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술사님 종이접기 잘하는구나. 새로 알게 된 정보에 흡족해하며 아무개는 조심스레 물었다.
“술사님······ 돈 많아?”
먼 옛날 희대의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던 어느 위인은 비싼 종잇값 탓에 물을 찍어 질그릇과 항아리에 글 연습을 했다지. 하물며 이 땅은 이백여 년 간 전란을 겪었다. 장인들은 당장 입고 먹을 수 없는 종이를 포기했고, 명맥이 끊겨 그 가치는 더욱 귀해졌다.
그리 값비싼 저선생을 한낱 놀잇거리로 낭비하겠다니. 그의 재력이 심상치 않다 싶었다.
“부족하지는 않지만, 종이를 주로 다루는 게 부유해서는 아니에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듯 작게 침음한 술사가 입을 열었다.
“실은 제가 종이를 쓰는 작은 공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저자도 인근에서.”
아무리 값비싼 물품도 생산지에선 단가가 낮은 법이죠, 그가 덧붙였다. 과연 아무개에게는 생소한 지명이었으나 저자도(楮子島)는 이름에서부터 종이 생산지임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어··· 그럼, 백지 부적···도?”
삿갓과 함께 유랑술사를 대표하는 상징물. 하얀 부적을 떠올려 묻자 술사가 하하 웃었다.
“부적씩이나? 단순한 종이일 뿐이에요.”
충격적인 진상이 연달아 밝혀졌다.
“부적이란 모름지기 괴황지에 경면주사로 노랗고 붉어야지 않겠어요?”
환상이 한 겹 한 겹 벗겨졌다. 사대귀인이 친히 들려주는 야사는 전설의 신비를 박살 내고 지독한 현실성만 남기었다. 여린 새순에 맺힌 이슬만 먹을 줄 알았던 흠모의 대상이 국밥에 깍두기 국물 시원하게 말아먹는 걸 본 기분이랄까. 물론 아무개는 술사가 그리한다면 아이고 잘 먹는다 흐뭇해하며 한 그릇 더 시키겠지만, 비유하자면 그랬다.
술사는 늦게까지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달이 차고 기울어 가는 밤. 초롱불이 어둠을 밝히는 깊은 산중 동굴에서. 아무개는 제 팔을 베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삿갓으로 덮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곁에 선명했다.
아무개는 남은 손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정자세로 누운 술사의 가슴팍엔 느슨히 묶은 머리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소심한 손은 그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하고 머리끈 양 끝에 매달린 술 장식만 쭈뼛쭈뼛 만지작댔다. 수술의 실타래가 손가락 새로 부드러이 흐트러졌다.
생경한 감각이다. 황제의 유품을 수습해 길을 떠날 적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미래.
“조금··· 무서워.”
아무개는 태생적으로 불운의 속성을 지닌 흉신이다. 뽑기를 하면 무조건 꽝이고 운세를 점치면 열에 아홉은 대흉이 나온다. 아마 술사를 만나는 데 남은 평생의 운을 다 쓰지 않았을까.
하면 앞으로는 추락뿐일진대. 제게 주어질 불운이 대체 얼마나 될는지 가늠조차 힘겨웠다.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 아무개는 자신의 결말을 그려 보았다. 차라리 술사에게 토벌당하는 편이 그나마 괜찮은 축에 속했다.
최악은, 자신이 술사님을······
반사적으로 몸이 벌떡 뛰었다. 흉신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중얼중얼 되뇌었다.
괜찮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부러 잠도 안 자고 버티잖아. 내가 제정신인 이상, 술사님께 해를 끼칠 리 없어.
한참을 세뇌하듯 읊조린 끝에 겨우 마음을 다잡은 아무개가 두 손 위로 눈만 힐끔 내밀어 술사를 봤다.
당신은 무슨 심산일까. 대체 무얼 믿고 모두가 꺼리는 흉신을 책임지려는 건가.
문득 그를 깨우고 싶어졌다. 분명 그럴 계획은 없었는데도. 언제나처럼 웃음기 머금은 시선을 향해 묻고 싶었다. 막상 실제로 그의 눈을 마주하면, 머릿속이 하얘져서 본래 하려던 말도 잊고 한심하게 더듬거릴 테지만.
“······술사님.”
동굴 밖을 스쳐 가는 바람결에도 묻혀 버릴 작디작은 부름. 진심으로 깨우려는 게 아니다. 단지 그를 구성하는 발음마저 애틋하여, 이리 몰래 입술에 담아 볼 따름이다.
아무개는 술사가 벗어 둔 두루마기를 가져와 슬쩍 덮어 보았다. 이불에 비하면 얇디얇은 한 겹 옷자락일 뿐이거늘. 기이하게도 밤이 자아내는 서늘함이 한층 멀게 느껴졌다.
그렇게 장인이 평생에 걸쳐 만든 역작을 보듯 시간 감각마저 잃고 술사를 멍하니 응시했다. 찬찬히 그 생김을 머릿속에 새겨넣자니 불쑥 역작에 묻은 얼룩이 눈에 띄었다. 옷깃 사이로 뻗어 나온 목선과 툭 불거진 목울대를 기어가는 유선형의 생물. 문신처럼 피부에 스며든 뱀이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아무개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영물이라 보통 뱀과는 다른 걸까. 흉신이 곱지 않은 눈길로 지그시 보자 검은 몸체가 움찔 떨렸다. 쉭쉭 혀를 날름거리던 뱀이 방향을 틀어 옷깃 안으로 도로 숨었다.
저거 이름을 지으라고? 마음 같아선 동굴 밖에 내다 버리고픈데.
술사는 아무개가 뱀을 못마땅해하니 가까워지란 뜻으로 제안했을 테지. 하나 친하게 지내랍시고 어른들이 억지로 붙여 봐야 애들은 말을 듣지 않는 법. 아무개에게 저 뱀은 술사에게 들러붙은 기생충이나 다름없었다. 훗날 최후의 용으로 거듭나든 얼마나 대단한 영물로 성장하든. 까불지 못하도록 초장에 기선 제압할 필요만 느꼈다.
저게 술사님과 하루 십이시진 붙어 있으니 물리적으로 어찌할 수는 없고. 제게 주어진 작명권을 최대한 발휘할 수밖에 없으렷다. 아무개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구상하고자 머리를 굴렸다.
대협곡은 이백 년 전 다환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대지진의 끝 무렵 형성된 지대다.
감히 헤아리는 것조차 까마득한 태초부터 기나긴 잠에 빠져 있던 대지의 군주, 다화련이 깨어나자 온 땅의 대지가 요동쳤다. 인류의 역사가 쌓아 온 문화유산은 군주의 기지개 한 번에 무너져 버렸다.
이러한 지변에서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 몇 있었는데, 오대세가를 비롯한 술사 집단의 본거지였다. 그들은 해당 지방의 영주인 대신령과 접촉하여 지반을 안정화하는 데 힘썼다.
주단 금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주단에 지진 피해가 미치지 못하도록 훌륭히 막아 냈다. 그리하여 연쇄 지진이 막을 내리고 겨우 한숨 돌리나 싶을 즈음. 예고 없이 찾아온 재해가 대협곡이었다.
어느 날 불현듯. 멀쩡한 땅이 하루아침에 돌연 갈라진 것이다.
“길이 좁아요. 헛디디지 않게 조심하세요.”
거인이 단칼에 베어 낸 듯 수직으로 매끄럽게 떨어지는 대협곡 한 귀퉁이에서. 술사는 내려갈 길을 찾았다.
“술사님··· 이 근방은, 잘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협곡 인근으로 축지해 온 술사는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금방 경로를 잡았다. 무척 능숙하여 현지인이라 봐도 무관할 정도였다.
“맞아요. 잘 모르는데, 여기만 알아요. 매년 벌초하러 오거든요.”
벌초라. 여기에 무덤이 있었나?
폭이 좁은 길은 둘이 나란히 설 수도 없었다. 어지간한 사람은 길인 줄도 모를 만큼 심하게 가팔랐으니.
술사는 아무개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웅웅 매서운 바람이 협곡 틈새를 할퀴어 댈 때마다 그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설령 아무개가 발을 헛디디더라도 금방 잡을 수 있도록.
“거의 다 왔어요. 슬슬 보이겠네요.”
마침 아무개도 발견했다. 협곡 밑바닥을 가득 채운 무덤을.
무수한 봉분이 줄을 지어 좌우 양쪽으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지의 상흔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묘지는 스산하고 삭막했다. 길을 잘못 들어 실수로라도 찾는 이 없을 장소라 더욱 그랬다.
“······저거 다··· 술사님이 벌초해?”
“네에. 이 중 제가 아는 사람은 한 명뿐이지만, 어디 묻혔는지 몰라서요. 이왕 온 김에 다 정리해요.”
“어디 있는지··· 왜, 몰라···?”
매년 이 방대한 공동묘지를 벌초한다니. 보통 정성이 아니건만, 막상 추모 상대가 어디 묻혔는지 모른다고?
“하하. 그게 말이죠, 모조리 산산조각 나서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가 없더라고요?”
익숙한 그의 웃음소리가 협곡에 울려 퍼졌다. 감정이라곤 일말도 섞이지 않은 버석한 웃음이.
“예전에··· 제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한 아이에게 나뭇잎을 준 적이 있어요. 귀환술을 걸어서요.”
귀환술은 세간에 ‘소환부’라 불리는 부적의 토대가 되는 술법이다. 미리 지정한 특정 조건을 만족시킬 경우 시전자인 술사에게 되돌아오도록 하는.
“나뭇잎에 피가 묻은 채로 돌아왔더라고요. 혈흔에 남은 흔적으로 곧장 본체를 추적했는데, 이미 늦은 뒤였죠.”
피 묻은 나뭇잎을 따라온 술사가 발견한 것은, 협곡 바닥을 가득 채운 언덕이었다. 산산이 부서지고 조각난 도자역 환자들의 시신이 쌓여 이루어진.
“과거 이 근방에 도자역이 유행했던 모양이에요. 시신을 협곡에 버리고 내버려 뒀겠죠. 그 아이도 포함해서.”
도자역은 여타 역병과 달리 시신을 불에 태우지 않았다. 가마에 구워 내는 기물처럼, 어지간한 불길에는 되레 단단히 굳어 버렸으니. 괜히 도자역(陶瓷疫)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시신마다 전부··· 무덤을 만들어 준 거야···?”
“그러려고 했는데, 잘되진 않았어요. 협곡 위에서 떨어트린 건지. 파손이 극심해서 한 사람분의 몸을 온전히 끼워 맞추기도 어려웠거든요.”
산산이 부서져 조각조각 흩어진 사지와 몸통, 머리를 꿰어맞추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이리 많은 몸체가 뒤섞인 상황에선 더욱 그랬을 테지.
“결국, 머릿수만 간신히 맞췄죠.”
먼 옛날. 그의 손에서 지평선 너머 끝없이 이어지는 무덤 밭이 만들어졌다.
술사는 작은 주머니를 꺼내 무덤 앞에 풀어놓았다. 지난밤 미리 준비해 둔 색색의 다식이 담겨 있었다. 그가 추모하려는 이는 어린아이였으므로. 탁주를 대신해 달금한 주전부리를 챙긴 것이다.
“이만 갈까요.”
을씨년스러운 봉분 사이에서 술사가 손을 내밀었다. 아무개는 무수한 죽음을 뒤로 한 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