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망상··· 아니야.”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가지에 꿰여 뿌리째 뽑힌 관상목 위로 아무개가 착지했다.
“최악으로는··· 바로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인체에도 금속이 있으니까.”
사람의 몸은 미량이나마 금속성을 함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조절하여 육체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 율해원은 그러지 않았다. 아마 못 한다는 쪽에 가까우리라.
“불완전한 반쪽짜리 계승 탓인지 능력 부족인지······ 그 정도는 아니잖아, 너.”
율해원은 전능에 필적하는 군주의 권능을 완벽히 소화해 내진 못했다.
최악의 경우 육체를 벗고 원혼의 군체로 회귀할 계획까지 세운 아무개로선, 다행이지만.
“나 원. 저승 것들은 무얼 하느라 청소도 똑바로 안 한 거야? 하다 하다 웬 폐물 덩어리가 나 죽인답시고 설치는데.”
헛웃음을 흘리던 해원이 돌연 싸늘히 낯을 굳혔다.
“건방지게.”
촤아악—···!
거대한 가시에서 보다 작은 가시가 선인장처럼 삐죽 돋았다.
때맞춰 아무개가 도약했다. 그를 지탱하던 관상목은 새로 자란 가시에 찔려 흡사 바늘꽂이 같은 몰골이 되었다.
‘아무래도··· 오해를 산 것 같은데.’
율해원을 죽인다 했지, 제 손으로 직접 죽이겠다 한 적은 없는데 말이다.
아무개는 복잡하게 얽힌 가시를 요령 좋게 옮겨 타며 박차고 나아갔다.
물론, 당장이라도 해원을 잡고 놈의 왼팔부터 사지 모두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나 터무니없는 가망에 목매지는 않았다. 반쪽짜리라 한들 상대는 엄연한 대지의 계승자. 낙오된 원혼의 집합체인 자신에게 승산은··· 냉정하게, 희박하다.
같잖은 호승심으로 위험을 자초할 만큼 어리석진 않다. 흉신은, 태자의 머리는 심사숙고 끝에 모색했다. 술사와 해원. 배다른 형제가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어일까.
술사는 해원과 경쟁하는 한편, 표면적으로나마 이 땅을 평온하게끔 유지하려 힘을 분산시켰다. 심지어 교전으로 발생한 여파를 감내하기까지 했다. 일방적으로 피해를 감수하는 술사가 몹시 불리한 형국.
하여 아무개는 자신이 무게추가 되기로 했다. 기울어진 저울의 균형을 직접 맞추고자.
“너.”
현재 요구되는 덕목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 따위가 아니다.
눈앞의 작은 싸움은 중요치 않다. 갖은 수를 써서 힘겹게 국지전을 이겨 봤자, 전면전에서 패하면 무용할 따름이니.
“지금··· 힘들지?”
아무개가 진정 목표한 것은, 술사의 승리다.
술사의 힘이 분산되어 있다면, 마찬가지로 해원의 힘도 분산시킨다. 술사가 교전의 여파를 감내한다면, 해원에게도 감당할 짐을 얹어 주어야 마땅했다.
제멋대로 돋아나는 가시가 빼곡히 도사려 마치 숲인 양했다. 굵직한 가시를 번갈아 엇갈리게 딛고 넘어 삽시에 돌파한 아무개가. 놈에게 뛰어들었다.
적의와 살의가 교차했다. 정신이든 육체든 뭐든 흔들어 놓는 것. 그게 아무개가 노리는 바였다.
“술사님도 무리하는데··· 네까짓 게 멀쩡할 리 없잖아?”
심기 불편한 듯 해원이 설핏 눈매를 좁힌 찰나. 녀석이 휘청 흔들렸다.
스멀스멀. 소리 소문 없이 낮게 깔려 접근한 어둠이. 그가 선 가시를 휘감아 꺾은 것이다.
가시가 부러지고 해원과 대지의 연결이 끊겼다. 축지가 불가능한 잠시간, 아무개는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을 찍어 내렸다.
해원의 몸이 일직선으로 추락했다. 첨단을 뾰족이 세운 가시밭에 처박혀 구멍투성이가 되기 직전, 지면이 봄을 맞은 눈처럼 녹아내리며 떨어지는 그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제법 인상적이었다. 이 땅은 결코 율해원이란 존재를 해칠 수 없다는 듯했으니.
가시의 가파른 경사를 디딘 아무개가 반쯤 무너진 들보에 올라탔다. 안개처럼 흐리게 일렁이는 어둠에 감긴 제 손을 보고 주먹을 쥐다 펴길 반복했다. 기름칠이 안 된 낡은 가구처럼 손마디가 뻑뻑했다.
낯설지 않았다. 신체가 차츰 굳어 가는 이 느낌은, 필시 도자역의 증상이렷다.
흘깃 눈동자를 굴려 해원을 돌아봤다. 저놈이 원인일 테지. 저주의 근원과 가까울수록, 병마의 침식 또한 급격히 빨라졌다.
······술사님도, 마찬가지였을 터.
“하아···.”
푹신한 대지에 팔을 걸치고 방만하게 누운 해원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네가 말한 그 술사라는 작자. 나도 아는 사람인 듯싶은데.”
고개를 뒤로 젖힌 그가 흉신을 서슬 퍼렇게 응시했다.
“너. 형님이 보낸 거냐?”
“······술사님은 가지 말랬어.”
이 와중에도 술사에게 오해가 생기는 건 원치 않은 아무개가 즉시 반박했으나, 해원은 한층 싸늘해졌다.
아무개는 ‘형님’과의 관계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결국 연관은 되었다는 뜻이잖은가.
“가지 말랬는데··· 내가 멋대로 온 거야.”
호흡마다 코와 기도의 점막이 아리도록 난폭한 살기를 흘리던 아무개가. 기죽은 듯 잔뜩 줄어든 소리로 웅얼웅얼 덧붙였다. 해원이 섬뜩하게 노려봤다.
“형님과는 무슨 사이지?”
기세가 좀 전과 판이하다. 말실수 한 번에 목이 떨어져 나갈 듯, 긴장된 공기.
놈의 변화를 기민하게 느끼면서도 아무개는 맘속에 정해 둔 답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고스란히 일러 주었다.
“임자.”
“······뭐?”
가당찮은 소리. 해원의 얼굴이 종잇장마냥 구겨졌으나, 아무개는 물릴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는 술사님을 달라 했고, 술사님은 그러겠다 했어.”
비록 여건상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했으나, 그 외에 전부 주겠다 했으니.
“그러니까··· 내가, 임자야.”
해원의 눈이 차게 식었다.
“수년을 동고동락한 이복동생은 가족도 아니지만··· 쓰레기 같은 혼 쪼가리나 덕지덕지 갖다 붙인 괴귀(怪鬼) 따위에겐 저 자신을 통째 넘겨준다, 라.”
생각을 정리하듯 해원이 중얼거렸다.
“궁금하네.”
바로 선 그의 눈이 아무개를 오롯이 담아냈다.
“일족이 몰살당하고 가문이 짓밟혀 스러져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냉혈한이······ 네가 죽으면, 과연 반응할까?”
일순 폭발하듯 터져 나온 기세에 아무개는 물론, 딛고 선 기둥과 바닥을 뒹굴던 자재까지. 주위 모두가 먼지처럼 흩날렸다. 흉신은 직감했다.
앞으로의 싸움은, 지금과 전혀 다른 양상이 되리란 걸.
드르륵, 문이 열렸다.
아무개가 눈에 둘러 준 휘장은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까지 막아 주진 못했다.
술사는 벽에 기대앉아 눈꺼풀로 스며드는 은은한 빛을 느꼈다. 사락사락 보드라운 꽃잎이 스치는 소리. 이어서 머리 위로 익숙한 무게가 얹혔다. 삿갓이다.
“조금은 편해 보이는구나.”
인사도 생략한 모란이 대뜸 평했다.
술사는 손을 뒤로 하여 매듭을 풀었다. 스르륵, 얇은 휘장이 미끄러지며 쇄골과 콧잔등에 걸렸다.
모란이 사뿐 앉았다. 술사가 아닌 우측 벽면을 향해 앉자 그의 옷자락이 만개한 꽃잎처럼 풍성하게 펼쳐졌다. 항상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꽃의 신령에게. 술사가 운을 뗐다.
“제게 도움 주시면 안 됩니다.”
“왜, 내게도 저주가 옮을까 봐?”
웃음기를 담뿍 머금은 대답에 술사가 작게 한숨 쉬었다.
“당신의 정원으로 오는 게 아니었어요.”
온 천하의 화초가 소생하는 화왕의 정원. 그 특성 탓에 신령과 술사 사이에선 평화 중립 구역으로 여겨졌다.
대지의 계승자를 피해 은신할 곳이란 천지 어디에도 없는 까닭에. 부득불 예까지 오고 말았지만.
“내게 기대는 게 싫니?”
“응석 부릴 나이는 한참 지났으니까요.”
“네가 응석이라니. 한번 구경이나 해 봤으면 좋겠구나.”
왕의 정원에 처음 발 들인 시절부터. 그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조숙했다.
어리광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무뚝뚝한 아이.
“고작 이백 살 조금 넘은 아이가. 어찌 이리돼 버렸을까.”
“······사람은 환갑만 넘겨도 경사라며 잔치를 벌입니다만.”
모란이 안타까운 양 하는 말에. 술사는 드물게도 어처구니없는 기색이었다. 그야 까마득한 세월을 지내 온 화왕에게 이백 살이란, 배냇짓하는 아기와 다름없을는지 모르지만.
“너는 응석 부릴 나이가 아니라면서. 정작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는 아우의 어리광은 받아 주잖니?”
“······제가 어리광을 받아 준다고요?”
의심과 부정이 뒤섞인 어조. 모란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지금껏 가만두는 게 그럼,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게 아니고 뭐니?”
잠시 말이 없던 술사는 이내 그런가요, 하고 맥없이 중얼거렸다. 미처 자각하지 못한 곳을 지적받은 이들이 그러하듯.
“전에는 나도 갈피를 잡기 어려웠으나, 이제 알겠구나. 저리 큰 사달이 벌어지는데도 너는 제법 편해 보이니 말이다.”
“그건··· 얼마 전부터 도련님이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제 쪽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습니다. 저항이 줄었으니 영역을 넓히기도 수월해졌죠.”
“너는 늘 그렇게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문이 막힌 듯 술사는 입을 닫았다.
피로 맺은 언약이 끊기고 이백 년 만에 찾아뵌 스승은,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만난 듯 거리낌 없어 외려 위화감이 들었다.
흡사 이백 년의 세월을 이틀이나 다름없는 양하니.
“당신께는··· 매번 못난 꼴만 보여드리네요.”
“그러니?”
화왕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내가 본 너는, 항상 무언갈 지키고 있었단다.”
술사의 호흡이 멎었다.
“무언갈 지키려는 절박함을 못났다 하면, 슬프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