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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01화 (101/124)

101화

“이거 들고 따라오쇼.”

촌장은 연진에게 작은 단지를 들게 하고 뒷짐을 진 채로 성큼성큼 길을 나섰다. 꽤 정정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찰랑거리는 소리와 약간의 냄새로 연진은 단지 안에 든 것이 술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어딜 가는 줄 아시오.”

촌장의 말은 질문을 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목적지를 몰랐기에 어디쯤 와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니 답을 할 수도 없다.

어차피 촌장은 답을 바라고 꺼낸 말이 아닐 거다.

“내 어머니, 내 처, 내 아들의 무덤에 가는 길이라오.”

“그렇군요.”

연진은 무던하게 반응했다. 척 보아도 홀로 사는 사람 같았고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놀랍지 않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여기서 어떤 반응을 내보여도 촌장에게는 상처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동정이나 연민, 그런 것이 가지는 양날을 아는 그였다. 그러니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차분한 반응이 어딘가 우스웠는지 촌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선해월이 제자 아니랄까 봐 무심하구먼.”

“…….”

그 후로 촌장은 스무 걸음에 한 번꼴로 연진에게 말을 붙였다.

“퇴마사가 그리 떳떳한 업은 아닌데 어찌해서 그놈 밑으로 들어간 게요?”

“사부를 따르기로 한 건 제 선택입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젊은 혈기를 따라 보는 것도 좋지.”

연진은 촌장의 말이 묘하게 거슬렸지만 구태여 반박하지는 않았다.

“세상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가끔씩 그놈한테 찾아가서 퇴마술을 알려달라는 작자들이 있었는데 그놈이 뭐라 했는지 아시오?”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저를 따른다면 언제든 신궁에 의해 모가지가 잘릴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지켜 줄 생각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그리 쏘아붙였더이다. 그러니 제자 삼아 달라는 사람이 남을 턱이 있나.”

과연 맞는 얘기였다.

“암암리에 퍼져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국법으로 허용된 것은 아닌 업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단 소리오.”

불편한 진실을 담은 조언이 귀에 박혔다. 공공연히 눈감아 주는 형국이라고는 하나 어쨌거나 이 일은 위법이다. 언제든 제거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세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영력을 다루는 술사들이 대거 숙청당한 기록도 있다.

그들이 하늘의 힘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나라가 도탄에 빠진 것이라고.

지금 보면 참으로 억지스러운 이유였다.

어쨌거나 그 위험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해월을 따르고 싶었고 그 손을 잡고 싶었을 뿐이다.

해월은 그런 위험으로부터 저를 지켜 줄 수 있다는 각오를 했을 테니, 그 각오를 믿었다.

그리고 저 역시 해월을 지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촌장은 여상한 어투로 해월에 관한 얘기를 계속했다. 연진은 그것을 묵묵히 들었다.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터놓고 말해서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놈은 방랑벽이라도 있는지 도무지 한곳에 머물지를 못해. 사람 상대하는 것은 능숙해도 사람 사귀는 데는 서투르고. 그래서 공자를 제자로 두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여.”

“하련방의 송 행수라는 분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으이? 송수련을 만났소?”

“예, 오는 길에 하련방에 들렀습니다.”

“…어때 보였는가. 송수련이는.”

“건강해 보였습니다.”

연진은 송 행수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준으로 얘기했다. 괜한 얘기를 보태지는 않았다.

촌장은 연진의 말에 설핏 안심하는 듯했다.

“나도 그네들과 같은 고향 출신이라오. 지금은 산 하나 끼고 있는 이 마을에서 촌장 노릇을 하지만… 도저히 그곳에서는 더 살 수가 없었어. 여기도 별반 다른 것은 없지만 그래도 거긴 내게 정말 살 곳이 못 돼.”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거 아시오? 이런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평생 이 근방을 벗어날 수가 없다오. 국경 쪽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적어지면 방비가 허술해진다고 못 나가게 막거든.”

“…몰랐습니다.”

정녕 모르던 사실이었다. 통행을 엄격하게 제한하여 관리 감독한다는 것은 알았다만 아예 평생을 다른 지방으로 갈 수 없게 막는 줄이야.

“제도 쪽 출신이니 당연히 모르지. 알 필요도 없구먼.”

촌장은 연진을 책망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야반도주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여. 해서 젊은 놈들은 죄다 도망을 갔소.”

도망간 사람들은 죽을 때 죽더라도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허면 사부는 어째서 방랑 생활을 하실 수 있었던 겁니까.”

해월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고 했다. 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 의문에 촌장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걸 몰라 묻소? 자사(刺史, 지방관리)를 겁박했지.”

“…….”

한발 늦게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싶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만 들었으니 말이다.

이윽고 촌장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자, 도착했소.”

그들의 눈앞에는 세 개의 봉분이 있었다.

촌장은 씁쓸한 눈으로 그것들을 보더니, 눈에 띄는 잡초를 우악스럽게 뽑아 던졌다.

연진은 천천히 단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기까지 함께 왔으니 도와줄 요량인 것이다.

하지만 촌장은 손을 저었다. 그리고 단지를 열어 그 안에 띄워져 있는 표주박으로 술을 떠서 봉분 위에 뿌렸다.

알싸한 물방울들이 빛바랜 봉분 위에 비처럼 쏟아졌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촌장은 그 자리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누가 보면 자기 집 이부자리인 줄 알 것이다.

“여독을 풀기도 전에 데려와 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공자도 좀 앉아서 쉬시오.”

“예.”

연진은 딱히 마다하지 않았다.

촌장은 단지에 있던 술을 한 바가지 퍼서 마신 뒤 표주박을 탈탈 털었다.

“그래도 그놈이 제법 공자를 아끼는 모양이오.”

“압니다.”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촌장은 벙찐 얼굴이 되었다가 몇 번을 소리를 내 크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럼 다 안다니까 내 말 좀 보태겠소.”

촌장의 얼굴에 이렇다 할 표정이 없어지자 그는 조금 핼쑥해 보였다.

“저기 있는 내 어머니를 죽인 것도 선해월이 짓이오.”

***

때는 지독한 병마가 백난국 전역을 휩쓸었을 무렵이었다. 제도에서도 의원이 모자라 난리인데 지방까지 의원이 올 리는 없었고 외면받은 백성들은 무력하게 죽어 갔다.

그리고 단곡 역시 병마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집집마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수용장에 가둬졌고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제대로 된 치료도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생명을 잃어 갔다.

역병이 더 도는 것을 막기 위해 시신마저 구덩이에 모아 놓고 한 번에 태웠다.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무덤마저 만들 수 없는 비참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까.

하여 사람들은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이 병에 걸렸단 사실을 쉬쉬했다.

당시 촌장도 그의 어머니가 병에 걸렸단 사실을 숨겼다.

어머니가 병으로 힘겨워하는 것을 겨우겨우 구한 약재로 다스리고 어떻게든 살려 내려 노력했다.

당시 이미 중년의 나이였는데도 철없는 소년처럼 어머니를 잃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약재를 구해 달여 마시게 하고 정성으로 보살폈다.

하나 흉년과 역병, 연이은 재난을 감당하기도 벅차서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게 화근이었을까.

‘아들아….’

어머니는 초췌한 몰골로 가느다랗게 숨 쉬고 있었다.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네 처자식을 잘 돌보려무나.’

그 눈빛은 삶의 의지를 잃은 무력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제 말을 하는 것도 힘겨워서 거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음성으로만 목소리를 냈다.

고개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소리였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곧 치유술을 쓸 수 있는 자가 집에 올 것입니다.’

‘…선 씨네 아들 말이냐.’

선학경의 아들, 선해월은 마을 내에서 별종 취급을 받았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냉정하고 꺼림직한 행동을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지난겨울에 죽은 송 씨도 그 녀석이 죽였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하지만 다 죽게 된 마당에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 아이가 치유술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 역시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전까지는 있는 듯 없는 듯한 그 아이를 외면하고 가끔은 이상한 것을 보듯 쳐다본 주제에, 추하게도 말이다.

다행히 그 아이는 자신을 향한 제안들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 애가 치유술을 행한 환자들은 모두 상태가 호전되어 생활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분명 제 어머니에게도 차도가 있을 것이다.

그때, 기다렸던 손님이 왔다.

‘안녕하세요.’

초가삼간으로 발을 들인 아이는 그의 명치쯤 오는 정도의 키에 또래보다 체구가 조금 왜소했다.

덧붙여 그 애는 어디에서나 눈에 띌 법한 곱다란 외양을 가지기도 했다. 눈빛이 차분하고 고요해서 얼핏 어른보다도 더 어른 같은 분위기가 났다.

순간 그 아이가 자아내는 기묘한 공기에 짓눌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 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마저도 그 나이 때의 소년답지 않은 의식적인 미소처럼 느껴졌다. 시전에서 팔던 탈에 조각되어 있는 그런 미소 같았다.

‘아저씨네 어머님께서 위중하시다고 했지요. 한번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능숙한 의원 같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뒤이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는 그의 어머니의 상태를 살피고 부드럽게 대화했다. 다만 그 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상태를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였겠거니 하고 넘겼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 녀석은 날마다 찾아왔다.

이 집뿐만 아니라 각 처에서 그 녀석의 아비와 그 녀석을 찾아 댄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힘에 부칠 것이 당연한데 지친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처럼 그 애는 웃고 다녔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듯했다.

혹자는 그 웃음에 안도했을 것이다. 어쩌면 구세주를 보듯 바라보았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이함을 느꼈다.

며칠이 지나고 어머니의 상태가 호전되자 그 애를 그런 식으로 판단했던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었다. 기적이 찾아왔다고. 그 애는 꺼림직한 소년이 아니라 정녕 구세주였노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추한 믿음은 얼마나 쉬이 깨졌던가.

그날도 그 애가 집에 왔었다. 어차피 치료가 막바지에 이른 듯하여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본능적인 직감이었을까. 무엇인가 확인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머니는 정갈한 자세로 보료 위에 누워 있었고 미간에 침이 하나 놓여 있는 상태였다.

‘…지금 무얼 한 것이야…?’

불길함이 엄습하여 턱이 떨려 왔다.

그것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대답은 명쾌했다.

‘운명하셨습니다.’

‘뭐…?’

아침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니. 그럼 대체 왜….

떨리는 동공이 어머니에게 꽂혀 있는 침에 닿았다.

차마 짐작하기에도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녀석은 평온하게 말했다.

‘고통 없이 편히 가셨을 테니 염려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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