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어떤 염치로 엄마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서원이 마땅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자, 도겸이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혔다.
“일찍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하루 묵고 가게 됐습니다.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죄송합니다.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많이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죠. 아침 준비할 건데, 먹고 갈래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급히 일을 나가 봐야 해서…….”
“그래요?”
“다음엔 제가 꼭 대접해드리겠습니다.”
도겸은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지 못하는 것이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렸다.
지희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 앞까지 향하자, 타이밍 좋게 도겸의 전화가 울렸다. 힐끗 보이는 액정에는 어머니라는 세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작게 혀를 차곤 서원을 돌아봤다.
“연락 꼭 받아. 병원은 꼭 가 보고.”
“……얼른 가세요.”
서원이 대답을 은근히 피하자 도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아졌다.
그는 대답을 채근하고 싶은 눈치이다가도, 쉴 새 없이 울리는 핸드폰과 지희의 눈치에 더는 무어라 하지 않고 금방 방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 집에는 서원과 지희만 덩그러니 남았다. 평소 워낙 사이가 애틋한 사이였다 보니 어색할 일 없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유달리 어색했다. 집 안에 흐르는 공기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공백이 어색했다. 서원은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다, 먼저 입을 열어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엄마가 좀 깨워 주지 그랬어요.”
“곤히 자길래 그냥 뒀지. 그런데 서원아.”
지희는 도겸이 나간 현관문을 응시하다, 천천히 서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말투도 표정도 평소와 같은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묘한 긴장감에 침을 꼴깍이자, 지희가 머뭇거리다 뒤늦게 말을 이었다.
“네 애……. 도련님 아이니?”
“……네?”
분위기가 묘하게 날카롭단 건 눈치채고 있었으나, 그녀의 입에서 이러한 물음이 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듯 철렁했고, 도겸의 아이라고 알릴 생각이 없는데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혀가 돌덩어리가 된 것처럼 아무런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서원이 놀란 얼굴로 지희를 바라보자, 그녀가 착잡하다는 듯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그럴 성격이 아니잖아.”
“…….”
“도련님이 미국에서 돌아온 날에 보였던 반응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밑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도 좀 의외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그때부터 그런 사이였니?”
“아, 아니에요!”
서원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언성을 높였다. 추측은 반쯤 맞았으나, 그때부터 그런 사이였던 건 결코 아니었다.
물론, 도겸이 유학을 끝내고 미국에서 돌아오던 날 보였던 행보는 여전히 저택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을 정도의 사건이었다. 몇 년 만에 돌아와 놓고서는 부모님도 아닌 가정부의 아들을 가장 반갑다는 듯 반겼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부모님이 일 층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페로몬 파트너 계약을 맺고 관계까지 맺었다. 도겸의 방에서 그런 일까지 일어난 줄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질 않았으니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많았다.
서원이 그런 일이 아니라고 한사코 부정하자, 지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이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서원은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고민하다, 결국 한숨을 내뱉듯 이실직고했다.
“엄마가 말한 대로 임신한 거…… 도련님의 아이가 맞아요. 그렇지만 그런 사이였거나 한 건 아니에요.”
“하아. 서원아. 어떻게 하려고 도련님의 아이를……. 도련님은 모르시는 것 같던데.”
“……아마도요.”
“들키면 어쩌려고?”
“모르게 해야죠.”
도겸이 이런 식으로 저를 계속 쫓아다닌다면 임신 사실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전에 제가 그를 떨쳐내야만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서원이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지희가 푹푹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차라리 도련님한테 다 말해. 아이 가졌다고. 내 생각엔 도련님이 알면 너를 그렇게 힘들게 내버려두진 않을 것 같아. 어제 보니까…….”
“그건 안 돼요!”
지희가 조곤조곤 설득했으나, 서원은 조금 창백한 낯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도겸에게 사실대로 말하라니. 저도 처음에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방법도 생각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절대로, 안 됐다.
“지우라고 할 게 분명해요. 절 오메가로 보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제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생각할 사람이에요.”
“오메가로 안 본다는 사람이 애를 임신시키고 꼭 껴안고 자?”
지희는 어제 서원과 도겸이 어떻게 잤는지 다 알고 있다며 캐물었다. 어제 느지막한 시간까지 둘 다 방에서 나오질 않으니, 본 게 틀림없었다.
“그건, 도련님한테 사정이 있어서…….”
“내가 도련님을 잘 알지는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럴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마음에도 없는데 저러면 쓰레기지.”
지희가 단언하듯 말했다. 그녀는 도겸이 서원을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쓰레기라니. 말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니까. 양심이 있으면 그렇게 행동 못 하니까.
그렇지만, 도겸은 제 앞에서 누누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말해 오지 않았나.
간혹 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도 있긴 했다. 사춘기 애들처럼 괜히 틱틱거리며 좋아하는 사람한테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만 도겸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저런 성격이었다. 그의 열네 번째 생일이자 제가 열성 오메가로 발현하던 날 입맞춤을 하고 잠적하는 기이한 행보를 보이자마자, 대뜸 유학을 가 버리고 암묵적으로 없던 일로 치고 넘어가던 사람 아니던가.
“아니에요……. 도련님은 절 안 좋아해요. 도련님은, 그냥…… 절 상대하는 게 편해서 그래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아이를 지우는 것만큼이나 그의 입에서 완전히 거절의 말을 듣는 것이 제 인생의 기반을 완전히 뒤흔들어 버릴 것 같았다.
너무 회피만 하는 것 같지만, 제 마음과 아이에 대한 일은 오롯이 저만의 일로 묻어두고 싶다. 이 기나긴 짝사랑의 끝이 언제 날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싶다.
서원이 체념이 뚝뚝 묻어나는 대답을 하자, 지희가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리며 조언했다.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니까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 안 하는 건 다시 생각해 봐.”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래. 배고프니까 얼른 밥 먹자. 거의 다 준비됐으니까 수저 좀 챙겨 줄래?”
“네.”
서원은 흐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 수저를 챙겼다.
와중에 엄마가 챙겨 준 식사는 맛있어서 다시 서울을 떠나야 하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 * *
서원은 그날 점심에 버스를 타고 다시 시골의 집으로 돌아왔다.
산부인과에서는 매달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게 좋다고 했지만, 그림자처럼 제 뒤를 밟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병원은 최대한 자제하기로 했다.
열성 오메가이다 보니 유산할 확률이 크다는 게 마음에 밟혔지만, 도겸에게 들켜도 아이를 지우게 될 거라는 결론은 매한가지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하루가 지나고, 슬기의 과외가 있는 날이 왔다. 슬기의 집에 방문해서 익숙하게 수업을 이어 가고 있는데, 바깥에서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문밖에서 쿵, 쿵, 쿵 하고 거친 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껏 투덜거리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왜 맨날 이런 걸 나한테 시키냐고.”
그리고 벌컥,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서원과 슬기가 수업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자, 빨갛게 머리를 염색한 남자가 한 손에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남자는 한눈에 봐도 성격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찢어진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을 뿐인데도 왠지 모를 껄렁함이 물씬 느껴졌다.
“드시면서 하세요.”
발걸음 소리도, 방에 들어오기 전에 하던 소리도 한껏 짜증으로 뒤섞여 있어서 시비를 걸 것만 같았는데, 서원과 슬기를 마주하고 뱉는 목소리는 정상적이었다.
그는 말을 하곤 들고 온 그릇을 공부 책상 위에 올려 줬는데, 설탕이 뿌려진 토마토가 담겨 있었다.
슬기네 부모님이 토마토도 조금 키운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수확한 건가? 잠깐 생각하고 있는데, 슬기가 화색을 보이며 낭랑한 목소리를 냈다.
“맞다, 선생님. 저번에 제가 말했던 저희 오빠예요.”
“야, 너 어디 가서 내 얘기 하고 다니냐?”
“응, 며칠 전에 선생님이랑 오락실 갔는데, 거의 오빠만큼 게임 잘하셔.”
“넌 그 게임을 아직도 하냐? 하이고…….”
슬기에게 핀잔을 준 남자는 뒤늦게 서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서원을 보자마자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큼흠, 안녕하세요.”
“네……. 토마토, 맛있게 먹겠습니다.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뭐어…….”
남자는 멋쩍은지 뒷덜미를 긁적였다. 귓가가 염색한 머리칼만큼이나 붉게 물들었다. 방금까지 슬기와 이야기를 잘 나눴던 걸 보면,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어색한 듯 보였다.
서원도 내향적인 편이라,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게 편하지는 않았다. 서원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가만히 앉아 있던 슬기는 그런 오빠를 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저래? 음, 선생님. 저희 토마토 먹고 해요.”
“이 페이지까지 풀고 먹자.”
“아, 쌤!”
슬기는 조금이라도 농땡이를 피우고 싶은 듯 어깨를 탈탈 흔들며 아양을 부렸다. 좀 쉬게 해 달라는 간절한 의지가 보였지만, 서원은 눈으로는 웃으면서 꿋꿋이 수업을 이어 갔다.
결국 설탕 뿌린 토마토를 먹게 된 건 슬기가 문제를 다 풀고 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