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의 반응에 서원은 아차, 싶어졌다. 난데없이 비비적거린 것도 그렇지만, 눈물도 그렇고 땀도 그의 손에 닦아 낸 게 되지 않나.
땀을 남의 손으로 닦아 내는 건 예의도 아닐뿐더러, 도겸은 무척이나 깔끔한 편이었다. 서원은 제가 도겸이 싫어하는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 퍼뜩 눈물을 그치고 그의 손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죄송해요……. 시원해서.”
“아니……, 미안할 건 없고. 몸이 완전 불덩이인데 병원은 갔어? 약은 먹었고?”
다행히 도겸은 화를 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뭐라고 놀리기라도 했을 텐데, 환자라고 봐주는 것 같았다. 대신 왠지 묘하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평소라면 이상하게 봤을 행동이었으나, 아파서 죽어 가던 서원에게는 뵈는 게 없었다. 서원은 바싹바싹 마른 입술을 벌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뭐? 다 죽어 가는데 병원을 안 갔다고? 내가 사람 불러올 테니까…….”
“그, 그건 안 돼요!”
도겸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서원이 후다닥 그의 손을 붙잡았다.
미약한 힘이었으나, 다행히 도겸은 그대로 멈췄다. 도겸의 손은 아까와 달리 조금 미지근해져 있었다. 38도까지 열이 오른 서원의 손과 비슷한 체온이었다.
그는 목이 타는지 침을 삼키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안 되는데?”
“도련님이 저랑, 만난 거……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잖아요…….”
“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지금 그게 문제야?”
그것만은 안 된다며 처연하게 도겸을 붙잡았지만, 가만히 듣던 그는 고작 그런 이유일 뿐이냐며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도겸에게는 ‘고작’인지 몰라도 서원에게는 ‘고작’이 아니었다. 도겸이 서원을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면, 도겸이 이 방을 자주 들락날락했다는 것을 이 집안사람들이 다 알게 될 것이다.
윤서원은 엄마 덕분에 이 집에서 살고 있지만, 없는 사람처럼, 귀신처럼 지내는 게 조건이었기 때문에 도겸과는 모르는 사이여야만 했다.
서원이 아는 사모님이라면, 아마 저와 도겸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저를 쫓아낼지도 모른다. 엄마를 자르지는 않겠지만, 열네 살에 혼자 떨어져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여기서 쫓겨나면……, 다시는, 도련님이랑 못 볼 수도 있어요…….”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도겸과의 접점을 완전히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자그마치 9년 동안 자주 봐 왔지만, 도겸과는 애초에 그런 사이였다. 제가 이 집에서 지내지 않았다면 절대로 마주칠 일 없는 부잣집의 도련님.
처음에는 제가 도련님과 이렇게 가까이 지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은 그를 못 보게 된다면 많이 슬플 것 같았다.
서원이 그건 안 된다며 붙잡은 손에 힘을 주자, 도겸은 멈칫했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다시금 엉덩이를 붙이고 앉더니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너희 엄마는 언제 오는데?”
“도련님 생일 파티 끝나고요.”
“아.”
서원의 대답에 도겸이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듯 탄식했다.
그는 검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더니, 자조적인 말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씨발, 난 왜 이런 날에 태어나서…….”
방 밖에서는 성대한 파티가 준비 중이건만, 정작 당사자는 파티를 없애 버리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다.
서원은 저 수많은 사람이 저를 위해 생일 파티를 해 주면 좋을 것 같건만, 도겸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며 지긋지긋한 눈치였다.
하기야, 그는 평소에도 모자람 없이 먹고 지내니까 음식을 성대하게 차리고 저택을 꾸민다고 한들 크게 와닿을 것 같진 않다.
맞다, 그러고 보니……. 서원은 문득 든 생각에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제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 저와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다들 그를 찾고 있을 텐데?
저와 함께 있어 주는 건 좋았지만,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도겸은 그런 건 신경 쓰지도 말라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준비 중이야. 그리고 저녁에나 끝날 텐데, 뭘 굳이.”
“…….”
그런가? 하긴, 준비 중이라면 일찍 갈 필요는 없긴 하겠는데……. 파티에 참여해 본 적은 없으니 그의 말대로 지금은 안 가도 되나 보다, 하고 어림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서원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도겸이 킁킁거리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갑자기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냐?”
“저한테서요? 땀 많이 흘렸는데?”
좋은 냄새가 난다니. 서원이 지내는 작은 방은 환기도 잘 되지 않았고, 열이 들끓는 탓에 땀을 줄줄 흘린 참이었다. 좋은 냄새가 날 곳이 없는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같이 킁킁거리는데, 순간 진짜로 좋은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이건…….
“제가 아니라, 도련님한테서 나는 향기 같은데요?”
“나한테서?”
“네, 향수 뿌리셨어요?”
“아니.”
향수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향기로운 냄새가 날 리가 없을 텐데? 아깐 울 만큼 아팠건만, 그새 덜 아파져서 그런지 그에게서 나는 냄새가 맞나 궁금해졌다.
몸을 일으킬 힘은 없어, 서원은 그를 향해 두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잠깐…… 이리 와 보실래요?”
“왜?”
서원의 말에 도겸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런 건 왜 시키냐는 반응이었다.
평소라면 ‘내가 왜? 네가 와.’하고 넘어갔을 반응이었지만, 그는 환자한테 좀 약한 편인 것 같았다. 웬일로 순순히 몸을 수그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손에 그의 뒷덜미가 닿았을 때, 서원은 팔에 힘을 줘 그를 바싹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목덜미에 대고 코를 킁킁거리자, 방금 맡았던 향기가 훨씬 더 진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그에게서 나는 것이었다.
“역시 도련님한테 나는 거 맞는데. 그럼 체취인가 봐요……, 어……?”
“씨발, 윤서원.”
어디서 나는 향기인지 근원지를 찾았을 뿐인데, 도겸은 난데없이 욕설을 지껄이더니 별안간 서원의 어깨를 손으로 꾹 눌렀다.
안 그래도 몸이 무거워서 일어날 힘도 없었는데, 몸이 위에서 아래로 눌리기까지 하니 거미줄에 박제된 나비처럼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서원은 험악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도겸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움에 눈을 깜빡거렸다. 제가 뭐라도 잘못한 걸까? 그냥……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하기에 어디가 근원지인지 찾았을 뿐인데.
서원은 겁에 질려 그의 목덜미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도겸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그의 목덜미에서 맡았던 우드 향이 순간 공간을 가득 메운 것처럼 짙고 무거워졌다.
콧날이 닿을 듯 가까워지는 거리에 혹여 입맞춤이라도 하려는 걸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애인조차 사귀어 본 적 없는 데다, 설마하니 도련님과 첫 키스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기에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는데, 숨결이 닿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입술 위로 보드라운 것이 붙었다 떨어졌다.
쪽, 하는 작은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키스도 아닌 새가 쪼고 지나가는 듯한 짧은 뽀뽀였다. 입술에 닿는 촉감도, 소리도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리는데, 도겸이 가까운 거리에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질질 흘려서 그런 거야.”
“…….”
그게 무슨 소리지. 서원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조심스레 눈을 뜨자, 도겸이 복잡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왜 갑자기 입술에 뽀뽀했는지 해명하지도 않고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쾅!
문이 조금 큰 소리를 내며 닫히고, 서원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사람처럼 멍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입술은 떨어진 지 오래인데, 보드라운 입술이 붙었다 떨어진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손끝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도겸이 천천히 제게 다가오던 모습이 떠올랐다. 도겸을 친한 도련님으로서 생각하기만 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멋대로 뽀뽀를 하고 갔으니 당연히 기분 나빠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제 감정이 선명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서원이 다섯 살부터 열네 살이 될 때까지. 9년이라는 시간 동안 봐 온 도겸은 제게 시비도 많이 걸고 말도 예쁘게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좋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다.
사춘기 때부터는 그와 있을 때 심장이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뛰고, 같이 누워 있으면 이상하게 의식되는 일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뚜렷했던 그의 이목구비가 새삼스럽게 잘생겨 보이는 때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나, 도련님을 좋아했나 봐.”
그게 다 좋아서 그랬던 거였던 모양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낀 게 처음이라서 이 감정의 의미를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도겸이 이 방을 찾아오면 기뻤고, 그렇게 멋대로 굴어도 기분 나쁘지 않고 다 좋게 느껴졌구나.
그래서…… 뽀뽀를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구나.
좋아하는 사람과 뽀뽀를 했다는 건 조금은 마음이 통했던 걸까 싶어서 설렜지만, 그 감정을 얼마 느끼지도 못하고 다시금 열이 확 올랐다.
부끄러움에 낯뜨거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뜨겁게 달아오른 쇳물에 몸이 타는 느낌이었다. 도겸과 함께 있었던 순간이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만큼 온몸을 다시 감싸오는 뜨거운 열에 서원은 몸을 웅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