콸 들어가고, 피부에 떨어졌다. 거의 동시에 언영의 허리가 꺾이며 구토를 참는 듯 입에서 욱- 하고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 여전히 칼 손잡이를 잡고 버티는 저 모습은 기적에 가까워 보였다.
봄비는 계속 달렸지만, 목린은 이제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언영의 눈에서 영혼이 희미해지는 상황이 보였다. 그의 입술이 덜덜 떨리는 모습이 적나라했다.
그렇게 창을 잡은 손에서 힘이 풀리려고 했을 때.
언영이 자유로운 한 팔을 옆으로 뻗었다.
발작하듯이 흔들리는 그 팔은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라고 보일 성싶었다.
하나 목린은 알았다. 이것은 마지막 기회였다.
창을 던질 마지막 자세를 취했다. 이제껏 배워 왔던 모든 연습을 몸에 실었다. 이번엔 절대 눈을 감지 않았다.
봄비가 절벽의 끝에 다다르고, 목린의 창은 손을 떠났다.
정성이 가득한 손길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끝은 표적, 즉 언영의 손을 향해 정직하게 뻗어 나갔다. 얼핏 보면 그의 손을 찌르려는 시도인가 싶겠으나 아니었다. 언영의 손은 무언가를 잡을 것처럼 벌어졌고, 창은 그 중앙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언영은 억센 힘을 주며 날아오는 창을 손으로 직접 잡았다. 팔뚝이 잠시 휘청이긴 하였으나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창은 그의 손안에 안정적으로 들어왔다.
언영은 창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괴귀의 붉은 점 안으로, 이미 파고 들어간 검 옆에 푹 찍었다. 그런 다음에는 창이 전부 들어갈 수 있게 여러 차례로 끊어서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검보다 훨씬 긴 길이를 자랑하는 창이기에 당연히 훨씬 깊숙하게 들어갔다.
창이 거의 끝까지 들어갔을 때, 괴귀의 몸에 변화가 벌어졌다.
그것이 당황한 듯 얼어붙었다. 언영은 이 순간이 익숙했다. 저번 가을에 한번 경험했다.
안도한 언영의 몸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칼과 창을 잡은 두 손을 모두 놓았다.
마침 그 순간 괴귀 또한 마지막 발악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여 언영은 던져지듯 멀리 날아갔다. 그가 입으로 토하는 수많은 양의 피가 그와 반대 방향으로 쏟아졌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열려 있지 않았다.
“서방님!”
보잘것없이 날아간 언영은 목린과 봄비의 머리를 뛰어넘어, 그보다 더 뒤로 무거운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목린과 봄비는 기어가듯 그에게 달려갔다.
괴물은 입을 쩌억 벌리고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턱 아래로 독이 줄줄 흘러내렸다. 흐리멍덩하게 충혈된 눈이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머금었다. 앞서 마비되었던 앞발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앞발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머리와 먼 꼬리부터 시작해서, 뒷발, 몸통, 목, 입, 그리고 얼굴…….
마치 태양에게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듯하던 괴귀의 눈이 영원히 감겼다.
* * *
초족이 탄 함선은 다시 섬에 완전히 돌아왔다. 하나 그 누구도 쉬이 배에서 내리지 못하였다.
“끝난 건가?”
“그런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면 왜…….”
모두가 조용한가.
초족도 이제 육지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저런 괴물을 처치했다면 온순한 태도의 초족마저도 신나서 엉덩이를 들썩거렸을 것이다. 그러니 귀혈족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 왜 아무도 승리를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가.
그때, 초족 사람들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지르는 처절한 비명이 섬의 하늘을 찢었다.
“서방님!”
“서방님! 일어나세요! 서방님! 정신 차리세요! 서방님!”
“부인, 위험합니다! 몸을 만지진 마십시오. 독이 닿을 수도 있습니다!”
귀혈족 의원이 절벽 위에 있을 목린을 향해 목청껏 내질렀다.
괴물의 죽음에 기뻐하기도 전에 땅에 내려와 있던 그들은 모두 봐 버리고 말았다. 독을 전신에 두르고 피를 토하며 형편없이 날아가는 언영이라니. 그들이 이제껏 봐오던 그의 호방한 모습과 제일 괴리가 컸다.
축 늘어져 있는 바다 괴물의 최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꾸물꾸물 터져 나오던 괴물의 촉완에 파묻혀 가며 검을 휘두르던 이들도, 녀석의 발에 밟혀 죽을 뻔한 이들도 모두 절벽 앞으로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아래에선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모두 일제히 고개를 들고, 목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터무니없이 긍정적인 그들마저도 속으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서방님, 죽으면 안 돼요! 저 목린이에요! 서방님 저랑 열다섯 명 낳고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기로 했잖아요……. 서방님…….”
목린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약한 모습은 무의식 속에서도 올린 적 없기 때문일까, 그는 꿈속에서조차도 늘 강인했다. 언제나 옆에서, 또는 앞에서 그녀를 헌신적으로 지켜 줄 든든한 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현실에서 벌어지면 안 되었다.
언영의 살짝 벌어진 입으로 계속 검붉은 피가 줄줄 나왔다. 입술의 색은 거의 녹색에 가까웠다. 그의 피부는 이미 산 자와 죽은 자 그 중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몸이 독과 싸우고 있었는지 힘없이 축 늘어진 팔다리가 아까까지만 해도 덜덜 떨리다가 멈췄다. 차라리 그렇게 발작하는 게 나았다. 그런 움직임까지 멈추니 그는 정말로 무덤에서 파낸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그의 가슴이 경련하듯 가끔 살짝 들썩거렸다.
“서방님, 절 두고 가시면 어떡해요!”
목린은 언영을 내려다보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목린의 통곡이 절벽 아래 사람들의 귀를 후벼 팠다. 이제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주언영이 떠났다. 누군가에겐 좋은 아들. 또 누군가에게는 좋은 오라버니. 혹은 좋은 벗, 좋은 동지, 좋은 경쟁자, 좋은 이웃. 고마웠던 영혼과의 이별이 다가온 것이다.
몸이 잠깐 불에 데거나 싸우다가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은 별거 아니라며 너털웃음으로 넘겨 버리던 그들이, 지금 이 순간은 모두 한마음으로 모여 울었다. 오늘의 눈물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 멍청아!”
귀혈족 의원이 근육질 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언영아!”
현오와 다인을 비롯하여 언영과 함께 인연을 쌓았던 벗들도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며 통곡했다. 그에게 존경의 의미로 무릎을 꿇는 이도 있었다. 호민은 은도를 끌어안고 훌쩍거렸으며 은도는 유일하게 여기서 울지 않은 척, 슬프지 않은 척하며 눈을 과하게 깜박거렸다.
“오라버니!”
“언영아!”
언영의 가족 다섯 명도 서로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숲속에서 혼자 누워있는 륭도 밖에서 들려오는 울음을 듣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고개를 수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목린은 고개를 숙이고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서방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느새 들썩거리던 언영의 가슴마저도 차분해졌다. 그는 이제 정말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침하며 피를 토해내지도 않고 속눈썹의 떨림조차도 멈췄다. 들리지 않을 것을 알지만 목린은 그동안 속에 묵혀 두었던 고백을 계속 털어놓았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갑자기 그때, 목린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목린이 휙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게!”
목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속삭였다.
“아버지?”
“일어나게! 우리가…… 우리가 감사할 기회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자네, 목린이를 두고 갈 생각인가. 원래 그럴 사람이 아니잖나! 돌아오게! 제발!”
익문이 목린의 오른쪽에 나란히 앉아 꺼이꺼이 외쳤다.
“주 서방! 내가 미안했네! 처형까지는 너무 갔네! 돌아와서 우리 목린이를 행복하게 해 주게!”
“매제!”
갑작스런 아버지의 등장에 적응하기도 전에, 이번엔 목린의 왼쪽으로 목현이 달려와 앉았다.
목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봄비와 목린이 온 방향은 이미 산사태로 막힌 상태였고, 익문과 목현은 그와 다른 방향으로 귀혈족의 도움을 받아 올라왔다. 부자는 각자 목린의 양쪽에서 언영의 죽음을 슬퍼했다. 두 사람이 여기까지 올라오길 도와준 귀혈족 사람들도 뒤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터뜨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뒤늦게 합류한 초족 사람들도 근처로 달려와 함께 울기 시작했다. 소중한 영혼의 희생 앞에서 편을 나누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아마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말을 섞을 일도 없었을 이들끼리 함께 부둥켜안았다. 낯선 이의 어깨를 오랜 친구라도 된 것처럼 다독여 주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윤근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덕복과 함께 마주 안고 있었으며, 은평은 초족의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울었다. 어떤 남성이 흐느끼면서 다인에게 다가가 팔을 벌렸다. 슬픔에 취한 다인이 품에 안기려고 했는데 어느새 아픈 다리도 잊고 달려온 현오가 욕설을 외치며 그를 주먹으로 날려 버렸다. 그리고 그가 직접 다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목린은 이대로 가다간 몸이 전부 물로 변해 바다에 함께 떠밀려 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상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만큼 어느새 언영은 그녀의 삶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빈자리는 단순히 현재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목린의 미래, 그리고 과거의 소중한 추억까지 모두 앗아 갔다. 이제 그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열다섯 명…….”
목린은 숨 쉬는 법을 순간 잊어버렸다.
“사실……이야……?”
불안정하게 후들거리는 언영의 손이 목린의 손목을 쥐었다. 초점이 흐릿하기는 했지만 그는 분명 눈을 뜨고 목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에서 피가 주룩주룩 새어 나오는 모습은 처절했다. 그의 뚝뚝 끊기는 목소리를 듣자니 심장이 갈가리 뜯겨도 이보다 아플 순 없을 것 같았다.
익문과 목현이 숨을 들이켰다. 목린이 울부짖었다. 언영을 위해서라면, 언영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좋게 해 줄 수 있다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네! 서방님만 살아계신다면 어떻게든 낳을게요!”
“만세!”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언영이 순식간에 활기차게 일어나 앉았다.
절벽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도 언영의 팔이 보였다. 순식간에 섬이 조용해졌다.
목현, 목린 그리고 익문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언영이 살아 돌아왔다는 기쁨보다는, 혹여 귀신은 아닐까 하는 경악이 더 크게 그들의 얼굴에 스며들었다.
언제 독을 먹었냐는 듯 언영이 호방하게 웃었다. 어느새 혈색도 모두 돌아와 있었다. 익문의 등골에 소름이 돋아났다.
“하하하하!”
목린의 말에 기뻐하느라 바쁜 언영만이 혼자 주변 분위기를 모르고 혼자 웃음꽃을 피웠다.
“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