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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3화 (3/124)
  • 3화

    밑바닥을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절벽 아래엔 언제나 낭떠러지가 있었다. 그곳이 바로 나락이 아닐까.

    해월은 한곳에 얽매여 있는 것이 싫어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았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연진을 만난 일이었다.

    고향을 제외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한곳에 머물고, 또 한 사람의 곁에 있은 것은 처음이었다.

    “…….”

    어쩌면 금술에 손을 댄 순간부터 해월은 지금과 같은 결과를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사술에 손을 대고서 행복한 최후를 맞이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어떤 결과를 맞닥뜨리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자부했다.

    ‘나 자신을 과신했어.’

    직접 그 상황을 마주하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전부 견딜 수 있다고, 의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오만이었다.

    마주친 것만으로도 이리 괴로운데. 모진 말을 듣자니 마음이 술렁였다.

    ‘그냥 솔직하게 다 말할까.’

    금지된 사술에 손을 댔고, 그로 인한 저주로 마물이 되었다고.

    그렇지만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도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 너무 아끼기에 더욱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는 법이다.

    해월에겐 지금의 제 모습이 그랬다.

    “…기억이 궁금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해월은 우선 모르쇠로 일관했다. 연진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부가 동안이긴 하지만 설마 소년 귀신이라고 불리고 있을 줄은 몰랐군… 사부가 알았다면 무척 싫어했겠어.”

    “…….”

    해월은 ‘이 나이 먹도록 소년 소리 들으니 싫긴 하더라.’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해월은 여러모로 제 동안이 싫었다. 퇴마사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 이후로도 동안 때문에 실력을 의심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생각해 보니 연진을 처음 만난 때도 그랬다.

    ‘뭐야, 이 꼬맹이는?’

    처음 만난 연진은 대뜸 저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순간 짜증이 난 해월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었다.

    ‘꼬맹이 아니고 퇴마사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보다 일곱 살은 많으니 말 좀 높이지?’

    ‘…….’

    문득, 그때 일이 떠오른 해월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이 연진의 화를 돋운 모양이었다.

    “웃어?”

    “…….”

    심정으론 울고 싶었다. 해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네 사부의 기억이 그리도 궁금해?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을 텐데.”

    제발 그냥 좀 넘어가라. 옛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좋은지 안 좋은지는 내가 판단해. 마물 따위가 낄 일이 아니야.”

    “하아… 참….”

    고집스러운 성격은 십 년이 지나도 안 변했구나. 한결같아서 좋다 해야 할지….

    문제는 지금 제 몸이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상태라는 것이다. 머리끝까지 열이 차올라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점점 힘들어졌다.

    연진 역시 해월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이렇게 색색거려?”

    “하아… 하….”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힘들어 죽겠네.’

    이미 죽어 봤는데도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게 …뭘 원하는 거야.”

    “너 같은 악귀와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지만 네가 그 몸에 들어간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뭐?”

    “말했잖아. 난 내 사부의 기억이 궁금하다고.”

    “그래서, 알려달라는 거야?”

    차라리 대충 얼버무리고 이 사태를 벗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

    이어 들려온 음성은 그런 안일한 해월의 생각을 무참히 부숴 버렸다.

    “그게 다가 아니지. 네가 내 사부의 몸으로 뭘 할지 어떻게 알고 그걸 그냥 두고 보겠어.”

    연진의 말에 해월은 속으로 기함했다.

    ‘정말 단단히 잘못 걸렸네.’

    “…네 사부가 이 광경을 봤다면 참 좋아하겠다.”

    조롱에 가까운 말에 연진이 눈썹을 까딱였다.

    “악귀 주제에 그걸 어찌 알아.”

    ‘그야 내가 다 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멍청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다행히 내뱉지는 않았다.

    ‘아, 이 멍청이를 어떻게 상대한담.’

    연진이 십 년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을 터. 짐작건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실력일 것이다.

    과연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해월은 최대한 호흡을 다듬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눈앞이 핑핑 돌았으나 그럴수록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해월의 전신을 감쌌다. 오른눈에 불꽃 같은 붉은빛이 일렁였다.

    해월이 손을 뻗자 손끝에서 뻗어 나간 사기가 연진에게로 달라붙어 밧줄처럼 그를 옭아맸다.

    “사술을 쓰는 요령이 좋군.”

    “……!”

    “그래도 이건 너무 약한 거 아닌가.”

    연진은 단숨에 제 몸을 옭아맨 사술을 풀어냈다.

    해월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아무래도 옛 제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힘을 지나치게 조절한 모양이었다.

    “칫.”

    해월은 곧장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연진이 뒤따라 붙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

    너 같으면 쫓아오는데 서겠냐. 그렇게 내달리던 해월의 앞에 두 명의 소년들이 보였다. 그들은 강씨 세가에 전해 내려오는 군청색의 천 옷을 입고 있었다.

    ‘강씨 세가의 문하생들인가.’

    왜 강가의 문하생들이 여기에 있는지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해월은 가볍게 도약하여 그들의 머리를 뛰어넘어 착지했다. 이어서 세차게 달렸다.

    느닷없이 자신들 위로 넘어간 해월을 멍한 눈빛으로 보던 평윤과 도원은 뒤이어 달려오는 연진과 마주쳤다.

    그들은 연진의 명을 따라 주막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을 수습하고 인가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자가 자신들을 뛰어넘어 가고, 심지어는 그 뒤로 가주님까지 나타나니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주님?”

    “무슨 일입니까, 가주님.”

    “저자를 붙잡을 것이니 따라오거라.”

    “예, 알겠습니다.”

    가주인 연진이 명하자 평윤과 도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

    몸은 날쌨지만 폐가 약한 해월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속이 너무 아렸다. 물론 아무리 아파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몸은 인간의 것도, 완전한 요괴의 것도 아니니까.

    “헉… 헉헉…. 이놈의 몸뚱이를 진짜….”

    그래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인가가 나온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인다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발을 떼려던 순간, 본능적인 불안감에 급히 뒤돌아섰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이미 발목에 결박용 부적이 달라붙은 후였다.

    “……!”

    순식간에 발이 묶인 해월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부적을 없애려 기를 모으던 해월은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부적은 해월이 지난날 만들어 낸 부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주 강한 효력을 가졌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만든 부적에 자신이 걸릴 줄이야. 제 덫에 걸린 사냥꾼과 다를 게 무엇인가.

    해월은 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그리 웃기지?”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연진이 물었다.

    “그럼 안 웃기겠어? 이 부적, 네 사부가 만든 거잖아.”

    다루기도 까다로울 텐데 이걸 용케 쓰고 있었네. 기특하면서도 참으로 씁쓸했다.

    “…그런 기억까지 알고 있어?”

    “그건….”

    해월이 무어라 대답하려던 찰나, 연진의 뒤에서 조금 전에 본 문하생들이 따라왔다.

    “가주님!”

    ‘가주…?’

    뭘 잘못 들었나 싶어 해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들은 당장 한주로 돌아갈 채비를 해라. 저자도 끌고 갈 것이다.”

    연진은 낮은 음성으로 명했다. 그 음성에는 견고한 힘이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타인의 위에 있는 자만이 낼 수 있는 위압감. 고저 없는 목소리에서도 그것이 숨겨지지 않았다.

    “예, 명 받들겠습니다. 가주님.”

    “잠깐.”

    해월이 손을 올렸다.

    “가주라고? 네가?”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믿기 어려워 되묻는 것이었다.

    “그렇다, 한데 그게 뭘 어쨌다는 거지?”

    “네가 어떻게….”

    연진은 소가주도 아니었다. 가문에서 있으나 마나 한 취급을 받았는데, 가주가 되었다니.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이건 너무 변한 것 아닌가.

    심지어 연진은 가주의 자리에 뜻이 없었다. 가주의 자리를 선취하라 권할 때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연진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해서 그가 가주가 되길 바라긴 했어도 정녕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물며 제가 죽은 뒤로는 권하는 사람도 없었을 테니 더욱 가주가 될 리 없을 거라 여겼다.

    해월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두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 볕 아래 있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다. 해월은 가쁜 숨을 내쉬며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았다.

    연진이 제 쪽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상체를 기울였다. 시야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

    무어라 말하는 듯했지만, 머릿속이 어지러워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았다.

    ‘안 되는데.’

    누군가에 의해 몸이 들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의식이 흐려 분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큼은 지켜 내고 싶었다.

    ‘나랑 가까이하면 안 돼….’

    해월은 열화와 한기에 괴로워하면서도 하나의 말만을 중얼거렸다.

    “저리… 가….”

    그것이 쓰러지기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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