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그날은 승현과 미열의 데뷔 축하를 빌미로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인 날이었다. 졸업 이후로는 연락한 적 없던 놈들이지만 억지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미열과 승현이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 걸 아는 팬들이 미열만 동창 모임에 나갔다고 한다면 또 한동안 구설수에 오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모임은 승현의 예상대로였다. 자극적인 가십거리를 떠들기 바쁜 놈들이 반, 남의 성취를 깎아내리며 제 자랑하기 바쁜 놈들이 반. 그리고 대체 왜 이들과 친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를 만큼 모든 대화에 시큰둥한 이가 하나. 하나같이 불편하고 실속 없었다.
“건배하자, 건배! 우리 친구 백미열과 선승현의 데뷔를 축하하며, 두 사람의 승승장구를 위하여!”
“위하여!”
승현은 생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안주를 깨작였다. 대대적인 식단 관리에 들어갔기 때문에 눈앞의 음식도 마른안주 외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미열은 치팅 데이라도 된 것처럼 술이며 안주를 마구 들이켰지만, 승현은 독한 술 냄새와 자극적인 음식 냄새에 역겨움만 느꼈다.
피곤했다. 어울리고 싶지 않은 이들의 대화에 예의상 대꾸를 하는 것도 처음 몇 번이 한계였다. 결국 승현은 두세 시간 남짓을 의자에 기대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웠다. 곁에 앉은 이들의 목소리는 소음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억지로 자리에 끌고 온 미열을 원망하며 목이 탈 때마다 홀짝홀짝 한 모금씩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잔이 바닥을 보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몽롱한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아, 실수했다.’
타고난 주량이 약해 늘 조심했는데, 겨우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취해 버릴 줄은 몰랐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무리한 탓에 금방 맛이 간 것 같았다. 승현은 이들 틈에서 못 보일 꼴을 보이기 전에 돌아가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게?”
“이 정도면 됐잖아.”
미열이 승현에게 물었으나 예의상 아쉬운 시늉을 한 것에 불과했기에 두 번 잡지는 않았다. 승현은 일행에게 별다른 인사 없이 가게를 빠져나왔다.
문 밖으로 나오자 살랑거리는 밤바람이 달아오른 뺨을 기분 좋게 두드렸다. 하지만 따뜻한 여름 바람은 술기운을 깨우긴커녕 몸을 노곤하게 만들어 솔솔 잠이 쏟아졌다. 더 늦기 전에 택시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지만, 액정이 흐릿하게 보이고 눈이 자꾸만 끔벅끔벅 감겨 왔다.
‘찬 음료라도 마셔야겠네.’
짝, 소리 나게 제 뺨을 한대 친 승현이 모자를 고쳐 쓰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래지 않아 프랜차이즈 편의점의 밝은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승현은 점원에게 정체를 들키기 전 재빠르게 물건을 사서 나오기 위한 계획을 세우며 편의점을 향해 느릿하게 발을 움직였다.
‘술 깨는데 좋은 음료가 뭐였더라. 꿀물이던가? 아니면 초코 우유?’
그러나 정작 승현을 술기운에서 깨운 것은 차가운 초코 우유가 아니라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익숙한 인영이었다.
“작곡가님?”
딱 한 번 만난 이후로는 스쳐 지나가면서라도 볼 수 없었던 사람. 얼굴도 잘생기고, 작곡도 잘하고, 노래도 끝내준다는 ‘팔방미인 작곡가’ 유이진이 편의점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던 것이다.
승현의 작은 부름에도 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걸 보아 앉은 채로 졸고 있는 듯했다.
‘이 근처에서 회식이라도 있었나?’
잠시 의문이 떠올랐다. 승현이 유이진을 보고 느낀 첫인상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미팅 중에는 곧잘 미소를 짓긴 했지만 끝내 개인적으로 말 한번 붙일 기회를 주지 않고 홀연히 떠나 버렸다.
승현은 이진이 떠나고 난 자리를 바라보며 친해지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표현하기엔 제법 견고한 벽을 느꼈다. 철두철미하게 짜인 계획표에 타인을 들여 놓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회식이라도 한 걸까. 무리하게 술을 마신 게 아니고서야 자기 관리가 철저해 보이는 저 사람이 이렇게까지 흐트러질 것 같지 않았다. 승현은 머릿속으로 이진에 대한 이미지를 수정하는 대신 그를 위한 여러 이유를 붙여 주었다.
고작 두 번째 만남에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기에 반가움보다는 당혹감이 먼저 들었다.
‘이걸 인사를 해야 해, 말아야 해?’
게다가 두 사람은 구면이긴 하지만 친분은 전혀 없는 사이였다. 따지자면 고작 한번 본 거래처 직원이 길거리에서 갑자기 아는 척을 해 오는 상황이었다. 물론 승현은 연예인이니만큼 대뜸 아는 척을 한다고 해서 ‘누구세요?’ 소리를 들을 일은 없었지만, 그게 이진 입장에서 당황스럽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취한 사람을 매정히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승현은 그에게 제법 큰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이대로 유이진을 놓고 가 버리는 것이 제 발 저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크응…….”
다섯 발자국 쯤 떨어진 곳에서 다가갈지 말지 망설이고 있을 때, 이진 쪽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깨어 있는 건가?’
승현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발걸음을 내딛고 나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훌쩍이는 소리를 듣고 나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승현이 코앞까지 다가갔는데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작게 떨리는 어깨와 축축한 숨소리가 더 분명히 느껴졌다.
“작곡가님.”
깊은 밤에도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 거리에서, 그는 외로이 울고 있었다. 고급진 칵테일 바나 운치 있는 공원의 벤치가 아니라 조그마한 편의점 앞에 놓인 테이블에 엎어져 발버둥을 쳤다.
여느 취객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거나 분노에 차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 두 눈에서 진주처럼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렸다. 잠들었다 착각할 정도로 고요한 울음이었다.
어떤 슬픔이 그를 숨죽여 울게 만들었을까,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유이진 씨, 무슨 일 있으세요?”
그래서 다시금 말을 걸었다. 그 부름이 드디어 귀에 닿은 건지 푹 떨궈져 있던 고개가 단번에 위를 향했다.
축축이 젖은 큼직한 눈동자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다음은 불만스럽게 삐뚜름한 곡선을 그린 눈썹이었다. 놀란 듯 살짝 벌어진 입 안으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열도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뭐야…… 선승현?”
한 박자 늦게 대답이 들려왔다. 이진은 승현이 눈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다가 뺨을 흥건히 적신 눈물을 슥슥 닦아 냈다. 그러고선 반쯤 풀린 눈을 한껏 치뜨고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뭔 개꿈이야.”
“꿈이 아니라…….”
“내가, 이 새끼가 광고하는 술 마실 때부터 꿈자리 사나울 거란 감이 왔어.”
이어서 중얼거리는 내용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선승현의 안티나 할 법한 말들이었다.
“대표님은 무슨 회식하면서도 트라이엄프 타령이야. 지겹지도 않나. 꼴 보기 싫어.”
이진이 짜증스럽게 욕을 뱉다 말고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분한 감정을 참지 못해 나온 행동이었다.
승현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윈올이니 트라이엄프니 업무 외적으론 한 치의 관심도 없었을 것 같은 유이진이 사실은 그들을 지겹고 꼴 보기 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정말이지 의외였다.
윈올을 통해 데뷔 과정이 적나라하게 공개된 만큼 트라이엄프를 노골적으로 욕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물론 멤버 개인의 안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룹을 싸잡아 험담을 하면 제가 응원하던 멤버를 데뷔시키지 못해 시기한다고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승현은 불쾌하기보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과연 무엇이 잔잔한 호수를 닮은 이 남자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꼴 보기 싫다고…….”
그러나 호기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진이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가 꺼질까요?”
“선승현 네가 제일 싫어.”
흐윽, 하고 조금 더 큰 울음이 터졌다. 철렁, 이번엔 심장이 떨어진 것처럼 욱신거렸다. 승현은 한층 더 곤란해졌다.
‘어떡하지. 달래야 하나?’
승현은 우는 사람에게 약했다. 화나서 어쩔 줄 모르고 씩씩대는 사람에게도 약했다. 하물며 울면서 화내는 사람이 하는 말이 ‘선승현 네가 제일 싫어’라니 죄책감이 물씬 차올랐다. 비록 잘못한 건 하나도 없지만, 사과의 표시로 제 뺨이라도 내려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가 문제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승현은 우는 사람에게 약했지만 타인을 위로하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 오히려 남의 감정에 둔했다. 제 감정에도 무딘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남에게 상처가 될 말도 구분하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쏘아대곤 했다. 그 언어 습관이 주변인에게 비수가 되어 꽂힐 수도 있다는 걸 학습한 이후로는 무던히 노력해 지금의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었지만, 근본적으론 공감 능력이 부족했다. 즉, 이와 같은 상황에 쥐약이란 소리였다.
지금 승현의 심정은 딱 이랬다.
‘내가 싫다니 미안하긴 한데, 뭐 어쩌라는 거지?’
꺼져 줄까 물었지만 답이 없는걸 보니 가장 원하는 게 그건 아닌 것 같고, 한 대 맞아 주고 끝내자니 뒤처리가 곤란했다.
‘차분히 앉혀 놓고 이야기를 들어 줘야 하나?’
경청은 보통 승현이 울적한 사람을 달랠 때 쓰는 수법이었다. 억지로라도 속마음을 털어놓게 시키면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
“왜요?”
결심한 승현은 옆 테이블에서 의자를 가져와 이진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곁에 앉으니 술 냄새가 확 끼쳤다. 승현처럼 술이 약한 건 아닌지 알코올 향이 제법 강했다. 이래서는 한동안 술에서 깨어날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왜 제가 제일 싫어요?”
재차 묻자 눈을 홉뜬 유이진이 버럭 외쳤다.
“넌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얼굴 빨로 데뷔하고, 한부모 가정에서 힘들 게 큰 것처럼 인터뷰한 주제에 데뷔하고 나서는 새아빠 백으로 광고 엄청나게 찍어 대고! 방송 내내 거짓말로 팬들을 속인 주제에 미안한 기색도 하나 없고……!”
무슨 말을 하든 적당히 고개나 끄덕일 생각이었는데 막상 이유를 들어 보니 너무나도 편견에 찌들어 있어 승현도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저런 주장은 그를 싫어하기로 작정한 안티들이나 할 줄 알았는데, 타인에게 무관심해 보이던 유이진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해명하고 싶어서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러나 승현이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은 이게 고작이었다.
“저 거짓말한 적 없어요. 열심히 안 한 적도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