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숨죽여 바라보는 무대, 승현은 바로 그 위에 서 있었다.
“투표가 마감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시청자 여러분과 참가자 분들의 길고도 짧은 여정이 막을 내립니다.”
푸른빛의 스포트라이트가 머리 위를 산만하게 오갔다. 빛이 눈을 찔러 올 때면 퍼뜩 정신이 들었다가도 금세 집중력을 잃고 초점이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기묘한 감각이었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질 때 즈음,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야, 괜찮아?”
고등학교 동창인 백미열이었다. 승현의 한 발 뒤에 선 그는 적정스러운 어조와는 다르게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을지 몰라도 몇 년을 알고 지낸 덕에 부정적인 감정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생방송 중인데 집중 좀 해. 카메라가 언제 잡을 줄 알고.”
“생방송?”
그제야 상황이 이해되었다. 윈올 마지막 무대를 막 마친 승현은 멍하니 서서 연극의 결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꿈을 꿨나…….’
짧은 생각이 스쳐지나갈 무렵 큰 환호성이 귀를 때렸다.
“여러분의 스타, 밤하늘을 첫 번째로 수놓을 별! 영광의 주인공은 바로…… 선승현 참가자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커다란 폭죽 소리와 함께 종이 꽃가루가 허공에 한가득 흩뿌려졌다. 살랑이며 떨어지는 꽃가루는 눈이고 입이고 가릴 것 없이 달라붙으려 들었기에 승현은 고개를 숙여 그것들을 피해 냈다. 기쁨과 성취감보다는 성가심이 더 컸다.
기쁜 낯을 한 동료들의 손길에 떠밀려 승현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무대의 끝에 다다르자 그의 머리 위로 화려한 왕관이 얹어졌다. 어깨에 둘러진 묵직한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며 웅장한 광경을 연출했다.
‘아니면 이게 꿈인가.’
아파트 동장도 투표로 뽑는 세상에 왕관이라니. 어차피 투표로 당선된 거니 왕이라도 상관없다는 건가 싶었다. 가벼운 실소가 흘렀다.
그래 봤자 승현은 무대 위의 배우일 뿐이고, 그의 손에 쥐여 쥘 영광은 배역을 훌륭히 소화한 데에 대한 보상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비로소 지금이 바로 현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승현은 능숙하게 입꼬리를 올려 벅차고 감동적이지만 너무 과하지는 않은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어차피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에 마음의 준비를 마친 초연함이 필요했다. 그리고 뒤돌아 자신의 등을 떠밀었던 동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제가 함께하고 싶은 멤버는.”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참가자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관객들은 환호성인지 비명인지를 질러 댔고 결과를 어렴풋이 알고 있던 참가자들은 가식적인 눈물 반, 진심 어린 눈물 반을 흘려 가며 결과에 승복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격려하며 그동안 쌓아 온 우정과 의리, 그리고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듯한 강한 유대감을 보였다. 몇 대의 카메라가 따라와 그 광경을 찍어 댔다.
선발된 이들은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 굴고 나서야 무대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우리 최소 계약 기간만 채우면 해체하고 각자 갈 길 가자.”
“이런 프로젝트형 그룹은 중간에 담당자 바뀌어서 팽 당하면 끝이야. 알잖아, 피치 엔터 같은 대형 소속사는 우리를 데리고 있어도 별다른 이득이 없다는 거. 우리 수명 끝나기 전에 얼른 다른 살 길 찾아봐야지.”
무대 직전에 나눴던 대화는 기억나지 않는 양, 서로에게 아주 절절하게 굴며 계약 기간이 끝났을 때를 언급했다.
“그러자.”
정식 데뷔를 준비하면서 승현은 무엇 하나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함께할 소속사나 멤버 구성은 물론이고 그룹명이나 첫 앨범의 컨셉까지, 정해진 각본처럼 척척 진행됐다.
우승자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는 자극적인 홍보가 무색할 만큼 모든 결정 과정에 기여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모두 승현이 정한 것으로 탈바꿈되었다. 심지어 기계처럼 읊어야 했던 이를 선택한 이유조차도 남이 적어 준 것이었다.
그래도 승현은 무력감을 이겨 내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멤버들과의 관계 개선은 아주 여러 차례 시도했다.
대화도 해 보고, 평소에 지적 받았던 나쁜 습관들도 고쳐 봤다. 그러나 이미 승현을 재벌 집안 출신 낙하산이며 그들을 그저 기만해 왔다고 굳게 믿는 멤버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승현은 날이 갈수록 고립되어 갔다. 지친 마음을 잠시 기댈 가족이나 친구는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이 맞나?’ 수시로 의문이 들었지만 애써 지워 냈다.
어쩌면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는 건 그의 문제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상황과 사건이 맞물린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승현은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수없이 가정해 봤지만 그럼에도 그를 둘러싼 상황은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승현이 망해서 돌아올 날만 기다리는 어머니와 승현을 이용해 기업을 젊은 이미지로 탈바꿈 하고 싶어 하는 새아버지,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을 그대로 믿는 동생들. 술자리에 불러 나갔더니 그날의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인터넷에 올리는 동창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척 깎아 내리는 친구까지.
진저리가 났다. 삶의 의욕이나 열정 같은 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절대로 연예인 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
어두운 밤, 모두가 잠든 숙소에서 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승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
마지막 방송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시작됐던 트라이엄프의 첫 활동. 한 달 남짓한 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속사는 곧바로 다음 활동 준비에 들어갔다.
그동안은 앞서 방송에서 선보였던 곡들을 재편곡하여 공연하거나 촬영 비하인드와 관련된 예능에 주로 출연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이번 앨범이 윈올의 그늘을 벗어난 신인 가수로서의 첫 발돋움이라 할 수 있었다.
“오늘 공모전에서 뽑힌 스튜디오랑 미팅 가질 건데 너네도 참가할 거야. 알아 둬라.”
소속사로 향하는 출근길 차 안에서 실장이 말했다.
“어차피 무슨 곡이 타이틀이 될지는 내부에서 정해진 거 아니에요? 무슨 미팅까지 해요.”
“그렇지도 않은 게, 대표님이 이 작곡가를 섭외하고 싶어서 공을 좀 들이시는 것 같아. 최대한 그쪽 의견 들어주시려는 것 같으니까 너희도 이틈에 원하는 방향성 잘 말해 봐.”
“원하는 방향성이랄 게 있나. 어차피 퍼포먼스가 중요하지 누가 우리한테 노래를 원해요.”
대다수 댄스 포지션으로 구성된 멤버들은 비슷한 감상인 것 같았다. 백미열이나 강재규는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애초에 첫 앨범의 컨셉이 별에서 온 미래 소년이었기 때문에 어떤 노래를 선택하든 기계음이 잔뜩 들어간 결과물이 나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회의실에 모여서 들은 데모 곡은 모두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가벼운 멜로디와 단조로운 코드가 어떤 컨셉도 소화할 만큼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보컬의 목소리가 환상적이었다.
데모 곡을 모두 듣고 나서야 승현은 제가 주먹을 세게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얼마나 집중을 한 건지 슬며시 주먹을 펴자 짧은 시간 동안 손에 흥건히 배여 있는 땀이 보였다.
“와. 이거 가이드 가수가 누구예요? 피치 엔터 사람이에요?”
“아니, 그쪽에서 제출한 원본 파일이야. 스튜디오 소속 작곡가라는데 대표님이 탐낼 만하지?”
“아티스트로 탐내는 걸 줄은 몰랐죠. 미쳤다, 이건. 백미열보다 잘 부르는데?”
“시끄러워. 그래서 이 사람 언제 온다고요?”
“슬슬 도착했을걸.”
승현은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손을 씻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뽀득뽀득 씻고 싱그러운 비누 향을 맡으니 마음이 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후. 왜 이렇게 긴장되지?’
거울에 비친 모습이 눈에 띄게 경직돼 보였다. 매니저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자신의 눈에만 이렇게 보이는 거겠지만, 종종 거울 속 자신이 끔찍하게 못나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좀처럼 좋은 일이 생기지 않기에 승현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의외로 그날 승현에겐 좋은 일이 생겼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길, 방금 전까진 아무도 없던 곳에 웬 아름다운 남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서 있었던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새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가 승현을 알아보고 인사까지 해 왔다. 승현은 그 순간 정말 아주 오랜만에 데뷔하기 정말 잘했다고 느꼈다.
갑자기 길 위에 나타난 그는 정말로 길을 잃은 천사처럼 어리둥절하게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설마하니 정말로 천사를 만났을 리는 없으므로 승현은 나름대로 외모와 인상을 조합해 신분을 추측해 보았다.
“혹시 연습생이세요?”
“네?”
“연습실은 여기가 아니라 지하예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남자가 희미하게 표정을 찡그렸다. 잘못 맞췄나 생각하는 순간, 그의 뒤에서 비상구 문이 열리더니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유이진 씨!”
“아, 대표님.”
“어? 선승현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트라이엄프와 미팅하게 된 스튜디오 비긴 대표…….”
남자가 호쾌하게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 미안하게도 하나도 귓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승현의 머릿속에는 딱 한 가지 정보만이 입력되었다.
‘이름이 유이진이구나.’
부드러운 어감이 선한 인상과 잘 어울렸다. 그는 승현과 눈이 마주치자 잠깐 놀란 듯했으나 이내 다정한 눈웃음을 보내 주었다. 당황감은 한발 늦게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저는 당연히 연습생이신 줄 알고.”
“아뇨. 제가 이런데 서 있었으니 오해하실 만도 하죠.”
“아. 우리 유이진 씨가 좀 잘생기긴 했죠. 작곡도 잘하고 노래도 끝내주게 부르는데, 아주 팔방미인입니다!”
이진은 말도 참 착하게 했다. 승현은 고작 한두 마디 오간 정도로 이진을 좋은 사람이라 판단할 만큼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사람의 첫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이 0.3초라고 하던가. 그렇다면 아마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승현이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리란 건 뻔한 결과였을 테다.
이후로도 승현은 종종 이진에 대한 생각을 했다. 짧게 만난 것이 고작이고 이진은 이후 미팅이며 녹음에 일절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편적인 회상에 그쳤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도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나날이 이어졌다.
“실장님, 그 작곡가분은 어떻게 됐어요?”
“뭐가? 작업 꾸준히 하고 있잖아.”
“대표님이 데뷔시키고 싶어 하셨던 거요.”
어느 날은 민망함을 무릅쓰고 실장에게 그의 근황을 묻기도 했다.
“본인이 데뷔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우리 회사 레이블로 들어오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이야. 덕분에 대표님 자존심 왕창 상했지.”
‘자존심이 상한 김에 거절할 수 없는 돈으로 좀 유혹해 주면 좋겠네.’
그러나 2년 반의 계약 기간이 끝나면 피치 엔터와 연이 끝나는 입장에서 굳이 이 회사 소속이 되는 것보다 그냥 작은 스튜디오에 남아 있는 게 더 이득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같이 작업하자고 하면 해 줄까? 진정한 가수가 아니라 싫다고 할까.’
그리고 이진에 대한 상상이 삶에 작은 즐거움이 되었을 무렵 승현은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