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도겸은 이유 없이 문전박대당한 사람처럼 황당한 눈으로 닫힌 전무이사실 문을 바라봤다.
윤서원이 어떤 말을 했는지도, 무슨 상황이 지나갔던 건지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도겸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원이 한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윤서원이 저를 좋아했다고? 그 양아치 새끼가 아니라 나였다고?”
서원의 안목이 고작 양아치 수준이 아니란 것도,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놈의 아이를 가지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윤서원이 저를 좋아하고 제 아이를 가졌다는 건 충격적이었다.
“그랬으면서 파트너를 했단 말이야?”
어째서인지 저를 속였다는 배신감이 들었다. 자그마치 6년 동안 몸을 겹쳐 왔으면서 그런 시커먼 음심을 품고 있었다니?
게다가 그는 저의 페로몬을 해소해 주는 섹스 파트너이기도 했다. 돈도 받고 사욕까지 채웠다니. 도겸은 제가 몸을 팔기라도 했던 것처럼 느껴져 모멸감이 느껴지고, 그놈이 앙큼해서 미칠 것 같았다. 저를 따먹고 버린 것 같았다.
당장 윤서원을 다시 불러와서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먼저 파트너를 제안한 건 저였다. 게다가 이제 그만하겠다는 사람에게 질척거리며 떨어져 나가지 않은 사람도 자신이었고.
탓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가슴이 갑갑하고 머리끝까지 짜증이 차올랐다. 도겸은 불쾌한 페로몬을 스멀스멀 공기 중에 흘려보내다 문득 방금 서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근데, 그런 눈으로 쳐다봤다는 건 또 뭐야? 사후 피임약 얘기는 뭐고.”
파트너 일은 제가 요구했던 거고 아이는 그날의 사고로 생겨 버렸으니 넘어가더라도, 윤서원이 나가기 전 화내던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윤서원을 어떻게 쳐다봤지?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직후라, 제가 서원을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사후 피임약 이야기를 한 건, 열성 오메가는 안 그래도 임신할 확률이 극도로 낮은데 사후 피임약을 먹었으면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 기적 같은 확률을 뚫고 임신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물어본 것뿐이었다.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아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저도 감정이 격해져서 말이 곱게 나오지를 않았다.
뒤늦게 생각해 보면,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충격받았을 것은 윤서원일 텐데, 제가 그를 너무 몰아세운 게 아닌가 하는 후회도 들긴 했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아이를 어떻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갑자기 뭔 양육비 걱정하지 말란 소리를 해?”
간혹 오메가를 임신시키고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 구질구질하게 나오며 아이를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알파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제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책임질 수 없는 여건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서원이 지환의 아이를 임신한 줄 알았을 때도 후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윤서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라며 저를 쓰레기 알파 취급했다.
오히려 기분 나빠 해야 하는 건 나 아닌가? 도겸이 미간을 좁히며 마지막 윤서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혹시 윤서원이 돌아온 걸까. 뒤늦게 이상하게 넘겨짚은 것을 깨닫고 돌아온 걸까.
저도 이제야 조금 상황 파악이 됐으니까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윤서원이 아닌 배 비서였다.
“윤서원 씨가 입을 옷 가져왔습니다.”
“…….”
도겸은 순간적으로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빨리 와? 배 비서는 단순히 일을 빠르게 처리한 것뿐인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겸은 힐끗, 배 비서의 손에 들린 옷을 바라봤다. 저와 윤서원의 체구 차이가 월등하게 나다 보니, 한눈에 보기에도 제가 입을 수 없을 사이즈였다.
“갖다 버려.”
“네? 윤서원 씨는…….”
“필요 없으니까 갖다 버리라고.”
“……알겠습니다.”
배 비서는 전무 이사실에 서원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도겸의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금방 뒤로 물러났다.
넓은 방에 다시 혼자 남은 도겸은 배고픈 것도 잊고 도로 의자에 앉아 답답한 숨을 내뱉었다.
화가 나는 상황이었다. 그런 취급을 당한 것이 자존심 상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더는 윤서원을 찾아가지 말아야겠다고. 걔가 뭘 하고 지내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역시 그럴 수가 없다.
일방 각인 때문에 오는 통증 때문에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마음을 받아주려는 생각도 아니었고.
다만 임신했다는 윤서원이 혼자 힘들게 아이를 키워내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그냥…… 제 곁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를 붙잡고 싶었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발칵 뒤집히고 말 거니, 섣불리 다가설 순 없었다. 도겸은 일단 생각 좀 해 보자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도겸은 어렸을 적 서원과 함께했던 기억들에 몇 날 며칠 시달려야 했다.
* * *
“도련님.”
흐린 시야에 작은 소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얗고, 가늘고, 작고. 지금보다는 볼살이 더 통통하게 있어 귀엽다는 감상을 버릴 수 없는. 십여 년 전의 서원의 모습이었다.
“졸려요?”
어린 서원이 바닥에 앉아 공부하다 저를 돌아봤다.
도겸은 서원이 지내는 좁은 방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워 있었다. 한여름인데 에어컨도 안 달려 있고, 어디서 난 건지 모를 덜덜거리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서원의 방향으로 선풍기가 돌아갈 때마다 옅은 색소의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바닥이 시원해서 그런가,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딱 좋았다. 도겸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방이 좁아서 그런가, 네 방만 오면 잠이 잘 오는 것 같아.”
“좁은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서원이 욕하는 거 아니냐고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사실이었다. 제 방은 넓고 휑해서 그런지 혼자 밤에 누워 있으면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 탓에 도겸은 초등학생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가정부 아주머니가 책을 읽어 주어야만 잘 수 있었다. 지금은 혼자서도 잘 수 있게 됐지만, 선잠을 자거나 악몽을 꿀 때가 많았다.
그런데 서원의 방에 있으면 그러지 않았다. 방이 좁아서 그런지, 제 방에 있을 때면 느껴졌던 이상한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편안했다.
서원이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대답하며, 다시 공부하려는 건지 등을 졌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 퍽 아쉬워, 도겸은 괜한 소리를 했다.
“낮잠도 자고 그래야 키 크는 거야.”
“……도련님이 너무 큰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보셨어요?”
“너 키순 5번이잖아.”
“그게 언제 적이에요……!”
키 이야기에 서원이 발끈하며 돌아봤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작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렇지만 성장기의 나이에 다섯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기도 하고, 도겸은 우성 알파로 발현하면서 키가 폭발적으로 자라났다. 그렇기에 도겸의 눈에 서원은 늘 작고 인형 같았다.
도겸은 바닥을 짚고 있는 서원의 손을 톡톡 건드리며 장난기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자자.”
“혼자 자요. 저 숙제해야 해요.”
“이따가 도와줄 테니까 빨리.”
“…….”
서원은 바쁘다고 거절했지만, 숙제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조금 솔깃했는지 머뭇거렸다.
사정상 사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만 수업을 듣다 보니, 공부하면서 막힐 때마다 도겸에게 조금씩 묻곤 했기 때문이었다.
도겸도 은근히 가르쳐 주는 것에 소질이 있어서, 알려 줄 때마다 서원은 깨달은 얼굴을 했다. 그게 퍽 귀여워서 종종 가르쳐 줬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서원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당부하듯 말했다.
“십 분만이에요.”
“그래, 그래.”
십 분이든 뭐든 눈 좀 붙이자. 도겸이 그런 의미로 한쪽으로 팔을 쭉 뻗었다.
베라는 의미로 기다리자, 서원이 머뭇거리다 팔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옷을 입고 있는데도 머리통이 팔에 닿는 느낌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그게 뭔가 기분이 좋아서 도겸은 눈을 슬며시 감은 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달달달달…….
오래된 선풍기의 소음만이 방 안을 메우고 있는데, 숨을 고르게 내쉬던 서원이 정적을 깼다.
“도련님. 저 근데…… 궁금한 거 있어요.”
“뭔데?”
“만약 제가 우성 알파가 되면…… 저도 그렇게 키가 커질까요?”
뭔…… 우성 알파? 서원의 물음에 도겸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저번에도 우성 알파가 됐으면 좋겠다는 헛소리를 하더니만……. 아직도 그 기대를 못 버린 건가?
발현 전에는 뭐로든 발현할 수 있으니까 뭐든 기대해 볼 순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제가 생각하기에 서원은 우성 알파랑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그냥 알파랑도 안 어울렸다. 비하하는 뜻이 아니라…… 아무튼, 이미지가 안 어울렸다. 저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저번에 넌 알파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했다가 서원이 서운해했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도겸은 서원이 보기 전에 표정을 정돈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통은 그렇겠지? 우성 알파들 체격이 대부분 큰 편이라고 하니까.”
“그래서 그런가, 도련님은 딱히 운동도 안 하시는 것 같은데 몸도 좋은 것 같아요.”
“나? 뭐, 내 몸 본 적이라도 있어?”
도겸이 장난스레 서원을 변태 보듯 내려다봤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쪽을 보던 서원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찔리는 게 있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