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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19화 (119/173)

119화

개인 촬영을 마치고 나오자 이진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기다리던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선생님은 이진과의 촬영을 마친 후 곧바로 돌아가셨다고 전해 들었다. 이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은 촬영장을 찾아 준 손님들과 참가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제법 바글바글했다. 이진과 친구들은 그 틈바구니에 끼어 늦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식당은 전체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진의 식탁만큼은 차가운 바람이 쌩쌩 몰아쳤다.

“이진 씨가 승현이랑 수빈이가 좋아한다는 바로 그 이진 씨죠?”

자리를 비웠던 승현의 어머니가 단체 촬영을 위해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 네. 안녕하세요. 유이진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승현이 엄마예요.”

설상가상 승현의 어머니는 이진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 이진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관찰했다. 이진은 웃는 얼굴로 승현에게 몇 번 눈치를 주었지만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 기분이 좋은 선승현은 젓가락질이 서툰 수현에게 반찬을 먹여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얘기 많이 들었어요. 승현이랑 그렇게 친하다고.”

비꼬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말에 이진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웃었다. 승현의 어머니는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몹시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외모가 선승현과 몹시 닮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어머님, 수빈이는 요즘 어때요?”

미열이 타이밍 좋게 지원 사격에 나섰다. 아마 구면인 듯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어떻긴. 공부도 안하고 윈올만 보더라. 아주 즐거운가 봐.”

“밥 드세요. 밥.”

미열의 지원 사격이 상냥한 말투로 신랄하게 비꼬아지자 드디어 승현이 나섰다. 승현은 수현에게 집어 주던 비엔나 소시지를 세 점씩이나 집어 어머니 입에 넣어 버렸다. 노골적으로 대화를 차단하고 차단당하자 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미열의 팔꿈치 공격을 받은 미열 엄마가 아들을 대신하여 지원 사격에 나섰다.

“승현이 어머님! 그동안 인사 한번 못 드렸네요. 저는 미열이 엄마예요.”

“안녕하세요. 미열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통성명 타임인가요? 저는 찬우 엄마예요. 제가 건강이 안 좋아서 아들한테 신경을 많이 못썼는데 이렇게 번듯한 친구들을 사귀어 와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수술 후 안정을 취하느라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던 찬우 엄마도 오랜만에 외출 허가를 받고 짧은 여행을 나왔다. 모든 말을 까칠하게 받아치던 승현 엄마도 병색이 짙은 사람에게 모진 말을 하진 못하겠는지 순순히 호의적인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나 승현의 어머니는 자신을 쏙 빼닮은 아들처럼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그나저나 이진 씨 어머님은 먼저 들어가셨나요?”

“아, 그게…….”

“물 드세요. 물.”

승현은 이번에 다짜고짜 물 컵을 들이밀었다. 물 컵에 입이 막힌 승현 엄마는 아들과 다시 살벌한 눈싸움을 시작했으나, 이번엔 수현이 소시지를 집어먹다 젓가락을 떨어뜨린 덕에 냉전에 돌입했다. 이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너는 왜 엄마가 말만 하면 입을 막으려 드니?”

냉전은커녕 휴전조차 아니었다. 미열 엄마가 한차례 헛기침을 하고 찬우 엄마가 “아! 병원 밥만 먹다 보니 급식이 너무 맛있다!”라고 외치기까지 했지만 두 사람의 대치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오셨어요?”

“네가 어디 가서 뭘 하는지는 확인해야 할 거 아니니. 언제까지 제멋대로 굴 거야?”

“궁금하면 방송을 보든가 저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다들 불편하게 뭐 하시는 거예요.”

이진은 새삼 그의 어머니가 아이돌 활동이 ‘꼴사납다’는 이유로 승현을 쫓아냈던 전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그때도 은근히 느껴지긴 했지만 상당히 타협이 없고 고지식한 성격이구나 싶었다.

“아, 됐어요. 그냥 일어나세요. 수현이 데리고 집에 가요.”

“형아, 나 집에 가?”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승현은 기어이 어머니를 일으켜 세워 식당 밖으로 끌어냈다. 승현에게 반 강제로 끌려가던 어머니는 식당을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려 이진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 날 선 시선을 한눈에 받은 이진은 찔끔 겁을 먹었다.

“어휴. 아줌마 성격도 드세네.”

한 팔엔 동생을 안고 다른 팔로는 엄마를 끌고 걸어 나간 승현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찬우 엄마가 툭 말을 내뱉곤 깔깔 웃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은 울지 못해 따라 웃었다.

“승현이가 엄마 등쌀에 못 산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엄마, 남의 집 얘기 함부로 말하지 마.”

“누가 엿듣니?”

미열 엄마가 운을 띄우자 찬우 엄마가 곧바로 미끼를 물었다. 미열이 한차례 말렸지만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아들이랑 승현이랑 같은 고등학교잖아요. 우리도 나름 학군이 좋아서 학부모회가 활발했는데 거기서 얘기가 돌았거든요.”

“무슨 얘기요?”

“타 지역에서 전학생이 한 명 왔는데 전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왔더라. 우리 고등학교 1학년으로 들어온다니까 단단히 조심해라.”

“어머, 승현이가 사고요?”

찬우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뒤에서 남의 말을 하는 건 정말 싫었지만, 이진도 승현의 과거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흥미가 일었다. 특히 미래에 한 번도 해명된 적 없는 논란이니만큼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었다.

“뭐 애들을 때렸니 불량 학생이랑 어울렸니. 말은 많은데 고등학교 올라오고 나서는 얌전했으니까 우리도 거기에 관해선 잘 몰라요. 그보다 승현이가 갑자기 이사 온 게 알고 보니 아빠랑 엄마가 살림을 합쳐서 이사 온 거더라고요.”

“어머, 어머.”

“와, 소시지 너무 맛있다!”

찬우가 씨알도 안 먹힐 발 연기를 하며 분위기를 한차례 환기시키려 노력했으나 가십에 흠뻑 빠진 두 중년의 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빠한테는 딸이 둘, 엄마한테는 아들이 둘. 거기다 갓난아기까지 하나 있다니까 다들 관심을 가졌죠. 이 집이 대체 어떻게 굴러가나 하고. 그런데 사람들이 잘 보니까…… 이 집 새엄마가 과보호도 심하고 애들한테 그렇게 집착을 하더래요. 새엄마는 원래 멀쩡히 회사 다니면서 사회생활 잘하던 사람인데 대체 뭔 일 때문인지 갑자기 집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미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진은 미열을 한번 곁눈질로 바라봤다. 미열도 이 이야기의 결론을 아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점점 더 자극적이고 개인적인, 승현과 아주 밀접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특이한 게 애들 엄마가 유별나게 첫째, 그니까 승현이만 그렇게 구박을 하는 거예요. 애가 듬직하고 착한데도 동생 못 챙겼다고 난리, 밖에서 헛짓거리 한다고 난리. 수틀리면 쫓아내기도 하고.”

“어머, 그걸 어떻게 알았대요?”

“그야 가끔 외출할 때마다 아파트 단지에서 고래고래 화를 내니까 다들 알게 됐죠. 처음엔 나도 승현이가 뭘 크게 잘못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우리 미열이가 친구라고 데려온 애를 보니까 그럴 애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다들 엄마가 이상하구나, 그 집 아들이 엄마 등쌀에 엄청나게 시달린다고 알고 있는 거죠.”

미열 엄마의 말은 마냥 허황되거나 과장된 말은 아니었다. 이진은 최근까지도 승현이 쫓겨났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까.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치를 보던 미열이 머뭇거리다가 제 엄마의 말에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도 요즘은 괜찮다고 했어요. 다시 회사 다니시면서 괜찮아졌대요.”

“괜찮은 사람이 멀쩡히 대학 다니던 애 학교도 그만두게 만드니?”

“그건 선승현이 그냥 학교에 적응을 못 해서 휴학한 거라니까.”

나름 승현의 제일 친한 친구로서 미열이 열심히 변호했다.

“하긴 방금 승현이 한 거 보면 그냥 당하고 산 것 같진 않더라.”

찬우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승현이 모친의 일방적인 폭력에 시달린 것 같지는 않았다. 미열도 찬우에게 동의했다.

“쟤네 가족 다들 사이 좋아. 그냥 승현이 어머님이 좀 불안정하셔서 그렇지.”

때마침 승현이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무사히 배웅을 마치고 온 건지 후련한 표정이었다. 물 흐르듯 다른 화제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승현은 원래 자리에 앉지 않고 텅 빈 이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진이 형, 미안해요. 불편했죠.”

“나 대체 왜 찍혔니?”

“글쎄요. 수빈이랑 수현이가 집에서 형을 엄청 찾아 댄 게 아닐까요? 아마 기사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스타팩트 기사를 떠올리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 일로 이진을 싫어한다 하면 할 말이 없었다. 승현이 고개 숙인 이진의 코 앞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쨌든 미안해요. 어머니가 형을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보니까 마음에 들어서 더 짜증 나는 것 같던데.”

“그게 어딜 봐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야?”

“형 앞에 앉았잖아요. 여기 내 자린데.”

승현이 농담조로 투덜거리자 이진도 피식 싱겁게 웃었다.

“너희끼리 뭐가 그렇게 재밌냐?”

“백미열, 눈치 없냐? 제발 좀 빠져.”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받아 온 미열이 끼어들려다가 승현에게 핀잔을 들었다. 미열의 어머니가 계시든 말든 참 태도가 한결같았다. 이렇게 보니 외모뿐 아니라 성격도 어머니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그래, 너희 모두 힘내고. 응원할게!”

밤이 깊어가자 제작진의 안내에 따라 학부모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마지막까지 밝은 응원을 남겨 주는 가족들 덕에 좋은 기운을 받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바탕 소란 때문에 무거웠던 마음도 해가 저물 즈음에는 다시 평온해졌다. 짧지만 따뜻했던 시간들에 이진은 긴 하루를 좋은 기억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좋은 기억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울에 사로잡히지 않을 정도로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촬영지를 방문한 가족들이 모두 돌아가고 이진은 숙소로 돌아왔다. 예상외로 스케줄이 지연된 탓에 오늘 밤 예정되어 있었던 촬영은 다음 날로 미뤄졌다. 그로 인해 참가자들은 자정을 넘기기 전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진이 형. 근데 그 폐교에서 이상한 거 못 봤어요?”

완전히 잠들기 전 귀신에 참 관심 많은 지흔이 속닥속닥 물어왔다.

“음. 좀 비슷한…….”

“유이진, 대답하지 마. 일주일 내내 잠 설치고 싶어?”

이진이 오늘 겪었던 미스터리한 현상에 대해 지흔에게 말해 주려는 찰나 겁 많은 미열이 선수를 쳤다. 이대로 말했다가는 같은 팀 같은 포지션 최고 전력인 미열이 집에 돌아가는 날까지 한숨도 자지 못할 것 같아 이진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지흔이 ‘치이…….’ 하고 아쉬운 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오싹한 얘기를 하다 말고 다시 잠에 들면서도 이진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괴이한 현상에 있어서만큼 이진은 제법 무딘 편이었다. 한번 시간을 역행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담력을 더 강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은 이진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 줄 사건들이 많았다. 승현과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겨뤘으며, 과거의 트라우마를 들쑤셔진 것도 훌륭하게 극복해 냈고, 그로 인해 친구들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진은 포근하고 부드러운 기분에 취해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이진의 심신은 몹시 안정적이었다. 잠결에 그 폐교에서 들었던 발소리를 다시 듣기 전까지는.

터벅터벅. 터벅, 터벅……. 끼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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