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야한 목소리였으나, 서원은 그에 오히려 더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왜, 왜……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해요?”
“많이 불러 봐야 입에 익을 거 아니야.”
서원이 대놓고 이상하다고 말했으나, 도겸은 다 이유가 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흥분한 것과 별개로 진심으로 하는 소리처럼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요구는 딱 잘라서 거절하면 됐다. 그런 플레이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왜 이런 요구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형이라는 말을…… 듣고 싶으세요?”
연인 간의 애칭은 어깨너머로 많이 들어보긴 했다. 닭살 돋긴 하지만 ‘허니’, ‘자기’ 같은 것이나, 아니면 이름을 따서 도겸을 ‘겸이’처럼 짧게 부르는 것을.
적응 안 되긴 해도 이러한 둘만의 호칭을 듣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단순히 형이라는 호칭에 집착을 보이는 게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형이라는 호칭은 저 말고도 다른 사람도 많이 불러 주지 않나?
서원이 그런 생각을 하며 물었으나, 도겸에게서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망설이기라도 하는 듯한 어색한 침묵에 뒤를 돌아봐야 하나 고민하던 때, 뒤늦게 도겸이 입을 열었다.
“형이라고 부르기엔 안 어울려서 그래?”
“아, 아뇨! 그게 아니라요……. 형이라는 호칭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듣고 싶어 하시는지 궁금해서요.”
“그냥, 뭐……. 나이 차이도 그렇게 많이 안 나니까 그렇게 불러도 되지 않나 싶어서.”
서원이 차분하게 묻자, 도겸이 머뭇머뭇하다 어물쩍거리듯 대답했다.
나이 차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잠시 생각해 보니 저와 그가 다섯 살 차이가 나는 것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섯 살은 가까운 듯 먼 나이였다. 도겸과 있을 때 서원은 그다지 느끼지 못하지만, 굳이 따지고 보자면 제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불리는 중학교 2학년 때 그는 성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제가 저번에 그를 ‘5살이나 차이 나는 전 직장 상사’라고 나이를 강조하며 선을 그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그렇게 불리는 것만큼은 싫은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었지. 아무래도 그때의 기억 때문에 형이라는 호칭에 집착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 나니, 서원은 좀 황당해졌다. 그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엔 다 이유가 있었는데…….
얼굴이 붉어진 걸 그가 보게 될 것이 민망했지만,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서원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해명했다.
“혹시 제가 저번에 했던 말 때문에 그러는 거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일부러 정 떨어트리려고 했던 말인걸요.”
“……그래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건 사실이잖아. 나도 양심이 있어.”
서원이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으나, 그는 여전히 신경 쓰이는 반응이었다.
양심이 있다니……. 애초에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섯 살 어린 제게 페로몬 파트너를 요구하지도 않았을 텐데.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을 했다가는 도겸이 완전히 토라져 버릴 것 같았다. 이러고 있자니 그가 어엿한 사회인이다 못해 한 회사의 전무 이사고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뭐 이런 유치한 사람이 다 있냐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서원에게는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그의 밑바닥까지 봐도 마음을 접지 못할 만큼 그에 대한 사랑이 견고해서, 이 정도는 애교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 딱딱한 사람이 제게는 이런다는 게 귀여웠다.
“저 정말 나이 많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심지어…… 혀, 형을 먼저 좋아한 건 저인걸요.”
형이라고 부르는 건 여전히 입에 붙지 않지만. 그가 그런 이유로 불안해한다면 얼마든지 불러 줄 수 있었다. 어색하긴 해도 어려운 건 아니니까.
용기 내어 형이라는 호칭을 입에 담고 나니, 묘하게 기분이 간질거렸다. 역시 부끄럽네. 몰려오는 어색함에 서원이 시선을 슬쩍 내리며 배시시 웃음을 흘리는데, 갑자기 도겸이 몸을 더 기대 오며 서원을 벽 쪽으로 완전히 밀어붙였다.
“어, 엇?”
“서원아…….”
방금까지는 벽에 밀렸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갇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벽과 도겸의 사이에 갇혀 버린 느낌이었다.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부르는 목소리가 아까처럼 젖어 있어 조금 떨려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엉덩이에 그의 뜨거운 성기가 닿았다.
“읏……. 아, 아래 닿아요……!”
“알아.”
서원의 허벅지 사이로 그의 것이 비집고 들어왔다. 뭉근하게 밀려 들어오는 느낌에 서원이 화들짝 놀라 항의했으나, 도겸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입술을 맞췄다.
“으흣……!”
그의 혀가 제 입속 여린 부위를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예민한 아래까지 비벼지게 되니…….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서원의 성기는 성실하게 서기 시작했다.
도겸 역시 그런 서원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천천히 하반신을 맞부딪히고 손으로는 가슴께에 있는 분홍색 알갱이를 만지작거렸다. 꼿꼿하게 선 유두가 집게손가락에 의해 이리저리 짜부라지고 긁혀졌다.
서원은 몸을 위아래로 유린당해 여린 신음을 흘리면서도, 흐리멍덩하게 생각했다. 제가 형이라고 부르든 안 불렀든 결론은 똑같았을 것 같다고…….
그렇게 욕실에서 나오게 된 건 십여 분이나 더 흐른 뒤였다.
* * *
마음이 이어진 기적 같은 날, 도겸은 같이 밤을 보내고 싶어 했지만 엄마가 장을 보고 돌아오면서 무산됐다.
도겸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아쉬운 듯 전화를 해 왔다. 밤늦게까지 통화를 하느라 핸드폰이 뜨거워졌을 때쯤, 도겸이 내일 점심 전에 시골집에 가서 짐을 정리하겠다는 말을 꺼내기에 서원도 같이 가겠다고 잘 준비를 했다. 도겸이 이사 준비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저더러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지만, 서원은 그래도 제가 한 번은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도겸은 다음 날 아침에 혼자 차를 끌고 서원의 집 앞으로 데리러 왔고, 함께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오랜만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치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저번에 도겸의 병원 진료를 같이 가줄 생각으로 나왔다가 돌아오지 않았던 터라 정리가 안 된 부분이 많았다.
일단 간단한 청소부터 해야 하나……. 막연히 그런 생각부터 하는데, 도겸이 그것을 귀신같이 눈치채곤 먼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사람 불러서 정리시킬 거니까, 따로 청소할 필요는 없고. 귀중품이랑 버리고 갈 거만 분류하면 돼.”
“그런가요……?”
“응, 중요한 건 이 박스에 넣어.”
도겸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려 있던 파란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짐을 정리하기로는 어젯밤에 결정된 건데 벌써 만반의 준비를 끝낸 모양새였다.
서원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와 함께 짐 정리를 시작했다. 딱히 챙길 만한 귀중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서랍장을 열어 보니 잃어버려선 안 될 필요한 물건들이 눈에 속속 들어왔다.
그간 작업했던 파일과 사진이 담겨 있는 외장 하드, 도겸이 아파트 명의를 제게 넘기겠다고 줬었던 파일, 파트너로 지낼 때 그에게 받았었던 옷 등……. 담다 보니, 차곡차곡 귀중품을 담는 파란 박스 안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반면 필요 없는 것들도 많았다. 시골집으로 이사 올 때 급하게 사느라 질이 나쁜 것들이 몇 있었는데, 도겸의 아파트에 웬만한 것들이 다 있고 짐도 많아 버리는 게 나을 듯 싶었다.
도겸의 도움을 받아 이리저리 정리하다가 책장을 정리하는데, 부지런히 움직이던 도겸이 갑자기 뭔가를 발견하고는 멈췄다.
그는 뭔가를 들고 유심히 살피더니 입꼬리를 장난스레 올렸다.
“이거는 뭐야? ‘To. 서도겸 도련님’?”
서원이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자, 그의 손에 세월을 드러내듯 조금 변색된 누런 편지 봉투가 들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처박아 뒀던 것이긴 하나, 제게는 잊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서원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데, 도겸이 재차 묻는 것이 더 빨랐다.
“난 이런 편지 받은 적이 없는데, 뭐야?”
“……이리 주세요.”
“나한테 주려고 쓴 거 아니야?”
서원이 대답을 피하며 편지를 낚아채려 손을 쭉 뻗었지만, 도겸이 손을 높이 들어 가볍게 피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쉽게 돌려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 그가 발견할 줄 알았더라면 본가에 두는 건데. 본가에 뒀다가 혹여나 엄마가 보기라도 할까 봐 가지고 다녔던 게 이런 결과를 내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돌려달라고 화를 내면 돌려주기야 하겠지만, 눈앞의 도겸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얼굴에 강경하게 나오기가 힘들어졌다.
이미 들킨 거 어쩔 수 없나……. 어쩌면 저것을 버리지 않았을 때부터 이런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서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체념하듯 대답했다.
“예전에 주려고 했는데, 줄 일이 없어져서요.”
“줄 일이 없어졌다고? 매번 나랑 같이 있었는데.”
“그거 쓴 지 6년은 됐을걸요. 그때, 형 열아홉 번째 생일날 주려고 썼던 거니까. 줄 타이밍을 놓쳤어요.”
“…….”
열아홉 번째 생일이라는 말에 도겸이 장난스럽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알기에, 그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이 되더니 심각하게 서원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 나 주면 안 돼?”
“……지금 달라고요?”
“응.”
도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장난스러운 태도였다면 거절하기가 쉬웠을 텐데, 진지하게 갖고 싶어 하니 거절하기가 힘들어졌다.
보여 주기 민망한데……. 지금의 제가 보기에는 내용도, 글씨체도 흑역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서원은 멋쩍은 눈치로 편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너무 옛날에 쓴 거라서 좀……, 그런데요.”
“타임머신 발견한 것 같고 재밌지 않아? 네가 여기에다가 내 욕을 써 놨을 린 없을 것 같고, 귀엽기만 할 것 같은데. 읽어도 돼?”
“별 내용 없어서 볼 것도 없는데…….”
“기대 안 하고 볼 테니까, 이거 나 주라.”
도겸이 설득하듯 말했다.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치고는, 한껏 기대한 것처럼 보여서 저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