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수업을 끝낸 서원은 슬기에게 방긋 웃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방에서 나온 서원은 목을 돌리며 뻐근함을 풀었다. 체력이 조금 떨어졌나. 어제 장시간 차를 탔던 게 회복이 안 된 건가……. 몸이 찌뿌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외주 작업이 아직 많이 들어오진 않았다.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슬기의 집 밖으로 나오는데, 훅 하고 매캐한 담배 냄새가 끼쳤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까 봤던 빨간 머리의 슬기 오빠가 대문 앞에서 쭈그려 앉은 채 껄렁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멀리 논밭을 바라보며 볼이 홀쭉해지도록 담배를 빨아당기던 그는, 대문을 나오는 서원을 보고는 급하게 담뱃불을 바닥에 지졌다. 담배에 별 관심이 없는 서원이 보기에도 막 불을 붙인 장초였다.
“계속 피우셔도 되는데.”
“뭐어……. 저, 선생님. 뭐 하나 여쭤 봐도 되나요?”
남자가 말을 붙여오며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까는 제가 앉아 있어서 몰랐는데, 꽤 키가 컸다. 도겸에 비하면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180은 거뜬히 넘는 것 같았다. 은은하게 낯선 페로몬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알파인 것 같았다.
도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라 그런지 낯선 남자의 알파의 페로몬이 썩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감이 들 정도라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는데, 남자가 고개를 살짝 내려 시선을 맞췄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싶었는데, 얼마 전에 서울에서 이사 오셨다면서요?”
“네? 네. 맞아요.”
슬기의 과외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줄 알고 바짝 긴장했는데, 남자는 다소 뜬금없는 것을 물어왔다.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서원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대답하자, 남자가 서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갑자기 이런 곳으론 왜 이사 오셨어요? 잘 알려진 곳도 아니고, 샌님 같은 게 농사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로 빚쟁이들한테 쫓겨서 도망 온 거예요?”
쳐다보는 시선이나 ‘샌님’이라는 단어가 왠지 좋은 의미로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빚쟁이라니……. 이전에 슬기가 제게 물은 것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슬기에게는 그런 거 아니라고 잘 설명해 줬으니 슬기가 말한 것도 아닐 텐데.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듣고 온 건지 모르겠다.
마을 사람들이 종종 묻기에 아니라고 몇 번 대답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난데없이 저런 질문을 받으니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빚은 아니고요. 단순히 사정이 있어서요.”
“언제까지 여기서 지낼 생각이세요?”
“그건 모르겠는데.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별로 좋은 의미로 물어보는 것 같지도 않은데, 친절하게 대답해 줘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
서원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투를 조금 날카롭게 세우자, 남자는 그 기색을 금방 읽어낸 듯 멋쩍게 뒷덜미를 긁적였다.
“아니, 이 시골에서 제 또래인 사람을 보는 게 흔치 않잖아요. 그래서 신기해서 물어본 건데…….”
“…….”
“기분 나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남자는 의외로 빠르게 잘못을 시인하며 사과했다. 어정쩡하지만 고개를 꾸벅이기까지 했다.
빠르게 사과해서 그런가 뾰족하게 세워져 있던 신경이 금방 가라앉았다.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니. 외모에서 온 편견 때문에 더 불량하게 받아들인 것도 있는 것 같았다.
반듯한 모습에 서원은 머쓱함을 느끼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럼 그쪽 이름이랑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주세요.”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 케이스를 빠르게 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반대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서원에게 내밀었다. 번호를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너무 뜬금없지 않나. 그런 맥락도 아니었는데……. 서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신상 정보 안 팔아먹고. 시골 내려올 때마다 심심해서 그래요.”
“…….”
고작 한 번밖에 대화를 안 섞어 본 사람에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 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이 사람은 슬기의 오빠였다. 나쁜 의도로 알려 달라고 하는 것 같지 않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서원은 남자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물건을 험하게 쓰는 편인지 남자의 핸드폰 액정은 반쯤 나가 있었다. 서원이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번호와 이름을 적자, 남자가 핸드폰을 되받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윤서원? 나이는요?”
“스물여섯 살이에요. 그쪽은요?”
“네? 스물여섯이요? 훨씬 어릴 줄 알았는데 동갑이네요? 저는 이지환이에요.”
서원이 나이를 말하자 지환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뒤늦게 나이를 덧붙이는 걸 보니 스물여섯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눈치였다.
하긴, 서원은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나이를 알릴 때마다 다들 의외라고 하긴 했었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니 어리게 생기기도 했고, 오메가이다 보니 체구도 남들보다 작아 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눈치였다.
그나저나 이 사람, 저보다 어렸구나. 그렇게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서원이 의외라고 생각하며 남자를 바라보는데,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이왕 동갑이니까 말 놓을까요?”
“말? 어, 어……, 그래.”
“와, 여기서 동갑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
서원이 어정쩡하게 허락하자마자, 지환은 굉장히 친근한 척을 해 왔다. 이런 깡시골에서 동갑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굉장히 반가운 것 같았다.
하기야 같은 또래인 것 같아서 기다리다 말을 거는 사람인데, 동갑이면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 수 있었다.
“근데 동갑이라고 하니까 더 이해가 안 되네. 과외 선생님 할 정도면 스펙 좋지 않나? 어디 대학교 나왔어?”
“나? 어……, 한국대.”
“뭐? 한국대? 이야, 여기서 한국대 나오면 바로 현수막 걸리는데. 완전 좋은 대학교 나왔네.”
지환은 한국대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서원의 어깨를 팡팡 내리쳤다. 선망의 눈길은 덤이었다.
보통 한국대를 나왔다고 하면 이런 반응이었다. 한국에서는 내로라하는 대학교이니까……. 그런데 이런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서원은 도겸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대학교면 취업도 쉽지 않겠다고 비꼬듯 한 말이. 그다지 좋은 기억도 아닌데 충격적인 말이라 그런지 좀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도겸 생각 좀 그만해야지. 서원이 애써 그를 머릿속에서 지워내는데, 지환이 이해하기 힘들단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 근데 한국대학교 나왔다고 하니까 더 이해가 안 되네. 진짜 여기는 왜 내려온 거야? 빚도 아니고 개인적인 사정? 뭔데?”
“뭐…….”
“말하기 곤란한가?”
친하지 않음에도 그의 친화력 때문에 말해 주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워낙 마을이 좁아 금방 소문이 나고 도겸에게까지 닿을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다. 굳이 말하고 싶은 사연도 아니고.
그래서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그냥 곤란하다며 어색하게 웃으며 뭉뚱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득, 지환의 얼굴을 보니 슬기가 그를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프로게이머라고 설명했던 게 떠올랐다.
서울에서 오기도 했고 나이도 동갑이고, 무엇보다 이 남자는 알파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서원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최대한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 이유 말해 줄 테니까,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시간만 내주면 되는 일인데…….”
주먹을 꽉 쥐는 서원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 * *
다시 다가온 주말, 왔던 시간에 또 찾아오겠다고 한 말을 약속 잡은 거라고 생각하는지, 도겸은 오늘도 뻔뻔하게 서원의 집을 찾아왔다.
이제는 왜 왔냐고 할 말도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 서울에서 마주했던 터라 오래간만에 보는 느낌도 없고……. 지금 들어서 생각한 건데, 그를 피하려고 시골로 내려왔는데, 어째 그를 가장 자주 만나는 것 같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서원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도겸을 보며 그런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도겸이 차에서 내릴 때부터 팔에 끼고 있던 서류 봉투를 서원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 받아.”
“……이게 뭔데요?”
“보면 알아.”
“…….”
간단하게라도 설명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또 계약서를 들고 온 것 같아서 그다지 기대가 되지도 않았다. 조건을 상향시켜 준다는 거겠지.
심드렁하게 서류 봉투를 열고 안에 있는 문서를 확인하는데, 서원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확장됐다.
안에 든 문서는 다름 아닌, 파트너 계약을 하고 있을 때 쓰고 있던 집을 서원에게 양도하겠다는 문서였다.
“아파트……?”
“너한테 양도할 거니까 거기에 사인해. 이 일로 일어나는 세금 문제는 우리 회사 측에서 해결할 거니까 깊게 생각할 것도 없고…….”
“아니,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라…….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단 한 번도 아파트를 탐내 본 적 없다. 갑자기 그가 아파트를 줄 만큼 그 기분 좋을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최근에는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만 했었는데, 갑자기 아파트를 주겠다고?
마카롱과 같은 자그마한 간식들은 그의 재력에 티끌만 한 흠집도 못 줄 것들이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는 아니었다. 아무리 돈이 많은 그라도 이런 건…… 너무했다.
서원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도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만두자고 할 때까지 계속 파트너를 이어 갔다면 펜트하우스를 주겠다고 했었잖아. 그것까진 안 되더라도 6년은 책임졌으니 뭐 하나는 줘야지.”
“설마 이런 거로 다시 파트너 시키려는 거라면…….”
“그런 거 아니니까, 받아. 원래 주려고 했던 거야.”
“…….”
도겸은 아파트를 주는 것과 파트너 연장 설득을 하는 건 별개의 일이라며 강조했다.
원래 주려고 했던 거라고 하니 받아도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될 것 같은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서원은 보고 있던 문서를 다시금 봉투 안으로 곱게 밀어 넣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일단…… 감사합니다. 혹시 모르니까 서류만 가지고 있을게요.”
“뭘 혹시 몰라?”
“도련님이 마음을 바꿀 것 같아서요.”
“내가? 나 하겠다고 한 건 안 바꿔.”
도겸이 별걱정을 다한다며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만 이미 한 번, 파트너를 그만두겠다고 할 땐 별다른 물음도 없이 보내놓고서는 계속 쫓아오고 있으니 신용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저 데이트 갈 예정이라, 오늘 양도 서류 받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요.”
“뭐?”
도겸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