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여기서 이진을 편애하는 대답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력이나 인기 면에서 이진이 미열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홍서가 한 질문은 이진과 미열의 실력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승현이 누굴 더 좋아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니까 승현이 ‘백미열이나 유이진이나 마찬가지.’라며 꼬리를 잘라도 이해는 할 건데, 그런 상상을 하니 이상하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투표 조작 된 거 아니냐고 따져도 돼요?”
승현이 몹시도 곤란한 목소리로 물어봤다.
“으하하, 그런 거 안 돼요!”
“형이 순위 밖으로 밀려날 리가 없는데.”
“이진 씨를 향한 신뢰가 정말 강하네요!”
홍서는 이쯤에서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려는지 더 구체적인 답을 추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아온 돌멩이를 직격으로 맞은 이진은 두루뭉술한 답변을 적당히 넘길 수 없었다.
“승현아, 투표 조작 된 거 아니라고 하면 나 안 뽑을 거야?”
이진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승현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아니요, 그게…….”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봐.”
어깨에 얹힌 손에 힘이 실리자 승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니, 이 자식 진짜로 고민하잖아?’
카메라 앞에서 입조심하기 위해 함구하는 것치고는 심하게 당황하는 게 아닌가. 승현은 진심으로 이진이 순위권에서 멀어지면 어쩔 수 없이 탈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괘씸함에 치가 떨렸다.
“그러는 형은 어떤데요. 형도 백미열이 순위 밖이면 안 뽑을 거 아니에요?”
“지금 백미열 얘기가 왜 나와!”
“아니, 두 분 여기서 싸우시면…….”
승현은 자신만 이런 추궁을 받는 게 억울한지 미열을 언급하며 따졌다. 이미 마음이 상한 이진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 두 사람이 대뜸 언성을 높이자 원인을 제공한 홍서가 끼어들어 말렸다.
그 난장판 속에서 찬우는 백미열 귀가 간지러워서 벌레 들어간 줄 알겠다며 깔깔 웃었고, 제이슨은 조용히 ‘Cutting water with a knife.’ 하고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래요. 저도 이런 제가 싫어요.”
“자각은 하는구나?”
“공정해야 할 일에 유이진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제가 싫다고요!”
“어우. 얘들아, 너희 정말 염병 첨병을 한다.”
그쯤 옥신각신하고 나니 이진은 왠지 모르게 화가 사르르 녹아내리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뒤늦게 말도 안 되는 가정으로 씨름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중요하지 않은 질문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승현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이미 지나간 봄바람에 어느 틈엔가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일까.
한편의 콩트가 되어 버린 대화는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홍서는 적당히 ‘천하의 선승현도 사족을 못 쓰게 만드는 유이진의 매력.’이라며 촬영을 마무리했다. 처음 등장할 때와 달리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선승현 씨, 임채일 씨. 바로 리허설 들어갈게요! 지금 나와 주세요.”
“아, 저 다녀올게요.”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진은 등에 대고 손을 흔들며 뒤늦게 방금 전 대화를 곱씹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1위를 다투는 우승 후보이니 정말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대놓고 이진을 편애한다 말하지 않은 것도 현명했다. 물론 그와 비슷한 말을 하긴 했지만, 이진이 추궁해서 강제로 받아 낸 대답같이 보였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이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금 대기실에서 나갔던 승현이 다시 문을 불쑥 열고 나타났다.
“형, 잠깐만요.”
“왜?”
승현은 급하게 볼 일이 있는지 문틈으로 몸을 반쯤만 빼낸 채 그를 불렀다. 이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이진이 다가오자마자 승현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여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어차피 형 없이 데뷔하는 건 아무 의미 없는 거 알죠?”
“그 말 하려고 다시 돌아온 거야?”
“아까는 카메라 때문에 못 했는데, 지금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당장 리허설을 앞둔 놈이 다급하게 달려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이런 거라니. 이진이 황당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리자 승현도 눈을 접으며 마주 웃었다. 퍽 달콤한 눈웃음이었다.
“저는 꼭 형이랑 같이 데뷔할 거예요. 그리고 평생 안 놔줄 거예요.”
“알았어. 얼른 리허설하러 가.”
“형은요?”
서슴없이 내뱉는 낯간지러운 말에 괜스레 민망해진 이진이 승현을 대기실 밖으로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승현은 팔에 힘을 주고 버티며 이진에게 같은 질문을 되물었다.
‘나한테도 저런 부끄러운 말을 듣고 싶다는 건가?’ 떠오르는 생각에 이진이 잠시 굳어지자 승현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시원스레 웃어 댔다. 그리고 뒷말을 덧붙였다.
“됐어요. 형은 그럴 필요 없어요.”
“야, 너는 무슨 말을.”
승현이 가볍게 던진 말에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진이 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각오하라는 둥 널 이길 거라는 둥 별의별 소리를 다하기는 했지만, 선승현이 없는 트라이엄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점만큼은 이진도 승현과 생각이 같았다.
“선승현 씨, 리허설 가자.”
그러나 이진이 승현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기 전, 어느새 복도에 서 있던 채일이 그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뒤를 돌아본 승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이진을 바라봤다.
“임채일이 화장실 급하다 해서 잠깐 시간이 났던 거라 이만 가 볼게요.”
“응. 잘하고 와.”
“네. 이따가 봐요.”
승현은 문틀에 기대고 있던 손을 내려 이진의 손을 한번 꼭 움켜쥔 뒤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쿵, 문이 닫히고 복도를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남은 승현의 온기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주먹을 꼭 쥔 채 자리로 돌아오자 제이슨이 눈을 홉뜨고 핀잔을 줬다.
“아주 평생 헤어지는 줄 알겠어.”
찔리는 구석이 있는 이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방송 중에 연애하지 마. 언프로페셔널해.”
“아직 아마추어다, 뭐.”
이진이 쪼잔한 변명을 중얼거리자 코웃음이 돌아왔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찬우가 친구가 없어서 부럽냐고 놀리듯 묻자 제이슨은 랩이나 제대로 연습하라며 신경질을 냈다. 다시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이진은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생방송 시작 두 시간 전. 리허설은 순조롭고 대기실은 평화로웠다. 괜한 불안감이 느껴질 만큼.
***
어느 순간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렀다. 다급한 발소리와 오고 가는 외침 속에서 느껴지는 혼란.
“무슨 일 생겼나? 밖이 소란한데.”
“글쎄.”
대기실 안에서 얌전히 지시를 기다리던 참가자들은 상황을 알지 못해 천진한 얼굴로 서로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모두 적극적으로 궁금증을 해소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진도 그들 틈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무언가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거에서 올라오는 기시감이었다. 익숙한 분위기에 이유도 모른 채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진은 모두가 숨을 죽인 이런 긴장감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흐리게 지워 버린 기억들 속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진아, 잠깐 나와 볼래?’
‘대학 발표 나왔어요?’
‘그게……. 놀라지 말고 들으렴.’
삐이이, 귀를 울리는 이명.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득해져만 가는 정신.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순식간에 호흡이 가빠졌다. 결국 커져 가는 불안감에 가만있을 수가 없어진 이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이진 씨.”
초조한 손길로 대기실 문을 벌컥 열자 원래라면 경황없이 돌아다녀야 할 카메라 스태프 두엇이 복도에 우두커니 멈춰선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진 씨, 지금은 우선 안에서 대기를…….”
“무슨 일이에요?”
이진이 말을 끊고 물었다. 평소 예의바르고 조곤조곤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그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스태프는 모자 위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사고가 생겼어요.”
“누구한테요?”
“리허설 무대 중이었는데, 완전히 새카만 어둠속에서 동선 이동이랑 세트 이동을 동시에 해야 했거든요.”
서포터 때문에 급하게 수정된 사항이 연출 팀에 제대로 전달이 안 된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원래는 꺼지지 않아야 할 조명이 꺼져 무대가 완전히 어두워졌고, 동선에 익숙지 않은 채일이 눈으로 무대에 붙은 스티커를 쫓아가다가 움직이던 세트와 충돌하고 말았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혹시 몰라서 의사한테 보이고 있고요.”
채일이 세트와 부딪혔다. 잠시 안도의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고작 이 정도 일로 이들이 침울해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하는 가정에 이진이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누가 다쳤는데요?”
“이진 씨.”
승현이라면 동선에 익숙하지 않은 동료를 위해 어떻게 했을까. 절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진이 재차 묻자 스태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실을 털어놓았다.
“선승현 씨가 무대에서 떨어졌어요.”
“그게 무슨!”
“채일 씨가 위험한 걸 보고 도우려다가 대신 떨어졌대요. 덕분에 채일 씨는 무사하지만 승현 씨는 무대를 할 수 있는지 확실치 않다고…….”
기가 막혔다. 그 잠깐 사이에 사고가 일어났단 게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게 하필 승현이라니. 그가 실수한 것도 운이 없어서 다친 것도 아니었다. 남에게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다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가 서포터를 뽑겠다고 나섰을 때 말렸어야 했다. 아님 적어도 채일을 끼워 주기 위해 무대 구성은 바꾸지 말라고 당부했어야 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참가자들이 어느새 대기실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바리게이트라도 쳐진 것처럼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이진은 방향 잃은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이걸 우리한테 왜 숨기는 거예요?”
“담당 PD님이 참가자들 동요해서 다른 무대도 망치면 안 된다고 하셔서…….”
하,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행태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이진이 이마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떨구자 찬우를 비롯한 몇 명의 동료가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후로 30분은 더 지난 뒤에야 리허설이 재개되었다. 이진은 그제야 승현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찬우는 리허설 차례를 기다리느라 움직일 수 없었고, 대신 하늘과 우진이 이진의 뒤를 따랐다.
“형,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는 의무실 침대에 기대어 앉아 처치를 받고 있었다. 팔에는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고, 다리에는 아이스 팩이 얹혀 있었다. 처치 상태를 보아 당장 무대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승현 직전에 리허설을 했던 미열이 그 곁에 앉아 침울한 기운을 풍겨 댔다.
“떨어졌다면서.”
“네. 무대가 아주 높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머리도 안 다쳤고 갈비뼈도 무사하대요.”
승현은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괜찮은지 변명하듯 말했다. 마치 미리 대답을 준비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매끄러운 말에 더 한숨이 나왔다.
“뭐, 준비했던 무대는 하기 힘들겠지만요.”
“무대 점수 비중이 적어서 순위에도 큰 영향은 없을 거야.”
미열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진은 그런 말로 승현을 위로하지 못했다.
승현의 여정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 절대로 납득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