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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59화 (59/124)
  • 59화

    “뭐라고… 하신 겁니까…?”

    “…으응? 내가 뭐라고 했어?”

    그제야 잠이 좀 깼는지 해월은 영 딴소리를 했다. 일부러 말을 돌리는 것은 아닌 듯 보여서 연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해월은 영 비몽사몽 한 상태였다. 밤새 어린 자신의 환영이 정신을 사납게 한 탓에 가뜩이나 피곤했던 몸이 더 피곤해졌다. 적당히 물건들 뒤에 기대어 쉰다는 것이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혹시 침을 흘린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머쓱한 몸짓으로 입가를 쓸었다. 닦여 나오는 게 없는 것을 보니 그 정도의 추태는 안 보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다. 배가 뜨는 시간이 아니라 잠시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해월은 제 옆자리를 톡톡 치며 앉으라는 뜻을 전했다. 연진은 곧바로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제 떠나는데 기분이 좀 어때…?”

    “조금 묘합니다.”

    묘하다는 말 외에 작금의 기분을 형용할 만한 말이 없었다.

    연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줄곧 박대받아왔다. 뜻하지 않은 계기로 만난, 그의 사부가 일으킨 사건 덕에 제 가문은 풍비박산이 났고 저 역시 거기에 일조했다.

    이 모든 것이 고작해야 한 계절이 바뀌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그 시간 속에 있을 때도 혼란스러웠지만, 그 시간을 다 보내고 나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거나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변화가 반가웠고, 제 옆에 있는 사부에게 고마웠다.

    사부가 아니었더라면 평생 벗어나겠단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타오르는 복수심도,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고.

    “한데…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숙부님을 뵈었을 때, 그 주변에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손에 닿으니 따끔거리기도 했고요.”

    “뭐? 그걸 손댔단 말이야?”

    해월은 화들짝 놀라 연진의 손을 살폈다. 다행히 음기가 깃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거 사령들의 저주야. 함부로 손댔다간 위험할 수도 있어.”

    “사령들의 저주요…?”

    “꼭 죽은 사람 그 자체만이 귀신이 되는 건 아니야. 죽은 사람의 사념도 귀신이 될 수 있어. 난 그런 사령들을 가주한테 붙여놓은 거고.”

    “영력으로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이건 내 아버지가 알려준 주술이야. 엄밀히 따지자면 사술이라서 함부로 쓰면 안 돼.”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어지럽히고 사특한 일에 쓰이는데, 그 술자에게 이로울 리 없었다.

    “그런데 벌써 그게 눈에 보이다니… 생각보다 네 눈이 더 잘 트였나 봐. 보통은 그냥 음험한 낌새 정도만 느낄 텐데.”

    이 깨끗한 땅에서 벗어나면 남들과 달라진 저 눈이 피곤해지겠지만 그만큼 성장했다는 방증이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원래는 곧장 고향으로 가려 했는데 생각이 좀 바뀌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그 망할 환영이 하는 말에 미혹되었다.

    “그냥 갈 거야, 그곳이 어디든.”

    이 숨이 끝을 맺기 전까지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갈 것이다. 연진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제가 없더라도 잘 살 수 있을 테니까.

    말처럼 쉬우면 좋겠지만 아마 험난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니까.

    문득, 말이 없어진 연진을 힐긋 본 해월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왜?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연진은 제 하관을 잡고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을 쉬이 읽기 어려워서 해월은 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밝아진 새벽의 공기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시야가 깨끗해진 기분이 들었다.

    “여하튼… 조금 돌아가도 상관없겠단 생각이 들어서.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말은 번듯하게 하고 있지만, 아직 불안이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기적으로 굴려 해도 막상 연진을 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아마 이건 양심의 가책이겠지.

    부모 없는 고아에 이제는 가문과도 의절한 그에게 제 죽음이라는 부재를 안겨주어도 되는 걸까. 그런 걱정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어쩌면… 네 기억 속에서 계속 살 수 있지 않을까.’

    일상의 기억은 금세 흐릿해지겠지만, 내가 너에게 의미 있는 기억이 된다면 계속 너의 가슴속에 남아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해월은 손을 뻗어 연진의 뺨을 꼬집고 안 아플 정도로 흔들었다.

    “아, 왜….”

    “그냥 해봤어.”

    이내 자세를 일으켜 여전히 앉아있는 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의미였다.

    “이제 가자.”

    해월의 등 뒤로 새벽의 광채가 비추었다. 작은 바람에 짧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네.”

    함락당할 수밖에 없는 강렬한 열광이었다. 연진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홀린 듯이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손끝을 타고 안정(安定)이 번져나갔다. 완전한 잠식이었다.

    ***

    해월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연진을 이끌고 아무 사공한테 가서 아무 배를 탔다.

    찰랑이는 물결을 가르고 그들을 태운 나룻배가 움직였다. 잔잔하게 부딪히는 물결의 소리와 노를 젓는 소리가 귓가를 메웠다.

    주위를 둘러보면 점점이 다른 배들이 보였다. 저들도 각자의 이유로, 각지로 향하는 자들이겠지.

    아는 이 하나 없지만, 왠지 모를 동질감에 그들이 가는 길이 평안하길 바라게 되었다.

    “우린 양명으로 갈 거야.”

    아까 전 뱃사공에게 행선지를 물어본 해월이 말했다.

    양면은 한주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다. 덧붙여 그리 정화된 지역은 아니었고, 양명 근처에 아는 이가 있는 해월에겐 낯설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양명이라면… 먼 곳이네요.”

    “잘 됐지 뭐. 혹시 네 가문 사람들이 널 쫓아올지도 모르니 멀리 가면 좋지.”

    “…….”

    “너 표정이 왜 그래?”

    연진의 표정이 조금 멋쩍어 보여 묻는 말이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제 가문 사람들이 저를 쫓아올 리는 없을 겁니다.”

    “강석철도 미령하게 되었으니 너 없으면 가문을 되살릴 중축이 없어지는 건데? 이렇게 순순히 보내줄 리 없잖아.”

    “실은….”

    연진의 이야기를 들은 해월은 피식 웃음 지었다.

    “그래서, 때려눕히고 왔단 말이야?”

    “눕힌 것까지는 아니고….”

    “그럼 때리긴 때렸단 얘기잖아. 어쩐지 손등이 좀 까져있더라.”

    점잖은 연진이 주먹질이라니.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리지 않나. 물론 자신이 체술을 알려주긴 했다만 실전에서 활용할 줄은 몰랐다.

    연진은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재밌어서 해월은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됐고, 발이나 내놔봐.”

    “예?”

    “어, 발 내놓으라고.”

    연진은 마지못해 그의 쪽으로 발을 내밀었다.

    재빠른 손길로 버선을 벗긴 해월은 드러난 그의 양발을 보고 곧장 타박했다.

    “이 미련한 놈아. 이리 피가 났는데 약도 안 바르면 어떡하냐.”

    자신의 상처에 둔감하다는 점에서 해월이 제게 무어라 할 자격은 없지 않나 싶었지만, 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월이 연진의 발등에 손을 올렸다. 청량한 감각이 저의 발 위로 스며들었다. 작은 생채기가 가득했던 발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치유술을 행한 것이다.

    사실 치유술은 술자의 생명력을 소모하는 일이기에 자주 쓰면 안 되지만, 이 정도 상처를 낫게 하는 것쯤은 큰 타격이 없기에 해주는 것이었다.

    ‘뭐 작은 상처가 아니더라도 해주겠지만.’

    아끼는 내 제자니까.

    그런데 해월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연진 역시 치유술이 술자의 생명력을 담보로 쓴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생채기에 그 힘을 굳이 왜 씁니까. 속도 아직 개운치 않다면서요.”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미안한 일이었기에 연진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놈이 치료를 해줘도 난리네.”

    짐짓 서운하다는 듯 반응하자 연진은 당황스러운 낯빛으로 제가 한 말을 수습하려 했다.

    “…송구합니다, 하나 제 말은….”

    “아아, 잔소리 듣기 싫어.”

    해월이 양 귀를 막으며 도리질을 쳤다. 연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멈칫했다.

    “너 맨날 나한테 잔소리했잖아. 앞으로는 나한테 잔소리하지 마.”

    골고루 먹어라, 단것 좀 그만 먹어라, 먹고 눕지 마라…. 이렇게 떠올리고 보니 대부분 먹는 것과 관련된 잔소리였다.

    “그건 잔소리가 아니라 조언입니다.”

    “그래, 보통 잔소리하는 인간들이 그걸 그렇게 부르더라.”

    천연덕스레 대꾸하자 연진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 되었다.

    해월은 괜히 딴청을 피웠다.

    “와, 저기 물고기 좀 봐.”

    무의식적으로 해월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본 연진은 물비늘만 보이는 강물을 보고 다시 해월을 째려보았다. 또 속은 것이다.

    해월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피식거리다 이내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너 왜 이리 순진해? 어디 가서 협잡꾼들한테 속고 다니는 거 아니야?”

    이쯤 되니 진심으로 걱정될 지경이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 속는 건지, 그 수를 다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사부니까 속는 거예요. 저 순진한 사람 아닙니다.”

    강하게 부정해보았지만, 해월의 눈엔 그저 순진해 보이기만 했다.

    “그래, 그래. 너 하나도 안 순진해.”

    적선하는 듯한 수긍이었다.

    “아니라니까요.”

    “응, 그렇게 생각하렴.”

    “정말 아닙니다.”

    나이답지 않게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던 사공은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오래간만에 재미난 손님들을 태운 것 같았다.

    젊은이 둘이 여행길이라도 오르는 모양인지 참 즐거워 보였다. 의도치 않게 대화를 듣다 보니 두 사람이 사제관계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 생긴 것과 하는 짓을 놓고 보면 형제나 친구처럼 보였다.

    그리고 덧붙여 생각했다.

    꾸밈없이 깨끗한 사람이 순진한 사람이라면, 두 사람 모두 그런 사람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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