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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60화 (60/124)
  • 60화

    현원 소가의 저택은 제도에 위치하여 황궁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황가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백난국의 천년 역사가 지나는 동안 맡은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전통성. 선대로부터 이어진 가주들의 드높은 충성심 어느면으로 보나 현원 소 씨가 제국의 최고 가문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하여 소 가가 오랫동안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처세에 있었다.

    최고의 자리에 있되,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

    일견 간단한 이치인 듯 보이나 실은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권력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황가에게는 한없이 자세를 낮추어 신용을 얻고, 아랫사람에겐 관용을 베풀어 존경을 얻고, 혹여 업신여기는 자가 있거든 냉정하게 싹을 자른다.

    그리고 무엇이든 ‘지나친 것’을 삼간다.

    현원 소 씨가 가문의 드높은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지금껏 국혼을 치른 적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황좌의 주인이 바뀌거나, 그 심기를 거스르는 날엔 역풍을 맞기 쉬우니 말이다. 다만 황가와 적당한 연을 맺는 것은 우호적으로 생각하기에 그들 가문의 사람들은 황가의 스승, 친우, 수하 등의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 방법이 황가와 남다른 연을 맺기 쉽고, 동시에 그 연을 끊기도 쉬우니까. 국혼보다는 못한 차선의 선택이지만, 여차하면 꼬리를 자를 수 있는 것이다. 현 가주인 소천보의 아들이자 십 황자의 배동이었던 소영현은 어릴 적부터 이와 같은 사실을 교육받아 왔다.

    ‘가문의 영광이 최우선이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리 살다 보니, 그 외의 것들엔 상대적으로 흥미가 없어졌다.

    그런데 최근 아주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저물어가는 해라는 멸칭이 붙은 백난국의 무인 가문, 한주 강 씨에서 오랜만에 팔가 연회가 열린 것이다.

    그곳에서 예상치 못 한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그저 따분함만 느꼈었다.

    ‘설마… 강석요를 척결하려는 자가 있었을 줄은.’

    강석요의 패악은 워낙 소문이 많이 돌아서 당연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몇 번은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아버지인 소천보가 그 박대당하던 선대 가주의 아들을 위해 힘을 써준 것도 알았다.

    처음 그 문하생에 대해 파악했을 땐, 당연히 배후 세력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일개 문하생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였을 가능성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이 나라에서 하극상은 중죄에 해당하니 한 사람이 그런 일을 벌이기엔 대의명분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짧은 머리의 사내는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강석요를 몰락시키기 위해서 움직인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사람을 봐온 끝에 얻은 경험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는 사람.’

    어찌 되었든 그 짧은 머리 사내의 바람이 강석요와 한주 강 씨의 몰락이었다면,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연회를 일단락시키고 정리한 뒤 귀족 회의를 열었다. 그 후 이 일을 황제 폐하께 보고하기 전 강석요를 추궁하기 위해 저택을 찾아갔다.

    그들을 반긴 것은 더 손 볼 것도 없이 망가진 강석요와 그 아들 강석철이었다. 그 부자는 제정신이 아닌데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몰골이 되어있었다.

    추궁은커녕 대화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평소 자신을 무시했던 가주들에게 앙심을 품고 독살을 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변명할 수도 없게 혼을 쏙 빼놓아 그대로 몰락하게 만든다… 아주 번듯한 계획이로군.’

    소영현은 다시 한번 그 짧은 머리 사내의 행각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덧붙여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한주 강 씨 장로회 대표였던 노온의 발언이었다.

    “우리에게 가주의 잘못을 연좌하여 가문을 요절내어도 좋고, 서인으로 만들어 변방으로 쫓아내도 좋고, 그저 괄시해도 좋소.”

    당당하다 못해 무심하게도 들리는 말이었다.

    “다만 내 부탁 하나 합시다, 대인.”

    “말씀해보십시오.”

    “연회가 엉망이 되었던 그 날, 우리 가문의 둘째 공자가 출가하였는데 부디 그 공자를 찾으려 하지 말아주시오.”

    “…….”

    “그 공자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대인께서도 잘 아시지 않소. 이제야 가문을 벗어나 살아가려 하는데 그 발걸음을 끊지 말아 주시오. 내 이렇게 부탁드리오.”

    간곡한 음성이었다. 본래는 그 음성으로 가문을 지켜달라는 말이나 들을 줄 알았었다. 그래서 노온의 말은 의외의 발언이었다.

    소천보는 한주 강 씨를 권력의 일선에서 제외하도록 황제 폐하께 건의하자는 것을 끝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당연히 반발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니,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 놈팡이들을 그대로 두시겠단 말이오?”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요!”

    하지만 그들의 반발도 이내 수그러든 이유가 있었다. 노쇠한 황제가 결국 병석에 눕고 만 것이다. 따라서 모든 주의는 황제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건은 서서히 잊히고 있었다.

    ***

    양명에 도착한 해월과 연진은 그 근처 마을에 들러 허기를 달래는 중이었다. 다행히 여비는 충분했다. 항상 빠듯하게 다니던 해월은 간만에 여유를 느꼈다.

    아무 밥집에 들러 국밥 한 사발을 먹으며 느끼는 여유는 꽤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창 잘 먹고 있다가 혹시 연진이 이런 음식을 낯설게 여기지 않을까 싶어 흘긋 쳐다보았는데, 걱정과 달리 그는 점잖은 얼굴로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도 염려되는 마음에 넌지시 물었다.

    “이미 먹고 있는 마당에 묻기 그렇지만, 이런 음식이 입에 맞아?”

    “예, 괜찮은데요. 전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괜한 걱정이었다. 하긴, 연진은 기본적으로 무던한 성격이었다. 그 성향은 입맛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그들은 거리를 거닐었다.

    “한주 밖이라고 한들 겉보기엔 크게 다를 게 없지?”

    “그렇네요.”

    “한데 한주보다는 정화된 지역이 아니라서, 좀 안 좋은 꼴도 많이 볼 거야.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테고.”

    “안 좋은 꼴이라면…?”

    “그건….”

    해월이 말을 이으려던 찰나, 귀신같이 적절한 순간에 한 사내가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부딪힐까 봐 살짝 몸을 틀었는데도 말이다. 누가 보아도 그 사내가 일부러 부딪힌 것이었다.

    꽤나 노골적인 짓거리였지만 해월은 전혀 개의치 않고 가던 길을 갔다. 짐짓 놀란 연진도 그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멈춰선 자는 그 사내뿐이었다.

    “이봐,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그냥 지나가나?”

    그제야 해월은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고, 이거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장난기를 머금은 듯한 가벼운 음성은 사내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뭐? 야 됐고 얼른 내놔.”

    느닷없는 말이었다.

    “…….”

    “귀먹었어? 사람을 치고 지나갔으면 값을 치러야 할 거 아니야.”

    사내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듣고도 해월은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각한 얼굴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잠시 정면을 보던 해월은 연진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봤지? 저런 놈들이 흔해. 몸이 가난하니 하는 짓까지 가난해지는 거야.”

    연진은 먼저 시비 걸고는 죽일 듯이 노려보는 사내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는 해월 둘 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파악이 가능한 것은 해월의 말을 들은 사내가 몹시 분노했다는 것이다.

    “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몸이 가난하니 하는 짓까지 가난하다고 했습니다만… 혹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렇다면 정정하셔도 됩니다.”

    예외의 경우는 있으니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연진의 숙부와 사촌 형만 봐도 돈 많은 개차반들 아닌가.

    “하,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게 뭔 헛소리야!”

    “호오, 꽤 용하시네요.”

    해월은 뜻을 알기 어려운 말로 응수했다.

    “소란 피우기 싫으니 그만 갈 길 가보십시오. 지금 제가 기분이 좋아서 당신을 그다지 상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해월은 연진의 소매를 붙들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사내는 노발대발하다 그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해월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어 그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사내가 뻗은 손목을 붙잡아 그대로 움켜쥐었다.

    “아악!”

    우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고함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귀가 사나울 정도였다.

    “그러게, 남한테 시비 걸며 살면 되겠습니까.”

    “으윽! 야! 너 이런 짓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내가 누군 줄 알고!”

    “당신이 누군지는 하등 관심 없습니다. 양명 일대의 무뢰배 집단에 속하기라도 한 모양인데 그 사람들은 압니까? 당신이 고작 행인한테 시비 걸며 산다는 거?”

    “……!”

    “돈을 뜯어내려거든 제대로 하셔야죠.”

    슬쩍 미소 짓자 사내는 할 말을 잃은 듯 어버버 거렸다. 해월은 가벼운 목소리로 지켜보고 있던 연진에게 말했다.

    “가자.”

    “…저대로 둬도 됩니까.”

    “괜찮아 부러뜨린 거 아니고 살짝 금만 가게 했어.”

    연진은 그런 것을 물은 게 아니었으나,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들의 뒤에서 사내가 복수할 거야, 두고 보자 같은 뻔한 말을 내뱉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행인들도 이런 일이 흔한지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도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하는, 해월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이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연진은 자신이 정말 세상을 너무도 몰랐구나, 하는 감상이 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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