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유랑술사는 두 사람을 바닥에 고이 내려놓았다. 기절한 듯 미동도 없는 그들을 보며 금비환이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마른세수하며 이마부터 턱 언저리까지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손바닥으로 입 모양을 가린 채 작게 읊조렸다.
“너희들. 수호단 갖고 있지?”
지척의 소영과 재효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디작은 음성.
“수호단을 복용하면, 어디까지 축지할 수 있지?”
다행히도 소영과 재효는 눈치가 아주 없진 않았기에. 금비환을 향해 고개 돌려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티 내는 어리석은 짓은 않았다. 재효는 소영의 뒤에 완전히 숨고서 마찬가지로 작게 답했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소영이는 조금 무리해서 하루에 이삼 리는 갈 수 있으니까, 수호단 먹으면 오륙 리까지는 될걸?”
“좋아. 이따 적당한 때를 보아 수호단을 복용하고 축지술을 써라.”
수호단(守護丹). 술법의 근간이 되는, 술사의 영력을 한계 이상까지 끌어올려 주는 환단.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유랑술사와 대립할 시 승산이 통 뵈질 않았다. 우리네는 수호단을 복용하고도 오륙 리가 최대인 축지술을 저리 능수능란하게 써 대는 자를 어찌 당해 낸단 말인가. 교전 시 기본 중의 기본인, 뒤를 잡히지 않는 것부터 무리이거늘.
“최대한 멀리 가야 한다. 우리 쪽에서 가능한 한 발을 잡아 볼 테니까.”
“네가 희생을 하겠다고?”
미심쩍음을 숨기지 않는 재효의 반응에 금비환이 쓴웃음을 흘렸다.
“역귀를 풀어 주겠다는 자보다야 너희에게 족자를 넘기는 편이 옳지. 그런 기본적인 계산도 못 할 만큼 구제 불능은 아니다.”
정치질이야말로 머리가 받쳐 줄 때 가능한 거라고, 덧붙인 금비환이 여타 세가 술사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기필코 죽이겠다는 각오로 임해라!”
금비환이 먼저 상비한 수호단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다환의 술사가 수호단을 섭취한다는 것은, 배수진을 치겠다는 것과 진배없었다.
극단적인 행동에 놀라는 동료들에게, 금비환이 자신 있게 떠들었다.
“안심해라. 어차피 귀인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릴 죽이지 않을 테니. 오히려 정 위험하다 싶으면 도와줄걸?”
온 땅을 떠돌며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는 선인. 사대귀인 유랑술사. 그런 자가 한참 어린 후배들을 해칠 리 없다는 속내.
거기까지 읽어 낸 재효는, 자신 또한 유랑술사와 대적하는 처지임에도 절로 야유가 나와 버렸다.
“이야, 상대의 선의를 이용하자는 거야? 역시 정치질의 달인답네. 비열하기 짝이 없어.”
“······시끄러, 인마.”
금비환의 결의를 본 여타 술사들이 뒤따라 하나둘 단약을 삼켰다. 소영이 나직이 권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어차피 족자를 가지고 있는 건 저희입니다. 여러분이 빠지셔도 귀인께선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너··· 대체 날 뭐로 보는 거냐?”
금비환이 인상을 찡그렸다.
“난 술사다. 대체 어떤 술사가 눈앞에서 역귀 놈이 멀쩡히 활보하도록 내버려 둔단 말이냐?”
난생처음으로 금비환이 멋지게 보일 뻔했건만. 재효는 진정으로 안타까웠다. 족자를 뺏으려 수작만 부리지 않았어도 방금 한 말에 제법 감동했을 테니.
“지금 드신 거, 수호단이지요?”
유랑술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동시에 무리 외곽에 있던 율가의 술사가 나무줄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땅이 우글우글 일어나며 굵직한 나무뿌리가 의지를 가진 듯, 지면에서 솟구쳐오르더니 유랑술사를 향해 뻗어 나갔다.
“자주 복용하지 마세요. 몸에 좋지 않습니다.”
석씨 술사 여럿이 뛰쳐나갔다. 신체 일부를 석화하여 육탄전을 벌이는데 탁월한 그들은, 발을 디딘 자리마다 묵직한 흔적이 깊게 팼다.
“미각 후각이 둔해지고···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수호단의 원료 팔 할은 환초예요. 중독 위험이 있지요.”
돌처럼 단단해진 주먹이, 팔이, 다리가, 앞뒤로 서슴없이 날아들었다. 유랑술사는 지척에 들이닥친 나무뿌리를 손끝으로 튕겼다. 딱밤을 놓는 듯 가벼운 손짓에 나무뿌리가 휘청이며 튀어 나가더니 석가의 술사들을 도로 후려쳤다.
“효과랄 것도 그다지 없잖아요? 술사가 본래 기량 이상의 힘을 강제로 끌어낼 시 동반되는 통증을 마비시킬 뿐. 단약의 효능이 다 하면 뒤늦게 고통이 찾아와 훨씬 힘들어지잖아요.”
“누가 그걸 몰라서 먹어?! 요?!”
이쪽에선 죽자사자 덤비는데 여유롭게 훈수나 두는 모습이 맘에 안 들어 대들었으나, 솔직히 재효는 몰랐다.
수호단이 몸에 좋지 않다, 부작용이 있다, 한 번 섭취하면 며칠은 꼼짝없이 정양해야 하므로 최후의 최후에나 마지막 수단으로 쓴다, 그 정도로 알 뿐. 미각과 후각이 둔해지는 증상이나 원료가 환초라는 것 등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아마 다른 세가 술사들도 마찬가지일 테지.
“뭣들하고 있어! 계속 가만히 있을 거냐?!”
금비환의 선동에 망설이던 몇몇이 마저 수호단을 삼켰다. 먼저 앞장서 달려가는 금비환을 따라 남은 술사들이 덩달아 함성을 지르며 나아갔다. 유랑술사를 둘러싼 원형 포위진이 단숨에 좁혀지고, 삿갓이 무수한 인영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즈음.
“재효!”
주머니를 열어 수호단을 삼킨 소영이 외쳐 불렀다. 염재효는 단단한 팔목을 붙잡고 곧장 달라붙었다. 직후 소영이 축지를 시전했다.
시야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산이 파도치듯 출렁였다.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운 것이 꼭 온종일 마차를 타고 멀미하는 듯싶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낯선 땅을 밟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소영이 휘청이자 급히 부축해 주며 재효가 주변을 살폈다.
“여긴 어디야?”
“모르겠다. 다급하여 아무 곳이나 적당히 이동했으니··· 축지술로 이리 멀리 이동한 적은 처음이라 속이 안 좋다.”
영력을 과히 소모해 버린 석소영이 메슥거리는 낯으로 나무에 기대섰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효가 소영을 다독였다.
“조금만 쉬다 가자. 이만큼 왔으니 유랑술사도 당장은 못 찾을,”
“한 번에 육 리나 넘어오셨네요.”
“······!”
소영이 몸을 기댄 바로 그 나무 뒤편에서. 삿갓이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소영과 재효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몸을 뺐다.
“여, 여긴 어찌···!”
어버버하며 삿대질하는 재효에게 해사한 미소를 지어 준 술사가 나무 옆으로 돌아 나왔다.
“축지술의 원리는 ‘땅을 접어 거리를 줄이는 것’이지요. 접힌 흔적을 토대로 도착 지점을 예측할 수 있답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재효가 기겁하여 소리쳤다. 기진맥진하던 소영이 벌떡 일어났다.
“땅이 접힌 흔적을 읽어 내는 것도, 이를 통해 축지술의 도착점을 추정할 수 있다는 것도. 모두 금시초문입니다만.”
“이번 일로 두 분의 견식이 한층 넓어지겠네요.”
염재효는 정말이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축지를 시전한 장본인인 소영조차 이곳이 어디인가 알지 못했다. 한데 제삼자가 정확히 알고 추적해 왔다고?
타인이 전개한 축지술의 도착 지점을 간파하는 역량이라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경지에 얼이 빠졌다. 그저 눈앞의 상대가, 자신의 인지 범위 너머에 자리한 초월적 존재임만 뼈저리게 사무칠 뿐.
“···남겨진 사람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석소영이 무겁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금비환과 여타 술사들이 유랑술사를 뒤덮는 것이었으므로. 한데 당사자가 시간차도 없이 너무 빨리 추격해 왔으니 걱정이 아니 될 리가.
“아, 그분들은···”
유랑술사는 말을 할 듯 말 듯 애를 태우더니 생긋 웃었다.
“궁금하면 직접 보시겠어요?”
“무, 슨···!”
두 장의 백지 부적이 날아들어 소영과 재효에게 각각 달라붙었다. 동시에 다시금 시야가 뒤집혔다. 재효는 어지럼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어처구니없어하는 금비환이 보였다.
돌연 사라진 유랑술사 탓에 우왕좌왕하던 찰나. 여태 남아 있는 소영과 재효를 발견한 금비환이 기가 막힌다는 듯 토로했다.
“내 말은 귓등으로 들었나? 축지술로 도망가라 했을 텐데.”
“아니, 우리는 갔거든? 갔는데···.”
가자마자 도로 잡혀 온 바람에 도망갔던 줄도 모른다. 어이가 없어 대꾸조차 나오질 않았다.
“제가 모셔왔어요.”
타앗. 처음 던져진 거대 바위 위에 올라선 유랑술사가 대신하여 답했다.
“실은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이길 기다렸거든요.”
그 말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인가?
소영과 재효는 무의식중에 시선을 교환했다. 둘 중 누구도 유랑술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기껏 기다려놓고 이제 와 흩어지게 둘 수는 없지요.”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하였으나, 듣는 이들은 소름이 돋았다. 금비환은 어지러운 전열을 재정비하며 뇌까렸다.
“저희를 어찌하실 요량입니까.”
“호명성에서부터 줄곧 쫓아오시기에, 그만두시라 권할까 했지요.”
삿갓 끄트머리를 매만지며 그가 하오나, 하고 뒷말을 이었다.
“후배님들께선 그럴 의사가 없으신 듯하니. 참 곤란하네요, 그렇죠?”
쩌적, 그가 서 있던 바위가 갈라졌다. 맨주먹으로 바위를 산산이 조각낸 석가의 술사는 또다시 사라진 유랑술사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쩔 수 없네요. 각자 할 일을 합시다.”
그의 뒷말이 이어진 곳은, 세가 술사들이 진을 친 한가운데였다.
모두가 소스라치며 일제히 물러났다. 유랑술사는 그들의 중앙에 서서 찬찬히 둘러보았다.
“귀하들은 제게서 족자를 지키시고⎯”
염재효가 손을 내젓자 등에 멘 통이 달그락거리며 화살이 절로 튀어나왔다. 세 대의 화살이 바람을 타고 가파르게 쏘아져 나갔다.
“⎯저는, 그분을 꺼내드리지요.”
파바박! 화살촉이 빈 땅에 꽂히는 동시에 염재효의 등 뒤에서 유랑술사가 나타났다. 그의 길고 곧은 손이 재효의 얼굴 옆으로 스윽 뻗어 나왔다. 족자를 꺼내 갈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