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61)화 (61/138)

61화

“이, 이익···!”

분노한 큰형님이 솥뚜껑만 한 손을 휘둘렀다.

“내놔라! 그건 내 것··· 으아악!”

술사는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잡아 세웠다. 우드득, 뼈마디가 뒤틀리며 상대의 주먹이 으스러졌다. 건달이 괴성을 지르자 술사가 손을 놓아주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힘 조절이 잘 안 돼서.”

무감한 음성으로 건네는 사과는 아무개가 듣기에도 건성인 양 했다.

“상해를 끼칠 의도는 아니었어요.”

고통에 몸부림치는 큰형님 곁을 서성이던 건달패는 즉시 태도를 바꾸어 술사에게 굽신거렸다. 술사는 금전 이천 냥 짜리 전표를 상 위에 내려놓았다.

“치료비로 쓰세요.”

“···!? 가, 감사합니다···?”

아이는 기겁했다.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올 만치.

전표를 넘긴 술사는 전낭만 챙겨 기루를 빠져나왔다. 그가 떠난 후 일대 소란이 일었다.

“치료비로 금전을 이천 냥씩이나 준다고? 이거 가짜 아닌가?”

“여보게, 까막눈이라 글을 못 읽는다손 쳐도 도장은 알아볼 수 있잖은가.”

“금강전장의 인장은 주단 금씨가 요상한 주술을 부려서 시간에 따라 모양이 변한다네. 이런 건 꾸며 낼 수도 없어.”

“허면 진짜란 말인가? 참말로 금전 이천 냥을 주고 간 겐가?”

우르르 모여드는 인파와 멀어지는 술사. 둘 사이에서 방황하던 아이는 결국 술사를 쫓아갔다. 헥헥 숨이 차게 뛰어 간신히 따라잡은 아이가 술사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미쳤어?! 저딴 개자식들한테 금전 이천 냥을 주다니!”

푸른 멍으로 얼룩진 강아지 꼴로 왁왁 대는 아이를 향해 술사가 전낭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높이 떠오른 전낭을 가볍게 받아 든 아이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사이. 그 옆으로 스쳐 간 술사는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이번에는 뺏기지 말아요.”

버석하게 메마른, 건조한 어조의 당부를 남기고서.

가뭄 같은 그의 음색과 손안에 묵직하게 들어온 전낭. 잠시 머리가 굳은 듯 멀뚱히 있던 아이가 뒤늦게 술사를 쫓아갔다.

“저기, 고맙긴 한데···. 이거 왜 주는 거야?”

건달패가 얼마간 썼다 하나 전낭은 여직 두둑했다. 횡재한 셈 치고 이대로 떠나도 될 텐데. 어째선지 아이는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이유가 중요하나요?”

“중요하지. 이유 없는 선의는 없으니까.”

아무개는 지금 보고 듣는 이 순간이 꿈이라는 게 실로 안타까웠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배은망덕한 꼬마의 주둥이를 찰싹 때려 줬을 텐데.

“당신은··· 너는 이유 없는 악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이라 부르기엔 너무 어린 탓일까. 술사가 호칭을 바꿨다. 줄곧 길 위에서 살아 온 거지 꼬마는 술사의 물음에 긍정했다.

“당연하지? 세상은 이유 없는 악의로 가득한걸.”

“그럼 이유 없는 선의도 있겠죠.”

“······? 그런가?”

아이는 너무도 쉬이 설득당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 나아쁜 자식들한테 금전 이천 냥이나 줄 건 뭐야. 차라리 나한테 주지.”

요 녀석 뻔뻔한 것 보게.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나.

아무개는 좀도둑 꼬마의 안면 몰수에 감탄했다. 하나 술사는 아이의 두꺼운 낯짝에도 썩 놀라지 않고 대수롭잖게 넘겼다. 아이는 묵묵히 걸어가는 술사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가 시체처럼 누워 있던 산중의 더욱 깊은 곳으로.

그리하여 다다른 곳은 어느 으슥한 동굴이었다. 어째 눈에 익다 싶더니. 우뚝한 봉우리 사이로 대협곡이 언뜻 뵈는 그곳은, 아무개와 술사가 하룻밤을 보낸 자리였다.

“왜 거기로 가? 집 없어? 나도 집 없지만, 동굴에서 지내진 않아. 밤의 숲이 얼마나 위험한데!”

“맞아요. 위험하니까 너는 돌아가세요.”

밀어내는 소리에 아이가 울컥했다.

“어른이라고 애보다 덜 위험할 것 같아? 우리 둘 다 똑같거든?!”

“아뇨. 너랑 나는 달라요.”

술사는 적당히 널찍한 바위에 자리 잡고 누워서는 삿갓으로 얼굴을 뒤덮었다. 아이는 어처구니없어 했다. 처음 발견한 당시부터 낙엽에 덮여 시체처럼 누워 있었는데, 무얼 기대한 걸까. 아이가 돌아섰다.

“나 간다?”

“······.”

“정말 갈 거야?”

“······.”

“진짜 간다니까?!”

“······.”

끝까지 한 번을 붙잡지 않는다. 아이는 씩씩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화가 그득 차오른 채로 저자에 다다랐는데, 분위기가 묘했다. 평생 눈칫밥을 먹어 온 아이는 곧장 상황 파악에 나섰다. 이 미묘한 긴장감은 기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건달패가 흥청망청하던 기루에 주단 금씨의 완장을 찬 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기루에 악곡이 끊기고 손님이 물러갔다. 곱게 치장한 기녀들이 불안해하며 모여 앉고 누주(樓主)가 직접 나와 금씨 술사들을 상대했다. 아이는 벽 뒤에 숨어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엿들었다.

“금씨가 무슨 일로 예까지 왔대?”

“웬 건달 놈들이 금강전장에다가 금전 이천 냥을 내놓으라 했다네.”

“금전 이천 냥? 주화나 지폐로 이천 냥이 아니라, 참말로 금전인가?!”

“그래, 금전이 맞네. 한데 전표랍시고 가져온 게 같은 오대세가의 화양 율씨 명의였다네.”

“으잉? 화양 율씨면 반역도 아녀?”

아이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반역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하이고, 이 사람아. 나라가 망해 부렀는데 언제 적 반역 타령이야? 주화도 옛날만 못 하고 지폐는 한낱 종이 뭉치로 전락했거늘.”

“내가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화병이 나, 화병이! 망국에 반역이고 충성이고 무슨 소용일랑가.”

“애초에 어거지로 뒤집어씌운 거라던데? 반역을 명분 삼아 멸문시키려고.”

“조용히들 하게. 화양 율씨가 실제로 반역을 꾀했든, 억울하게 누명을 썼든, 그런 건 하등 중요치 않네. 나라님이랑 합심해서 율씨 핍박한 게 금씨인 거 잊었나?”

“우리네는 아이고, 그런가 보다- 맞장구나 쳐 주면 돼. 괜히 쓸데없는 소릴 해서 금씨 눈 밖에 나면, 주단에서 못 살어.”

아이의 귀를 통해 들은 아무개는 얼추 짐작했다. 이번 꿈은 이백여 년 전 연나라가 멸망한 후이리라고.

전국 각지에서 발발한 민란에 북방 이민족의 침략까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휘청이던 제국은, 다환 전역을 뒤흔든 대지진의 여파와 도성에 번져나간 도자역에 무너지고 말았다.

관이 힘을 잃자 사람들은 지방 유지와 토호를 중심으로 뭉쳤다. 오대세가는 각기 한 지역의 호족이자 대지진으로부터 해당 지역을 지켜 내었으므로. 자연스레 소왕(小王)인 양 행세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주단에서 금씨 일가는 왕족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으잉? 건달 놈들이 율씨네 전표 가져간 거랑 기루가 뭔 상관이여?”

“그놈들이 기루에서 놀아나던 중에 금전 이천 냥 짜리 전표를 받았다지 뭔가. 덕분에 금강전장이 뒤집어졌어. 대관절 뉘한테서 전표를 받았느냐고 인상착의부터 행적까지 먼지 털듯 털어 대는 중이라네.”

“어째서? 혹 율씨거든 잡아들이려고?”

잡아들이다니. 아이는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글쎄올시다. 반역도일 적이라면 또 모를까, 이제 와서 그런 이유로 잡아들일 수는 없지 않나?”

“모르는 소리! 지금이야말로 더더욱 잡아들여야지.”

“금씨네 종손이 율씨 잡으러 갔다 되레 당해서 죽어 부렀잖어. 자식놈 원수를 갚으려 들지 않겄어?”

“한데 화양 율씨가 폭삭 주저앉은 데에 금씨가 한몫 단단히 했자누? 서로서로 미워 죽을 지경인데, 하필 이때 율씨가 주단 한복판에 떡하니 족적을 남겼다? 뒤숭숭해서 어디 잠이나 들 수 있겠나 그려.”

그들은 정황상 전표의 주인이 화양 율씨이리라 여겼으나, 아무개는 선뜻 동조할 수 없었다. 율씨는 초목을 다루는 가문이므로.

아무개가 꿈과 현실을 통틀어 보아온 유랑술사는, 화양 율씨의 술법을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었다. 오히려 피를 이용해 대상을 추적하거나 신체 일부를 빌려주는 등의 술수는 주단 금씨의 혈조술(血操術)을 연상케 했다.

“기루를 뒤진다고 뭐가 나온다나? 건달 놈들은 어쩌고?”

“놈들이야 진작 금씨네가 잡아들였지. 듣자 하니 벌써 고신을 받았다던데.”

“하필 전표를 준 놈이 삿갓을 썼다던가? 해서 얼굴도 바로 본 작자가 없다나 봐.”

“웬 거지 꼬맹이랑 같이 있었다던데. 금씨가 고 녀석 찾겠다고 난리여.”

고신. 거지 꼬맹이.

벼락이라도 맞은 양 아이의 몸이 펄떡 뛰었다.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 아이는 들키지 않게 발소리를 죽이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올 적에는 몰랐으나, 갈 때가 되고 보니 길목에 금가 술사들이 종종 보였다. 시퍼렇게 날 선 눈으로 경계하며 조금이라도 수상하거든 우선 잡고 보는 것이 잘못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리겠다 싶었다. 아이는 작은 몸을 십분 활용하여 어른들은 모르는 좁은 골목과 개구멍, 담벼락 등을 넘어갔다.

무사히 도주에 성공하고 나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거지 꼬마라는 인적사항을 파악했다니 평소 지내던 다리 밑은 이미 점령당했을 터. 결국 갈 만한 곳이 한 군데밖에 남질 않았다.

“······나 왔어.”

유랑술사가 자리 잡은 산속 동굴. 큰소리치며 떠났던 곳으로 돌아온 아이는 아랫입술을 삐죽이며 동굴 입구를 툭툭 찼다. 한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설마 그새 떠난 걸까. 아이는 허겁지겁 동굴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술사는 여전히 바위에 누워 있었다. 삿갓으로 얼굴을 덮은 그대로.

“뭐야. 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해? 혹시 자?”

너른 바위 주위를 어슬렁거리자 술사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서 삿갓을 살짝 들쳤다. 작게 드러난 틈새로 술사의 눈길이 아이를 향했다.

“왜 왔어요.”

“왜긴. 어엄청 중요한 소식 있어서 알려 주러 왔지!”

아무개가 보기에 아이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온 게 아니었다. 소식을 알려 주러 왔다는 것도 술사의 물음에 급히 지어냈음이 틀림없다. 하나 어찌 됐든 중대한 정보라는 건 사실이니.

“저자에 금씨 술사들이 쫙 깔렸어. 건달 놈들이 금전 이천 냥 짜리 전표를 쓰려다가 걸렸대. 그거 화양 율씨 명의라며?”

“율씨 명의가 아니라, 화양 율씨 가문의 보증으로······.”

아이가 떠드는 소릴 정정해 주던 술사가 도중에 멈췄다. 귀찮은 모양이다.

“이제야 알았어. 날건달 놈들한테 금전 이천 냥 짜리 전표를 준 이유. 어차피 못 쓰는 거라서지? 화양 율씨랑 주단 금씨는 사이가 나쁘니까!”

잠시간 아이를 물끄러미 보던 술사가 삿갓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이 삿갓에 뒤덮여 사라졌다.

“여하간! 금씨가 전표의 원주인을 찾나 봐. 분위기 되게 살벌하다?”

술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흥분해 떠들던 아이도 열기가 한풀 꺾였다.

“장난 아니라니까? 막 온 거리에 금씨 술사들이 잔뜩이야! 형님도 위험하지 않아? 화양 율씨잖아!”

순간, 삿갓을 쥔 술사의 손끝이 짧게 경련했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개는 그가 반응한 것이 ‘형님’이라는 단어인지 ‘화양 율씨’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누가 그래요?”

어찌 됐든 드디어 술사가 제대로 된 응대를 했다. 비록 여전히 삿갓을 덮어쓰고 있으나, 그가 대답했다는 사실에 만족한 아이가 환히 웃었다.

“다들 그러던데? 나도 화양 율씨 명의의 전표라면, 당연 화양 율씨가 갖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거 형님 거잖아?”

“그 전표는 내 게 아니에요.”

“어? 그럼 전낭은? 설마 전낭도 형님 거 아니야?”

“대신 갖고 있었을 뿐이에요. 전낭 원주인이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생활감이 형편없거든요.”

“뭐야. 자기 것도 아닌 전낭이랑 전표를 남한테 줬어? 그래도 돼? 원주인 도련님이 화내지 않아?”

“화 못 내요.”

숨을 고르듯 잠시 말을 끊은 그가 조금 뒤이어서 덧붙였다.

“죽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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