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44화 (44/173)

44화

마지막에 남은 5명은 선택의 여지없이 이진 팀으로 편입되었다. 이진이 어영부영하다가 팻말을 들 기회를 전부 놓쳐 버린 탓이다. 다들 이진이 리더라는 데에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이었다.

팀이 정해지자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팀별 연습실로 옮겨가 회의 시간을 가졌다. 이진은 승현과 미열의 팀이 바로 옆방인 것이 이상하게 안심되었다. 여차해서 주먹 다툼이 벌어졌을 때 아군을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이 힘이 되었다.

5명의 이름은 김태원, 성수원, 남주헌, 임채일, 김지호로 다들 제대로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의외로 이진도 기억할 만큼 인지도가 높은 사람도 있었다.

“우리 컨셉은 이거예요.”

이진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펼쳤다.

“복고? 그…… 꽃무늬 정장 입는 거요?”

김태원이 물었다. 김태원은 이진과 같은 일반인 출신이지만 미열이나 이진과는 다르게 음악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춤도 노래도 이곳에 와서 처음 배웠고, 아이돌이 되기 위해 이렇게 필사적인 사람이 많을 줄 몰랐다고 말한 바가 있다. 태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고 이진이 유일하게 시청한 1화 개인 인터뷰에서 그가 멋쩍은 표정으로 한 말이었다. 1라운드에서는 서브 보컬3 파트였다.

“그건 아니고…….”

“그럼요?”

“……아니에요.”

성수원이 소심하게 말을 마쳤다. 성수원은 리더들 중 누구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 비운의 참가자 중 하나였다. 미열에게 안겨 있던 참가자와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이진은 그가 마지막까지 남은 이유에 리더들을 향한 원망과 반감이 남아 있을 거라 추측했다. 이름을 듣고 떠올려 보니 그는 1라운드에서 77위로 생존한 참가자였다.

“좀 방정맞게 추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아닌데요…….”

“그럼 뭔데?”

“……아니에요.”

남주헌의 말에 수원이 소심하게 반박했다가 다시 말끝을 흐렸다. 남주헌은 실용 무용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으로 댄서 전문 에이전시에 소속되었다고 했다. 1라운드 포지션은 래퍼지만 랩 실력은 박자를 흉내 내는 수준이고 그가 다니는 대학도 이진은 들어 본 적 없는 지방 전문대였다. 지방 전문대에 대한 편견을 빼고 보더라도 그의 실력은 여기서 처음 춤을 배웠다는 태원과 비슷한 레벨이었다.

러나 대학에 갈 만큼 몸을 단련한 건 어디 가지 않는지 태원에 비해 체력이나 활동량은 월등히 많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몸을 어찌나 많이 움직이는지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었다. 말도 물론 많았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들이에요? 복고는 흔히 70, 80을 떠올리게 하는 레트로 음악이죠. 보통 때라면 신스 팝 쪽으로 보면 되겠지만 우리의 경우엔 디스코 풍 리믹스를 생각하는 게 좋을 거예요.”

임채일이 아주 퉁명스럽게 답했다. 임채일은 예고, 예대 실용 무용과라는 나름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참가자였다. 방금 전 주헌 때문에 생길 뻔한 실용 무용과 인간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 줬다. 이진이 메인 보컬조로 옮겨 갔을 때 센터조로 편입했으며 1라운드에서는 재규와 제이슨과 같은 팀이었다. 그는 그때 삭막한 팀 분위기를 질색해 당시 멤버들과 다시는 한 팀이 되고 싶지 않아 마지막까지 남았다고 털어놓았다.

이진은 채일이 타인을 향한 라이벌 의식과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제이슨의 팀이 삭막했던 이유에는 까칠한 제이슨이나 절대 져 주지 않는 재규뿐 아니라 대놓고 화를 내는 채일도 한몫 보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 너튜브에서 자주 커버하는 느낌이네요? 딱 좋다.”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김지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김지호는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너튜버였다. 실용 음악과 기타 전공자로 채널에 올린 유행곡의 어쿠스틱 편곡 몇 개가 꽤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대형 기획사 오디션을 보러 다녔으나 전부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실용 음악 입시를 준비했으며, 대안으로 너튜브를 하고는 있지만 아이돌을 향한 꿈은 접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진이 보기엔 보컬이 가진 힘이 약해 기타를 들지 않으면 비전공자나 다를 바가 없었다.

“와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우진이 혼자 짝짝짝 박수를 쳤다. 연극 영화과인 우진까지 포함해 사실상 오합지졸인 이들과 대체 어떻게 파트를 분배해야 할지 이진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보컬 라인을 캐스팅하는데 성공했다면 좋았겠지만 이들은 따지자면 보컬보다는 댄스에 강했다. 심지어는 그조차 가히 잘 봐 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이번 경연곡의 하이라이트 파트를 비롯한 고음 영역까지 음역대가 올라가는 사람이 아예 없어 이진은 어쩔 수 없이 어려운 파트를 독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진이 파트를 분배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적당히 말을 트고 하하, 호호 친목을 다졌다.

“그래도 형이 있으니까 너무 다행이다. 그지?”

우진이 어려운 부분마다 제 이름을 적어 넣는 이진의 옆에서 복장 터지는 소리를 했다. 7명이 부르라고 만들어진 곡이니, 이진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혼자서 소화할 수는 없었다.

편곡이 자유니까 조금 손을 본다면 어떻게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렇게 되면 팀별 경연이 아닌 개인전이 되고 만다. 이진은 우진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마저 제 파트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래서 편곡은 어떡할까?”

“나는 EDM 까는 게 좋아. 위융, 쮜이잉, 두두두두, 쿠웅, 쾅!”

주헌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그는 머릿속 어딘가에서 음악을 재생시키기라도 했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감고 몸을 흔들며 혼자만의 세상에 빠졌다. 주헌의 옆에 앉은 채일이 질색했다.

“그리고 다들 가슴팍 까는 셔츠 입고 뽝, 클럽 컨셉으로……!”

“미친 소리 좀 작작해. 들어 주는 시간이 아깝다.”

주헌이 트레이닝셔츠 지퍼를 찍 내리며 말하자 채일이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냈다. 주헌은 예민한 채일의 반응에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지퍼를 올렸다.

“그럼 너는 뭐가 좋은데.”

“무조건 군무지. 나팔바지 핏 블랙 정장 쫙 빼입고 군무 한번 춰 줘야 다들 자빠지는데.”

“군무는 좀 옛날 거 아니냐? 한 파트 정도는 멋있을지 몰라도 요즘은 구성이 다양해야…….”

“물론 그것도 그건데 아마 소화 못 할 사람이 많을걸. 엉성하면 오히려 퀄리티 확 낮아 보이잖아.”

채일의 의견에 주헌이 깐족대고 지호가 현실적인 한계를 말했다.

“맞아. 나도 춤 잘 못 춰서.”

“아니, 실력이 부족하면 어떻게든 올려야지 무슨 속 터지는 소리야? 불평할 시간에 연습했으면 됐겠다.”

“그게 마음처럼 됐으면 난 전미 투어 다녔지.”

우진이 제 실력을 털어놓자 채일이 발끈했다. 그러자 주헌이 이번에는 양팔을 허공에 올리고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님 중간에 왈츠, 이런 거 어때?”

“대체 뭘 어떻게 편곡하려고 왈츠 소리가 나와?”

“마냥 옛날로 돌아간다고 복고가 아닌 건 알지?”

“그래도 왈츠 괜찮은데?”

주헌의 의견에 찬성한 지호가 채일을 일으켜 제법 그럴싸한 포즈를 잡았다.

“이러면 다들 껌뻑 죽는다고.”

“아무것도 안 했잖아.”

우진이 지적했다. 이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브로맨스 몰라? 우리가 찰싹 붙으면 붙을수록…….”

“아. 이 새끼도 미친놈이었어!”

지호에게 붙들려 있던 채일이 질색하며 그를 뿌리쳤다. 이진은 아직 그들이 사용하는 브로맨스라는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그가 아는 브로맨스란 드라마나 영화에서 형제처럼 깊은 우정을 나누는 주인공 두 사람을 뜻했는데, 지호와 채일이 바짝 붙어 선다고 갑자기 어디서 우정이 샘솟는 건 아니었으니 그들이 어떤 의미로 브로맨스를 언급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딴 거 하려면 인지도부터 쌓으라고!”

“미리부터 떡밥을 깔아 둬야…….”

“듣기 싫어!”

“그건 너무 시청자들 기만하는 마인드인데? 여자 팬들이 그렇게 생각 없어 보여? 카메라 앞에선 말조심 좀 합시다.”

태원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지호는 태원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다. 이진은 달라붙으려는 지호와 떨어지라고 몸부림치는 채일을 뒤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계속 잠자코 있던 수원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클럽 괜찮은 것 같아. 노출은 아니더라도 클럽 같은 컨셉이면 안무 좀 안 맞아도 괜찮을 거고 편곡도 수월할 것 같고.”

잘하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못하기 싫다는 불안이 더 강한 의견이었다. 미열이 들었더라면 패배주의적인 정신머리로는 어떠한 업적도 이룩할 수 없다고 무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마땅한 의견이 나온 게 없으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때, 우진이 손바닥을 찰싹찰싹 부딪치며 말했다.

“그때 그 시절이란 느낌으로 댄스 배틀이면 재밌겠다! 무대 연출도 다양해지고 컨셉이랑도 맞고. 마지막에는 화해해서 군무를 추는 걸로 끝내는 거야!”

우진은 벌써 혼자 결론을 냈는지 우리 조 완전 대박 나겠다며 신나 했다. 이진은 클럽보다는 나은 의견 인 것 같아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말로 들어서는 그럴싸해 보이는 의견에 다들 이들도 동의했다. 자신의 의견에 힘이 실려 신이 난 우진은 휙 고개를 돌려 이진을 바라보더니…….

“형이랑 팀 해서 그런가 전부 너무 좋다!”

뜬금없는 공치사를 날렸다. 이진은 부담스러운 우진의 눈빛을 피하며 “응…….” 하고 대답했다. 그냥 빨리 수긍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었다.

“우리 팀 이름도 정해야 되는데.”

프로그램 자체에 별 의욕이 없는 태원이 아까 받아 온 스케치북을 쓱 밀며 말했다.

“뭐 하지.”

“복고러워 어때?”

“내가 다 부끄러워.”

주헌의 의견에 채일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진은 채일이 그냥 주헌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진 님과…….”

“싫어.”

운을 띄우자마자 이진이 칼같이 잘랐다. 우진은 가식적인 힝 소리를 내며 자리에 픽 드러누웠다. 그때 연습실 문이 끼익 열리며 익숙하고 그리운 얼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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