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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100화 (100/124)
  • 100화

    쾅쾅.

    “계십니까.”

    해월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살살 좀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네가 뭘 몰라 그렇지 나이 든 이들은 귀가 어두워서 이 정도로는 해야 돼.”

    해월을 업고 있는 터라 손이 모자란 연진 대신 업혀 있는 해월이 촌장의 집 문을 세게 두들겼다.

    누가 보더라도 예의가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만큼 격의 없는 사이라는 뜻도 된다.

    “안 나오시면 문을 부술 겁니다. 촌장님!”

    “…….”

    연진은 어딘가 익숙한 말에 움찔했다가 이내 체념했다. 해월은 남의 집 문을 부수는 게 취미인가 보다.

    그래도 해월의 겁박이 통했는지 저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대낮부터 이게 무슨 소란….”

    방금까지 잠을 자고 있었는지 촌장의 머리는 까칠했고 수염도 정돈되지 않은 채였다.

    이 마을에서 그나마 가장 번듯한 집에 사는 자인 것치고는 행색이 멀끔하지 않았다.

    ‘늙은이가 신경 쓸 외양이 어딨느냐!’는 촌장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촌장을 보고 잠시 흠칫한 해월은 이내 웃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오랜만입니다.”

    “너는… 선해월이?”

    “예, 맞습니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촌장은 생소한 얼굴인 연진과 해월을 번갈아 보며 눈 크기를 늘렸다. 정확히는 업고 업혀 있는 그들의 모습에 놀란 것이겠지만.

    “피로하니 일단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지요.”

    해월이 당장 해야 할 일을 제시해 주자 촌장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그 뻔뻔스러운 자태를 보아하니 그놈이 맞구먼.”

    “허면 귀신인 줄 아셨습니까.”

    “네놈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말은 그리해도 촌장은 그들을 집안으로 들여주었다.

    ***

    “하루만 신세 지겠습니다.”

    “누구 맘대로. 여기서 고향도 가까운데 왜 굳이 내 집에 머무르려 해.”

    “저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해서요. 여독도 쌓였고.”

    거짓된 변명은 아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도, 여독이 쌓였다는 말도 전부 사실이었으므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촌장은 가진 것이 없는 이가 아니었다. 해서 신세를 져도 마음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비록 한 채이긴 하지만 이 근방에서 이만큼 번듯한 집에 살기는 드문 일이다.

    “자주 비추는 얼굴도 아니면서 낯짝 한번 두껍군.”

    촌장은 방을 데우기 위해 장작을 만졌던 손을 대충 털며 중얼거렸다.

    해월은 촌장이 침을 뱉지 못하도록 웃는 낯을 했다.

    그런 해월을 황당하게 보던 그는 연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쪽은 딱 보아도 귀한 댁 공자 같은데 함자가 어찌 되오.”

    “강가 연진입니다.”

    “강씨…? 혹 본관이 어딘지 물어도 되겠소?

    “그게….”

    본관이 한주에 두고 있는 강씨라는 것을 안다면 썩 좋은 상황이 될 것 같지 않아 망설이던 차에 해월이 여상한 투로 대신 답했다.

    “한주 강씨입니다.”

    “아, 그래 한주 강씨… 아니, 뭐라고?”

    “한주 강씨요. 백난국의 팔대 세가.”

    제도의 귀족들 사이에서나 무시당하지, 이런 지방에서 팔대 세가의 존재감은 강할 수밖에 없다.

    오래전부터 백난국에 충성하여 공덕을 쌓아 온 많은 가문들 중 가장 으뜸가는 여덟 개의 가문이다. 그중에서도 백난국의 과갑(戈甲, 창과 갑옷)이라 불릴 정도로 무예에 강했던 가문이 한주 강씨였다.

    해월의 여상한 설명에 입이 떡 벌어진 촌장은 연진을 쳐다보았다. 이미 다 드러난 마당에 연진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그저 침묵했다.

    촌장이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해월은 다시 발언했다.

    “지금은 제 제자 삼았습니다. 사정이 생겨서 데리고 나왔거든요”

    “제, 제자? 네가 한주 강씨 공자를 제자로 들였다고?”

    그 사실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지만 얼마 전 큰 마을에 들렀을 때 들었던 풍문을 떠올린 촌장은 더욱 기함했다.

    “그, 허면 혹시 소식은 들었나…?”

    “무슨 소식을 말입니까.”

    이번에도 해월은 연진이 해야 할 말을 가로챘다. 연진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 한주 강씨 가주와 그 아들이 오늘내일한다던….”

    촌장은 차마 가문 자체가 오늘내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한주 강씨 가문은 다른 세가의 가주들을 시해하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데다 그 중심인물들은 원인 모를 병을 앓아 죽기 직전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해월은 놀란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아, 그 소식이 이제야 이곳까지 닿았군요. 그것이 사실 제가 한 짓입니다.”

    “뭐?!”

    “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선해월이 …드디어 정신을 놓은 겐가?”

    사뭇 진지한 질문이 날아들자 해월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저는 정신을 붙잡고 있던 적이 더 드물었습니다.”

    “허… 어찌 이런 일이… 아이고….”

    쓰러질 기세로 뒷목을 잡는 그에게 해월은 그간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연진은 박대받고 있던 공자였고 자신은 연진에 대한 헛소문 때문에 의뢰를 하러 찾아갔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사제의 연을 맺은 뒤 그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함께 도망 나온 길이다….

    ‘이렇게 말하니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일 같군.’

    당사자인데도 타자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리 먼 과거도 아닌데 떠올리려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자네 아버지는 아는가.”

    촌장은 선학경에게 이 사실을 터놓을 것이냐고 물었다.

    “찾아가서 말씀드려야죠.”

    시원스러운 답이 이어졌다. 어찌나 곧바로 말했는지 말과 말 사이의 틈이 없었다. 그만큼 고민거리도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숨겨야지! 말하긴 뭘 말해! 근자에 덜 맞았다고 매가 그리워진 게야?!”

    촌장이 윽박지르던 순간에 귀를 막은 해월은 제 할 말을 꿋꿋하게 했다.

    “아버지는 거짓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싶어서 이리 부탁드리는 것 아닙니까.”

    “마음의 준비는 개뿔. 딱 보니 또 무리한 통에 영 길을 나설 몸 상태가 아닌 것 같구먼.”

    그는 해월의 상태를 보며 혀를 찼다. 아까부터 해월은 힘없이 늘어져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기대어 앉아 있는 게 고작으로 보였다.

    “이 집에서 송장 치울 생각 없으니 알아서 쉬고 얼른 꺼져.”

    “어이구. 야박하셔라.”

    “아오. 저 반질한 낯짝을 아주!”

    능글맞게 대꾸하는 해월에게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촌장은 벽이 다 흔들리도록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크큭.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웃기시는 분이네.”

    “……?”

    해월이 웃는 지점을 이해할 수 없어 연진은 그저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

    “몸은 움직일 만하십니까.”

    “아직 힘이 잘 안 들어가긴 하는데 괜찮아.”

    그 말을 증명하듯 바닥에 축 내려놓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뭐가 괜찮은 겁니까.”

    그나마 따뜻한 방이라서 추위는 안 느껴진다는 게 다행이었다.

    “냅두면 회복돼.”

    해월은 별스럽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진아.”

    무의식적으로 연진을 불렀다. 연진이 다른 곳에 두고 있던 시선을 돌려 눈을 마주했음에도 정작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하려고 했던 말은 없었다.

    정말 무의식적으로 부른 것이었으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에 연진은 말없이 해월의 손을 잡고 손가락부터 손목 그리고 팔목까지 순차적으로 주물렀다.

    마디가 굵은 손이 제 팔을 감싸 쥘 때마다 하얀 피부 위로 붉은 손자국이 생겨났다. 그만큼 해월은 피부가 여린 편이었다.

    “야, 아파….”

    정녕 아픈 것은 아니었는데 뜨겁고 간질거려서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 세게 잡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눌러야 피가 금방 돌아서 회복이 빠를 겁니다.”

    “그럼 좀 살살 하든가….”

    소심한 반항이었다. 해월은 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뭐 하는 짓거리여.”

    그때, 촌장이 불쑥 방으로 들어왔다.

    말도 없이 들어온 것에 대해 불만이 생겼지만, 촌장의 집이니 그 사정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덕분에 둘만 있을 때 묘하게 더워졌던 공기가 한기로 희석되었다. 해월은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무엇으로부터의 안도였을까.

    “내 집에서 그따위 짓거리할 거면 썩 나가.”

    매몰찬 음성이었다.

    “거참, 애먼 오해를 다 하십니다.”

    “오해는 무슨 아주 둘이 한 몸처럼 붙어 있더구먼.”

    촌장의 지적에 해월과 연진은 할 말이 없어졌다. 붙어 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런 저속한 의미는 아니었으므로.

    “나갔다 오려는데 힘깨나 쓰는 일이니 거기 공자님이 나 좀 도와주쇼.”

    “예? 나를 말씀이십니까?”

    연진이 조금 당황했다.

    해월은 되지도 않는 소리라는 투로 말했다.

    “왜 남의 제자를 마음대로 부리려 하십니까. 그리고 엄연히 귀한 핏줄입니다.”

    “귀한 핏줄인들 지금은 출가하였다면서.”

    “그래도 안 됩니다. 이 녀석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거의 쉬지 않았다고요. 아저씬 힘도 세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해월은 촌장님이라는 호칭 대신 더 익숙한 호칭을 입에 올렸다.

    “다 늙었는데 내가 뭔 힘이 있겠느냐.”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해월은 여직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가 떨리는 팔로 연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참으로 얄팍한 보호였다.

    촌장은 코웃음을 치며 해월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

    앉아서 중심을 유지하는 것도 고작이었던 몸이 손쉽게 뒤로 넘어갔다. 해월은 얼결에 이부자리에 그대로 눕게 되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희고 둥그런 이마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쯧, 어디서 또 몸을 넝마로 만들어서는. 하나도 안 무섭다 이놈아.”

    “아저씨!”

    해월의 외침을 들은 채도 안 한 촌장은 몸 위로 두꺼운 이불을 몇 겹이나 던져 놓고 연진에게 손짓했다.

    “저 철딱서니 없는 놈은 내버려 두고 나 좀 도와주쇼.”

    “…….”

    연진은 망설이는 듯 해월과 촌장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쉬고 계세요.”

    “야 강연진! 너 누구 편이야!”

    해월이 몸을 비틀었으나 쌓인 이불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아무리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라 하나 고작 솜이불이 몇 겹 쌓였다 하여 이리 옴짝달싹 못 하는 게 말이 되는가.

    곧이어 이불 밖으로 드러난 둥근 윤곽들을 본 해월은 기함하며 소리쳤다.

    “누가 솜이불에 자갈돌을 넣어 놓습니까…!”

    “자갈돌이라니! 신중히 엄선하여 찾은 귀한 옥돌인데! 옥돌이 얼마나 몸에 좋은지 알아?”

    “제가 그걸 알겠습니까!”

    옥돌을 넣어 놨을 줄이야. 어쩐지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이만 가세.”

    촌장은 해월을 아예 무시했다. 연진은 이 상황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지 쉬이 따랐다.

    “허면 쉬십시오.”

    “야 어디 가!”

    해월의 외침은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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