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예고되지 않은 규칙. 이득은 없고 짊어질 리스크는 높기만 하다. 그야말로 ‘구제’라는 말이 딱 맞는 시스템이다. 여기서 참가자들이 구제를 포기하고 고개를 젓는다 해도, 마지막 라운드에서 모험을 택하고 싶지 않은 마음만큼은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선승현 참가자부터 서포터 지명, 혹은 패스해 주세요.”
“저는 임채일 지명하겠습니다.”
막힘없는 대답이었다. 채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결정이 빨랐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안무 습득이 빠르고 성격이 꼼꼼해서 짧은 시간 동안 좋은 호흡을 보여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일아, 기대할게.”
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삭막한 이유였지만, 뜻밖의 상황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채일은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승현의 선택으로 인해 참가자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짙어졌다. 특히 미열은 승현을 한 대만 때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음은 하늘의 차례였다. 하늘의 얼굴엔 먹구름처럼 망설임이 드리워 있었다. 우정인지 실리인지 많은 고민이 될 것이다. 하늘은 끄응 소리를 내며 눈을 꼭 감더니 곧 같은 소속사 식구이자 절친한 친구인 나봄을 선택했다.
앞의 두 사람이 선뜻 서포터를 선택하자 세 번째 차례인 이진의 입장이 애매해졌다. 이진은 주변을 흘끔 눈짓하며 다른 참가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찬우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있었고, 미열은 목을 스트레칭하는 척 슬쩍슬쩍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진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사실 마음의 결정은 이미 내린 상태였다.
“저는 패스하겠습니다.”
“미안하다. 저도 패스요!”
다행히 찬우도 빠르게 패스를 외쳐 이진 혼자 이기적인 이미지를 독박 쓸 걱정을 덜었다.
‘이틀 만에 어떻게 무대를 수정해.’
미안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매정하게 말하자면 승현은 정에 이끌려 무모한 선택을 내렸다. 하물며 오랜 친구인 미열이 서포터 후보였더라도 쉬이 뽑아 주라 등 떠밀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친분이나 같은 소속사라는 명분도 없는 임채일이라니. 이진은 그가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요새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제대로 구분해야지.’
채일의 팬들이 채일 대신 승현에게 투표하길 노린 게 아니고서야 멍청한 행동이었다. 분명 이 일로 인해 발목을 잡힐 것이다. 이진이 채일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어서 괜히 삐뚤게 보는 건 절대 아니었다.
“강재규 참가자,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으아아…….”
강재규는 같은 소속사의 두주형과 민서호 중에 누굴 골라야 하나 고민하다가 순위가 더 높은 두주형을 택했다. 허동규는 아무도 택하지 않았고, 제이슨은 뜬금없이 최강희를 선택했다. 이어 박희영과 이우진, 강지흔도 패스를 외쳤다.
“자, 마지막입니다. 이진연 참가자, 서포터 지명 혹은 패스 주세요.”
“미안, 얘들아. 저는 패스하겠습니다.”
참가자 투표로 선발된 김태원, 백미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진연까지 서포터 지명을 포기했다. 마지막 순서까지 다다르자 한숨과 탄식, 그리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제작진이 기회를 마련해 주었지만 최종적으로 김보원, 장현기, 민서호는 단체 무대에만 오르게 되었다. 그들은 절망감에 고개를 떨구기도, 카메라를 향해 애써 웃어 보이기도 했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우울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그들이 무대 점수를 받지 못하게 된 것에 모든 참가자의 선택이 영향을 미쳤기에 누구도 쉬이 위로하지 못했다. 보원의 시선이 잠시 이진에게 머물렀다가 떠나갔다.
곧 괜찮아지겠지. 지금은 시간을 갖고 스스로 극복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은 감정을 추스를 여유를 주지 않았다.
***
프로그램 마지막 날이 밝았다.
“헐, 사람 진짜 많아.”
“오늘 야구 하는 날 아니야? 야구 팬일 수도 있어.”
“야구 팬들이 윈올 응원 봉 들고 있겠어?”
저번 생방송 때보다 두 배는 큰 거대한 경기장, 그 안팎에 수많은 사람이 빼곡히 자리했다. 참가자들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진은 이미 TV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광경이었다. 그들이 탄 소형 버스가 길을 빙 둘러 주차장으로 내려간 뒤로도 들뜬 목소리가 시끌시끌했다.
카메라는 버스에서 내려 대기실로 향하는 잠깐의 틈도 놓치지 않았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은 복도에는 ‘이 무대에 관계자가 이렇게 많단 말이야?’ 하고 놀랄 만큼 많은 사람이 오고 갔다. 참가자들의 등장이 그들에겐 경보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신속해졌다.
“와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드디어 마지막이다. 내가 다 눈물 날 것 같아.”
오늘 패널로 참가할 멘토진은 참가자들보다 먼저 도착해 대기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문을 열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참가자들을 환영해 주었다. 원래라면 리허설이 끝난 뒤에 와도 되었겠지만, 손에 든 화려한 꽃다발과 폭죽을 보아하니 이것도 각본의 일종인 것 같았다.
“오늘 우리 멤버들도 온대요. 다들 기대가 많아요.”
“우리 회사 애들도 표 달라고 난리를 쳤는데 받았는지 모르겠네? 뭐, 선배들 앞에서 꼭 멋진 모습 보여 줍시다.”
화제의 프로그램인 만큼 연예인 관객도 많을 예정이었다. 연예인에게 큰 동경심이 없는 이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지만 존경하는 선배들이 무대를 보러 온다고 하자 기합이 바짝 들어간 이들도 몇몇 있었다. 멘토들은 적당한 격려로 참가자들의 긴장을 풀어 주고는 자신들의 대기실로 돌아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현장 스태프가 들어와 오늘 촬영에 대한 안내를 이어 갔다.
“저번에 해 봐서 아시겠지만 의상 총 세 번 갈아입어야 하는 거 숙지하시고요. 카메라 위치도 파악하시고, 마지막으로 생방송 중인 거 잊지 말고 다들 파이팅 합시다.”
“네!”
참가자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뭉쳐 대기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후로는 지체할 시간 없이 이곳저곳으로 불려갔다. 무대가 많은 탓에 리허설에 소요되는 시간도 몹시 길었다. 이진이 자신을 부르는 스태프를 따라 대기실을 나갈 때, 누군가 툭툭 등을 두들겼다. 고개를 돌리자 승현이 방긋 미소 짓고 있었다.
“형, 잘하고 와요.”
짧은 인사를 건넨 승현이 채일과 함께 그의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이진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동선을 맞추고, 카메라 움직임을 확인하고, 음향을 조율하기에도 빠듯했다. 잘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까지 많은 이들이 합을 맞춰야 한다. 그뿐 아니라 생방송 중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실제 대본에 맞춰 예행연습까지 해야 하니 시간이 두 배로 있어도 모자랐다.
윈올은 실시간 투표수를 집계하고 그에 따라 대본이 달라지거나 할 수 있어 리허설 중에도 유동적인 진행이 필요했다. 한창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또 몇 시간은 주구장창 대기만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틈틈이 카메라를 들이밀며 인터뷰를 따거나 미션을 주는 제작진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이럴 시간에 연습을 하고 싶은 초조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이진! 오늘이 네 데뷔 날이다!”
“이진아, 사랑해!”
중간부터는 관객석이 하나둘 차기 시작하더니 몇 번째일지 모를 리허설 무대에서는 관객들의 응원이 함께했다. 팬들은 멤버 별로 플래카드며 응원 구호를 준비해 와 알차게 써먹었다. 이진도 ‘이진이가 이긴다, 이긴이가 유이진, 츄즈 원 유이진’ 같은 응원 구호를 듣고는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여러분, 응원 감사해요.”
이진이 웃을 때 한번 난리가 났던 관객석은 그가 무대를 내려가며 손을 흔들자 다시금 기쁨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무대에서 내려가 다시 대기실로 향하자 승현과 찬우, 제이슨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계속 동선이 엇갈려 몇 시간 만에 보는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승현과 찬우는 단체 무대에서 랩 파트를 일부 배분받은 바람에 쉬는 시간 틈틈이 제이슨에게 랩 강습을 받는 모양이었다.
“아니, 발음을 그렇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래도 필링이 사는 게 중요하지 않냐?”
“박자를 타, 박자를!”
찬우가 혀를 꼬아가며 나름의 느낌을 살리면 제이슨이 답답함에 화를 버럭 내기를 반복했다. 멀리서 봐도 승현은 강습을 받는 게 아니라 싸움을 말리느라 끼어 있는 모양새였다.
“형, 왔어요?”
“이진아, 들어 봐. 내 랩이 그렇게 구리냐?”
이진이 다가가자 승현과 찬우가 고개를 들고 반겼다. 제이슨은 이진을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아는 척도 안 했다가 찬우에게 타박을 들었다. 그는 아무래도 이진을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이제 본무대까지 정말 얼마 안 남았다.”
“그러게. 지금 리허설 하는 거 누구지?”
“백미열이었나.”
같이 쭈그리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제작진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싶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제작진 뒤에서 사회자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마이크를 든 홍서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언제 봐도 과하게 밝은 표정이었다.
“마침 막강한 우승 후보 세 분이 함께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우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홍서의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재롱둥이 아이돌이 아닌 연차 높은 선배다운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높은 목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여러분, 아직 최종 순위가 결정되기 전이잖아요? 그래서 막간을 이용해 여러분 마음속에 그려 둔 드림팀을 시청자 분들께 살짝 전해 드리고자 제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고는 카메라를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자리에 모인 네 명 중 그 텐션에 따라갈 만한 인물은 찬우 뿐이었으나 이번에는 찬우도 그를 도와주지 못했다. 그만큼 예민한 주제였다.
“네에? 이렇게 갑자기요?”
“자, 자. 다들 누굴 골라야 하나 생각은 계속 하고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죠?”
“저는 그냥 최종 순위대로 뽑으려고 했는데요.”
홍서의 재촉에 승현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아 찬우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분량을 뽑아야 하는 홍서는 지지 않고 물어 왔다.
“선승현 씨는 백미열 씨와 절친한 친구 사이잖아요. 친구가 순위권 이하에 있을 때도 뽑아 줄 마음이 없으신가요?”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욕은 좀 먹겠지만, 어차피 저희는 원래 그렇게까지 친하지도 않았고.”
“야, 인마. 선승현아, 빈말로라도 백미열이 7위 안에 들 거라 믿는다고 해라.”
승현은 정말 이런 인터뷰에 도움이 안 됐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홍서의 시선이 이번에는 이진을 향했다. 마음속 드림 팀이니 뭐니 이런 건 팬들끼리 하게 두면 될 텐데. 이진은 어떤 말로 그의 질문을 얼버무려야 할지 머리를 팽팽 굴렸다.
“만약에 이진 씨라면요?”
“네?”
그러나 홍서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이진을 향한 게 아니었다.
“만약 이진 씨가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면요?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안 뽑으실 건가요?”
곁에 앉은 승현이 당황해 굳어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진은 고개를 서서히 돌려 승현의 눈을 바라봤다.
‘너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