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단월도의 윤곽이 시야에 선명히 잡히기 시작하며 언영의 심장이 조용히 철렁거렸다.
한때 목린과 함께 이 바다 위에서 섬의 풍치를 구경한(비록 바로 직전에 식인 물고기와 싸우고 오긴 했지만) 낭만적인 추억이 있었다. (비록 언영의 목이 뜯겨 버릴 뻔하긴 했지만)그땐 평화로웠다. 목린은 섬이 너무 아름답다고 했지만, 그의 눈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목린이 앞에 가까이 앉아 있는데, 조금이라도 더 쳐다봐야 하는데 섬 같은 것을 구경할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목린이 없는 지금은 보였다. 이제야 보였다.
산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높은 언덕이 불룩 튀어나와 있는 섬이 심해와 천공의 경계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근래에 왔던 눈이 녹지 않아 하얀 옷을 두르고 있는 단월도는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섬이었다. 그 와중에 또 흰 눈을 보니 여름에 목린과 함께했던 여행이 떠올라, 언영은 가슴 한편이 시큰해졌다.
목린의 고향이었다. 저런 곳에서 편안히 가족들과 둘러싸여 살다가 처음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언영은 노를 더욱더 빠르게 저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당도해서 목적을 이뤄야 했다. 긴장감과 걱정 속에서 매서운 겨울바람도 평범하게만 느꼈다.
“어?”
바다 우측에서 무언가가 영롱히 반짝이고 있었다. 언영은 의아해하며 그쪽으로 끙차 배를 돌렸다. 지난가을에 그 괴물 놈을 박살 내면서 단월도에 대한 걱정은 줄어들었으나 혹시라도 또 다른 이상한 기류가 있을까 봐서였다.
가까이서 확인해 본 언영의 표정은 다시 얌전히 식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간단히 주워 냈다.
‘머리 장식이네.’
주로 여성들이 머리에 꽂는 기다란 장식이었다. 이런 장식을 초족의 여자들 몇몇이 쓰는 것을 그도 몇 번 본 경험이 있었다. 언영은 손목을 앞뒤로 돌리며 그것을 무심히 살폈다.
하필이면 몸에 달고 다니는 장식품을 발견한 것이 약간 신경 쓰이기는 했다. 마치…… 물에 빠져 죽은 누군가가 지고 다니던 물건 같지 않은가. 단월도를 깊은 바다가 둘러싸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말 가까운 주변의 수심은 안전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이건 귀혈족의 관점에서였지만. 초족에겐 좀 다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실마리가 있을까 싶어 언영은 휙휙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그 외에 보이는 건 없었다. 시체는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그는 머리 장식을 배 안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섬에 도착하고 나서 이 장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나 물어볼 생각이었다.
“귀혈족이다!”
한편, 평화롭던 단월도의 어느 겨울날 오후. 바다를 구경하던 한 소년의 외침으로 그 평화에 빗금이 그어졌다.
목린의 아버지 익문은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섬의 북쪽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지난번에 목현이 목린을 보러 갔다가 돌아온 게 귀혈족과의 마지막 교류였다. 익문이 알기론 그의 딸은 봄이 되어서야 섬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무슨 영문으로 찾아왔는지, 정확히 누가 왔는지 한 치도 예상 가지 않았다.
익문이 바다에 당도하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그만 배가 보였다. 호기심에 뒤따라온 이들도 익문의 등 뒤에서 웅성거렸다.
언영이 홀로 불끈불끈한 팔뚝을 이용하여 노를 열심히 저으며 오고 있었다. 영차영차 힘을 주고 있는 그의 표정이 어딘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늘 헤헤 웃고 다니던 그의 평소 모습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익문의 근심 어린 마음이 바짝 조여들었다.
“장인, 소인 왔습니다.”
“저, 저 바다를 혼자서 건너온 건가? 반갑……네.”
섬에 완전히 다다른 언영의 발이 육지에 내려앉았다. 녹지 않은 눈이 그의 커다란 발에 뽀각뽀각 밟혔다. 익문은 서서히 가까이 다가오는 언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미 배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지만 그쪽을 흘긋 살피며 더듬더듬 물었다. 바람에 그의 수염이 흔들거렸다.
“이,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자네는 여전히…… 크군. 그런데 우리 목린이는 놔두고 혼자 온 건가? 왜…….”
목현이 ‘목린이는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 줘도 익문은 결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들뻘인 사위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힘없이 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주변을 요리조리 살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피할 수만은 없는 법. 서서히 사위와 눈을 맞추었다. 아니, 눈을 맞추려고 했다.
언영의 품에 담긴 조그마한 함과, 초족의 머리 장식을 보기 전까지는.
익문은 바로 땅에 주저앉았다. 옷에 눈이 묻는 것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목린아!”
그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익문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언영이 터벅터벅 걸어오기 시작할 때부터 조용히 뒤로 물러선 상황이었다. 그래서 언영이 두 팔에 품고 오는 것들을 뒤늦게 발견했다. 모두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목린아!”
“안 돼!”
“이럴 수가! 그 가엾은 것!”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는 이도, 기절하듯 몸을 휘청이는 이도 있었다.
예고 없었던 추운 겨울 갑작스러운 방문, 목린이의 부재, 언영이 팔에 소중하게 안고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함, 굉장히 서글퍼 보이는 그의 표정. 그리고 초족 여자들의 머리 장식.
이 모든 것이 하나를 뜻하고 있었다.
“목린아! 목린아!”
익문은 가슴을 부여잡고 엎드려 오열을 토해냈다. 그의 처절한 통곡을 들은 주민들이 호기심을 갖고 계속 몰려들었다. 함을 들고 홀로 서 있는 언영, 그 앞에 드러누워 울고 있는 익문. 더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 그들의 눈에도 바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흐흐흐흑!”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언영의 주변에 몰려들어 울기 시작했다.
“어?”
당황한 언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때 익문이 허겁지겁 기어 오더니 언영이 들고 있던 함과 머리 장식을 거칠게 잡았다. 초족 노인이라곤 믿을 수 없는 강력한 악력이었다. 언영조차도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익문이 핏발 선 눈으로 절규했다.
“내놔!”
“아, 예.”
언영은 바로 손을 놔주었다.
빈손으로 방문할 수는 없어서 보석을 가득 담은 함을 같이 가져왔다. 목린이 주셔서 고맙다고 지난 오 년 동안 온갖 패물을 갖다 바쳤을 때는 수줍은(아니다) 표정으로 가만히 있던 장인이, 갑자기 독살스럽게 달려드니 언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차피 드리려고 가져온 것이니 별생각은 없었다.
“어흐흐흐흐흑!”
익문은 함을 끌어안고 웅크려 앉았다. 그것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몸을 감고 옭아맸다. 그리고 처절하게 울었다. 뒤에 있던 주민들 또한 그의 행동을 보고 안타까워 통곡 소리를 높였다.
그러는 동안 언영은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서 있었다. 하나 그의 눈에도 머지않아 눈물이 핑 돌았다.
“으허엉…….”
감수성이 풍부한 언영은 이유는 모르지만 그들의 슬픔을 보고 심장이 콕콕 쑤셨다. 무슨 상황이 이들을 이토록 괴롭게 만들고 있는가. 언영도 초족을 힘들게 했다는 점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으나, 그는 진심으로 초족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익문의 앞에 함께 무릎을 꿇고 그의 어깨를 안았다. 그리고 함께 울었다.
어느새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아닌 이상 거의 모두가 밖에 나와 곡을 하며 울고 있었다. 공기 속에 서글픈 감정이 켜켜이 스며들었다. 우울감이 조그만 섬을 잔뜩 짓눌렀다.
“목린아, 목린아, 우리 아가…….”
“목린아, 내가 미안해!”
익문과 언영은 서로의 손을 잡고 웅얼거렸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리 중 누군가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익문과 비슷한 나이대의 어른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언영을 향한 삿대질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쉰 목소리로 내는 외침이 물결치는 통곡을 가로질렀다.
“이, 이, 이, 찢어 죽일 놈!”
화들짝 놀란 주민들 몇 명은 히끅 놀라며 울음을 그쳤다. 언영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보게…….”
옆에서 누군가가 그의 다리를 당기며 얼른 자리에 앉히려 했다.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그는 오히려 벗의 손길을 뿌리치며 더욱 윽박질렀다. 바다에 모인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쩌렁쩌렁 내지르고 팔을 양쪽으로 펼쳤다.
“목린이의 희생을 생각해 보게! 내 말이 정말 심했나? 저놈이 수년간 목린이에게 한 짓은 어떻고? 내 참다 참다 결국 한 마디 외친 게 그리 큰 잘못인가! 내가 저놈에게 맞아 죽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네!”
무고한 이의 죽음은(아니다)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평소라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얼른 그만두라고 하며 쩔쩔맸을 초족 사람들은 의외로 조용했다. 아까 전까지 섬에 가득 울리던 울음은 삽시간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보게, 일단 진정하게.”
“그래요. 먼저 저 귀혈족에게 설명을 듣고…….”
의견이 엇갈렸다. 더듬거리며 이게 무슨 짓이냐 묻는 이도 있었고, 흘러가는 분위기에 동의하는 듯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꽤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
“…….”
언영은 그들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주저앉아 있는 수백 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절망이 드러누웠다.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를 증오하는 것은 아주 잘 보였다.
어쩌면 목린이도 속으로는…….
영혼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다시피 물었다.
“그편을 목린이가 더 선호할까요? 제가 얼른 세상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
원래 꽃을 구해 가지고 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목린이의 고향 사람들이 더 낫다고 보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따를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피해자로서 목린이와 사고방식이 조금 더 비슷할 테니까.
목린이가 다른 놈 품에 안기는 걸 볼 수가 없어서 망설여진다면,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됐다. 그러면 목린이가 어떻게 살든 방해하지 못할 테니까.
언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팔에 기대 거의 탈진한 상태로 울고 있는 익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품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호통을 친 이 앞으로 저벅저벅 향했다.
당연히 모두가 기겁했다. 언영이 한 대 치러 오는 줄 알고 다들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아까까지 떵떵거리던 이는 팔다리가 지푸라기로 변하기라도 한 양 형편없이 떨었다. 마침내 언영이 굴복의 의미로 무릎을 꿇었을 때는 오히려 기절할 것처럼 경악했다.
“그렇다면 상관없습니다. 마음껏 제 목을 내리치십시오.”
언영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했다.
“응? 으응? 으응?”
* * *
섬의 한 청년이 마을 창고를 뒤져, 이전에 귀혈족이 초족에게 선물한 가장 커다란 검을 쥐고 나타났다. 목을 가르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무기는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가장 큰 문제, 누가 언영을 죽여야 하는가가 도래했다.
“자네가 족장 다음으로 마을 큰 어른 중에 가장 키가 크잖나. 자네가 잡게.”
검을 전해 받은 어른은 옆에 있는 친우에게 지저분한 것을 치우듯 다시 건네며 말했다. 지금 익문은 주저앉은 채 정신없이 울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를 할 수 없었다. 물론 지목된 상대는 몸을 뒤로 내빼며 기함했다.
“키가 여기서 무슨 상관인가! 나 같은 늙은이가 무슨 힘을 쓰겠다고.”
“그럼 덕복이한테 시키자. 가장 팔뚝이 튼실한 녀석 아닌가.”
“목현이는 어떤가? 목현이도 지금 많이 힘들어하는가?”
“목현이는 보이지 않는데? 어디 갔지?”
그 누구도 검을 잡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람을 검으로 죽이는 일이라니! 여기 있는 그 누구도 해 본 적 없었다. 더군다나 귀혈족 사람을 죽여야 한다니. 저 근육질 몸에 과연 검이 들어갈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었다. 어쩌면 죽이려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언영은 술렁거리는 초족 사람들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을 천천히 하나하나 경청하던 그는 품에 달고 있던 검을 스르르 뽑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칼로 단번에 목을 자르는 건 불가능합니다. 제 검을 쓰십시오.”
“으아아아아악!”
언영이 검을 앞으로 내밀자 초족 사람들은 기절초풍하며 뒷걸음질 쳤다.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은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내려놔! 내려놔! 살려 줘!”
“아, 그러고 보니…….”
언영은 고분고분 말을 따르며 차분히 입술을 뗐다.
“이대로 저를 죽이시면 저희 마을 사람들이 제가 살해당했다고, 실종되었다고 큰 오인을 할지도 모릅니다. 글을 남겨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물론이네.”
모두가 이때다 싶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형을 조금이라도 미룰 수 있는 좋은 빌미가 생겼다.
잠시 뒤, 언영의 앞에 붓과 먹, 벼루가 놓였다. 초족 사람들은 충분히 안전한 거리를 두고 언영을 에워싸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았다.
붓을 들며 언영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다른 이의 것보단 제 글씨체를 직접 남기는 것이 더 신뢰가 가겠지요.”
“그, 그렇지.”
“하지만…… 초족의 섬만큼 안전한 곳도 없기 때문에, 제가 여기서 명을 다했다고는 귀혈족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쪽에서 이곳을 탐색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언영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했다.
“제 가족과 부족이 제 흔적을 찾느라 헛된 시간을 낭비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되도록 빨리 그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동의하는 바이네.”
그를 에워싼 초족 사람들도 바로 수긍했다. 언영이 이곳에서 죽었음을 오랜 시간이 지나 귀혈족이 알게 되면, 쌓아온 노여움과 원통함, 안타까움을 다 단월도에 풀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귀혈족에게 즉각 알리기 위해 대면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초족의 누군가가 언영이 쓰고 있는 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이걸 누가 자네 마을로 보내지?”
“…….”
귀혈족에게 빨리 알린다 함은 누군가가 저 종이를 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제가.”
언영이 입술을 뗐다.
“제가 한번 갔다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그래야겠네.”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 명의 초족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에겐 귀혈족 마을로 뜬금없이 찾아갈 배짱도, 힘도 없었다.
언영은 종이를 둥글게 말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 제가 돌아올 것을 믿지 못하실 테니, 늘 품에 지니고 다니는 아끼는 것을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때마침, 상황을 설명 듣고 달려오는 목현이 뒤늦게 합류했다. 심란한 낯빛의 목현이 숨을 헐떡이며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마침내 언영을 가까이서 마주했을 때, 언영은 이미 가장 소중한 물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목린과 언영, 그리고 그의 세 누이가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목현이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 * *
“목린아, 언영이가 돌아오는 건 확실하지?”
“분명 제게 생일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어디를 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목린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크아아아!”
다인이 괴성을 지르며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러자 우두둑하고 금이 갔다. 목린은 숨을 헐떡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하나 그 정도의 굉음마저도, 지금 이 방에 모인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에 형편없이 바스러져 묻혔다.
목린은 정확한 사정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언영이 북동쪽으로 사냥을 떠났을 때 그와 했던 약속 때문에 찾아왔다는 이들이 현재 무려 일천 명을 넘어섰다. 당시에 배를 타지 않았던 이들도 심심해서 함께 놀러 왔다. 걸걸한 인상의 그들은 모두 성대한 선물을 팔에 이고 들어와선, ‘절대 그 자식 생일을 축하해 주려는 게 아니다. 이건 오다가 주운 거고, 궁금해서 와 봤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단연컨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언영을 세 명 쌓아 놓은 것만큼 거대한 발 조각상이었다. 사람의 발이 징그러울 정도로 크게 공간 한구석을 차지했다. 과연 언영이 저걸 좋아할지 목린은 속으로 조용히 잠깐 의심했으나,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얼른 머릿속에서 털어 버렸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문객의 수가 불어나자 월진은 방책을 마련했다. 대회가 열리는 넓은 공터는 사람들이 운집하기엔 겨울에 너무 추웠다. 하여, 월진은 근래에 새로 지은 거대한 창고에 급하게 자리를 마련했다. 혹시 모를 재난에 대비하여 만든 도피처의 역할도 하는 곳이었기에 적당히 널찍했다. 기다란 상과 의자를 부랴부랴 이쪽으로 옮기고 음식을 내왔다. 어느새 사방이 시끌벅적한 축제가 벌어졌다. 근육질의 호탕한 사람들이 서로 몸통을 부딪치며 인사하고, 즐거운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주먹으로 상을 탕탕 내려쳤다.
목린은 자리에 앉지 않고 입구 쪽에서 불안하게 서성였다. 그녀의 품에는 화려한 갑옷이 안겨 있었다.
언영이 마을에 없어서 유일하게 좋았던 점은 그의 부재로 인하여 아무한테나 편하게 물어보고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어쩌다 엿들을 일이 없으니 자신 있게 캐묻고 다녔다. 언영이 무얼 주면 좋아할 것 같은지. 현재 그녀의 상황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게 무어가 있는지. 그러자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 들어왔다.
황칠나무 표피에서 얻어낸 액으로 칠한 금색의 문양이 검고 우아한 갑옷 위에서 각도에 따라 다르게 반짝거렸다. 목린도 옆에서 최대한 성실히 도와서 만들어 낸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그냥 품에 안고 바라만 봐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앞서 구경한 현오, 월진, 다인, 은평 등등 모두가 입을 모아 멋있다고 해 주었다. 목린도 이번만큼은 자신감이 있었다. 적어도 저 정체불명의 발 조각상보다야 백 배 나았다.
언영이 이 화려하면서도 튼튼한 갑옷을 입고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목린은 저절로 얼굴이 붉게 익고, 심하면 허벅지 사이까지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런 흥분도 아주 잠시뿐이지, 소식 없는 그의 근황만 생각하면 뜨거워진 몸이 바로 식고 한숨만 푹푹 나왔다.
그때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고 새로운 손님이 입장했다. 그의 등장은 상당한 파란을 일으켰다.
“황은도?”
“황은도잖아!”
“누구라고?”
술렁거림이 커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직접 확인하려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순식간에 몰려드는 눈길과 관심에, 젊은 사내가 미간을 팍 좁혔다.
황은도, 서쪽 바다의 젊은 지배자.
남녀노소를 다 꾀어낼 곱상한 미모에, 게다가 본인도 치장하기를 좋아하는 터라 주변 이들의 즐거운 눈요깃거리가 되어 준다고. 부러 그런 시선을 끌어당기기 위해 묵직한 것보다 화려한 움직임을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고, 그의 등장에 기절초풍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는 그가 막상 사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은도가 다스리는 해야족은 수 해 전에 쫓겨난 극악무도한 부족들과 척지었으나, 그렇다고 지금의 평화 연맹에 속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오로지 그들끼리만 지냈다. 언영과 호민처럼 부족의 경계를 넘어 개인적인 친분을 쌓은 이들도 있었지만 단지 그뿐. 부족을 이끄는 은도는 그런 외교에 큰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굳이 마을 밖을 벗어나는 경우는 그가 심심하여 원금화를 찾아 나설 때뿐이었다.
그러니 그가 생사가 걸린 일도 아닌 그저 (언영은 부인하겠지만)벗의 탄생일을 기념하여 여기까지 행차했다는 것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사람 처음 보나?”
반듯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자세로 은도가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새를 조각한 귀고리가 흔들거리고, 지난여름에 봤을 때보다 조금 긴 머리카락이 뒤에서 흔들거렸다. 어떤 장인이 밤을 새워 공들여 만들었을 두껍고 좋은 갖옷이 그의 몸을 든든히 에워쌌다. 목린을 발견한 눈동자는 묘하게 반짝거렸다.
“은도야!”
그때 호민이 기쁜 얼굴로 달려 나가며 은도의 앞길을 막았다.
“은도야, 정말 오랜만이다! 언영이 생일이라고 와 준 거야?”
“그럴 리가. 나는 그저 아리따우신 부인을 뵈러…….”
은도는 팔로 툭툭 치며 앞길을 막는 호민을 치웠다. 그리고 목린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뻗었다.
“…….”
하지만 머릿속이 온통 언영으로 가득 찬 목린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고뇌에 빠져 있느라 그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엇갈린 곳을 보며 생각에 폭 잠겨 있었다.
은도는 어색하게 손을 뒤로 뺐다.
“……왔는데 우연히 주언영의 생일이더군.”
“그래, 그것참 믿음직스러운 변명이구나.”
사람들의 인내심도 이제 한계가 왔다. 속마음은 따뜻하다지만 그래도 겉모습은 거친 이들은 짜증을 표출할 때 남들보다 수백 배는 더 무서웠다. 특히나 그런 이들이 일천 명 넘게 모여 있다면 더더욱. 그들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자 다리가 위태롭게 후들거렸다.
“그 자식, 여기 이렇게 수백 명을 불러놓고 뭘 하는 거야!”(부른 적 없다.)
“이번에도 또 자기 생일 못 세고 있는 거 아니야?”
“녀석이 좋아한다는 발가락도 준비해 왔는데 뭘 꾸물거리는 거야!”
월진이 깔끔하게 중재하여 다행히 올라갔던 목소리는 쉽게 잦아들었다. 그러나 불만이 쌓인 사람들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목린은 가슴이 쪼그라드는 답답함을 느꼈다. 바람이 필요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바로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그녀의 몸을 난도질했으나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서방님 걱정이었다. 그래도 어디 가시는 거냐고 한 번이라도 여쭈어볼걸. 잠자느라 바빴지, 이 바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 수 없으니 어디서 기다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언영이 너무 보고 싶었다. 늘 배를 끌고 섬에 찾아오던 그의 성실함이 이제는 이해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똑같이 했을 터다.
목적지도 없이, 그저 보이는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바람에 뒤로 땋은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도착할 언영에게 예뻐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꾸민 얼굴은 우울하게 내려앉았다.
그러던 목린의 눈에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조그만 아이가 비쳤다. 익숙한 소녀였다. 목린이 먼저 밝게 아는 척을 했다.
“오랜만이에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던 목린의 반가움은 놀라움으로, 놀라움은 걱정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아질수록 감정의 변화가 심해졌다.
“왜 울고 있어요? 괜찮나요?”
목린은 아이의 옆에 앉아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
아이는 지난봄에 목린이 받았던 서간을 가져갔던 그 소녀였다. 그날 있었던 일 이후에도 목린은 마을에서 종종 아이를 마주쳤고, 점점 밝아지는 아이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안심하곤 했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갑작스레 우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니 근심이 찰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쭈그려 앉아 있던 아이는 눈물범벅이 되어 버린 어떤 종이를 목린에게 들어 보여 주었다.
“이건 도무지 읽히지 않아요.”
목린은 친절하게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못 읽을 수도 있어요. 저도 어려워서 못 읽는 글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흐으으윽…….”
“어디서 났길래 그러시나요?”
“바다에서 주웠어요.”
목린은 부러 명랑하게 너털웃음 소리를 냈다.
“그럼 분명히 누군가의 낙서가 틀림없어요. 읽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아이는 훌쩍거리며 힘들게 말을 이었다.
“너무…… 악필이에요……. 이렇게 못 쓴 글은 처음 봤어요…….”
“그러면 제가 한 번 봐 볼까요?”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린은 눈물이 살짝 묻은 종이를 잡고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아이를 울게 할 정도의 악필이라고 하니 어떨지 궁금하긴 했다.
그러나, 호기심을 담고 첫 문장을 읽어 내리는 목린의 얼굴에 바로 경악이 스며들었다.
목린은 다급하게 아까까지 있었던 창고를 향해 내달렸다.
“아버님! 서방님이 남긴 글을 발견했어요!”
관심이 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쾅 열어젖혔다. 그러자마자 시야에 바로 드러난 윤근을 향해 팔을 들고 재빨리 뛰어갔다.
“뭐라고? 무슨 내용이더냐?”
“아직 겁이 나서 다 읽어 보진 못했어요…….”
“줘 봐라. 내가 한번 보겠다.”
목린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윤근에게 종이를 건넸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의 눈썹이 부들거렸다.
“아니!”
“왜 그러세요?”
목린이 숨을 죽이고 물었다. 어느새 다가온 월진이 뒤에서 목린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았다.
“아버지!”
“오라버니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생겼어요?”
언영의 세 누이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어느새 창고에 있던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언영의 가족을 구경하고 있었다.
서간을 펼친 윤근의 손이 경악 탓에 부들거렸다. 그가 더듬더듬 외쳤다. 눈동자에 공포가 아우성치고 있었다.
“도무지…… 글씨체를 알아볼 수가 없구나!”
“제게 주세요. 저는 읽을 수 있어요!”
목린이 서간을 잡아당겼다.
목린은 언영 사이에는 꽤 오래 글을 주고받은 역사가 있었다. 비록 처음에는 그녀도 글자 하나하나 다 해석하기 괴로웠지만, 이제는 보통 사람이 쓴 것보다 조금 느리게나마 읽을 수 있었다.
목린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아아!”
“목린아, 너도 못 알아보는 거니!”
월진이 외쳤다.
목린은 울면서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그녀의 커다란 움직임이 주변의 관심을 끌었다. 모두가 조용해졌다.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목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서방님이…… 죽으러 가신다고…….”
언영의 글씨를 수십 번은 보았던 목린은 별 무리 없이 내용을 읽어낼 수 있었다. 삐뚤빼뚤 엉망진창, 눈물 때문에 번진 글자들의 배열들이 의미하는 말은 목린을 경악케 했다. 그는 억지로 혼인을 밀어붙여 미안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의 죽음이 그녀의 고통을 덜어낼 수 있으리라는 끔찍한 내용을 전했다.
그 후로도 여러 번 미안하다고 반복하더니, 맨 마지막에 감히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문장과 함께 글을 끝맺었다. 얼마나 떨면서 적었는지, 그건 목린조차도 한참을 들여다보고야 알아들었다.
“언영이가…… 뭘 한다고?”
월진이 먼저 침묵을 깼다.
“죽으러 가?”
목린은 울음을 터뜨리며 입을 앙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양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영이가 왜 죽어!”
“주언영 그 자식이 미쳤나!”
“이렇게 예쁜 부인을 두고!”
“이 발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주름 하나하나 세밀하게 표현했단 말이다!”
온갖 고함과 괴성이 사방에서 파도쳤다. 목린은 순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비틀거렸다. 옆에서 월진이 잡아 주지 않았다면 바로 쓰러졌을 뻔했다.
월진은 목린을 토닥여 주며 물었다.
“아가야, 자세히 좀 말해 보렴. 언영이가 왜 갑자기 죽으러 나섰다는 거니.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말해 주지 않아서……. 저는 말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조용히 있었는데…….”
결국 목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털어놓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녀가 알고 있는 오해는 모두 설명했다. 귀혈족이 침략 온 줄 알았다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언영을 받아 줘야 했다는 것. 수줍은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는 것. 언영의 커다란 가슴이 지금은 좋지만, 예전엔 너무 무서웠다는 것 등등.
일천 명에 육박하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목린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때때로 손으로 입을 막고, 초족이 느꼈을 공포에 이입하여 눈물을 보이고, 숨을 떨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목린은 월진의 품에 안겨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죄송해요…….”
“그게 왜 네 잘못이니, 아가야. 내가 미안하구나. 내가 오해하게 했어. 다 나의 잘못이야.”
월진은 목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불쌍한 초족 사람들! 얼마나 무서웠을까.”
구석에 서 있던 현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어딘가 이상하다 싶었어. 그 자식 성격치고 너무 순탄하게 혼인까지 가더라.”
목린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꿀꺽 삼키며 더듬더듬 물었다.
“이제 우린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합니까!”
어떤 이가 주먹 하나를 허공으로 뻗으며 당차게 외쳤다.
“그 바보 같은 놈을 혼내 주러 가야지요!”
그리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들고 소리 질렀다.
* * *
높푸른 하늘 아래 단월도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통곡이 울려 퍼졌다.
“목린아, 이 아비가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목린의 아버지 익문을 선두로, 목린을 추모하는 수백 명의 단월도 주민들이 모두 바다 앞에 나와 있었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가 그녀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익문은 언영이 가지고 온 함을 품에 안고, 넓게 뻗은 망망대해를 울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의 기다란 수염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목린이 시집 간 사이 그는 눈에 띄게 늙어 있었다. 그의 눈에 잡힌 주름이 슬프게 접혔다.
“너와 함께 했던 세월 동안 행복했다.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단다. 부디 바다에서 잘 쉬렴…….”
“흐흐흐흑, 목린아!”
“보고 싶어, 목린아!”
목린의 오랜 벗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분명 꾸준히 보내 준 서간에서는 지금의 삶이 즐겁다고 했는데, 역시나 그들의 기분을 낫게 해 주기 위해 목린이 거짓을 말했음이 틀림없었다.
목린을 기억하는 어른들도 뒤에 서서 혀를 끌끌 찼다. 땋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다니던 무척이나 귀여운 소녀였다. 마음씨도 곱고, 먹는 모습도 복스럽고, 누가 봐도 예뻐할 그런 고운 아가씨였다. 이렇게 단명할 줄 누가 알았을까.
목현도 그의 부인과 친우들하고 나란히 앞쪽에 서 있었다. 옛날부터 목린을 마음에 담았음을 묘하게 티 내고 다녔던 덕복이 그의 옆에서 손등으로 눈을 거칠게 문지르고 있었다. 목현은 허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보았던 누이의 눈에서 반짝이던 행복의 이채는 무어란 말인가.
언영이 막 단월도에 도달하였을 때 목현은 어떤 주민의 집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상황을 뒤늦게 보고받았다. 바다에서 최근 실종된 남편 때문에 울고 있는 부인을 위로해 주고 밖에 나와 보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오열하고 있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니 목린이 언영 때문에 죽어 버렸단 답이 돌아왔고……. 목현이 그게 말이 되냐고 반박하자 상대가 말하길, 언영이 목린의 유골이 담긴 함과 그녀가 자주 썼을 게 분명한 머리 장식을 갖고 왔다는 것이다. 그가 너무도 확신하며 말하고 있고, 저쪽에 보이는 언영 또한 통곡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목현은 더 이상의 의심을 접었다.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목현은 피로한 표정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천천히 다시 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오겠다던 언영이 급하게 품 밖으로 내민 그림이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것. 바로 언영과 목린이 함께 있는 그림. 예전에 잠깐 본 적이 있는 언영의 세 누이는 바로 함께 있는 이 꼬마들이 아닌가 싶었다.
그림 속의 누이는 단순히 즐거워 보인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행복해 보였다. 단순히 그림에서도 풍족한 기쁨과 여유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언영을 올려다보고 있는 두 눈엔 사랑이 가득했다. 언영의 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그린 이가 정말로 훌륭한 화가라면 이런 느낌을 지어내서 끌어내는 일도 충분히 가능했을 터이다. 그러면 정말 이것이 가짜라고?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러면 주언영은 정말 실수로 목린이를 죽인 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목현은 언영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영이 정말 목린을 죽였어도, 설령 사고였다고 한들, 몸소 나서서 옹호해 줄 정도로 그를 아끼는 것도 결코 아니었다. 죗값은 치러야 한다. 이제 다시는 사랑하는 누이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이어서 익문과 목현은 작은 쪽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멀리 가지는 않았다. 멈춰 선 지점에서도 땅에서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익문은 우울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쪽배를 저어 주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됐다는 의미였다.
익문은 일어선 자세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네 영혼이 우리 고향에서 잃었던 평온을 되찾기를 바란다. 사랑한다, 목린아.”
익문은 천천히 함을 열었다. 목린의 유골을 바다에 뿌려주기 위함이다. 부디 여기서 목린이가 영원한 행복을 되찾기를……. 그렇게 빌면서 익문은 함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음?”
예상했던 것이 잡히지 않았다. 더 단단하고, 더 크고, 더…… 보석 같았다.
아니, 정말로 보석이었다.
“뭐, 뭐야!”
* * *
‘귀가 왜 이렇게 간지럽지…….’
갑판에 나와 있던 목린은 얼굴을 찌푸리며 귀를 긁었다.
갑판 위에는 낮에도 밤에도, 언제나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언제 습격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건 목린이 타고 있는 이 배 말고 나머지 열아홉 척의 배도 매한가지였다.
목린의 고백 이후 사건의 정황을 알게 된 일천 명의 방문객은 모두 단월도로 향하기 위해 뛰쳐나갔다. 언영에게 주기 위해 준비한 발 조각상을 누군가가 번쩍 들고 달리느라 커다란 발이 멀리서 보면 무리 위에 둥둥 떠다녔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소식을 들은 나머지 귀혈족 사람들도 함께 달려 나갔다. 거동이 불편한 이만 아니라면, 아니, 거동이 불편한 이들까지도 합세하여 모두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언영의 누이들까지 따라나섰다. 옆을 돌아보면 오른쪽에 있는 배 갑판에 산적같이 생긴 의원님도 보였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렀다. 이런 곳을 홀로 건너시다니, 그것도 여러 번씩이나……. 외롭게 바다 위에서 사투를 벌이는 언영을 생각만 해도 목린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디서든지 품에 담고 다니는 언영의 새 갑옷을 더 꽉 끌어안았다.
“춥지 않으십니까?”
“은도 님.”
‘재밌어 보인다’는 이유로 배에 동승한 은도는 여기서 별일을 하지 않았다. 남들이 밖으로 나와 식인 물고기와 같은 괴물을 잡고 있을 때도 그저 어슬렁거리며 지켜보았다. 정말 그저 구경하러 온 사람 같았다.
귀혈족의 함선을 얻어 탄 은도가 성큼성큼 걸어오자 목린이 말문을 열었다.
“여기 올라탄 이후로 은도 님에 관한 얘기를 좀 들었어요.”
“예. 들으나 마나 뭐 멋진 영웅담…….”
“이런 일은 귀찮아해서 끼어들 사람이 아닌데, 배에 올라탄 게 신기하다고 모두 입 모아 말하더라고요.”
은도는 당황스러움을 숨기며 팔짱을 꼈다. 애써 태연히 입술을 뗐다.
“제가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니…….”
“고맙습니다.”
은도의 눈이 몇 번 깜박였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예?”
“서방님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여기 계신 모든 분께 고마워요. 사실, 친하다고, 아낀다고 말은 해도 이렇게 행동으로 정말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잖아요. 저야 항상 마주 보고 함께하는 아내니까 이렇게 따라오는 게 당연하지만, 나머지 분들은 따로 소중한 가족도 있으시고……. 모두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테니까요. 또 귀찮을 수도 있고요. 다 이해해요. 그런데 그런 걸 다 제쳐두고 따라오신 거잖아요.”
그사이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목린의 낯빛은 다소 초췌했다. 하지만 은도를 향한 고마움만은 진심인지, 미소가 다정하게 빛나는 중이었다.
예상보다 너무 진지한 답이라서 오히려 은도 혼자 적잖이 당황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 언영이는 정말 오래된 인연이니까……. 상황이 반대였어도 언영이가 이랬을 것 같아서 온 것뿐입니다.”
“겸손하시기까지 하시네요! 역시 소문만 듣고 믿지 말아야겠어요.”
“그래 주신다면야 고맙습니다.”
그는 소문을 부정하지 않으며 교묘하게 넘어갔다.
목린은 고개를 돌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단월도는 물론 언영의 흔적도 아직 보이지 않는 푸른 심해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자유롭게 뚫려 있는데도 가슴이 갑갑했다. 숨을 들이켜 시원한 겨울 공기를 들이마셔도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은도 님.”
“예?”
목린의 부름에 은도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린은 그와 눈은 맞추지 않고 정면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설령 서방님과 은도 님 중 한 분을 선택해야 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전 서방님을 선택할 거예요.”
“…….”
은도는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 가만히 있다가, 애써 장난기를 섞어 운을 뗐다.
“정말 가차 없으십니다.”
침묵이 잠깐 그 뒤를 이었다. 목린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저보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하셨지요. 엄청 비싸 보이는 반지도 주려고 하셨고요.”
은도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는 바로 손에서 반지를 뽑을 자세로 신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건 사실, 서방님도 제게 해 주실 수 있어요.”
“……그렇군요.”
은도의 두 팔이 어색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모두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자리는…… 확실히 솔깃한 제안이기는 하지만, 제게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목린의 눈이 새하얀 구름을 바라보며 몽상에 잠겼다.
“제게 필요한 건 그보다는, 함께 동등하게, 서로 다르더라도 그것을 포용하며 제게 용기를 주고, 같이 나아가는 가족들이에요. 그러니까 은도 님께서 제안하신 멋있는 자리는 다른 분께 맡기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무서운 인상과는 한참 거리가 있어서 제가 명령을 내리면 너무 꼴이 웃길 거예요.”
목린은 하늘을 향해 소탈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은도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목린은 갑자기 눈썹을 확 꿈틀거리며 은도를 돌아보았다.
“아, 혹시 상처받으신 건 아니지요? 누구에게나 다 그렇게 장난스럽게 구혼하신다고 생각하여 말씀드린 건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은도는 능글거리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갸웃하는 자세로 애매하게 답했다.
목린은 한 발짝, 두 발짝, 느리게 앞으로 발걸음을 뗐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제 자리를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맴돌았다. 그러다 갑자기, 청청한 하늘을 뚫어져라 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터득한 듯이 이채를 띠었다.
“은도 님, 아직도 원금화를 찾아 돌아다니고 계시나요?”
목린이 은도를 다시 바라보며 질문했다. 은도는 가볍게 웃었다.
“예.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제 운명의 소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면 어떻게든 찾아낼 겁니다!”
그는 각오를 다지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목린은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얼굴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파란 바다를 잠자코 구경하는 듯하더니, 툭 내뱉었다.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은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물론 은도 님의 행복을 진정으로 응원하고 있어요! 하지만…… 만약 제 서방님이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신화 속의 꽃만 찾으러 다니셨다면, 이런 사람들과 다 함께 정답게 어울릴 수 있으셨을까요?”
목린이 양팔을 벌렸다. 같이 이동하고 있는 열아홉 척의 함선을 끌어안듯이.
목린은 이토록 많은 배의 행렬을 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모두 서방님이 멍청하다고 혼내 주러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계시지만, 걱정하시는 모습들이 너무 눈에 띄는걸요.”
정말 혼내 주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바다를 건널 리가 없다. 모두 그렇게 멍청한 놈은 난생처음 본다고 투덜대면서도, 늦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떠날 채비를 했다. 스무 척이나 되는 배가 눈 깜빡할 새 출항 준비를 끝마쳤다. 목린은 출항 직전에 의원님 눈에 고인 눈물 또한 똑똑히 봤다.
“물론, 서방님께서도 결국 호기심 삼아 숲을 둘러보시다가 저를 발견하신 것이지만……. 제 생각에 서방님께서 꽃을 찾는 게 의미 없다고 하신 건, 아마 이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 같아요.”
목린은 은도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말했다.
“어떻게 사느냐는 오로지 은도 님의 선택이지만, 그래도 운명을 찾는 데에 있어서 너무 시야를 좁히지는 마세요. 알고 보면 같은 부족에서 만난 사람들, 교류하다 만난 사람들. 모두가 운명이 될 수도 있어요. 사실은 은도님께서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달린 거겠지요. 그리고 정말 은도님께 진실한 정인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은도 님이 마음이 넓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감사히 여기는 멋진 인물임을 알면, 그 정인분도 더 빨리 마음이 빼앗기시지 않을까요?”
겨울바람이 목린의 몸으로 칼날같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따뜻했다. 이 사람들이 함께 쌓은 애정이, 우애가, 사랑이, 정말 고마워서.
은도는 잠깐 말을 잇지 못하고 목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멍한 표정으로 오래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아.”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주에 걸렸다가 풀린 사람처럼 제자리에 서서 눈을 깜박이며 머릿속을 다시 정리해야 했다.
“은도 님?”
“저는.”
은도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평소의 여유로운 그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감정을 완벽히 갈무리했다.
그가 뻔뻔하게 웃었다. 그리고 목린의 근처로 바로 걸어와 그녀 앞으로 몸통을 숙였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사실 그런 것 없이 얼굴만으로도 꼬실 자신감이 이미 충분하여…….”
목린이 단호하게 막았다.
“저는 이미 지아비가 있어요.”
“예. 여러 번 차였으니 압니다. 굳이 번복하실 필요 없습니다.”
은도는 순식간에 상체를 다시 뒤로 빼며 툴툴거리듯 말했다. 이어서 일부러 더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부인께 말씀드리자면, 저는 인간이란 결코 바뀔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터라…….”
목린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그녀가 발끈하며 외쳤다.
“솔직히 그건 핑계라고 생각해요! 아직 시도해 보지도 않았잖아요.”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목소리 높이지 않으셔도 다 알아듣습니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목린이 얼른 사과하며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은도는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며 꽤 오래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손을 가로로 들어 제 목까지 갖다 댔다.
“……그런 입장을 고수하는 터라 부인의 말씀에 토 달고픈 마음이 여기까지 차올랐으나.”
목린은 동그란 눈으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은도의 여우 같은 눈매가 곱게 접혔다.
“생각해 보니, 저 같은 예쁜 얼굴에 마음씨까지 좋으면 득이 아니겠습니까. 하여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 *
“혼자서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왕복하다니…….”
“사람이 맞는 건가……!”
언영이 탄 작은 배가 시야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무려 수백 명의 초족 사람들이 바다에 나왔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 빼고는 거의 참석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무시무시한 바다를 홀로 뚫고 온 언영을 바라보는 초족 사람들의 동공에는 공포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마침내 배가 육지에 정박했다.
쿵. 지친 언영이 두 노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그가 몸을 일으켰을 뿐인데 겁에 질린 단월도 주민들은 단체로 뒷걸음질 쳤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거구의 육신이 배에서 나와 허청허청 주민들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동안 해맑게 웃으며 ‘목린아!’ 또는 ‘장인!’, ‘형님!’을 외칠 때도 무섭게 생겼었다. 지금의 모습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가장 앞장서서 그의 움직임을 관찰 중인 익문의 표정엔 수많은 생각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언영은 잠시 익문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수그렸다. 무거운 몸을 천천히 그의 앞으로 이끌고 갔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대낮의 겨울 바다가 주는 날카로운 바람이 더욱 냉랭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언영은 어느새 익문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는 길에 마음의 준비는 이미 끝마쳤습니다. 언제라도 죽여 주십시오.”
“자, 잠깐만. 여기 있게. 누가 와서 저자의 팔을 묶어 보게.”
익문은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바로 급하게 회의를 열었다. 가까운 마을 어른 열 명 정도를 이끌고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둥글게 섰다.
“정말…… 죽인 게 맞겠지? 그래서 벌을 받으러 온 거 맞지?”
목린의 유골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유골이겠거니 생각한 그 상자 안에는 생뚱맞은 보석만 한가득 쌓여 있었다. 상자를 뒤집고, 분해하고 별짓을 다 해 봤다. 보석까지 깨 보았다.
익문의 우측에 있던 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여기 와서 보여 준 행동들을 보게.”
“그런데 왜 유골이 없는 건가……!”
“유골도 못 구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던 거 아니겠나. 익문! 정신 차리게!”
익문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가 털썩 주저앉았다. 양옆에 있던 이들이 그의 팔을 잡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익문은 땅을 내려치며 통곡했다. 그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섬 주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우리 목린이……. 혼만큼은 이 섬에 잠들게 해 줘야 하는데…….”
“저, 그래도 확인차 물어봐야 하지 않겠나. 저 사내한테…….”
이번엔 익문이 서 있던 자리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에 서 있던 이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그자의 맞은편에 있던 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반박했다.
“뭐라고 물어야 한단 말인가? 아내를 죽인 것이 맞냐고?”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필요 있겠는가. 그저…….”
“애초에 죽을죄를 지었으니 죽여 달라 애원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이 저러기 쉽지 않아. 보통 잔인한 행동을 한 게 아닐걸세.”
“그렇네. 그리고 목린이가 살아 있다면 함께 오지 않았겠는가.”
그 점엔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으로 저쪽에 홀로 앉아 있는 언영을 동시에 흘끔 쳐다보았다.
“…….”
언영의 손목을 묶을 끈을 들고 목현이 혼자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무 표정도 없는 목현의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언영은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가, 그 상대가 목현임을 깨닫자 황급히 다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영락없는 죄인의 모습이었다. 목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언영.”
목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언영의 바로 앞에 앉았다. 언영은 고개를 푹 숙이며 상대의 시선을 철저히 회피했다.
목현이 낮은 목소리로, 언영 빼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크기로 물었다.
“네가 이러는 연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는 건가?”
“예, 맞습니다, 형님……. 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목현의 눈이 더 날카로워졌다.
그 상자에 들어 있었던 것이 유골이 아니었음이 드러난 뒤로 마을은 한바탕 뒤집혔었다. 모두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보석은 대체 무엇이며, 유골은 대체 어디 있으며, 아니, 애초에 유골이 있긴 한 것이냐며.
그리고 지난번에 목현은 언영이 가지고 온 그 머리 장식이, 목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바다에서 실종되었던 그 주민이 가족을 생각하는 의미로 몸에 갖고 다니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다시 말해, 목린의 죽음과 하등 관련이 없었다.
목현은 목소리를 더욱더 작게 내리깔았다. 코앞에 있는 언영마저도 귀 기울여 들어야 알아들었다.
“나는 사고였을 거라 믿어. 넌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사고가 아닙니다. 저를 두둔해 주지 마십시오.”
“하나 오해하는 게 있는데, 나도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다.”
언영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목린이라면 이랬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내 누이는 너를 끔찍이 은애하였고 이런 상황을 절대 바라지 않았을 터이니.”
“뭔가…… 크게 잘못 알고 계십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시다시피 목린이는 저와 억지로…….”
“내 인내심이 고갈 나기 전에 가만히 들어라. 나는 무언가 사연이 있었을 거라 믿지만 그렇다고 앞서서 너를 수호할 만큼 내 누이처럼 선량하지도 못해. 그러니…….”
한편 같은 얘기만 반복되는 회의는 여전히 뜨겁게 이어지고 있었다. 목현은 그쪽 일을 가볍게 무시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익문에게 다가가 고했다.
“묶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바람 소리에 묻히지 않게 크게 말했다.
“주언영의 목을 쳐내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래, 아끼는 누이였으니 마음이 매우 아플 거야. 목현이도 그러고 보면 참 불쌍하지. 아니, 족장님이 다 안타까워, 나는. 다양한 말이 오갔다.
언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무도 목현을 막지 않았다. 그는 원래 언영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던 가장 키가 큰 사내 앞으로 거침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내가 벌벌 떨면서 주는 검을 한 손으로 낚아채듯 가져갔다.
무표정으로 언영을 향해 발을 떼는 목현의 얼굴은 무서우리만큼 평온해서, 지켜보는 초족 사람들을 소름 돋게 했다. 그는 서늘한 눈으로 주민들을 한번 쓱 훑어보다가 자신의 아내를 잠깐 더 오래 쳐다보았다. 두 사람만 알았다. 하지만 좀 더 무언(無言)의 대화가 오가기 전에 얼른 목현이 다시 눈을 돌렸다.
목현의 두 발이 언영의 앞에 안정적으로 멈췄다.
그가 차분하게, 느리지만 흔들림 없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주민들은 숨도 쉬지 못했다.
언영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목현의 눈에 핏발이 단단히 섰다. 자루를 쥔 그의 손에서 뼈마디가 단단히 튀어나왔다.
그가 마침내 검을 들었다. 깔끔하게 손질된 첨예한 끝이 우아하게 반짝거렸다. 모두의 시선이 절로 그곳에 쏠렸다. 하지만 검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던 이들은 그 뒤의, 바다 저 끝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존재를 놓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바다에……!”
누군가가 더듬거렸다.
그것은 컸다. 그리고, 많았다.
“누군가가 또 오고 있다!”
“배다!”
아무리 시력이 나쁜 노인이라도 놓칠 수 없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단순한 방문이 아니었다. 이제껏 한 척, 많아 봐야 세 척 정도 되는 함선으로 초족의 섬을 찾아왔던 귀혈족과는 달리 이번에 들이닥친 습격은 하나의 군대와 다를 바 없었다.
익문이 눈을 부릅뜨고 언영을 노려보았다.
“자네!”
“아닙니다! 결코 제가 부르지 않았습니다! 소인도 모르는 일입니다!”
언영이 몸을 앞으로 내밀고 목청껏 부정했지만, 처음 보는 광경에 대경실색한 초족의 귀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체 몇 척이나 되는 건가!”
“하나, 둘, 셋……. 열다섯 척은 되는 것 같습니다!”
“으앙!”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다 큰 어른들도 이제 우리는 죽었다면서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고 통곡했다. 그대로 오줌을 지리는 이도 있었다.
언영은 절박하게 해명했다.
“상황을 분명히 설명했고, 가서 조용히 죽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들 몰려온다고?”
“그러니 어서 육지에 닿기 전에 저를 치십시오!”
“자네를 치면 이대로 우리 목숨이 날아갈 게 분명하지 않는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언영은 이번엔 목현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형님, 어서 저를 치십시오!”
“…….”
목현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언영과 바다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또한 언영에게 나름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을 바로 휘두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언영이 다시 한번 외쳤다.
“형님!”
“안 돼!”
바다 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어린 여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안 돼요!”
하늘 위로 은색의 말이 날아올랐다. 밤하늘의 별을 하나하나 따내어 고운 털로 빚어낸다면 저런 색이 나올 것 같았다.
말이 바다를 밟으며 옆으로 튀기는 물방울마저 신성하게 보였다. 그 아름다운 모습 자체에 혼이 빼앗기느라, 초족 사람들은 말에 올라탄 멋진 여인의 정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당연히 모르는 이라고 생각했기에 얼굴을 그리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 육지를 밟고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얼굴은 차츰 선명히 보였다.
“그 검 당장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목린이……?”
주저앉아 있던 익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속삭였다.
초족 사람들이 단체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죽었다던 사람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목린의 탈을 쓴 악귀일지도 몰랐다. 외양과 목소리만 같을 뿐이지, 그들이 기억하던 그 사랑스러운 섬 아가씨가 아니었다.
목린은 능숙하게 봄비를 타고 질주했다. 뒤에 한 가닥으로 땋은 머리가 펄럭거렸다. 안정감 있게 땅을 가로질러 정확히 언영과 목현 사이에 들어가 그 둘을 갈라놓았다.
목현 또한 충격에 빠진 눈으로 누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목린아.”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오라버니!”
사정을 모르는 초족 사람들이라면 그러려니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숨통을 끊으려 검을 쥐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목현임을 확인했을 때 목린의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봄비를 데리고 바다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목린은 안정감 있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목린이 겁도 없이 떨어지자 멀리서 보던 익문은 숨을 들이켜며 뒤로 넘어갈 뻔했다. 목린은 언영의 앞에 서서 목현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남편을 보호하듯이 두 팔을 옆으로 뻗었다.
“서방님은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알고 계시잖아요!”
하도 적막했기에 가까이에 있던 초족 사람들은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똑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턱이 바닥에 닿을 것같이 입을 벌렸다. 익문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었다.
뒤에 있느라 못 들은 초족 사람들도 앞쪽 사람들이 전해 주는 귓속말 덕분에 빠르게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아들었다. 배에 타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에 있던 이들까지 모두 밖에 나와 목린, 목현, 언영 세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
입을 다물고 있는 목현의 얼굴엔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 사실이 더욱 목린의 화를 부추겼다.
“서방님께서 안 계신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어떻게 오라버니께서 이러실 수가 있어요!”
목린도 이런 식으로 언영에게 마음을 밝히게 될 줄은 몰랐다. 뒤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니, 상상될 것 같아서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상상하게 되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목린은 그들의 대화를 경청 중이었던 초족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귀혈족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정말 오로지 친해지고 싶어서 여기 왔을 뿐이에요! 물론 여러 가지 오해 때문에 좋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이제라도 같이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와 서방님처럼요!”
물론 지금 초족 사람들의 표정을 본다면 결코 그 말이 쉽게 나올 순 없었다. 그들은 마치 강한 태풍 속에 갇혀 있다가 빠져나온 사람들처럼 황망하게 서 있었다. 목린이 제시한 긍정이나 희망 같은 요소들은 찾기 어려웠다.
일단 목린은 언영을 구하는 데 먼저 집중하기로 했다. 두렵지만 용기를 내며 등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눈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서방님, 괜찮으세요? 그 사이 얼굴이 너무 수척해지셨어요……!”
허풍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소중하게 간직된 언영의 생기발랄한 미소는 흔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뺨이 살짝 패고 눈에는 하나도 생기가 없었다. 굵다란 몸을 칭칭 감으며 속박하고 있는 밧줄이 목린의 눈물샘을 건드렸다.
언영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처음 맞닥뜨린 것처럼 목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건조해진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목린아…….”
“제가 얼른 풀어 드릴게요.”
계속 그의 얼굴을 보면 오열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목린은 얼른 언영의 뒤쪽을 향해 무릎으로 기어갔다. 일단 끈이라도 풀어 줘야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그러나 매듭을 확인한 목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는 정교하게 보였던 매듭이, 가까이서 확인했을 땐 아무것도 아니었다. 목린이 한 가닥만 대충 잡아당기자마자 바로 술술 풀렸다.
초족 사람들이 분노했다. 그중 한 사람이 언영을 삿대질하며 내질렀다.
“역시 도망칠 생각이었구나!”
그리고 그때, 목현이 마침내 침묵을 깼다.
“제가 처음부터 묶지 않았습니다.”
목린도, 초족 사람들도, 배에서 듣고 있던 이들도 모두 휘둥그레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언영만이 죄인처럼 얼굴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목현은 그런 그의 정수리에 시선을 고정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이기고 도망치는 건 매제에게 일도 아닐 터이니, 알아서 도망간 다음 다시는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혹여 모르니 제 아내 또한 뒤에서 돕기로 하고. 아무리 봐도 누이가 이런 상황을 바라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현은 이번엔 목린과 똑바로 눈을 맞추며 덧붙였다.
“그런데 끝까지 고집하더군요. 물론 저 또한 마찬가지로 끝까지 고집할 생각이었고.”
목린의 뺨이 조용히 불타올랐다.
그러니까 결국엔, 사실 그렇게 위험한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다. 목 놓아 언영을 향한 고백을 외칠 필요도 없었고.
그때 마침 언영이 고개를 천천히 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목린의 복잡한 머릿속 잡념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목린아. 조금 전 그 말…….”
“네, 서방님.”
목린은 얼른 다시 언영의 앞으로 다가가 빠르게 속삭였다.
“사실이에요. 모두 사실이에요. 서방님, 사랑해요. 이렇게 죽으면 안 돼요……! 처음엔 무서웠지만, 그래도 결국 혼인을 앞당기자고 한 사람도 저였고……. 여러 가지 선택에 결코 후회는 없어요. 서방님이랑 함께하면서 새로운 행복을 배웠어요.”
언영의 눈에서 잠시 희망이 싹을 피웠다가 다시 시들었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자조했다.
“그래도 내가 잘못한 건 사실이야.”
“그렇다고 제가 언제 죽으라고 얘기했어요!”
답답한 목린의 표정이 가득 일그러졌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황한 언영이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렇게 미안하다면, 평생 제 옆에서 사죄하시면 되잖아요!”
언영의 입이 바보같이 벌어졌다.
“……그래도 돼?”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목린이 호소했다.
언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동자가 중심을 못 잡고 방황했다. 그가 고심하는 게 보였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그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건가.
“……알았어.”
마침내 그가 내뱉었다. 한번 답하고 나니 봇물 터지듯 그녀를 향한 말이 튀어나왔다.
“알았어, 목린아. 알았어. 그럴게. 네 말대로 할게.”
언영은 목린과 이마를 맞대고 계속 속삭였다. 목린은 그런 그의 두 뺨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뜨겁게 입술을 포갰다.
충격받은 언영의 몸이 굳고 그의 눈이 떡 벌어졌다. 목린은 단순히 입술을 잠깐 붙였다가 떼지 않았다. 그의 입술을 빨고, 부드럽게 깨물고, 사랑스럽게 머금었다. 언영의 거대한 몸통이 행복해서 벌벌 떨렸다. 그는 쭈뼛쭈뼛 팔을 뻗어 목린의 등을 매우 조심스럽게, 소중하게 안았다.
다만, 나머지 사람들은 두 사람의 감동적인 재회를 여유롭게 볼 상황이 아니었다.
“잠깐, 그렇다면 귀혈족은 우릴 침략하려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익문이 황망하게 더듬거렸다.
“익문, 난 자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배에서 훌쩍 뛰어내린 월진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도 우수수 배에서 달려 나왔다. 모두가 하나같이 무서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서웠지만 익문은 애써 목소리를 짜냈다.
“모두 완전 무장을 하고 오지 않았는가!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온 건 그럼 대체 어떻게 설명하려고!”
“처음 만나니까 멋있어 보이고 싶었어요…….”
나란히 서 있는 근육질의 수염 난 남성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토로했다.
“부족 이름도 뭔가 이상하잖아! 귀혈족이라니! 피를 즐길 것 같은 이름이잖나!”
“나아갈 혈(趐)자를 씁니다.”
“웃기지 마! 노린 거잖아!”
사람들의 외침 가운데 월진이 차분하게 말했다.
“익문, 지금부터라도 함께 진실한 우애를 쌓는 게 어떻겠는가. 이제부턴 내게 말을 놓도록 하게. 원한다면 오히려 내가 말을 높이겠네.”
월진은 익문이 무릎을 꿇으라 하면 망설임 없이 바로 꿇을 자세를 취했다. 그건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맙기보단 오히려 당황스러워진 익문이 정신없이 물었다.
“나는…… 나는 솔직히 말하면 반대요! 인제 와서 대체 무얼 하겠다고! 게다가 함께 데리고 온 저들은 또 대체 누구요!”
“나의 아들이 걱정되어 달려온 이들이네.”
걱정되어 달려온 사람들이라 하기엔 좀 너무 많았다. 시야에 다 들어오지도 않았다. 게다가 죄다 싸우러 온 사람들 같았다. 오히려 익문을 더 겁에 질리게 했다. 그가 창백한 표정으로 내질렀다.
“나는 그런 오해가 없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린이를 귀혈족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걸세! 그러니 진정한 화해를 원한다면 나는…… 나는…… 두 사람의 혼인을 없던 일로 하길 바라네!”
“아버지!”
언영의 품에 파묻혀 있던 목린이 불쑥 고개를 들고 외쳤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익문의 표정은 냉담했다. 그는 여식의 외침을 못 들은 척하고 말했다.
“우리 목린이는 고향에서 훨씬 행복할 것이니. 두 사람 사이에 아직 아이도 없고 부부의 연을 맺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네. 덕복아! 네가 우리 목린이를 쭉 마음에 담아 뒀던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혼례를 마다하는 거 아니냐!”
초족 사람들의 눈이 전부 구석에 가만히 서 있던 덕복이라는 청년에게로 향했다. 초족이 바라보는 곳을 보고 나머지 육지에서 온 이들도 같은 청년을 바라보았다.
졸지에 오천여 개의 눈알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덕복의 얼굴에 난처함이 가득했다. 그의 얼굴이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반대로 입에서 나오는 말은 꽤 차분했다.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족장님, 목린이는 귀혈족의 사내를 이미 마음에 담았습니다. 제가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입니다. 저는 오히려 저 둘의 행복을 지지…….”
“방금 듣지 않았는가!”
대화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자 익문이 중간에 자르고 들어가 외쳤다.
“아버지, 저는 서방님 곁에 있을 거예요!”
목린이 두 팔로 언영을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반발했다.
“안 된다! 바깥세상은 너무 무서운 곳이야! 이 아비랑 같이 계속 여기서 살자!”
“그러면 서방님께서 너무 괴로워하실 거예요!”
“그것은 내 알 바 아니다! 목린아, 너 이런 애 아니었잖니!”
목린의 품에 갇힌 언영 또한 더듬거리며 끼어들었다.
“목린아, 굳이 이러지 않아도…….”
목린의 미간이 팍 좁아졌다.
“서방님은 조용히 계세요.”
목린은 언영의 턱을 강하게 잡아끌어 그와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할 말이 있었던 언영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두 사람의 입맞춤을 바라보는 익문은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그때, 배에서 벌떡 일어나 상황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던 언영의 동료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염치없지만 언영이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들은 우람하고 위협적인 덩치에 걸맞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는 몸짓으로 계속 외쳤다. 놀란 나머지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그리로 향했다.
“많이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착한 놈입니다!”
제 일처럼 공감하고 이입하며 그들이 울먹였다. 그러자 그 측면에 있던 배에 탄 사람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들도 익문을 향해 절절하게 외쳤다.
“누구에게나 솔직하고 꾸밈없는, 알고 보면 좋은 녀석입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두가 팔을 높이 쳐들었다. 남녀노소 굴하지 않고, 배에 올라타 있는 이들이나 땅으로 내려온 이들 모두 가슴을 들썩이며 쩌렁쩌렁 외쳤다. 어딘가 좀 이상한 면이 많지만 그래도 소중한 녀석을 위해 제 한 몸 다 바쳐 호소했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발가락을 빨아 주는 걸 좋아한다지만 그 정도면 폭력도 아니고, 꽤 양호한 취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완벽한 놈은 아니지만, 가족이랑 친우들을 위해선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놈입니다요! 사윗감으로 최고입니다! 쭉 지켜봐 왔는데 부인을 정말 소중하게 대해 줍니다!”
“가슴도 정말 큽니다!”
“제가 마을에서 가장 존경하는 형님입니다!”
월진은 감히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울적한 표정으로 익문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외침은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 않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적어도 한 번은 언영에게 진 빚이 있었다.
“오라버니에게 기회를 주세요!”
언영의 세 누이도 함께 손을 맞잡고 울었다.
안 그래도 이 천 명 남짓의 걸걸하고 목청 큰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한마음에 소리를 질러대니, 그 소리가 주는 괴력이 어마어마했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하늘을 누비던 새들은 도망치듯 달아났다. 초족 사람들 대부분은 단결된 자들의 하소연에 감동하기는커녕 되레 겁에 질렸다.
“으윽.”
참지 못한 호민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레와 같은 함성은 널리 퍼져 바닷속까지 흘러들었다.
바닷속, 그다지 깊은 곳에 살고 있지 않는 ‘그것’의 귀에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