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45화 (45/173)

45화

“야, 유이진이! 대장 노릇 잘 하고 있냐?”

미열과 승현이었다.

“이 팀은 뭐 이렇게 오래 회의해?”

“대장님이 혹독하셔서.”

미열과 주헌은 이미 아는 사이였는지 익숙하게 농담을 주고받았다. 승현의 팀은 미열의 주도하에 순식간에 세부적인 컨셉과 파트를 정리하고 진즉에 해산했다고 한다. 그들의 컨셉은 ‘반항’으로 갱단이나 폭주족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고 안무를 조금 거칠게 수정할 예정이라 했다.

“우리 팀은 복고인데, 청청 패션이나 알록달록한 옷 입고 그 시절 압구정을 주름잡던 댄스 왕들의 댄스 배틀이란 컨셉으로 하려고요!”

우진이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어느새 부가 설정이 붙어 있었다.

“형, 우리 팀 팀명 좀 도와주라. 아이디어 고갈이야.”

“이름 짓기 하면 또 이 백미열 님이시지. 하하하!”

“맞아, 우리 1라운드에 팀 이름 정한 거 누구였어?”

이진이 묻어 뒀던 기억을 끄집어내며 물었다. 미열은 이진의 말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팀 이름을 고민하는 척했다. 참여 의지가 없는 태원과 수원 때문에 오고 가는 의견이 적은 편이었는데 그나마 미열이 와서 말이라도 많아지니 나았다.

미열은 두 사람이 대화에 끼어들도록 자꾸 유도했는데 수원은 말할 기회를 잘 잡지 못하는 편이었을 뿐 할 말은 많았고, 태원은 그냥 재미있는 일엔 빼지 않고 숟가락을 얹었다. 어느새 승현과 미열은 이진의 근처에 앉아 한 팀처럼 떠들고 있었다. 그중 특히 채일과 미열은 분명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사이였는데도 막역지우처럼 서로를 향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춤추는 풍선들이 뭐야. 장난해요? 우리 팀 망하라고 초 치러 왔구나?”

“아, 왜. 개업 축하할 때 쓰는 풍선 있잖아! 왜 이렇게 삐딱해?”

이진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거대한 키다리 풍선을 가지고 저렇게 열렬히 토론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미열이 얼렁뚱땅 이진의 팀에 합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네는 언제 돌아가냐.”

주헌이 승현을 보며 말했다. 승현은 이진을 한 번 봤다가 미열을 한 번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형만 보려고 온 건데 백미열이 혼자 신나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들이 자신을 생각해 찾아와 주었다는 말을 직접 들으니 새로운 감동이 일었다.

“와. 형 친구들 부럽다. 나도 보고 싶을 때마다 형 보러 가고 싶은데!”

갑자기 우진이 전혀 다른 핀트로 끼어들었다. 물론 이진과 우진이 센터조에 있을 때 그럭저럭 잘 지내긴 했지만 모두가 다 같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편승해서 적당히 지낸 거지, 사실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안 돼요.”

승현이 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미열에 한찬우까지 있는데 그쪽까지 오면 우리 방 시끄러워서.”

“아, 뭐야! 너무해!”

이진은 평소 백미열이나 한찬우와 비슷한 수준으로 잘만 놀던 승현이 우진에게 선을 긋는 걸 보며 어색함을 느꼈다. 적어도 승현은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남을 밀어내는 말은 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우진이 너무하다며 항변을 해도 장난스럽게 웃기만 할 뿐 언제든 놀러 와도 좋다는 말은 해 주지 않았다.

모두의 미적지근한 동의하에 팀 이름은 칠색 찬란이 되었다. 채일이 자꾸 칠색 팔색이라고 중얼거렸지만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었다. 이진은 대표로 싸인 펜을 들고 스케치북에 커다랗게 칠색 찬란이라 적었다. ‘찬’을 적을 때 실수로 ‘팔’을 적을 뻔했지만 의도한 글씨체인 척 무마하고 넘어갔다.

스케치북을 북 뜯어 연습실 문 앞에 테이프로 붙이자 그제야 이 사람들과 함께 이번 라운드를 해쳐 나가야 한다는 실감이 났다.

“저녁부터 먹고 마저 포지션 정합시다.”

이진이 돌아오자 주헌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이진은 이번에도 같은 팀끼리 다 같이 밥을 먹나 눈치를 봤는데, 다들 같이 먹자는 말은 없고 핸드폰을 드는걸 보니 각자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같이 먹자는 말이 나왔어도 아까부터 이진을 기다리고 있는 승현과 미열이 있는데 둘을 떼어 놓고 새 팀을 따라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 이진이 형!”

“왜?”

“형, 나 배고파요. 빨리 가요.”

“어?”

우진이 이진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왔으나 승현이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이진은 이따 보자는 말을 남기고 후다닥 연습실을 나섰다.

“야. 너 이우진한테 왜 그래?”

연습실에서 멀어지자마자 미열이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이진은 자신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뜨끔했으나 승현을 향한 질문이었다. 이진이 살짝 눈을 돌려 승현의 표정을 힐끔 확인했다. 확실히 얼굴에 불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몰라.”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몰라도 적당히 조심해라?”

미열은 그렇게만 경고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 승현이 우진을 노골적으로 적대한 것도 아니고 이진도 제대로 눈치채지도 못한 수준의 거부감이니 적당히 넘어간 것이다. 이진은 승현이 우진 같이 정신없는 타입을 싫어했나, 고민해 봤다. 시끄럽기로 따지면 미열이나 우진이나 비슷했기에 유독 우진이 승현에게 찍힌 사유를 알 수는 없었다.

식당에 도착하자 찬우와 윌리엄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구경 가고 싶더라.”

“우리 행진이!”

“시끄러워…….”

이진은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놀려대는 두 사람에게 힘없이 대꾸하고 국을 휘적거렸다. 지금이야 팀이 바뀌는 첫날이라서 다 같이 둘러앉아 먹는다 해도 조금만 지나면 각자 먹게 되겠지. 서로 연습하는 스케줄도 안 맞을 거고 아무래도 팀끼리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각자의 팀과 함께하지 않을까.

그렇게 서로가 공유하는 영역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이진이 모르는 세계가 넓어질 거고 점점 언제 친하게 지냈는지 가물가물해질 만큼 멀어지는 경우도 찾아올 거다. 당장 진영이나 하늘만 해도 이 자리에 없으니 말이다. 이진은 앞으로 찾아오게 될 자연스러운 변화를 떠올리자 입맛이 사라졌다.

“오늘 밥이 맛이 없나?”

미열이 이진의 식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숟가락으로 국을 떴다. 삼시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자야 할 시간에 제때 자는 일은 이진이 몸을 축내지 않고 건강히 살 수 있던 요령이다. 이진은 아무리 먹고 싶지 않아도 열심히 수저를 움직였다.

***

밥을 소화시키기 위해 잠깐 산책을 다녀오고 다 같이 연습실로 돌아왔다. 이진은 남은 회의를 끝내야 했고 나머지는 공연까지 시간이 촉박하니 편곡을 끝내기 전 남는 시간에도 안무를 외워야 한다고 했다.

“나 안무 다 외웠으니까 어려우면 말해!”

“찬우야, 지금 남의 팀 걱정할 때가 아니라 나부터 알려 줘야지!”

찬우가 주먹을 흔들며 말하자 윌리엄이 그의 주먹을 꼭 쥐고 밑으로 내렸다. 아마 윌리엄뿐 아니라 찬우 팀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을 터였다.

“이진이도 힘내. 필요한 일 있으면 문자로 SOS쳐. 당장 달려가 줄게.”

미열이 이진의 어깨 위에 턱하고 팔을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승현이 어깨에 올라탄 먼지를 털듯 미열의 팔을 툭툭 털어 냈다. 자신을 노려보는 미열에 승현이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이진은 칠색 찬란이란 손 글씨가 붙은 연습실 문을 열며 둘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다. 기껏해야 세 시간 뒤에 방에서 다시 만날 사람들치고는 참 각별했다.

“형, 금방 왔네!”

연습실에 들어가자마자 우진이 반갑게 이진을 맞았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방금 들어온 듯 겉옷을 정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끼리라도 포지션 얘기 좀 해 볼까?”

다른 팀은 벌써 연습에 돌입했는데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은 멤버들을 데리고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진이 스케치북과 가사가 적힌 A4 용지를 가지고 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우선, 이전 포지션을 고려는 하되 지금 상황에 맞는 전략을 짜는 게 맞을 것 같아. 알겠지만 지금 센터가 둘이고 리드 보컬은 없는 상황이니까.”

“나는 센터 안 해도 괜찮아. 깔끔하게!”

우진이 양 손바닥을 보이며 경쟁에서 물러난다 말했다.

“채일이가 나보다 춤 훨씬 잘 추는 거 아니까. 고집 부리고 싶지도 않아.”

이진은 씁쓸하게 웃는 우진의 얼굴을 보며 잠깐 고민하다가 채일의 의견도 들어보자며 판단을 보류했다.

이진은 센터조 사람들이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던 때 우진이 한 말을 떠올렸다. 얼굴만 믿고 영화과에 갔는데 연기를 못 하더라.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몸을 쓰는 건 전부 못 하는 것 같더라.

일부러 밝게 말하긴 했지만 이진은 그 막막함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첫발을 잘못 디뎌 그 뒤로 딛는 모든 걸음이 계속 꼬여 몸이 휘청대는데도 이대로 멈추면 완전히 넘어져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까 봐, 계속 발을 움직이는 그 기분을 알았다.

우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을 굳이 몰아세우고 싶지 않았다.

“다들 하고 싶은 포지션은 있어?”

“나는 이거. 이 정도는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

“어. 거긴 나도 하고 싶었어.”

우진이 가리킨 포지션은 서브 보컬 1로 이진이 먼저 체크해 둔 파트를 제외한 보컬 파트 중엔 비교적 음역대가 낮았다. 센터에 섰을 때 안무도 적당히 간단하고 쉬운 편이라 눈에 크게 띄지는 않아도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덜한 자리이긴 했다.

그런데 태원도 그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태원이야 정말 데뷔할 생각까진 없는 것 같으니 가급적 연습량이 덜할 것 같은 파트를 탐내는 게 그럴싸했다. 그리고 팀을 위해서도 의욕 없는 사람을 중요한 포지션에 두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었다.

“그럼 차라리 메인 보컬 포지션은 어때? 어차피 지금 나눈 보컬 파트는 거의 의미가 없으니까 리드 보컬이랑 겹치는 곳만 네가 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내가 소화하면…….”

이진이 서브 보컬1 다음으로 센터 안무가 적은 메인 보컬을 짚으며 말했다. 이진은 자연스럽게 본인이 메인 보컬을 하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어차피 리드 보컬에게 할당된 파트도 혼자 소화해야 했다. 안무 수정량을 최소한으로 하려면 우선 정해진 틀에 최대한 맞추는 게 나았다.

“그, 그럴까? 나야 좋지.”

우진의 대답에 맞춘 듯 연습실 문이 열리고 채일과 주헌이 돌아왔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생각해 둔 포지션을 설명할 때쯤 지호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간식거리를 한아름 싸 들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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