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36)

<53화>

“……뭐?”

따스하고 다정한 기운이 담겨 있던 도겸의 눈빛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누군데?”

“도련님이요.”

“……어?”

서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하자, 이번에는 도겸이 무척이나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하기야, 모르는 것 같긴 했지……. 아무튼 몰랐더라도 저와 마음이 같다면 사귀게 되는 거였다. 어쩌면 미래까지도 새로 그려 볼 수 있었다.

그에 기대감을 품고 도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는 서원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술을 달싹거리고 당황한 낯빛을 지우지 못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그런 농담을 해.”

“진심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줄곧 도련님만 좋아했어요. 다른 사람 좋아한 적 한 번도 없고요.”

“…….”

“유학 가시기 전에 입맞춤하셨잖아요. 저 그때부터…….”

“잠깐만.”

제 고백을 농담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언제부터 그를 좋아했는지, 왜 그의 페로몬 파트너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는지 하나하나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도겸은 듣지 않고 말을 중간에 끊어먹었다.

그는 살짝 뒷걸음질을 쳐 서원과 거리를 벌린 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입을 손으로 가린 채 경계심 어린 눈으로 서원을 바라봤다.

“그때부터 날 좋아했다고? 그럼 아이는?”

“……아이는 미국에서 러트랑 히트사이클 올 때 생긴 것 같아요.”

“그때라면…… 내 아이잖아?”

맞아요. 서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당황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던 도겸의 얼굴이 이번에는 새파랗게 변했다.

놀랄 만한 일이라는 건 알았다. 도겸은 한 번도 제가 그를 그런 눈으로 본다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눈치였고, 심지어 아이도 이지환의 아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놀라는 건 당연한 건데……. 눈앞의 도겸은 거의 세상을 잃은 것처럼 충격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동요한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행복과 기대로 가득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스멀스멀 불안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 지금이 타이밍이 아니었나. 조금씩 힌트를 주고 천천히 다가설 걸 그랬나. 엉킨 실타래처럼 마음이 복잡해졌다.

서원은 불안한 눈으로 도겸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말을 고르듯 하던 그는 크게 숨을 내뱉더니, 따지듯 서원에게 질문했다.

“미치겠군……. 내가 그날, 사후 피임약 줬잖아. 설마 안 먹었어?”

고백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왜 아이가 덜컥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그는 서원이 일부러 제 아이를 가지려고 사후 피임약을 먹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서원은 순간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그런 오해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이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일부러 그의 아이를 가지고 협박하는 오메가로 몰린 것 같아 황급히 부정했다.

“아뇨! 먹었어요. 먹었는데…… 효과가 없었는지…….”

“…….”

“일부러 도련님 아이 가지려고 욕심낸 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도겸의 싸늘한 눈초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원은 애원하듯 굴고 있었다.

분명히 엄마가 그랬다. 도겸은 저를 좋아한다고. 행동하는 것도, 임신도, 각인을 시킨 것도 좋아하지 않으면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고 그랬다. 그러지 않으면 쓰레기라고 그랬다.

그래서 처음으로 기대를 품고 그에게 고백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를 좋아했노라고. 아이도 사실 이지환의 아이가 아니라 당신의 아이라고.

그런데 도겸은…….

“씨발, 정말로 내 아이라고……?”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하지 않았던 일에 휩쓸린 사람처럼 충격받은 얼굴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욕설을 지껄이고 있다.

도겸이 정말로 저를 좋아했더라면 이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아아, 결국은 엄마가 말했던 쓰레기류의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거절당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에게 거절당하면, 아이를 지우라는 강요를 받게 되면 엄마와 함께 집을 팔고 해외로 떠날 계획까지 짰으니까.

그렇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실제로 겪는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최악이었다.

게다가 일부러 사후 피임약을 먹지 않은 건지 저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제게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저는 그런 오메가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이용하기 편한 열성 오메가였던 것이었다.

“하…….”

서원이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날의 추억을 부정당하고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인생의 반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시간을 늘 함께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에 그 부분을 칼로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텅 빈 허망한 감정이 들었다. 그의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파트너로만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쓸모없는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저번에도 지금과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제게 박는다고 하면 기분이 더럽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아니, 그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기분이 더러웠다.

눈시울이 삽시간에 뜨거워졌지만, 그의 앞에서 더 추해지고 싶지 않았다. 더 바닥까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서원은 아랫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고 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말했다.

“저 도련님한테 아이 키워 달라고, 양육비 내놓으라고, 지분 내놓으라고 그런 짓 안 해요.”

“뭐?”

“지금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 하시는 거잖아요.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제가 좋아한다고 하면 그가 꼭 받아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거절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는 것은 기분 나빴다. 돈을 받고 그의 페로몬 파트너를 했던 것은 맞지만, 제가 그의 곁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함께했던 것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해하지 말라고. 제가 그의 앞에 걸림돌이 될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바로 돌아서려던 때였다. 도겸이 팔목을 붙잡으며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내가 무슨 걱정을 했다고?”

방금까지는 제 고백 때문에 세상을 잃은 얼굴을 해 놓고서는. 저에게 사후 피임약을 안 먹었냐고 물어 놓고서는……. 그걸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았다. 서원은 거칠게 도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방금 그랬잖아요. 나한테, 사후 피임약 먹지 않았냐고 묻고, 그런 눈으로 저 쳐다봤잖아요. 내가 모를 것 같아요?”

“내가 무슨…….”

“당신 같은 사람한테 마음을 연 내가 병신이야.”

“……뭐라고?”

“다시는 저 찾지 마세요. 일방 각인이든 페로몬 체증이든 알아서 풀어요. 거래할 때 말했죠. 제가 이기면 다시는 볼 일 없으면 좋겠다고. 오늘부터 보지 말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긴 했다. 도겸을 줄곧 좋아했으니까.

그러니 더는 붙잡지 말라고 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도겸은 서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더 강한 손길로 서원을 붙잡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하아……, 윤서원.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좀 알아듣게 말해. 왜 그러는데?”

“…….”

“내 반응이 뭐가 어땠는데? 좀 기분 나빠했다고 이러는 거야? 다른 사람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날 좋아하는 거였고, 그걸 파트너 하면서 숨겼고, 이지환 아이인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내 아이라면서.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하, 손뼉 치고 기뻐해야 하나?”

도겸은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하겠냐며 비꼬아 댔다.

서원은 그의 날카로운 언행에 고개를 휙 돌렸다. 외국 드라마에서처럼 헐리우드 액션을 해 가며 기뻐할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 반응은 그와 어울리지도 않았다.

“기뻐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도련님이 이렇게까지…….”

처음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사고로 일방 각인이 된 거일 수도 있으니 거절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제 마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아이를 지우라고 하는 것까지는 시나리오에 그려 뒀던 그림이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저를 그런 취급을 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말해서 뭐해요. 어차피 바뀌는 것도 없는데.”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말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다. 지금도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회사에서 난동 일어나는 게 싫으면, 더는 잡지 말아요.”

“하…….”

서원이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며 쏘아붙이듯 말하자, 도겸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서원은 도겸을 뒤로하고 전무 이사실을 빠져나왔다. 협박이 통했는지 이번에는 붙잡지 않았다.

쾅,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굳게 닫힌 문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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