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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60)화 (60/138)

60화

“주, 죽은 거 아니었···?”

이번 악몽 속 술사는 너무도 낯선 형색이었다.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술과 서늘한 눈매. 아직 덜 여문 골격에 앳된 티가 남은 얼굴임에도. 단지 웃음기가 가신 것만으로도. 자신이 알던 이가 맞나 싶을 만큼 상반된 분위기가 흘렀다.

늘 웃는 낯의 술사가 잠시 잠깐 안색을 굳힐 때와는 달랐다. 조금도 웃지 않는 그의 무표정에는 날 선 예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맞았어요?”

무심한 눈길로 아이를 훑은 술사가 툭 던지듯 말했다. 민망했던지 괜히 발끈한 아이가 언성을 높였다.

“아, 아니거든! 이건 그, 그냥··· 구른 거야!”

“옷에 발자국이 남아 있는데요.”

황급히 고개를 내려보니 꼬질꼬질한 옷 가운데에 큼직한 발자국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 내가 어디서 맞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그럼 상관있는 이야길 해 볼까요. 전낭은 어디 두고 오셨죠.”

아이가 움찔 굳었다.

“그 돈이면 몇 달은 부족함 없이 먹고 마실 수 있었을 텐데.”

삿갓 끈을 단단히 여민 술사가 매듭을 지은 후 다시 아이를 돌아보았다. 물기 어린 아이의 눈을 목도한 그가 물었다.

“뺏겼어요?”

“······.”

유구무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바스락, 마른 잎이 밟혀 부스러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고개 숙인 아이는 다가오는 기척에 바짝 굳었다. 술사가 손을 뻗어 올 적에는 아까 전 건달패가 떠오르기라도 한 듯 움츠러들었다.

술사의 손은 아이의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스친 후 멀어졌다. 긴장한 아이가 슬쩍 실눈을 뜨니 엄지와 검지 새로 무언가 문지르는 그가 보였다. 검게 굳은 피딱지다.

아이의 것은 아니다. 아마 팔뚝을 물어뜯긴 건달 놈의 피겠지. 머리에 붙은 걸 떼어 준 걸까? 괜히 지레 겁먹었다 싶었던지 아이가 으으, 하고 몸을 부들거렸다.

술사의 오른손에는 아이에게서 떼어 낸 피딱지가 부스러져 놓였다.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아무개는 보았다. 말라붙은 검붉은 가루들이 독특한 형태로 움직인 것을.

그 모양새를 가만 보던 술사가 걸음을 옮겼다. 좀도둑 꼬마애를 혼쭐낼 의사는 없는 듯싶어서. 아이는 안심하고 뒤를 따랐다.

“저기, 손···.”

아이가 조심스레 지적했다. 뒤늦게 제 손을 들여다본 술사가 아아, 하고 작게 탄식하더니 은장도를 잡아뽑았다. 푸욱, 장도가 뽑혀나가자 검게 굳은 피 사이로 붉은 선혈이 새로이 흘러나왔다.

아무개는 할 수만 있다면, 비명을 지르고픈 심정이었다. 술사는 제 손에서 피가 질척하게 흐르는데도 남의 일인 양 무심했다. 뽑아낸 은장도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그가 지혈도 않고 재차 이동했다.

그가 내던진 장도는 근처 나무 기둥에 퍼억! 박혀 들었다. 아이는 장도가 꽂힌 나무로 가 보았다. 뒤집힌 은장도가 멀쩡한 날은 두고 뭉툭한 손잡이를 나무 깊이 파묻었다.

“세상에···.”

아이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저리 대충 던져서 손잡이를 박아 버릴 완력이라면, 꼬마 도둑 따위는 진작 뼈째 바스러트릴 수도 있겠지.

아이는 은장도를 잡아 보았다. 술사의 전낭에 돈이 많았으니 이 장도도 값어치가 있으리라 여겼을 테지. 하지만 너무 깊이 박힌 탓에 좀처럼 뽑히질 않았다. 아무개라면 또 모를까, 이 아이에게는 무리였다. 결국 아이는 은장도를 포기했다.

멀어진 술사의 뒷모습은 어딘가 위태로운 듯했다. 아무개가 익히 아는 산뜻하고 가벼운 걸음걸이와는 달랐다. 분명 곧게 나아가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당장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산에서 내려간 술사는 길목 어귀에서 멈춰 섰다. 그는 반듯한 대로와 죽 늘어진 상가, 지나가는 인파를 망연히 응시했다.

“거기 서서 뭐해?”

뒤쫓아 온 아이의 물음에 상념에서 깨어난 술사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왜···.”

“······? 왜?”

“왜··· 여긴 멀쩡하지?”

물음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읊조림.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을 지극히 낯설게 보는 술사에게. 아이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무슨 말이 그래? 멀쩡해서 싫어?”

술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다른 지역은 모두 엉망인데···. 어째서, 여기만 멀쩡하지?”

그 순간 참 생뚱맞게도. 아무개는 새삼 눈앞의 술사가 어리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의 의문에서 날것의 감정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아무개가 아는 유랑술사는 말에 본심을 담지 않는다. 설혹 미미한 감정이 실렸다 해도 이는 술사가 타인에게 내보이고자 꾸며 낸 것일 뿐. 그의 감정은 지극히 정제되어 있었다.

“나도 귀동냥으로 들은 건데, 타지방은 대지진 탓에 야단났다며? 주단은 금씨 술사들 덕에 멀쩡하다더라. 이 지방 대신령이랑 접촉해서 지진을 막아 줬대.”

아이의 설명이 이어지자 술사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의 주위에 감돌던 날 선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에 아무개는 불안감을 느꼈으나, 아이는 괜찮아졌다 여긴 듯 묻지도 않은 걸 떠들어 댔다.

“반년 전인가? 다환 전역이 지진으로 난리 통이었을 때. 주단이랑 강암, 가온처럼 유명한 술사 종가가 있는 곳은 피해가 적었대. 그렇게 멀쩡하다 소문난 곳으로 난민이 몰려들어서 고생이 심하다던데, 주단 금씨는 돈이 많잖아? 난민이랑 거지랑 죄다 공사 인력으로 데려가서 여전히 살 만하다더라.”

아이는 술사가 보는 방향을 힐끔 곁눈질했다. 수줍게 미소 지으며 나란히 걸어가는 연인. 칭얼대는 아이 손에 주전부리를 쥐여 주는 부모. 소리 높여 호객하는 장사치. 뻐근한 어깨를 풀고 기지개를 켜는 일꾼들.

“······하.”

여느 때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하, 하하···.”

그들을 일별한 술사가 돌연 실소했다.

“하하, 하하하하···!”

허리를 굽히고 미친 듯이 웃었다. 실성한 듯 웃는 모양새에 아이가 반사적으로 주춤 물러섰다. 지나가던 행인들마저 힐끗 쳐다볼 만큼, 말 그대로 광소를 터트린 그가 돌연 웃음기를 거뒀다.

광적인 웃음이 사라진 낯은 공허했다.

아무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저런 눈을 한 이들을 안다. 마음이 죽어 버린 자들. 자기 자신을 포기한 이들이 내비치는 망연함이다.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내는 게 낫지. 저리 텅 비어 버린 눈은 좋지 않은 징조다.

얼마간 넋 놓은 듯 가만 있던 술사의 오른손이 움찔 떨렸다. 아이에게서 떼어 낸, 건달 놈의 핏가루를 쥐었던 손이다. 손바닥에 들러붙은 검붉은 흔적을 내려다본 술사가 비척비척 걸음을 내디뎠다.

아슬아슬 위태로운 형상으로 그가 향한 곳은, 주단에서 가장 큰 기루였다. 아무개는 도저히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술사님이 기루를?

“하여간 사내놈들이란!”

아이는 실망한 듯 툴툴대면서도 술사를 뒤쫓았다. 정문을 활짝 열어 둔 기루에선 잔치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이리 돈 지랄을 했을꼬. 그 낯짝이 궁금하여 둘러보던 중, 잔치 한복판에서 기녀를 희롱하는 사내들을 발견했다. 아까 전낭을 빼앗아 간 건달패였다.

그들은 갈취한 돈을 흥청망청 써 댔다. 고운 비단에 금사로 수놓은, 술사의 전낭을 보란 듯이 뽐내며.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설주에 달라붙은 아이가 핏발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술사는 무감한 눈길로 그 모두를 무심히 스쳤다. 이윽고 그가 잔치 한복판에 섰다.

“안녕하세요.”

낯선 이가 대뜸 인사를 건네자 건달들이 의아한 듯 돌아보았다. 술사는 그들을 향해 입꼬리만 간신히 끌어올린, 부러 꾸며 낸 게 뻔히 보이는 형식적인 미소를 띠었다.

“전낭을 찾으러 왔습니다.“

아무개에게는 자못 익숙한 웃음이기도 했다. 이제야 겨우 자신이 아는 술사가 되었건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술사가 손바닥의 핏가루를 툭툭 털어 냈다. 필시 저 건달의 피로 추적해 온 것일 터. 효용이 다 했으니 버리는 듯싶었다.

“저 아이에게 잠시 맡겨 뒀는데. 어떤 무뢰한이 빼앗아 갔다네요.”

객은 물론 점원과 기녀까지 모두 문가에서 얼쩡거리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건달패거리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시선을 교차한 그들은 미리 짜둔 양 입을 맞췄다.

“무슨 소릴 하는지 통 모르겠군. 이 전낭은 우리 큰형님 걸세.”

“저 더러운 꼬마한테 돈을 맡겨놨다고? 대관절 어느 멍청이가 그런 짓거릴 하나?”

“거지한테 전낭을 맡기다니.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편이 현명하겠군, 그래.”

건달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모르쇠로 일관할 셈인지 시치미를 떼는 모양에 아이의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하나 그보다 두려운 것은, 전염되듯 퍼져 나가는 은근한 조소였다. 이 자리의 모두가 술사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래요? 하면 전낭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 당연히 아시겠네요. 진짜 주인이라면.”

술사의 지적에 건달들이 재차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 무리 중에서도 유독 덩치가 남다른 큰형님이 기선을 제압하는 듯 타악-! 보란 듯 수저를 내려놓았다.

“자잘한 푼돈은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서. 잘 모르겠군.”

“게다가 큰형님은 예 당도하자마자 인심 써서 돈을 뿌리셨네. 그걸 어찌 다 기억하겠나?”

실제로 돈을 뿌린 모양인지 점원이며 기녀들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여론이 건달패 쪽으로 기울고 아이는 불안하여 눈치를 보았으나, 술사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한 푼까지 정확히 외라는 건 아닙니다. 대략적인 금액만 말씀해 주셔도 돼요.”

“쓰읍, 저놈 헛소리를 듣고 있자니 술맛이 떨어지네.”

“자신이 없으신가요? 저는 그 전낭에 얼마가 들었는지 아는데.”

술사의 언행이 과히 당당하여 건달패의 역성을 들어 주던 기녀는 물론 여타 손님들마저 혼돈될 지경이었다.

참말인가? 진정으로 저어 삿갓 쓴 작자의 전낭이렷다?

하기야 저 양아치 놈들, 왈패 놀음이나 하던 것들이 어디서 이리 큰돈이 났을꼬? 필시 남의 것을 가로챘을 테지.

건달패의 평소 행실이 대두되며 여론이 반전되려 하자 큰형님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래? 허면 그리 잘 아는 네놈이 먼저 지껄여 보거라. 이 전낭에 얼마가 들었는지.”

건달은 역으로 술사에게 질문을 돌렸다. 공격 주체가 뒤바뀌자 구경하는 시선들이 술사에게로 반전되었다. 모두가 삿갓을 쓴 객인에게서 나올 답을 기다리는 가운데. 기대에 부응하듯 술사가 입을 열었다.

“금전 이천 냥입니다.”

“······무어라?”

풉, 흐하하하하!

어불성설. 건달패거리는 물론 은근히 구경하던 손님에 점원, 심지어 기녀들까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파하하! 거 목소리를 들어 보니 젊은이 같은데, 벌써 실성했나?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너무 놀리지 마세요, 큰형님. 덕분에 실컷 웃었잖습니까?”

야유로 가득 찬 공간은 작은 아이에게 너무도 버거운 장소였다. 아이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듯 눈을 굴렸다.

“이봐, 너는 이 쬐끄만 전냥에 금전이 이천 냥 씩이나 들어갈 것 같으냐?”

큰형님이 전낭을 높이 들고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그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술사가 전낭을 가로챘다.

“이 자식이···!”

상대가 미처 성을 내기도 전에 술사는 전낭 겉면의 자수를 잡아 뜯었다. 찌이익⎯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뜯겨나간 자수 안쪽, 이중으로 덧댄 면 틈에서 술사가 무언가를 빼냈다. 작게 접힌 그것을 펴자 검은 글씨와 붉은 인주로 찍힌 도장이 보였다.

“주단 금씨가 운영하는 금강전장에서 발급한 전표입니다. 금전 이천 냥짜리죠.”

창졸간에 조롱이 사라졌다. 전낭에 숨겨진 공간과 그 안에 든 전표, 정확한 금액까지. 누가 보아도 술사가 전낭의 진정한 주인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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