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이후, 도겸은 서원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제 말에 꼼짝도 하지 못하는 아이라는 걸 안 이후로는, 종종 가정부와 과외 선생님의 눈을 피해 서원의 방에 숨어들어 오기도 했다.
서원의 엄마인 지희마저도 도겸이 가정부의 방에 숨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애먼 곳을 뒤지며 도련님을 외치곤 했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서원의 나이는 아홉 살, 그의 나이는 열네 살이 됐다.
“야, 네 방에는 먹을 거도 없냐?”
오늘도 도겸은 만화책을 들고 서원의 방을 제 방 드나들듯 들어오더니, 바닥에 태평하게 누워 과자를 찾았다.
사람 둘이 들어오면 꽉 찰 만큼 좁은 방에 와 봤자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찾아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서원은 바닥에 엎드려 수학 문제집을 풀다, 남몰래 한숨을 쉬곤 입을 열었다.
“없는데요.”
“너 그렇게 못 먹고 다니니까 키도 안 크고 뼈밖에 없는 거야.”
“저 그, 그렇게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요…….”
“너 키순 몇인데?”
“……5번이요.”
“조빱이네.”
“…….”
사람 보고 조빱이 뭐야…….
어이가 없어서 따지고 싶었지만, 말대꾸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예전에 그가 ‘길바닥에 나앉고 싶어?’하고 말한 게 농담이 아닐 정도로, 그는 이 저택에서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는 하나뿐인 도련님이었다.
게다가 그의 눈에는 서원이 작아 보일 만했다. 나이 차이를 떠나, 몇 년 사이에 그의 키가 훌쩍 커졌기 때문이었다.
한집에 살다 보니, 궁금하지 않아도 가정부들끼리 하는 대화를 듣게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도겸은 작년인 열세 살에 우성 알파로 발현했다고 했다.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알파, 오메가, 베타는 사람마다 발현 시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이 성인이 되기 전에 발현한다고 했다. 알파 중에서도 우성 알파는 세상에 그리 많지도 않다고 했다.
알파가 가장 뛰어난 신체 조건을 가진다고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우성’ 알파라 그런지 도겸은 벌써 나이대답지 않게 몸이 커다랬다. 중학생인데 180cm를 훌쩍 넘은 것 같았다. 중학교에 들어오고 교복만 몇 번 새로 맞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제가 작아 보이겠지. 서원이 그렇게 납득하는데, 그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서원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먹을 걸 따로 챙겨 와야지, 안 되겠네.”
제 키가 작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니면 과외 선생님을 피해 숨어들어 오는 아지트에 먹을 게 없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카롱이나 조각 케이크를 종종 아지트로 가져왔다. 단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런 건 왜 자꾸 가져오는지. 한두 입 먹고 질린다며 제게 먹으라고 떠넘기듯 주곤 하니까 좋긴 했다.
그런 간식은 거의 다 제가 먹곤 했으니, 더 먹는다고 키가 크는 것 같진 않고 유전이나 형질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그리고…….
“……저도 알파가 되면 크지 않을까요?”
“뭐? 너 알파가 되고 싶어?”
“알파가 되면 키가 커진다던데요? 몸도 튼튼해지고. 우성이면 더 좋다고 했어요.”
“…….”
우성 알파가 되는 게 꿈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래도 다들 우성 알파라고 하면 우러러보고 존중해 줬으니, 이왕이면 우성 알파로 발현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대답을 했을 뿐인데 왜인지 도겸의 얼굴은 오만상이 되어 있었다.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왜 저래? 제가 뭐 못 할 말 했나? 웬만한 사람들은 다 원하는 건데 저라고 원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단순한 희망 사항인데…….
서원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넌 알파랑 안 어울려.”
“네? 형질에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어딨어요?”
“말대꾸하지 마.”
“…….”
형질이라는 건 원하거나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따지고 발현되는 게 아니건만, 왜 저렇게 말하는 건지…….
게다가 알파랑 안 어울린다는 말은 욕 같았다. 알파 중에 잘생기고 우람하고 덩치도 큰…… 그래, 도련님처럼 멋있는 남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알파가 되고 싶은데.’
서원은 알파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 억울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고귀하신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 반박도 하지 못하고 문제집 푸는 것에 집중했다.
* * *
서도겸은 시비를 걸기 위해서인지 서원을 꾸준히 찾아왔다.
솔직히 그가 와서 하는 거라곤 키는 도대체 언제 크는 거냐, 밥은 제대로 먹는 거냐, 성적은 얼마나 나왔냐, 처럼 하나같이 시비를 거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왜인지 서원은 그의 묘한 태도에 끌림을 느꼈다. 워낙 호감이 가는 얼굴이기도 했고, 제 세상에서는 가장 위대한 사람처럼 보이는 도련님이 제게 잘해 주기까지 하니 저도 모르게 그가 오는 시간을 은근히 기대하게 됐다.
우리는 단순히 도련님과 가정부 아들의 사이가 아니라 진짜 친구 사이라고…….
그렇게 서원이 열네 살, 그리고 도겸이 열아홉이 되던 때에는 완전히 그에 대한 마음이 열려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아지트를 들키지도 않고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서원이 앓아누웠다.
삐삑.
“38도. 열이 너무 높네…….”
서원의 엄마가 심각한 얼굴로 체온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무척이나 난감한 상황이었다. 학교를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아이가 순식간에 열이 들끓더니 드러누운 것이다.
징조라고 할 것도 없이 갑자기 열이 오른 게 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서원을 데리고 병원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무척이나 안타깝게도 오늘은 도겸의 생일이었다.
저택의 작은 주인님의 생일은 매년 성대하게 준비했다. 도련님의 나이가 벌써 열아홉 살이라 그만할 법도 했는데, 생일 파티를 여는 게 사모님의 소소한 행복이라 매년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준비하고 저택을 꾸며야 했다.
정작 당사자인 도겸은 이제 이런 건 귀찮다는 기색이었지만, 사모님은 그런 녀석의 모습마저 사랑스러운지 멈추지 않았다.
도겸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준비해야 하는데, 아픈 서원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녀는 서원의 작은 손을 포개며 한껏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서원이 곁에 있고 싶은데, 일이 있어서……. 어쩌지?”
“엄마…….”
서원은 힘이 다 빠져 가는 소리로 엄마를 찾았다. 살면서 이렇게 아파 본 게 처음이라 죽을 것만 같은데, 몇 시간 동안 혼자 있어야 할 생각을 하니 서러워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렇지만 차마 엄마에게 가지 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좁은 방에서라도 서원이 엄마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된 건 엄마가 이 저택에서 일하는 가정부이기 때문이었다. 서원은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엄마를 방해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오늘이 다른 날도 아닌 도련님의 생일이라는 것도.
붙잡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서원은 꾹꾹 감정을 눌러 삼키며 목소리에 힘을 줬다.
“별로 안 아파. 열만 오른 거야…….”
아무리 아프지 않은 척을 한다고 해도, 열네 살 아이였다. 목소리에 색색거리는 숨이 섞였다.
그것을 아는 지희는 좀 더 서글퍼진 얼굴로 서원의 작은 손을 도닥이다 입을 열었다.
“얼른 준비하고 올 테니까 푹 쉬고 있어. 끝나면 바로 병원 같이 가자. 알겠지?”
“응…….”
서원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희는 그러고도 한참 서원을 바라보다 바깥에서 그녀를 찾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서원은 눈을 스르르 감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부양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지럽고 머리도 아프고 식은땀도 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뭐가 문제였던 걸까. 도서관에서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쐤던 거? 아니면 돌아와서 도겸과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던 것? 감기에 걸릴 만한 행동은 그것밖에 없는데,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렇게 아픈 거라면 너무 억울했다.
눈가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소리를 참아내며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조심스레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엄마가 온 걸까? 생각보다 일찍 돌아와서 옷소매로 눈물을 부랴부랴 닦는데,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서원, 왜 울어?”
눈물로 뿌옇던 시야를 닦아내니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도겸이 제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흐으…….”
서원은 왜인지 도겸을 보자마자 방금 닦아 낸 눈물이 다시금 울컥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겸이 편해서일까, 아니면 그의 생일 파티 때문에 엄마랑 같이 있지도 못하고 병원 가야 하는 것을 미뤄서 그런 걸까. 마음이 놓이면서도 억울한 느낌에 혼자 울 때보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멈출 줄을 모르고 흘러나왔다. 숨죽여 우는 것도 못 하게 될 정도로 눈물을 펑펑 흘리자, 도겸이 놀란 얼굴을 하며 답지 않게 허둥댔다.
“왜, 왜 그래? 어디 아파?”
“흐, 흐으으……, 흐윽…….”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갛고?”
도겸은 걱정이 묻어나는 얼굴로 서원의 뺨에 손을 댔다.
도겸은 해마다 키가 더 자라났고, 그만큼 손도 커다랬다. 서원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시원하기도 했고, 커다란 손이 왠지 모르게 듬직해서 의지하고 싶게 느껴졌다.
비비적거리고 있자니 왜인지 지끈거리던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도겸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제 행동 때문인지 도겸은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