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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54)화 (54/138)

54화

휙, 휙, 순식간에 풍광이 뒤바뀌었다. 술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연달아 축지했다. 그렇게 열 댓 번쯤 반복했을까.

“···흐억?!”

“히이익!”

유령마냥 홀연히 생겨난 그들을 목도한 무리가 소스라치며 물러났다.

“웬 놈이냐!”

“귀, 귀신? 귀신인가?!”

아무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부터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호리병 주둥이를 입안에 탈탈 털어 넣으려는 놈들. 꾀죄죄한 얼굴에 지저분한 수염과 산발한 머리. 가죽을 기워 만든 옷가지. 널판을 세워 만든 정문과 망루까지.

“여기가 협곡 마을일까요? 산적 소굴에 가까운 듯싶은데.”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애매한 어조로 읊조린 술사가 재차 이동했다. 여전히 그와 손을 맞잡고 있던 아무개도 얼결에 발을 뗐다.

저들은 느긋한 걸음을 옮기는 술사를 경계하면서도 막상 나설 용기는 없는 듯했다. 소란스런인사들이 마을 안쪽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짐승을 몰아가는 사냥개처럼, 몰려가는 인파를 뒤쫓자 옹기종기 모인 움집을 지나 초가집이 드문드문 보였다. 개중 기와집은 단 한 채뿐이었다.

“이장님!”

“여깁니다, 이장님!”

다급히 불려 온 이장은 어깨가 떡하니 벌어지고 콧등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선명한 중년인이었다. 허리께엔 큼직한 도끼까지 차고 있었다. 편견은 좋지 않으나, 솔직히 이장보다는 도적 두령에 어울리는 행색이었다.

두툼한 하완을 꼬아 팔짱을 낀 채로 아무개와 술사를 물끄러미 보던 이장이 입을 열었다.

“술사 나리 되시나?”

“네에, 저는 평범한 술사고 이분은 제 일행이세요.”

술사는 여직 잡고 있던 손을 자연스럽게 들어 올려 아무개를 소개했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맞잡은 손으로 와 닿았다. 아무개가 술사에게서 제 손을 빼내야 할지, 저들의 눈알을 뽑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이장이 먼저 등 돌렸다.

“외지인이 어인 일로 예까지 오셨는지 모르겠소만, 일단 드시게나.”

이장을 따라 도착한 곳은 널찍한 초가집이었다. 마을 형편을 대강 눈대중해 본 아무개는 예서 초가집을 거처 삼는 것이 대단한 권위임을 알아차렸다. 쥐꼬리만 한 권력은 호랑이에겐 별 볼 일 없으나, 쥐에게는 몹시 중요할 테니.

“보다시피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마땅히 드릴 게 없구려.”

이장은 물을 한 잔씩 내어주었다. 나무로 깎아 낸 투박한 잔에 미지근한 물이 담기었다. 술사는 하하 웃으며 의례적인 답을 돌려주었다.

“괜찮습니다. 무얼 얻어먹으려고 예까지 오진 않았으니 말예요.”

“하면 어인 일로 후미진 벽촌까지 걸음 하셨소.”

다환에선 술사가 오거들랑 부족한 살림에도 성심껏 대접하는 풍조가 있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한낱 필부로선 흉내 내지 못할 괴이한 권능을 부리는 자에 대한 공포가 하나요.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선심을 쓰면 훗날 언제고 은혜를 배로 돌려주리란 믿음이었다.

하여 도적 같은 이장이라 해도 술사 나리께는 함부로 굴지 못했다.

“꿈장수의 안내를 받아 왔습니다. 그에게 받을 물건이 있거든요.”

“꿈장수? 그게 누구요?”

이장은 생전 처음 들어 본 듯 의아한 기색이었다. 망할 꿈장수 놈이 또 사기를 친 걸까? 아무개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졌다.

“주민분들께선 못 느끼셨던 듯한데, 제게는 이 마을을 둘러싼 주술의 기운이 선명하게 보인답니다. 특히 기와집 부근에 술법의 잔흔이 가득하네요. 거기 누가 살고 계시나요?”

술사가 기와집을 언급한 순간. 이장의 시선이 번득였다. 찰나 스쳐 간 기색은 언뜻 놓치기 십상이었으나, 적의와 살의에 민감한 흉신은 그 짧은 경계를 분명히 인식했다.

“술법의 잔흔이라··· 그럴 법도 하구려. 그 기와집은 신령님께서 머무는 사당이니.”

신령님?

신령이 인간 마을에서,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인간처럼 지낸다고?

“그분께선 대대손손 우리 마을을 지켜 주시는, 살아 있는 신령(生神)이시지. 신성하고 고귀한 분이시기에 외지인에겐 함부로 소개할 수 없는⎯”

이장이 완곡한 거절을 채 끝맺기도 전. 콰앙···!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 덜컹대며 격하게 열렸다. 남의 집 문고리를 활짝 열어젖힌 이는 열댓 살 즈음의 소년이었다.

“영감님! 밖에서 술사 나리가 왔다면서?! 앗, 이분들이셔?”

이장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으나, 소년은 아랑곳 않았다. 술사와 아무개를 발견한 소년이 반색하며 와다다 들러붙었다.

“우와, 바깥사람들은 때깔부터 다르네!”

그리 감탄하는 소년은 정작 아무개가 오는 길에 본 주민 중 가장 멀끔했다. 의복도 정갈하게 갖추고 얼굴도 땟자국 없이 깨끗했으니.

소년은 신도 벗지 않고 무릎걸음으로 마루를 딛고 서 머리를 문지방 안으로 들이밀었다.

“술사님들. 우리 마을엔 어쩐 일로 왔어요? 얼마나 있을 예정인데요? 혹 주무시려거들랑 우리 집··· 신당으로 오세요!”

우다다다 쉼 없이 쏟아지는 말소리가 정신 사나웠다. 그 와중에도 아무개는 신당을 제집이라 칭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설마 저 시끄러운 꼬맹이가 신령은 아니겠지?

“신령님! 외지인을 그리 쉽게 들이시면···”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장이 언성을 높였으나, 술사가 먼저 미끼를 덥석 물었다. 아무개는 이 철딱서니 없는 애송이가 신령이라 불린 것에 놀랐고, 소년 신령이 환호하였으며, 이장의 얼굴은 험악하게 굳었다.

“이보시오, 술사 나리. 이리 멋대로 정해 버리면 곤란하지.”

“신당의 주인은 신령님 아닌가요?”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장에게 술사가 되물었다.

“신령님께서 권하시는데 어찌 이장님이 반대하실까요? 혹 이 마을에선 신령님보다 이장님의 권위가 높은 건가요? 대대손손 마을을 지켜 주는 살아 있는 신이자 신성하고 고귀한 분보다 더?”

말간 낯으로 청산유수마냥 막힘없이 내뱉는 말마디에 이장이 한층 미간을 구겼다.

“그런 뜻이 아니라······ 신령님께선 귀한 자리를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장례! 누이의 장례를 치른 지도 얼마 안 됐으니 걱정스러워 그런 게지.”

소년 신령은 콧방귀를 꼈다.

“뭐라는 거야? 나더러 누이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냉혈한이라더니. 냉혈한이 그딴 걸 신경이나 쓰겠어요?”

소년 신령은 무릎걸음으로 종종 물러났다. 마루에서 내려선 소년이 만세 하듯 두 팔을 활짝 폈다.

“영감님은 냅두고 갑시다, 술사님들! 우리 집··· 이 아니라, 신당으로!”

영감님은 마실 것 하나 제대로 안 주지? 나는 삼시 세끼 다 챙겨 줄 수 있어요!

소년 신령이 어깨를 한껏 펼치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아무개는 샐쭉한 눈초리로 녀석을 흘깃 보았다. 저런 게 신령이라고? 농담이지?

“그럼.”

술사는 이장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돌아 나왔다. 아무개는 흔한 목례조차 올리지 않고 냉큼 술사만 뒤쫓았다.

기와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신당으로 향하는 길. 소년 신령은 산책 나온 강아지마냥 폴짝대며 앞장섰다. 미심쩍은 구석 탓에 곱지 않은 시선이 된 아무개와 계속해서 은은한 미소를 띤 술사가 나란히 뒤따랐다.

“다 왔다!”

댓돌에 신을 아무렇게나 팽개친 소년이 냅다 정실로 들어갔다. 창호문을 열고 우당탕 뛰어드는 소년과 달리 술사의 신은 반듯하게 가지런히 놓였다. 아무개는 술사의 신 옆에 제 것을 남몰래 붙여 두고는 괜히 눈치를 보며 대청을 건넜다.

둘이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소년 신령이 창호문을 단단히 닫아걸었다. 그때, 나사 빠진 양 촐싹대던 소년의 표정이 돌연 뒤바뀌었다. 다른 사람마냥 순식간에 일변한 분위기에 아무개마저 조금 놀랐다.

“술사님들. 초면에 실례지만,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요?”

혹여 누가 들을까 걱정스러운 듯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소년이 입을 열었다.

“난 이 마을을 벗어나야 해요.”

소년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여기 있다간, 살해당하고 말 거야.”

“······잠깐. 잠시만요.”

자리 잡고 앉기도 전에 본론이 나오자 아무개와 술사는 어정쩡하게 선 채로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술사는 녀석의 횡설수설을 잠시 멈추었다.

“이 마을의 존귀한 신령님 아니신가요? 누가 당신을 살해한다는 건가요?”

“하, 당연히 빌어먹을 마을 놈들이죠. 누이는 물론 우리 가족을 전부 죽이고 이제 나만 남았으니까!”

소년의 일족은 피로 상처를 치유하는 권능이 있다 한다. 그 때문에 마을에서 변고가 생겼다 하면 피를 쥐어짜는 게 일상이라고.

“옛날 조상님들은 굉장했다던데. 어째 대를 이을수록 피의 효능이 떨어져서··· 근래 들어서는 누구 하나 치료하려거든 단단히 마음 먹어야 할 지경이 돼 버렸어요.”

“그렇군요.”

술사는 소년의 사연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겠어요. 한데 꿈장수는 어디 있나요?”

“꿈장수···? 그게 뭔데요?”

소년은 간곡한 사정설명이 그렇군요, 알겠어요, 두 마디로 넘어가 버리자 당혹하면서도 의문을 표했다.

“저희를 예까지 걸음 하게끔 한 당사자지요. 이 신당에 그가 주술을 쓴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어요.”

흘러내린 너울을 손등으로 걷어 올리던 술사의 눈동자가 소년을 향했다.

“특히 당신에게.”

그 시선을 고스란히 마주한 소년 신령이 흠칫했다.

“나, 난 몰라요. 꿈장수니 뭐니 하는 건··· 정말 모른다고요!”

술사가 가만히 응시하자 추궁이라 여긴 소년이 중언부언했다. 하나 술사는 소년의 항변에 그다지 귀 기울이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제 슬슬 나오지 않을래요?”

난데없는 술사의 물음에 소년은 맥락을 쫓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다. 통 영문을 모르겠는데도 술사가 저를 향해 손을 뻗자 지레 겁먹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술사의 손은 소년의 얼굴을 지나 허공을 스쳤다.

“언제까지 숨어계실 거예요.”

나긋한 어조로 재촉하자 소년의 옷깃에서 나비가 한 마리가 슬며시 빠져나왔다. 실눈을 뜨던 소년은 술사의 손마디에 사뿐 올라탄 나비를 보곤 눈을 화등잔처럼 키웠다.

“이, 무슨··· 왜 내 몸에서 나비가!?”

소년에게 내민 손을 도로 거둬들인 술사가 나비를 향해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인사는 생략할게요. 아무개 님께 드리기로 한 베갯잇은 어디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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