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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15)화 (15/138)

15화

“허면 귀인께선 어찌하시려는 겁니까?”

소영의 물음에 유랑술사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우선은 거기 족자에 갇힌 분 말씀을 들어봐야지 않을까요?”

“역귀랑 대화를 하자고?! 미쳤,”

상소리를 뱉으려는 재효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은 소영은 비죽 튀어나온 녀석을 꾹꾹 눌러 도로 숨긴 후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미숙하나마 후학이 한 말씀 올립니다. 설령 말씀하신 대로 역귀가 아니라 한들, 이처럼 원기가 강한 것이 함부로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습니다.”

여타 세가 술사들은 소영과 재효의 만행에 경악했다. 유랑술사에 비하면 어리다 못해 핏덩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이, 배분을 세는 것조차 까마득한 대선배께 말대꾸하였으니.

하나 두 사람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양순한 후배였다면, 애당초 역귀를 추격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대선배고 뭐고 그르다 싶으면 사정없이 들이박는 둘을 향해 유랑술사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원기가 강하여 마땅히 축출해야 할 악령이란, 대개 자아를 잃고 공격성만 남아 무차별적인 파괴를 일삼지요.”

후배님이 보기엔 어떠셨나요?

“그분께서 마땅히 축출해야 할 악령으로 여겨지던가요?”

소영은 말문이 막혔다. 상대의 질문에 곧장 답할 만큼, 진득하게 관찰해 본 바 없으므로. 소영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역귀에겐 자아가 있나?

있다. 역귀는 재효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했더랬다. 비록 단 한마디뿐이었으나.

역귀가 무차별적인 파괴를 일삼았나?

아니다. 역귀는 선공을 피하며 반격하였다.

······그것이 역귀가 맞기는 한가?

처음에는 확신했다. 하나 유랑술사가 의심의 싹을 틔웠고, 고뇌가 깊어질수록 소영은 부평초처럼 흔들렸다.

“알 게 뭐야! 그놈의 지독한 원기가 십 리 밖에서도 보일 판인데! ······요.”

그때 매미처럼 들러붙은 재효가 끼어들었다.

“사특한 것도 정도껏이어야 재고 따질 겨를이 있지. 이쯤 되면 우선은 잡아놓고 봐야 할 거 아니냐고! ······요.”

“어쩌면 훗날 저지를지도 모르는 악행의 가능성 때문에. 현시점에서 무고한 이를 봉인하자는 말씀이신가요?”

“그, 그건··· 평범한 인간이 아니잖아! ···요. 딱 봐도 어마무시하게 삿된 것을. 당연 일반 평민들과 달리 취급해야지! ······요.”

“즉,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특성을 기준으로 선악을 분류하고 격리하자는 뜻인가요?”

“······.”

말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궁색해지는 것 같아, 재효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상하지. 분명 틀린 말은 아닐진대, 유랑술사의 입을 빌어 요약된 제 주장은 어딘가 불합리한 듯싶었다.

“그럼 아니 됩니까?”

그때. 유랑술사의 난입에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금비환이 나섰다.

“사람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는 것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싹을 밟아놔야지 않겠습니까.”

유랑술사는 금비환을 돌아보더니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은 절 의심하셨지요. 오해는 풀리셨나요?”

“아침부터 온 성이 떠들썩하더군요. 장군 댁 아씨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합니다. 역시 유랑술사는 다르다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아마 함 장군 측에서 작정하고 소문을 퍼트렸으리라. 유랑술사는 딱히 아씨를 고치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이 하나 더 죽어 나갔을 뿐이오나, 사정 모르는 이들에겐 아씨가 하루아침에 멀쩡해진 듯 보일 테니.

아씨와 직접 말을 섞어 보기 전까지. 잠시간의 착각에 불과하지만.

“실력을 의심한 것은 저희 불찰입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금비환은 하지만, 하고 단서를 달았다.

“저희가 귀인을 의심하게 된 원인. 그 끔찍한 귀기의 진정한 주인을 도로 풀어 줄 수는 없습니다.”

금비환의 주장을 들으며 소영은 생각했다. 족자에 봉인한 것은, 원기라는 시퍼런 칼을 품은 자였다. 아직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하여 가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화를 시도하든, 실체와 의도를 캐내든, 우선 제압하여 칼부터 빼앗는 것이 순서일 터. 내심으로 결론을 지은 소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역시 족자는 넘겨드릴 수 없겠습니다. 역귀인지 혹은 다른 악령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가문에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가문이라면, 고작 두 분이 ‘도자역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역귀’를 쫓게 만든 그 가문 말씀이신가요.”

재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제로 상황을 알리고 본가에 지원을 요청했을 때. 더 나서지 말고 귀가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더랬다. 세가에선 이번 일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역귀란 들이는 수고에 비해 위험이 컸으므로.

하여 두 사람은 어른들의 뜻을 거스르고 단독행동으로 이곳까지 추적해 왔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역시 그랬군요.”

유랑술사는 익히 짐작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납득했다.

“그럼, 족자를 제게 주시겠어요?”

음?

“왜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요?”

“봉인을 풀어 줄 수 없고, 본가 어른들께 도움을 청하겠다는 귀하의 뜻은 이해합니다.”

“한데 어찌하여···.”

“이제 막 수행 길에 오른 어린 후배님들께 무거운 짐을 떠넘긴 가문을 신뢰할 수가 없네요.”

유랑술사가 생긋 웃었다.

“······는 핑계고, 사실 제가 그분께 빚이 있어요.”

빚? 대체 역귀에게 빚질 일이 무어 있단 말인가.

후배들이 얼굴에 서린 불신의 빛에 유랑술사가 좀 더 길게 설명했다.

“그분. 눈이 안 보이셨죠? 제 탓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니까,”

술사가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백지 부적이 끼워져 있었다.

“제게는 그분의 시력이 돌아올 때까지.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어요.”

“저희와 싸우겠다는 뜻입니까.”

경계 섞인 소영의 물음에 유랑술사는 설마요,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되기 전에 후배님들께서 양보해 주십사 청을 드리는 게지요.”

“이런 미친,”

소영은 다시 한번 재효의 입을 막았다. 강직한 낯이 단단히 굳었다.

유랑술사의 말이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 하지만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다.

이는 필연적으로 무력사태를 야기한다. 하나 저자가 진실로 사대귀인 중 일인인 유랑술사라면,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역귀를 빼앗긴다.

“유랑술사께선 온 땅을 유람하며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는 의인이라 들었습니다. 기껏 봉인한 역귀를 강탈하는 것이 중생을 돕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한다는 게 감정에 호소하는 것뿐이라. 소영은 제 입으로 꺼내고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유랑술사 또한 곤란한 웃음을 흘렸다.

“소문이 과장되었네요.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대단한 인격자라도 된 것 같잖아요? 오가는 길에 힘들어 뵈는 분이 계시면 살짝 도와드린 것뿐일진대.”

남들도 다 하는 수준이라 겸양한 그가 손끝으로 재효를 가리켰다.

“지금 곤경에 처한 건, 귀하들보다는 족자에 갇힌 분인 듯싶네요.”

“듣자 듣자 하니 귀인께선 자꾸 역귀를 사람 취급하시는 것 같습니다?”

염재효가 역정을 냈다.

“어찌하여 자꾸 역귀의 편을 드시는지요?”

“일단, 저는 그분이 역귀가 아니리라 말씀드렸어요.”

저벅, 유랑술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타닷, 다른 술사들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또, 저는 그분께 빚이 있지요.”

유랑술사가 재차 한 걸음 내디뎠다. 다른 술사들은 네 걸음을 물러났다.

“지극히 사사로운 이유로. 귀하와 맞설 수밖에 없네요.”

타협의 여지가 없다. 남은 건 무력행사밖에.

“말로 드리는 권유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삿갓 그늘이 턱밑까지 드리워졌다.

“족자를 넘겨주시겠어요?”

“···⎯!”

멀찍이 떨어져 있던 상대의 음성이 지척에서 들렸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신기루처럼 홀연히 나타난 유랑술사의 형상에 소영이 미처 대응할 겨를도 없이 굳어 버린 찰나. 온기를 머금은 손이 뒤쪽에서 어깨를 잡아챘다.

“소영아!”

재효의 다급한 부름. 곧이어 어두운 그림자가 그들 머리 위로 덮쳐들었다.

쿠우웅⎯ 콰광!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운석처럼 날아들었다. 자욱한 흙먼지에 밭은 숨을 내뱉으며 염재효는 제 위에 엎드린 소영을 톡톡 두드렸다.

“어우, 소영아. 괜찮아?”

석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쉼 없이 기침하며 얼굴 언저리로 손부채질하던 재효는 여타 세가 술사들에게 삿대질했다.

“야 이 미친놈아! 우리까지 뒤질 뻔했잖아!”

“어차피 소영이가 석화해서 지켜 줄 텐데. 무슨 걱정이야.”

살과 근육으로 이루어진 신체가 단단하게 굳어 석상처럼 변하는 기술. 강암 석씨의 비전 술법 중 하나인 석화(石化)였다. 실제로 소영은 몸을 석화시킨 후 재효의 위에 웅크려 뒤덮었더랬다.

“해서, 귀인께선 어찌 되셨지?”

금비환은 왁왁 대거리하는 염재효를 무시하고 바위 근처로 다가갔다. 하나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바위에 깔렸다면 핏자국이라도 남아야 할진대.

“어차피 유랑술사가 이런 단순 공격에 당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만, 아예 없었던 듯 증발해 버리니 당황스럽군.”

겨우 정신을 차린 염재효가 으잉? 하고 괴상한 소릴 냈다.

“그러게? 어디 가셨대?”

“찾으셨나요?”

“으아아악!”

뒤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또다시 기겁한 재효가 허우적거렸다. 유랑술사가 하하, 나직이 웃었다.

“저런, 놀라셨나요.”

“그럼 이 상황에서 누가 안 놀라겠···!”

후다닥 튀어 소영의 뒤에 숨은 재효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바락바락 소리치던 중 흠칫하며 멈추었다. 좌측 옆구리에 하나, 오른쪽 어깨에 또 하나. 축 늘어진 사람 둘을 짊어진 유랑술사의 모습에.

“금비우! 석소건!”

금비환이 정신 놓은 두 사람을 외쳐 불렀다. 원거리 공격을 위해 미리 매복시켜 둔 녀석들로, 좀 전에 날아든 바윗덩어리도 저들의 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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