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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35)화 (135/138)

135화

눈을 내리감고 조곤조곤. 화왕이 건네는 말소리엔 꽃내음이 스몄다. 

수호단의 부작용으로 후각을 상실한 술사는 향기를 맡을 수 없다. 다만 어린 시절, 화왕이 부르는 손짓을 따를 적이면 늘 은은한 향이 감돌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때 그 향기는 잊었으나, 향을 느낀 기억은 여즉 남아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검은 뱀이 슬그머니 기어 왔다. 담금이다.

술사에게 깃들어 그의 신력을 먹고 자라던 영물은 일찍이 아무개가 데려갔다. 평소에도 마뜩잖은 기색이 역력했으니. 그나마도 아무개로서는 꽤 봐주고 있던 모양인데, 술사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을 때마저 빌붙어 기생하는 꼴은 도저히 못 참은 듯싶었다.

어찌어찌 아무개를 따돌린 건지. 슬금슬금 지나가는 담금을 모란이 일견했다.

“네 일행의 외출이 잦은 건 알고 있을 테지?”

질문이라기보다는 이어질 대화에 앞선 준비 절차였다.

“정원이 소란스럽더구나. 네 일행이 다시 외출했는데, 분위기가 전번과 사뭇 다른 모양이야.”

담금이 모란을 빙 돌아갔다. 술사가 손 내밀었다.

담금은 여느 때처럼 술사의 손을 타고 오르는 대신,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검은 뱀이 쩍 입을 벌리자 그 안에 반짝이던 것이 손 위로 툭, 떨어졌다. 술사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아무개에게 준 반지였다.

땅이 늘어났다.

고무를 당기듯 주욱 늘어난 대지는 아무개를 삽시에 창성 중심에서 끝자락으로 보내 버렸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해일에 휩쓸린 종이배처럼, 속절없이 떠밀렸다.

축지로는 아무개를 이동시킬 수 없다. 원혼에 둘러싸인 몸은 지면에 닿지 않으니.

하나 아무개 주변 땅을 주무르는 건, 가능했다. 직접 옮기는 건 불가하니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실성했군.’

성벽에 처박히기 직전, 검은 안개에서 돋아난 손이 벽면을 따라 피어났다. 

아무개는 손을 계단 삼아 밟고 올랐다. 지면이 뒤틀리고 취락이 무너졌다. 창성에 거주민이 몇인데 이리 마구잡이로 땅을 주무르다니. 실성한 게 틀림없다. 

이러한 난리 통에도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필시 율해경의 소행일 터.

어쩐지 방해를 안 하더라니. 그동안 창성의 주민을 대피시킨 모양이다.

저자의 크고 작은 시전(市廛)과 우미한 고택의 처마를 지나 우뚝 솟은 대문 너머. 낱알보다 작아진 해원을 응시했다. 놈이 손짓하자 땅이 기지개를 켜며 흙으로 빚은 인형이 걸어 나왔다.

얼굴 없는 인형이 전진했다. 무한히 생성되는 인형의 행진. 웅장한 군세는 규모 면에서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했다.

오금이 저리도록 두려운 광경이었으나, 막상 저들이 노리는 당사자인 아무개는 별다른 동요 없이 덤덤했다. 

머릿수로 밀어붙이겠다는 건가. 아무리 대단한 초인이라 한들 수적 열세를 당해 낼 순 없으니.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머릿수로는 아무개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막이 검게 물들고 홍채가 희게 바랬다. 역안의 흉신이 명했다.

“······나와.”

흉신을 둘러싼 어둠이 크게 일렁였다. 

물결처럼 번지는 어둠 속에서 검은 팔이 불쑥 나와 제 몸을 빼냈다. 수천, 수만의 원령이 검은 호수에서 빠져나왔다.

만물점주가 수집한 원혼. 그들을 거느린 아무개는, 진정한 의미의 일인 군단이었다.

— 캬아아아악···!

생명이 없는 인형과 생명을 잃은 혼이 부딪쳤다. 창성 전역을 전선 삼아 짙은 흙빛과 새카만 암흑이 태극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인형이 원혼을 후려쳤으나,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관통해 버렸다. 실존하는 육체가 없는 원혼에게 물리적 공격은 헛수고에 불과했다.

퍼억! 인형의 다리가 부러졌다. 후열에 짓밟힌 인형이 무너져 흙더미로 전락하고, 지면에 스며들었다. 후방에선 새로운 인형이 빚어졌다.

양측 모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불사의 군단이 맞붙은 지독한 소모전.

아무개는 퍽 흡족했다. 율해원의 신력을 소모시키고, 술사와의 경쟁에 집중할 수 없게끔 하는 목적에 부합한 상황이잖은가.

아비규환의 전장을 사이에 두고 아무개와 율해원은 서로를 직시했다. 아득한 거리감은 중요치 않았다. 얼마나 먼 거리에 있든 그들은 상대의 이목구비를 정확히 식별할 수 있었다.

“···—마.”

하여 알 수 있었다. 해원이 무어라 지껄이는지.

“······지 마··· 나만, 나 혼자······ 가지 말라고—!”

위태로운 얼굴이 고성을 내질렀다. 불길한 예감에 아무개의 미간이 설핏 구겨지던 찰나. 

대지가 울부짖었다. 지면이 발악하듯 터져 나오며 융기하고 침강했다. 온갖 잔해와 파편이 공중에 흩어져 우후죽순 떠올랐다. 

아무개는 뱀처럼 꿈틀거리는 성벽을, 주상절리를 피해 물러났다. 흉신의 역안이 아연실색하여 크게 벌어졌다.

해안 절벽에서나 볼 수 있는 주상절리를, 내륙에 위치한 데다 인근에 화산도 없는 창성에서 보게 되다니.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고운 모래로 쌓아 올린 사구에 석탑이 파묻히고, 반파된 어물전 내에는 하얀 설원이 펼쳐졌다. 

온 천지가 제멋대로 뒤섞였다. 이곳 창성에서 천변만화가 펼쳐졌다.

두 눈을 의심할 광경이었으나 흉신은 즉시 상황 파악을 마쳤다. 왜, 저자도 사원에도 온천과 연결된 전각이 있잖은가. 

축지는 땅을 접어 이동하는 술법. 땅을 접은 상태 그대로 유지하면, 이역만리 떨어진 땅덩이를 고스란히 옮겨 온 것과 마찬가지다. 가히 신의 경지에 범접한, 극한의 축지술.

‘아무리 그래도 이건···.’

미친 짓이다. 

양옆에서 압착하듯 조여 오는 토벽. 우측은 푸른 삼림이나 좌측은 울긋불긋한 단풍 숲이다.

시험 삼아 흙 인형 하나를 걷어차 밀어 넣었다. 붉은 단풍에 파묻힌 인형이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으나, 놈은 창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째 불안불안하더라니. 통제를 잃은 힘이 날뛰면 이 꼴이 되는가.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고개를 들자 네모 각진 바다가 떨어지고 있었다. 바다를 담은 저곳은 창성의 영토가 아니었다. 이곳에 있되 이곳에 없는 바다.

조각조각 뒤섞인 땅에 떨어진 인형이 허우적거렸다. 이래서야 수적 우위를 점해도 무용지물이다. 아무개는 흩어진 원혼을 그림자에 거둬들이며 바다를 피했다. 검푸른 물결이 비산했다.

창성 외 지역에 발 디딘 순간, 해원은 접어논 땅을 도로 펼치리라. 어딘지도 모를 머나먼 곳에 유기되는 셈이다. 

곧 패배를 뜻한다.

수십 수백의 공간을 갈기갈기 찢어 한데 뭉쳐놓으니 율해원이 거꾸로 선 건지, 저가 뒤집힌 건지 알 수 없었다. 상하는 물론 전후좌우의 구분조차 난해했다. 공간감이 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미로에 갇힌 아무개는, 그중에서도 창성의 것이 분명한 땅을 골라 밟았다. 

하늘로 이어진 계단을 딛고 옆으로 누인 가택의 장지문을 넘었다. 쉼 없이 뛰고 달렸으나, 율해원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만천하가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으니.

도자역이 잠식한 다리가 뻣뻣했다. 높이 뛰기가 여의치 않자 아무개는 손을 내밀었다. 어둠에서 비롯한 손이 아무개의 손을 맞잡고 곡예 하듯 위로 던졌다.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여 착지한 후 아무개는 직감했다.

여기까지구나.

도자역이 중증에 달하면, 호흡 시 폐와 늑골이 들썩이는 것만으로도 몸에 금이 간다. 아직 그리 심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격전을 감당할 만큼 유연하지도 못했다. 원혼의 손을 빌어도 한계는 명확했다.

아무개는 저 멀리 율해원을 응시했다. 제 손으로 직접 죽이는 건 무리라도 한 대 정돈 제대로 날려 주고 싶었는데. 저주의 침식이 먼저였다.

아무개가 발 디딘 마룻바닥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 너머 회백색 벽돌이 가지런히 깔린 이국의 거리가 보였다. 다환을 벗어난 적 없는 흉신에겐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 낯선 땅.

발끝이 마루에서 떨어졌다. 잿빛의 세계로 추락하던 찰나.

손이 잡혔다.

공중에 매달린 아무개는 반사적으로 고개 들었다. 그가 보였다. 몹시 익숙한 얼굴이나, 지독히 낯선 표정의···

“···술사님?”

허전한 왼 소매가 흩날렸다. 술사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손으로 흉신을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했는데.”

웃음기라곤 전연 찾을 수 없는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위험한 짓 말고 옆에 있으라 했는데.”

“······어어—”

“말도 안 듣고. 속 썩이고. 성격도 나빠. 난폭하고 예민한데 손버릇도 험해서는···”

“······.”

술사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저 혼잣말인 양, 조곤조곤 읊을 따름이다.

하나 아무개는, 생에 가장 큰 공포에 휩싸였다.

살면서 이보다 두려웠던 적이 있던가. 차마 눈치 볼 여력도 없이 바짝 얼어 버린 아무개를, 그 역안을 물끄러미 보던 술사가 불현듯 쓰게 웃었다.

“제멋대로인 주제에. 하필 나 같은 걸 예외로 삼아서··· 이리 사서 고생하나요.”

그가 손에 힘주어 아무개를 끌어올렸다. 좁은 모서리에 두 인영이 바짝 붙어 섰다. 술사는 외팔로 아무개를 끌어안고서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얼마나 좋은 곳이기에 그리 나도는가 했더니. 터가 별로예요. 오래 머물 만한 곳은 못 되네요.”

만화경처럼 혼잡하게 뒤엉킨 천지를 가리켜 ‘터가 별로’라고 짧게 평한 술사는, 흐트러진 아무개의 머리칼에 뺨을 묻었다. 웃음기 가신 눈이 해원을 직시하고, 미소를 머금은 입술은 아무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도 가고 싶어요?”

‘저것’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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